[스크랩] 카타리나의 생애
카타리나의 생애
1. 주변 세계
당시의 교회적 사회적 사건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타리나의 생애는 우리에게 매혹적일 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주목할 만한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시대를 기억하게 해준다. 카타리나가 살았던 당시, 1347년부터 1380년 사이에 교회사에서는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교황권 아래 통일되어 있던 유럽 국가들은 주권을 요구하며 투쟁하였고, 독립 국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 사회, 그녀가 몸담았던 도미니코 수도회 모두가 혼돈의 상태이자 신비주의가 발흥하던 시기였고, 터키인들에 대한 십자군, 피렌체와 교황의 알력, 그리고 서방대분열로 인한 그리스도교의 불일치가 있었다. 1348년 흑사병의 대유행 이후에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단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하여 성직을 맡거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교회는 더욱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 있던 세계는 이미 프랑스 왕 필립과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권력 다툼을 겪었는데, 이것은 개혁 이전의 교회에 대하여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사건이었다. 교회와 국가 양편 모두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확보하려고 했던 교황의 시도에 대응하여, 필립은 프랑스 주교 관구들이 로마 교황청의 경비 분담금을 보내는 것을 금지했고, 보니파시오는 필립을 파문했으며 필립은 보복한다. 보니파시오는 몇 달 후에 세상을 떠나고 1305년에 교황 글레멘스 5세로 선출된 베르트랑 드 고트(Bertrand de Got)는 로마로 가지 않고 프랑스에 계속 머무름으로써 그 이후 70년간 그의 뒤를 이은 교황들이 따르게 되는 선례를 만들어 놓았다.
교황들은 아비뇽에 머무르면서 프랑스인 대리자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이탈리아를 통치했다. 카타리나의 고향인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지방은 특히 심하게 이러한 외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상업과 문화가 발달해 있었던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의 다른 국가들에 대하여 자신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고, 계속되는 불화와 유혈혁명을 통하여 피렌체와 시에나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부를 얻었으며, 13세기 끝 무렵에는 아홉 명의 대의원들 그룹이 선출하여 시에나를 통치했다. 카타리나의 아버지 야고보 베닌까사는 이러한 포폴라니(통치자가 되도록 피선거권이 있는 사람)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유한 염색업자였으며 라파 피아첸티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부모는 시인이자 이불 만드는 사람이었다.
가타리나 베닌까사는 성령의 특별한 활동에 의하여 점점 더 넓은 사회와 교회의 영역에서 활동하게 되고, 이탈리아와 유럽의 문제 한가운데에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교회의 심장부에 서있게 되었던 것이다.
마이스타 에카르트(Meister Eckhart), 요한 타울러(John Tauler), 앙리 수소(Henry Suso) 등 도미니코회 동료들이 사변에 심취되었던 데 비해 가타리나는 실천을 중요시하는 영성을 살면서 크게 영향을 끼쳤다.
2. 설교의 원천
가. 성경
설교는 지극히 교의적이어야 한다. 도미니코 3회원이었던 가타리나의 가르침의 원천은 성경이었다. 요한 복음과 바오로의 서간들은 도미니코 회원들에 있어서 설립자의 모범에 따라, 매우 중요한 영성의 원천이었다. 그녀에게서 성경은 사변적인 관심의 의해 묵상되고 성찰된 성서학자들의 그것과는 달리 더욱 내밀한 친밀함과 익숙함, 그리고 통찰력을 통하여 그녀의 언어와 융합되어 있다. 그리고 대단히 소중하고 절대적이며 생생한 필요성에 의하여 다뤄졌다. 그녀는 편지들 및 대화에서 391회 성경을 인용하였는데 그중 구약을 51회, 신약을 340회 인용하였다. 신약성경 중에서도 바오로 서간을 111회나 인용하였는데 어쩌면 바오로 사도는 그녀의 진정한 영성적 맏오빠로서 그녀의 작품 전체에 사도의 향기를 풍기게 하였을 것이다.1)
나. 도미니코회
그녀는 일찍이 하느님께서 그녀를 특별한 사명으로 부르신다는 소명의식을 가졌다. 그녀의 뒷날 지도신부에 의하면 그녀가 겨우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자신의 방식대로 그리스도께 자신을 봉헌하며 동정 서원을 하였다. 가타리나의 가족이 살던 집 뒷동산에 교육과 설교의 중심지인 도미니코회 수도원과 성당이 자리 잡고 있어 그녀는 그곳을 자주 찾아가 오랜 시간을 보내며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가타리나가 어린 시절에, 그녀의 집에서 성장기를 지내고 도미니코회 수도자가 된 사촌오빠 토마스 델라 폰테의 영향도 컸을 것임에 틀림없다. 토마스는 나중에 그녀의 첫 번째 고해사제 겸 영적 지도자로서 영적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가타리나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녀와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었던 도미니코회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2)
도미니코는 그가 세운 ‘설교자들의 수도회’의 영성을 열렬한 기도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사도직 활동을 병행하는 생활, 즉 관상과 활동이 통합된 생활로 규정하였다.
