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아우구스띠노의 기도체험........................................................
2)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셨다....................................................
(1) 기도의 문제
(2)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
(3) 이교(異敎)사상의 위험
(4) 기도는 열망이다.
3) 예수님은 기도를 주셨다..........................................................
(1) 기도는 기도함으로써 배운다.
(2) 영원한 행복을 위한 갈망
(3) 주님의 기도
(4) 말의 기능
4) 예수님은 의사이시다..............................................................
(1) 마음의 치유
(2) 열망의 기도
(3) 행복을 위한 청원
(4) 물질의 축복을 청함
(5) 고통을 통하여 기쁨으로
(6)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7) 기도와 활동
5) 그리스도는 신비체의 머리이시다..............................................
(1) 기도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2)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삶으로 인도되는 그리스도인의 삶
(3)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기도한다.
(4)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
(5) 신비체 전체의 기도인 시편
(6) 기도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
(7) 기도는 끊임없는 찬미

http://ocatholic.cafe24.com/youngsung/youngsung_01_8.htm
1)아우구스띠노의 기도 ( 아우구스띠노의 기도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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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비록 세례는 받지 못했으나 그가 얻은 기도의 체험은 어린아이로서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워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어느 날 배가 몹시 아파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기도를 하고 나자 갑자기 나은 적이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평범한 학생으로서 갑이 많았기에 선생님께 매를 맞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
청소년기부터 다소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한 때는 정결을 지킬 수 있도록 절제의 덕을 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때의 기도는 혼신의 정을 다 바쳐 의지를 움직일만한 강렬한 기도는 아니었다. 마치 사도들이 스승과 함께 한 시간동안 깨어있기를 원했으나 그들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던 그런 경우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절제의 생활이 먼 훗날에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철딱서니 없고 젊은 이 놈은 청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당신께 순결을 빈다는 소리가 "순결을 주소서.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다소 쾌락을 찾는 생활과 마니교 사상에 빠져 기도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다가 삼십 대 초반에 이르러 세례성사를 준비하던 중 이앓이를 심하게 하고 있었는데 "건강의 임자이신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더니 즉시 나은 일이 있어 그는 기도의 효과를 이런 식으로 실감나게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도 체험은 바로 자신의 회개였다. 그는 자기 회개의 은혜를 어머니 모니까에게로 돌렸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아들의 회개를 위하여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원을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아. 내게 있어서 세상 낙이라곤 이제 아무 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가지 일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보겠다고… 그랬더니 천주께선 과남하게 나한테 베푸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되니 그럼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한 마디로 회개 후의 그의 생활은 기도로 일관되어 있었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는 어떤 때 탈혼(脫魂 ecstasy)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단적인 예로서 어머니 모니까가 이승의 삶을 마감하기 얼마 전 母子가 로마 근처 오스띠아(Ostia)에서 상봉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기도 중에 탈혼 상태에 빠졌다가 한참 후 깨어나서는 천상의 삶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불멸의 걸작 고백록(Confessiones)은 그 자체가 기도이며 죄의 고백만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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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감사, 흠숭 그리고 신앙고백이 복합적으로 어울려진 기도서이다. 독백(Soliloquies)이란 저서도 긴 기도로 시작하고 있다.삼위일체론(De Trinitate)은 자신과 독자들의 마음을 드높여 하느님의 존재와 신비를 보다 잘 깨닫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쓴 저서로서 중년에 시작한 그 힘든 작업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는데 하느님의 사랑에 이끌려 그 어려운 작업을 끝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랑에 매혹되어 넋을 잃어버립니다." 진실한 철학자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 굴복하기 마련이고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는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철학과 신학을 탐구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그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높은 차원에서 관상(觀想)하였고 신비가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었다. 16세기 스페인의 신비가들, 예를 들면 십자가의 성 요한과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수도자들이다.
훌륭한 사목자였던 그는 강론과 편지를 통하여 기도에 관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기도에 관한 그의 신학은 두 가지 특징을 띠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경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에 의하면, 설교가의 사명은 단순히 성경을 주석하고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그 자체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활동을 계시한 역사서이다. 구약성경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의 목소리와 사랑의 권고를 받은 것이다.
"성경은 모두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사랑을 움직인다."하고 한 그의 표현에서도 그 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다. 사실 사도 성 요한은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잇다. "당신들은 (성경)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우구스띠노는,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종교의 실재는 옛날부터, 아니 인류가 이 세상에 살기 시작할 때부터 있어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소 지나칠 정도로 이런 표현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과거에 생존한 사람들 중 의롭게 산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떠나서는 구원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본고향에서 온 편지로서 모두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향이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려고 하는 본고향이며, 사람인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는 그 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지막 행복과 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요한 14,6)이 참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목적이자 그 곳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시므로 그분은 인생 여정에 있어서 언제나 사람들과 가까운 분이 되신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사실을 기도와 연관을 지어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끝난다. 기도는 결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
2)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셨다
기도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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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띠노의 고백록은 우주의 주인이시자 진선미성(眞善美聖) 자체이신 하느님을 찬미 찬송하고 흠숭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있다. 그는 인간의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종교심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제 당신이 내신 한 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생심하옵나니…
당신을 기림으로써 즐기라 일깨워 주심이니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니다. |
인간은 이렇게 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이다.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로 끌려가듯이 인간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으며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는 바로 행복 자체이신 하느님을 찾는 데 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인간이 비록 하느님을 찾았다 해도 계속해서 그분을 찾아야 하는 작업이 이승의 삶을 사는 한 언제나 요구된다.
이는 "발견된 하느님은 찾아야 한다."(Deus inventus quaerendus)는 그의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분을 더 감미롭게(dulcius) 또한 더 욕심을 내어(avidius) 찾아 만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비교법의 두 부사(dulcius와 avidius)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한다는 그의 표현에서도 잘 드러나 있으며 시편 저자의 정신과 일치하여 자기의 심정을 하느님께 이렇게 고백하였다.
이리 말씀하소서, 듣겠나이다. 보소서 주여, 당신 앞에 내 마음의 이 귀들을. 입을 열으사 내 영혼에게 말씀하소서. 네 구원이 바로 나라고. 이 목소리 뒤로 내달아 가서 당신을 붙잡고 말으오리다. 당신 얼굴을 나한테서 감추지 마옵소서. 차라리 뵈옵고 죽으리다, 아니 죽기 위해서.
하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행복의 올바른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소위 훌륭하다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자기들이 상상하는 하느님에 관해서 모르고 있으므로 기도할 때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양떼들에게, "형제들이여, 하느님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미 하느님이 아닌 어떤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하느님을 이해하고 있다면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여러분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깨우쳐 주기도 하였다.
인간이 하느님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지성이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마음에 달려 있다. 아우구스띠노에게 있어서 사랑은 각자가 알고 있는 사물의 성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으로 보아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그 대상을 함축적으로 파악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관심도 적어지고 정신도 산만해져 사물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밖에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어떤 것도 완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완전히 알지 못한다"라고 단언한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열망이 인간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해 그 열망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은 피조물에 대하여 애착을 끊어버리지 못해 참 행복을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으려고 한다. 결국 이 세상의 피조물이 좋은 것이로되 올바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이 식어 버린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고 단정한 것이다.
그는 "하느님을 별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고백록 서두에서 이렇게 제기하고 있다.
주님, 당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면 당신을 기리는 것이 먼저 인지, 혹은 당신을 아는 것이 부르는 것보다 먼저 인지 저를 알게 하소서, 알아듣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누구 있어 당신을 모르면서 부르오리까?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첫 시도는 하느님을 알도록 도움을 청하는 청원의 기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께 간구 할 수 있는가?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어떤 거짓 신에게 손을 모으는 것이 아닌가 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그분의 가르침 안에서 이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랑의 무질서로 인해 하느님을 올바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은 이 무질서를 극복하고 마음을 정화시켜줌으로써 하느님을 올바로 알게 해 준다. 예수께서도 산상성훈에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8)하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믿음은 의지의 혼란을 가라앉힘으로써 마음의 눈을 뜨게 하여 하느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혼란한 마음의 감옥에서 해방되도록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의해서만 하느님께 도움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아우구스띠노가 양떼들을 가르칠 때, "기도는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가 계시를 통해 믿는 바는 하느님은 전지(全知)하시므로 모든 것을 아시며 또한 그분은 영원하시므로 절대로 변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에 관해 충분한 성찰을 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께 대한 지식에 대해 확신이 서지도 않을 것이며 본능적으로 기도하는 법을 안다고 상상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충분히 성찰한 다음 위에서 언급한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변화되도록 또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도록 기대할 수 있겠는가? 또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데 어떤 것을 따로 말씀드려 하느님께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드릴 수 있겠는가?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친구의 생각이나 계획을 변경시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절대로 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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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되시거나 정보 제공을 더 많이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도를 분명히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定議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의 말씀드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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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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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어보면 기도의 가치와 중요성은 지대하다. 예수님은 기도의 중요성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기도하셨다.
주 예수님의 이러한 생활모습을 복음사가 마르코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른 새벽 몹시 어두울 때에 예수께서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외딴 곳으로 물러가서는 거기서 기도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크나큰 모범이 아닐 수 없다. 일상생활이 기도와 일치되고 조화를 이루는 생활은 그리스도인 삶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
무엇보다도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 그것은 언제나 오랫동안 기도하심으로써 생활 전체를 아버지께로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복음서를 보면 그분의 일상생활 중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기도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분은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고(루가 3,21),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가시어 40일간 그곳에서 지내셨을 때도 기도하셨다(루가 4,1-13). 또한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도 (루가 6,12), 빵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마르 6,46),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전에도(루가 9,18), 거룩한 변모 때도(루가 9,29), 최후 만찬 시에도(루가 22,32; 요한 17장), 게쎄마니 동산에서도(루가 22,41-44),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셨다(루가 23,33-46).