도미니코회는 설교 수도자들의 영성의 기초를 무엇보다 관상에 둔다. 그 관상은 세상과 격리된 채 이루어지는 은수적 성격을 띤 것이 아니고 사도직 활동과 조화를 이루는 선교적 차원의 것이다. 설교는 관상의 결실을 전하는 것이며 공부는 설교 준비를 위한 관상의 방편이다. 도미니코는 설교자들의 삶의 전형을 사도들의 선교활동에서 찾고자 한다.
“사도들의 사명의 협력자들인 우리는 성 도미니코가 생각했던 생활 방식을 따라, 사도들의 생활을 본받아 공동 생활에서 한마음을 이루고, 복음적 권고[순명, 정결과 청빈]의 선서에 충실하며, 전례의 공동적 참여, 기본적으로 성체성사와 성무일도, 기도[묵상, 묵주기도와 천주의 모친이신 동정녀께 대한 신심 등]와 금욕에 열성을 가지고, 진리를 근면하게 공부하며, 꾸준히 규율을 준수[봉쇄, 침묵, 수도복 착용, 참회 고행으로 하는 일 등]한다. 이 요소들은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며, 서로 균형을 이루며 조화되고 서로를 풍요롭게 하여, 그 총체가 우리 수도회의 고유한 생활을 이루는 것이다. 즉 가장 완전한 사도생활은 풍부한 묵상에서부터 설교와 가르침이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3)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요약한 “관상하라. 그리고 관상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Contemplari et contemplata aliis tradere) 설립자의 정신을 요약하는 수도회의 이 모토는 관상의 중요성과 사도적 소명을 통합하는 수도회의 사명과 목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처음으로 인쇄된 회헌(1505년)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 수도회는 시초부터 관상한 것을 알리고 설교하며 가르치는 것을 특별히 본질적이고 원칙적인 목적으로 삼아왔다.”4)
도미니코회는 ‘진리’(Veritas)를 수도회의 기본 모토로 삼았는데 그것은 그의 수도회의 목적과 카리스마에 따른 사도직 영역을 잘 표현한다. 단순히 수도원 제도의 발전이나 수덕생활의 쇄신에 머물지 않고 거시적 차원에서 사회와 교회의 요구에 응하고자 하였다.
도미니코가 설립한 수도회의 카리스마의 첫째가는 본질적인 요소는 설교이다. 이 설교는 하느님의 말씀 ․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용서와 화해,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설교는 궁극적 목적인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봉사의 방편이다. 이는 근본이 되는 도미니코회의 회헌에 잘 표현되어 있다.
“성 도미니코가 설립한 설교자들의 수도회는 시초부터 특히 ‘설교와 영혼 구원을 위하여’ 설립되었으므로, 형제들은 설립자의 뜻을 따라 자신과 다른 사람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으로서 어디서나 … 복음적인 사람들로서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들 안에서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이든 하느님과 함께 또는 하느님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이다.”5)
도미니코회가 지향하는 설교 영성의 특징은 이러하다.
첫째, 설교는 항구하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둘째, 설교는 공동체적이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 전체가 설교하는 것이고 이로써 지속성과 항구성이 유지될 수 있다.
셋째, 설교는 성령의 이끄심과 하느님 말씀의 풍요로움으로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설교자의 영적 자세에 관한 것이다. 설교자는 권력을 지닌 자가 아니라 카리스마를 지닌 영적 스승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관리나 행정직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넷째, 설교는 교의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이란 뜻이 아니고 초기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로 인해 주어진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설교는 긍정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윤리적 권고나 보속에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선물임을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선하심을 알리는 것이다.
여섯째,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수도자의 삶의 교본이고 하느님 사랑에 관한 책이다. 바로 그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일곱째, 설교는 예언적이어야 한다. 설교는 깊은 관상과 하느님 말씀의 빛 안에서 해석될 수 있는 미래를 비추어 줌으로써 하느님의 구원의 뜻을 밝히고 역사 안에 존재하는 시대의 징표를 알려야 한다.6)
『대화』와 편지들 안에 나타나는 가타리나의 영적 가르침은 하느님께 대한 지식과 자신에 대한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녀의 영적 가르침은 매우 교의적이며 스콜라 신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녀는 성삼위의 흠숭자이고 그리스도께 대한 신심은 특히 인류의 구원을 위해 흘리신 성혈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그녀는 영적 사부인 성 도미니코처럼 사도적 관상가였다.7)
가타리나는 1365년 18세에 여성 평신도들로서 도미니코 3회원들의 단체인 만텔라테회8)에 가입하였다. 그 단체의 여인들은 수도복을 착용했지만 각기 자기 집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의 원장과 도미니코 수도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고아, 가난한 이들, 병자들 등 소외된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였다. 결혼하지 않고 봉사생활을 하고자 마음먹었던 가타리나가 반대하던 가족들을 설득시켜 마침내 허락을 받아 입회한 곳이 이 만텔라테회였다.