루가 복음 11장 1절에 의하면 늘 기도하시던 스승의 모습이 제자들의 호기심을 대단히 불러일으킨 듯하다. 그래서 그들 중 하나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대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백성의 영적 지도자로 등장하여 많은 제자들을 거닐고 있던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자기들도 그런 것을 배우고 싶었을 것이고 또한 자기들이 따라나선 예수님만이 온갖 좋은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스승이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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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님께 대한 지식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모든 기도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기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하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기도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응답이며 대화를 시작하시는 하느님께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이 약속하지 않으셨다면 누가 감히 그분께 요구할 수 있으리오?"하고 반문하였다. 사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으뜸가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었고 그 가르침은 기도의 교훈 안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
이교(異敎)사상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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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기도의 가르침을 펴실 때 우선적으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잘못부터 지적하신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유다인들의 기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결점이자 악습인 위선(僞善 hypokrisis)을 피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이는 회당이나 길거리에 서서 남이 보라는 듯이 기도하기를 좋아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겉꾸미는 행동을 말한다. 이를 두고 아우구스띠노는, "그들은 위선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대역(代役)을 하고 있고 실제로 자기네들과 다른 사람들로 보이려는 연 |
극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기도의 행위(act of prayer)에 지나지 않는다. 위선자가 기도할 때 그의 마음은 하느님께 있지 않다. 그는 겉꾸미는 행동으로 신심 깊은 것처럼 보임으로써 그것을 보고 칭찬하려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이런 경우 위선자는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위선자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그런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느님을 누리기 위한 사랑을 결(缺)하고 있다"하고 비판하였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이방인들의 전형적 잘못인 기도의 방법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마태 6, 7-8).
기도할 때에 말을 너무 많이 한 이방인들은 기도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오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신(神)들에게 말을 많이 늘어놓아야만 그들을 굴복시켜 복을 받고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위선자들의 경우와 비슷하게 이방인들도 神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神을 다른 용도로 이용해 보려는데 더 많은 관심을 두었으므로 그들의 기도는 마치 법정에서 교묘하게 말을 꾸며대는 변호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변호사는 어리석게도 사건 자체의 진상 규명과 변론에 치중하기보다는 근거도 없는 변론을 펴면서도 청산유수같이 지껄여대는 자기의 달변만 믿고 검사와 판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기도를 말의 힘에만 의존한 이방인들의 오류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우구스띠노가 사목한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런 이교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류에 빠져있던 신자들의 정신을 바꾸어 보려고 대단히 노력하였다. 비록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기복신앙(祈福信仰)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부(富)나 병의 치유 또는 물질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이방인들의 신전에 가서 빌기 일쑤였다. 아우구스띠노는 이렇게 한탄하였다. "많은 그리스도인 뱃사공들은 불안감을 없애기 위하여 넵튠(Neptunus=바다의 신)에게 빌지 않고는 배를 타지 않는구나!" 그래서 착한 목자였던 그는 그들의 생활을 보고 슬픔에 잠겨, "그들은 만사가 순조로우면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지만 무슨 불상사가 생기거나 화급한 일을 당하면 점장이나 마술사에게 가버리는구나"라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그 신자들이 자신들을 변호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데 우리가 옛날에 믿던 신들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요?"라고 반문하곤 하였다.
이 질문에 대해 아우구스띠노는 기도의 본질과 그리스도인다운 참 기도의 자세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을 변화시키기 위해 애걸복걸하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하느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그분이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도를 이해하려면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태도를 묵상해야 한다 그분은 그 때 당신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좌절과 고통이 극도에 달해, 루가 복음사가에 의하면 실제로 핏방울이 흘러내릴 정도로 심한 공포를 느끼셨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분은 장차 닥쳐올 엄청난 그 사건을 감수할 힘이 없어 올리브 동산을 떠나 당신은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급박한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마음을 돌렸고 이제까지 가르쳐 온 당신의 가르침에 진실한 者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가르침이란 다름이 아니라 지난 날 즐거웠던 시절 당신의 제자들에게 경고한 바 있는 기도의 두 오류를 피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분은 제자들의 도움을 겸손 되이 청한 후 베드로와 제베데오의 두 아들들을 뒤로 하고 약간 떨어진 곳으로 가서 이렇게 기도 하셨다."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장차 닥쳐올 고통을 면하게 해주시도록 간절히 청한 예수님의 그 기도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솔직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뜻만을 우선적으로 앞세우심으로써 참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분의 기도는 분명히 위선자들과 이방인들의 기도와는 달랐다. 그분은 아버지께 사정하여 십자가의 죽음에서 구해달라는 기복적(祈福的)인 기도는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찾는 기도가 최선의 기도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끔 고통과 실망을 안겨줄 때가 있다. 그렇지만 성서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은 오직 그분의 사랑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올리브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그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며 진실한 행복임을 웅변적으로 가르치는 것이고,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좁은 식견이나 기복적인 관점에서 받아들이면 그것은 위선자나 이방인의 부류에 들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진실로 그리스도인다운 기도라면 그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께 더욱 의합하게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하고 하였다. 이 한 마디는 영성생활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것으로서 그는 이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목적이므로, 이는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리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없음을 깨달을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온전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바라지 말고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이기심을 버린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여러분의 기도가 사랑하는 그분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하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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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열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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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서 최상의 가치는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기도를 단순히 하느님께 대한 열망으로 정의하였다.
따라서 순수한 기도는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善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누리기(frui)위하여 이 세상을 이용(uti)하지만 惡한 사람들은 이 세상을 누리기 위하여 하느님을 이용하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
아우구스띠노는 "그들은 富를 얻고 재정적인 손실을 막기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많은 이들이 주님께 부르짖지만 주님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따라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기는 쉽지만 하느님 자신을 열망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마치 선물을 주는 사람보다 선물 그 자체에 마음이 더 쏠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기도가 본질적으로 하느님 자신을 열망하는 것이라면 늘 기도하라는 성경의 말씀은 지당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항구하게 하느님을 열망하기만 하면 언제나 기도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아우구스띠노는 서신 교환을 하던 어느 교우에게, "우리가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식지 않는 열망을 간직하고 있으면 언제나 기도하게 됩니다"하고 편지한 적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참된 그리스도인의 일생은 긴 기도의 연속이 될 수 있다. 반면, "열망이 식으면 기도는 잠을 잔다"는 그의 표현처럼 "식어버린 열망으로 기도문을 외우거나 전례에 참여하는 것은 올바른 경신 행위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위선자들과 이방인들은 기도에 시간과 정력을 소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하느님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으며 참된 기도를 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설이다(마태 6,6).
이 말씀은 기도를 언제나 문을 닫아걸고 하라는 뜻은 아니다. 아우구스띠노가 가르친 것처럼 순수한 기도는 땅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하느님을 열망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기도가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라면 그것은 하느님과 나누는 마음의 대화이다. 마음은 인간의 본질적인 자리이자 인간 자신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마음으로 청하고, 마음으로 찾고, 마음으로 두드리면 하느님은 마음의 호소에 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cor sursum) 것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변화되는 측은 하느님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를 하느님과 나누는 마음의 대화라는 관점에서 마음의 기도(prayer of the heart)의 권위자였던 성 요한 끌리마쿠스(Climachus, +650)는 마태 6,6의 "문을 닫는다"는 말씀을 세 가지 방식으로 가르친 적이 있다. "네 독방의 문을 육체에 닫아라. 말하고 싶은 네 입술의 문을 대화에 닫아라. 네 영혼의 내적 방을 악령에 닫아라." 이를 풀어 말하면, 마음을 수직하여 육체의 정욕을 피하고 입을 조심하여 말을 삼가며 심령을 굳게 하여 악령의 유혹을 물리치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이자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하지만,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성경에 강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시며 인간사에 별로 개의치 않으신다고 쉽게 단정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풍요나 축복의 신에게 가서 빌기도 하고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 세상을 건설해 나가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하느님께 빌기만 하면 모든 것이 쉽게 이루어진다고 여긴다. 이들은 마치 자동 판매기에 동전을 넣으면 차 한 잔이 나오듯이 기도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어린이다운 순수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다분히 기복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에서 중요한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고방식은 비신앙적이거나 아니면 세례는 받았으나 제대로 복음화 되지 않은 상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심이 깊다는 사람들조차도 천둥번개가 치는 것을 보고는 "하늘이 노했구나"하고 말할 때가 있다. 이런 표현은 전적으로 외교인의 사고방식이다. 이는 또한 하느님이 사랑이시며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계시의 초보 단계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처럼 하느님을 못살게 굴거나 열심히 간청하기만 하면 하느님도 피곤하게 되어 할 수 없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는 예언자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과 싸움을 벌인 그 유명한 사건에서 잘 드러나 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알의 예언자들처럼 하느님을 하나의 강력한 절대 군주처럼 생각하여 오래 간청하기만 하면 설득되는 그런 분으로 여길 때가 있는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분이시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점을 자기의 양떼들에게 애써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의 불의를 보시고 화를 더 내신다든지 선업(善業)을 보시고 더 행복해지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달이 차고 기울 듯이 변화되시는 분이 아니다. 사도 성 요한의 말씀처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 아우구스띠노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행하신 많은 기적과 가르침이 모두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기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말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열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보다 간결하게 표현한다면, 기도는 하느님께 마음으로 응답함이다. 따라서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자만 그래도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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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님은 기도를 주셨다.
기도는 기도함으로써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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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위선자들과 이방인들의 기도 방법을 지적하신 후 제자들에게는 기도에 대하여 따로 가르쳐 주셨다. 그 가르침은 짧은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그 안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기도는 기도함으로써 배우게 된다. 마치 목수가 목공일을 계속함으로써 능숙한 목수가 되듯이(Faber fabricando fit faber) 기도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기도는 체험이지 기도의 기술을 익히거나 미사여구의 나열이 아니다. 기도할 때 가끔 느끼는 것이지만 입에서 나오는 열심한 말이나 아름다운 기도 |
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느님 자신을 얼마나 적게 갈망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우리의 느낌에 따라 기도의 정도를 평가하거나 하느님도 우리의 구미에 따라 변화되시는 분으로 대할 때가 많다. 이와 같이 올바른 신심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신비적 현상이나 이와 유사란 것들이 등장하여 공동체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을 훨씬 초월하는 분이므로 우리가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신비와 더불어 살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신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긴장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다소 역설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기도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상상이 올바르지 않을 수 있으므로 우리 안에 형성된 그분께 대한 신심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고통스런 체험(실망과 좌절)을 맛보기 때문이다.