3. 활동
입회 후 3년간 그녀는 사회와 격리되어 엄격한 침묵과 기도 중에 관상생활을 하였다. 그녀가 글 읽기를 터득한 것도 고독과 침묵으로 지내던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녀의 독거 생활은 1368년 그리스도와의 '신비의 약혼식'을 가짐으로써 절정을 이루었다. 그 후 그녀는 주님의 부르심에 더욱 확신적 응답으로 만텔라테회 자매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 나환자들을 위한 봉사에 적극 투신하였다.9)
1374년 5월부터 10월까지 시에나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흑사병으로 황폐화되었다. 대부분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전염의 위험성을 피해 도시를 떠났지만 가타리나는 소수의 수도자들, 만텔라테 회원들과 함께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가타리나의 그러한 놀라운 사랑과 용기 그리고 헌신적 봉사에 대한 소문은 여러 도시로 금방 퍼져 나갔으며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가타리나의 헌신적 사회구조 활동은 점점 그녀의 명망을 높여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였으며 그녀는 그들과 대화를 통해 배우기도 했고 가르치기도 했다. 배운 것은 성서주석과 신학적 논리였으며 가르친 것은 자신이 하느님과의 내적 만남을 통해 체험하고 터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적극적인 사회활동이 그녀의 침묵과 관상생활을 소홀히 하도록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관상생활로부터 활동적인 사도직이 성장해 나왔고 활력을 얻었다.
1370년부터 1374년 사이에 시에나에서 가타리나의 권고를 통하여 잘못 살고 있던 이들뿐 아니라 교만한 지식인들 등 헤아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였다. 그녀의 권위 있는 타이름과 사랑 담긴 조언은 적대적인 파벌들이 화해하도록 했으며 악명 높은 죄수들까지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는 눈물을 흘리도록 하였다.10)
사람들이 가타리나에게 이끌렸던 이유는 단지 그녀의 호감 가는 소탈한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 그분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또한 3년 간 그녀의 작은 방에서 은수생활을 하면서 받게 된 말씀의 은총 때문이었다. 그녀의 설교뿐 아니라, 대화중에 정겹고 신념에 찬 그녀의 말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매력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이들도 친구나 제자로 함께 있고 싶어 했고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려 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가타리나는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조직의 주창자 및 중재자로서 폭넓은 활동을 했으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간의 화해, 로마와 도시 국가들 사이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 이 도시 저 도시로 두루 다니며 평화의 사절 역할을 하였다. 좌절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큰 장애를 겪고 힘든 방해들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그것을 인내하며 그리고 용기 있게 극복하여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를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오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교황은 1376년 9월 13일 가타리나와의 로마 귀환 약속을 이행하면서 아비뇽을 떠났다.
가타리나는 교회의 개혁과 성직자들의 쇄신을 위하여도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교황과 추기경들을 만났고 편지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호소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녀는 경건한 사람들을 모아 로마에서 교황을 지지하고 교회의 개혁을 중재할 '교황청 평의회'를 조직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시도는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11)
가타리나가 교황과 추기경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친구들, 제자들 등에게 보낸 편지들 가운데 오늘날 남아 있는 것만도 400여 편이나 된다. 이러한 서신 일체를 염두에 두고 1377년부터 두 해에 걸쳐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책'이라고도 불리는 『대화』를 썼다. 그녀의 인품과 성장과정 그리고 인간관계를 선명하게 알려주는 자료가 그녀의 편지들이라면, 저서『대화』는 하느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내용과 제자들에게 가르친 영성을 담은 역작이며 유산이다. 그녀가 쓰기를 배우기 전에는 구술하여 다른 사람들이 적도록 하였다.
1380년 초부터 가타리나는 음식을 섭취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교회와 사회에 영향력 있는 이들에게 편지를 통해 교회의 쇄신과 화해 등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촉구하였으며 기도와 희생을 통해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녀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탈진되기 직전까지 1마일이나 되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서 매일 아침 미사 때부터 저녁 마지막 기도 때까지 교회분열의 종식과 쇄신 그리고 일치를 위해 온 종일 기도하면서 머물렀다. 가타리나는 4월29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성혈의 자비를 청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가타리나는 1461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939년에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주보성인으로 공인되었다. 그리고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1970년 10월 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의 박사’로 선언되었다.
아무런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아 읽기와 쓰기조차 뒤늦은 성년에 이르러 독학으로 터득한 그녀가, 더구나 성서 주석이나 신학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토록 출중한 학자로 인정되어 ‘교회의 박사’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겨우 33년(1347-1380)이란 짧은 생애를 살았으며 평신도로서 그리고 시대적 한계 조건인 여성으로서 활동한 가타리나가 어떻게 당시 유럽의 도시 국가들의 지도자들.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뿐 아니라 사회의 온갖 부류의 수많은 사람들의 복잡한 일에 관여하며 영향을 미쳐 그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시대에 요청되던 특별한 카리스마를 받은 성령의 도구로서 그분의 이끄심에 순응하면서 이룬 결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