한편 아우구스띠노는 회심한 이래 하느님을 잘 알고 있었고 그분께 대한 풍부한 체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깊게 체험하였다. 따라서 그는 기도를 가르칠 때 무엇보다도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였으며 참된 기도는 체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고백록의 다음 구절은 하느님을 체험한 그의 심정이 적절히 묘사되어 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우리가 이 기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우구스띠노가 하느님을 찾기 전에 하느님이 먼저 그를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로 얻어진 것은 스스로 만족스러운 신심이 아니라 자기 생활에 대한 부족함과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갈망이었다. 초기 작품인 독백(Soliloquies)에서도 그는 하느님과 자신을 알고 싶은 열망을 기도로 표현하고 있다. 달리 말해,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사랑의 확산이었고 하느님과 자신을 아는 지식이었다. 이 지식의 두 형태는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통찰하려면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한계점을 깊게 인식하고 체험할 때 가능해 진다. 아우구스띠노는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내 자신 안으로 들어오라는 타이르심에 타인의 이끄심 따라 나의 가장 안으로 들어왔삽고, 그리 될 수 있삽기는 당신이 나를 도와주신 때문이었습니
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아찔하도록 쇠약한 내 안광에 세찬 빛을 쏘아주었기에 난 사랑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체험이며 기도함으로서 기도를 배우게 된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에 관한 강의를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기도를 주심으로써 그들이 기도를 체험하게 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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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행복을 위한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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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행복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다. 아우구스띠노에게 있어서 주님의 기도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인간의 갈망이 내세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다.
주님의 기도는 복음사가 마태오(6,9-13)와 루가(11,2-4)가 전하고 있는데, 청원의 수는 각각 다르지만 아우구스띠노는 서로 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며 예수께서 일곱 가지 청원을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일곱 가지 청원 중 처음 셋은 영적인 은혜를 위한 것이고, 나중 넷은 현세의 도움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사후(死後)에 누릴 영원한 행복을 갈망한다면 이 지상의 사물들도 장차 누릴 영원한 세상을 위한 준비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일곱 가지 청원은 모두 永生을 위한 것이지 그 중 어떤 청원도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한 청원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사고방식은 다분히 플라톤적이며, 특히 신플라톤사상(Neo-Platonism)에 세례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일곱 가지 청원을 드립시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과 멀어져 살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장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히 일치된 기도는 본질적으로 본고향(Patria)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의 염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을 나그네(peregrinus)라고 부르곤 하였다. 영원한 세상을 염두에 둔 그는 이 세상을 잠시 지나가는 피난살이 정도로 여겨 양떼들에게 이렇게 가르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본고향에 대한 열망이 자라야 합니다. 영생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이유 때문에 현세적인 축복을 원하거나 이 세상의 행복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이 세상의 행복과 안정을 위한 약속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행복에 대한 희망을 모두 하느님께 두도록 도와주는 수단이며 귀양살이 하는 인류가 본고향을 그리워하는 염원 내지는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염원을 강렬하게 염두에 두었던 그는 강론을 통하여 양떼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 형제들이여, 노래부릅시다. 휴식을 취하면서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하면서 기운을 내기 위해서입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노래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도 노래하면서 여행합시다." 본고향으로 가는 순례의 여정에 있어서 이 세상의 재산은 그 여행을 잘 하도록 도와주는 수단이면 족하다. 그렇지 않으면 여행에 방해가 된다.
그는 또 말한다. "피조물을 생각할 때 그것에 빠지거나 호기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생에 나아가는 디딤돌로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약한 본성 때문에 자기가 영원한 세상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끔 잊어버리고 이 세상을 잠시 쉬어 가는 주막이 아니라 본고향처럼 여겨 이 곳에 빠져버리거나 안주(安住)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네 가지 청원은 인생의 본 목적에서 이탈하려는 강한 경향들과 투쟁하는 데 적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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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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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그분의 善하심을 찬미하는 행위로서 그 자체가 벌써 하느님의 관대하심에 의한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불려질 권리가 있거나 그런 영예를 입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이미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고 있다는 사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양자(養子)로 삼으사 그리스도의 상속을 함께 나누도록 배려하신 사실을 인 |
정해야 한다.
또한 "아버지"라는 칭호를 묵상할 때 우리 마음 안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일어나 무한한 존경과 사랑이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자신을 관대하게 드러내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신뢰를 가지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인간의 생사를 온전히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으며 창조주이신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는데 후세에도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이 기도의 서두는 경외심과 감사의 정을 자아내며 우리의 행위를 올바르게 인도하여 하느님의 자녀다운 생활을 합당하게 하도록 인도해줄 뿐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을 성찰할 기회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집도 절도 없는 불쌍한 소년이 저명한 가문에 양자(養子)로 입적되어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양자로 입적되고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며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어 초자연적인 공로를 받아 모든 권리를 상속받고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라는 사실은 하느님과 우리 개개인의 관계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우리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참조. 마태 5,43-48)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를 때 우리와 그들은 모두 그분의 사랑 받는 양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상속은 모든 이에게 골고루 나누어지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형제 자매로 받아들여야 하며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신분 구별을 원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진심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그리스도인은 만인을 차별 없이 대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빈부의 차이나 지역 감정, 민족과 피부색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그 당시 심각했던 사회적 신분 격차, 즉 하인과 주인,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서로 형제처럼 지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가르치곤 하였다.
주님의 기도 서두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부르고 있지만 하늘(ouranos)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아우구스띠노는 순진한 양떼들에게 가르치기를 만일 하늘이 장소적 개념이라면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이 우리보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기도문의 의미는 하느님이 성인(聖人)들과 의인(義人)들 안에 거하신다는 뜻이며 사도 성 바울로도 같은 의미로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고린 3,17). 그러므로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는 멀리 여행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 안에서 그분을 만나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아우구스띠노가 이 진리를 깨닫는 데는 많은 세월이 걸렸다. 오랜 방황을 해 오던 그가 회심한 후 고백한 바를 젊어서는 결코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늘 그와 함께 계셨고 그를 인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았나이다… 님은 나와 함께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이란 하느님이 성전처럼 거하시는 의인들의 마음이므로 아우구스띠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는 이 기도문을 바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도 거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뜻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자리잡고 있는 온갖 장애물이나 하느님을 대신하는 우상들로부터 해방되어 자기의 마음속 깊은 곳에 하느님을 모실 거룩한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성삼의 내주(內住)현상으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마음 안에 모시는 상태이며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맛볼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영성생활이다.
②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이 기도는 하느님이 거룩하시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땅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사랑을 참된 행복의 근원으로 깨닫도록 청하는 기도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계시를 이 세상이 받아들이도록 청원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거룩하게 드러나도록 비는 기도이다. 또한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온갖 장애물을 우리에게서 멀리해 주시도록 비는 청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도 거룩하게 되도록 비는 기도이므로 우리를 위한 축복의 기도라고 하였다.
③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 또는 왕국(basileia tou theou)은 우선 하느님의 영역이나 통치를 말한다(시편 103,19; 145, 11-13; 이사 52, 7 ; 마르 9, 47; 10, 15. 23-25; 1고린 15, 50; 갈라 5, 21 등). 또한 그 나라는 의인들이 누릴 영원한 거처이다. 그 나라는 우리가 기원하든 기원하지 않든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기로 되어 있는 것은 기정 사실이므로 하느님이 그 나라를 온전한 자유로써 통치하시도록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통치하심에서 우리가 은혜를 입도록 청하는 기도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우리도 그 나라의 한 몫을 얻어 누리도록 기원하는 청원인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 아우구스띠노는, "그 나라가 우리 안에 오도록, 또한 우리도 그 나라에 들어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 기도는 우리가 그 나라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증을 얻기 위한 청원인 것이다. 또한 이 기도는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그 나라의 회원이 될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므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겸손 되이 청하는 기도이다. 마치 눈먼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없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아우구스띠노는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마음속의 소경됨이 치유되어 성인들의 대열에 들 수 있도록 겸손 되이 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도 예리고의 두 소경이 크나큰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주시도록 큰 소리로 간청하자 자비하신 그분이 그들의 소경됨을 치유해 주신 사건(마태 20,29-34)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④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아우구스띠노는 이 기도문을 해석할 때 많은 부분을 성 치쁘리아노(St. Cyprianus)의 주석에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얼마나 많이 애원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의 출발점으로서 그는 하느님의 뜻의 성취는 인간의 계획과 사고방식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또는 인간이 하느님께 협조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의 뜻은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저주받은 자들에게 이루어지지만 오직 구원받을 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행함으로써 그분께 호의를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기도드리는 것은 그분의 특별한 도움이 없이는 그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관해서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여러분이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행하십니다"하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청하는 기도 안에는 현재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도록 청하는 염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큰 실수 중의 하나는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맡기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어 주시도록 하느님께 무조건 청하는 것이다. 이는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는 아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므로 전능하신 하느님께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앞세워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된 내용이지만 우리는 이 청원에서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범을 배워야 한다. 그 분은 십자가의 형벌을 원하지 않으셨으므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 청원문에서 우리 자신의 변화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첫째로 이 청원문은 천상의 천사들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행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비는 기도이다 천사들은 우리 인간들처럼 사랑의 분열이 없는 존재들이어서 행복의 근원을 오직 하느님 안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존재 전체를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으므로 실수로 인해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거나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청원은 우리도 천사들처럼 우리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하여 충만한 행복을 누리도록 염원하는 기도인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청원에서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정신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하루빨리 증오심을 버리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도록 기도하자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우구스띠노는 이런 외적인 요소 외에 염두에 두어야 할 내적인 요소가 있는데, 특별히 이 청원에서는 개개인이 수덕생활(修德生活)을 하면서 겪는 마음의 전쟁(戰爭 bellum cordis)에서 해방되도록 청원을 드리는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 청원에서 "하늘"은 정신을, "땅"은 육체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육체와 정신으로 하나의 존재를 이루고 잇는 인간이 올바르다고 여기는 바를 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상에 맞는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이 청원을 통하여 인간의 갖가지 사욕편정(私慾偏情 concupiscentia)이 사랑으로 승화(昇華)될 것이고 영육간의 투쟁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완덕(完德, perfectio)을 지향하는 청원의 기도이기도 하다.
또한 이 청원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교회를 위하여 비는 기도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수행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교회도 그 머리이신 분의 뜻을 본받아야 한다. 한편 영적 투쟁 중인 지상의 교회(Ecclesia militans)는 그 안에 죄 많은 지체들을 안고 있으므로 죄인들의 교회(Ecclesia peccatorum)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청해야 할 것은 느슨한 생활을 하는 죄인들이 하루 빨리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고 교회도 그 창설자인 그리스도께 완전히 동화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하는 청원에서 드러나는 분명한 내용은 하느님의 뜻이 인간 삶의 모든 면에 두루 퍼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뜻이 완전히 수행되는 그 날 인류는 온전히 회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우리가 이 청원을 드릴 때마다 위에서 말씀드린 그 모든 것을 염두에 두면서 아버지께 간절히 청하도록 합시다"하고 권고한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청원은 주님의 기도의 첫째 부분이며 주로 영적인 것을 청원한 반면 다음의 네 가지 청원은 주의기도의 두 번째 부분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은혜를 청하는 기도이다.
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소서.
이 청원은 육신과 영혼의 양육을 위한 기도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일용할 양식(panis quotidianus)을 다음의 세 가지 관점으로 이해하였다. 첫째는 육체적인 필수품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식주를 말하며, 두 번째는 천사들의 빵이자 우리 영혼의 음식인 성체를, 세 번째는 교회가 매일 선포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구든지 부자든 가난하든 이 기도를 바칠 때는 하느님 앞에서 걸인임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부자들은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은 것은 무엇이나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므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아우구스띠노는 강조하기를 부(富)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위하여 청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이 청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매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만을 위하여 두 손을 모을 것이 아니라 매일이라도 성체를 모실 수 있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교회와 일치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그분의 몸으로 모인 우리가 그분의 지체들로 변화되어 우리가 받아 모신 성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우리의 음식이 되어 오시는 주님을 모심은 주님과 하나됨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다. 이를 누리는 사람은 "선은 저절로 넘쳐 흐른다(Bonum est sui diffusivnm)는 원리처럼 이 세상의 사람들, 특별히 어렵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성찬의 기쁨을 전해주도록 요청 받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도 영혼의 양식이다.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은 바로 생명의 약식이다(요한 6,35).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매일같이 묵상하고 실천에 옮겨야 하는 하느님이 계명"이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는 약한 인간이 세속적인 것과 신적인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쉽게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 듣고 거기에 심취되어 살아가야 하며 매일 교회가 선포하고 가르치는 말씀의 양식과 찬미가로 힘을 얻고 회복하여 수덕(修德)에 정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⑥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이 청원에서 전제하고 있는 것은 사도 성 요한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죄인이라는 사실이다(1요한 1,8).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에 세례성사를 받은 다음에도 자주 실수하고 죄를 범하므로 매일 용서를 받아야 한다.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늘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도록 자비하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우구스띠노는 우리가 성체를 모시지 못할 만큼 중대한 죄는 아니라도 하느님께 적절히 응답하기에는 부족한 실제적인 장애물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사소한 죄나 잘못은 비록 모래알같이 미소하지만 그것이 조금씩 쌓여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납덩이같이 되어 크고 무거워진다고 하였다. 또 다른 강론에서는 그것들은 배 안으로 스며드는 물방울 같아서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얼마 후에 배를 가라앉힐 만큼 큰 재난을 초래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미소한 죄들은 누구에게나 위협적일 수 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제자들까지도 사소한 죄에서 해방되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 청원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 겸손 되이 기도한 세리(루가 18,10-11)처럼 우리도 겸손 되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기도는 작은 죄들을 없애주므로 그는 주님의 기도를 매일 바치는 세례성사로 여겨 이를 바치도록 권고하였고 바로 이런 이유로 영성체 직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매일 이 기도를 바치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 사람들의 잘못까지도 용서해 주겠다는 결심을 하느님과 하게 된다. 산상설교의 주석에서 아우구스띠노는 이웃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로 보아 용서해 달라는 청을 받든 받지 않든 무조건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내 원수가 언제까지나 나를 싫어하여 공격해 와도 나는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다. 기도문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나에게 용서를 청할 때에만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볼 수 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고 명하셨다. 아우구스띠노는 인간의 경험으로 보아 남을 먼저 용서하기 전에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거만하게 굴더라도 또한 그들이 나에게 화해를 청하기 전이라도 여전히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황금률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착한 목자였는지라 양떼들의 영성생활을 위하여 용서의 한계까지도 구체적으로 설정해 놓았다. 용서를 청하기 전이라도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채무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법적으로 소송절차를 밟지 않으면 갚지도 않거니와 갚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므로 만일 그들이 갚기를 거부한다면 비록 나로 인해 그들이 죄를 범하였으나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 다소 누그러진 태도를 보인 그는 세례 지원자들에게 행한 강론에서 용서 청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누구든지 용서를 청하면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소한 이 정도의 수덕생활은 할 수 있어야 주님의 기도를 정당하게 바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상적인 가르침은 원수들이 용서를 청하든 청하지 않든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이 주 예수님의 추종자가 실천해야 하는 제자다운 삶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 신자들에게 행한 강론에서 사울에게 박해를 받아 죽어가면서도 그를 위해 기도한 거룩한 부제 스떼파노(사도 7,60)를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아우구스띠노가 가르친 용서의 결과들은 무엇인가? 첫째는 마음에서 온갖 미움을 몰아냄이요, 둘째는 용서를 위한 모든 소청(訴請)을 들어줌이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성실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교정(矯正)하고 벌을 주는 직책을 맡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경우 용서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전제한 그는 이런 경우 범죄자를 원상 복귀시켜 준다는 동기로만 행동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혹시 책임자의 선의(善意)에도 불구하고 복수의 동기들이 범죄자들을 충동할지도 모를 일이므로 책임자는 자기의 책임을 성실히 수행한다는 마음으로 벌할 것은 벌하고 혹시 이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자기가 실수 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우구스띠노는 용서하는 것과 진정으로 사랑의 방법으로 교정하며 벌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용서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그 외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없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남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님으로부터 받기 위하여 우리는 늘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청원에 우리가 진실해진다면 우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며 그 때에는 정당하게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진실한 용서란 우리의 노력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한계성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느님께 청한다면 그분은 분명히 우리 마음 안에서 무엇인가를 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는 겸손에 있다고 보았다. 사실 겸손은 모든 덕의 기초이다.
그리스도인의 완덕은 사랑의 완성에 있으므로 아우구스띠노의 가르침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야 하므로 행위를 보고 성덕의 척도를 판가름 할 수 있다(참조. 마태 7, 20). 이 점에 있어서 아우구스띠노는 사도 성 요한의 말씀 외에 따로 인용할 말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용서의 문제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직결되므로 진실(veracitas), 유화(affabilitas), 공정(equitas)과 같은 윤리덕이 요구되며 인간 개조에는 아량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잘못을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이 가끔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용서의 주제를 다룰 때 미움(odium)은 자기를 미워하는 원수에게보다도 미워하는 사람 자신에게 훨씬 더 파괴적이라고 본다. 원수라 하더라도 사람의 중심인 영혼은 파괴하지 못하지만 미움은 영혼을 파괴시킬 뿐 아니라 눈멀게 하여 사랑의 가능성을 영혼에게서 빼앗아가므로 영혼을 죽이는 죄악인 것이다.
⑦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잘못한 죄의 용서를 청한 다음 미래로 눈을 돌려 온갖 죄를 피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 이 청원은 약하디 약한 우리의 처지에 너무나 강한 유혹이 몰아치면 죄에 떨어지게 되므로 그런 유혹에서 구하여 달라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없이는 죄를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연약한 처지에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으시도록 특별한 청원을 드리는 것이다.
사실 유혹은 우리의 삶에 적극적인 면을 제공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유약함과 당신의 위대하심을 가르치시는 것도 역시 유혹을 통해서이나 악에 떨어지도록 유혹하지는 않으신다(1고전 10,13). 예수님도 유혹을 당하셨으나 거기에 떨어지지는 않으셨다(마르 1,13). 오히려 유혹을 이기는 자에게 더 많은 힘과 용기를 주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모든 유혹을 없애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약한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았지만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 유혹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이 지상의 삶을 계속하는 한 온갖 내적 갈등과 분열이 지속될 것이나 오직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에 의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정진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⑧ 악에서 구하소서
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이상적 기도의 마지막 부분은 유혹 그 자체와 이것과 관련된 마음의 전쟁(bellum cordis)에서 구하여 달라는 청원으로 끝난다. 이 청원은 공포와 불안, 전쟁과 유혹이라고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내세(來世)의 평화와 축복이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되리라는 희망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아우구스띠노가 고백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도한 것처럼, 영원한 안식일을 향하는 그리움과 탄식을 끝난다고 볼 수 있다.
이렛날만은 저녁도 없고 해넘이가 없나이다. 따로이 축복하시어 무궁토록 길게 하셨음이니이다. 당신은 고요하신채 창조의 업을 하시었어도 매우 좋은 그 일들을 끝내신 후에 이렛날에 안식을 취하셨다고 성서의 말씀이 말해줌 같이 당신이 주시기에 매우 좋은 일들을 우리가 한 후에도 영원한 생명의 안식을 당신 안에서 누리게 하신 것이니이다.
이상으로 주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이상적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훑어보았다. 이 기도는 제자들의 간청에 의해 주어진 기도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기도를 해설하여 양떼들에게 가르치면서 일곱 가지 청원들 중 이 세상의 삶을 위한 것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본고향인 내세를 동경하는 염원과 더불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는 하느님 중심의 기도를 바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인간의 선입관을 과감히 수정해 나간다. 의식주와 건강 그리고 번영을 누리고 싶어하는 욕망, 심지어는 좋은 날씨 등 온갖 기복적인 청원기도는 모두영생을 향한 열망에 종속되고 승화(昇華)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열망을 고무시키기 위하여 아우구스띠노는 다섯 번째 청원 기도(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를 강조하였다. 그는 이 청원이야말로 주 예수님이 기도와 연관지어 가르치신 여러 말씀 중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전제하면서 만일 이 청원을 잃어버리면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비로와 지기를 원하시므로 사람들은 이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불행해질 수 있는 요인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대하신 그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욕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돌릴 수 있도록 전적인 내적 변화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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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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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의 열망이라면 기도에 있어서 말을 기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기도는 내적인 행위이므로 말이 없어도 가능하다. 하지만 기도 안에서 말의 중요성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암송하고 반복할 수 있도록 기도를 주신 것이다. 그분이 주신 기도는 짧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주님의 기도 뿐이다. 그래도 여전히 제기되는 질문은 기도에 몇 마디 말이 |
라도 꼭 필요한가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느님은 인간의 말에 의해 변화되시는 분이 아니다. 아우구스띠노는 이런 유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단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기도에는 말이 꼭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말로써 하느님을 움직이거나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도록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일들을 우리가 알고 그 열망을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기도 안에 등장하는 말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적 이상(理想)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며 우리의 열망들을 그것에 따라 형성 시켜 준다. 그러므로 말의 목적은 하느님을 움직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아우구스띠노는 "기도에 집중하면 마음을 맑게 하고 순결하게 하여 영적으로 우리 안에 주입된 하느님의 선물들을 훨씬 더 많이 받게 된다" 라고 가르쳤다.
예를 들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자극시켜 하느님의 이름을 모든 사람들이 거룩하게 받들고 우리도 그 이름을 받들 열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청원들은 우리를 위하여 합법적인 욕망의 선을 그어준다고 볼 수 있다. 아우구스띠노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거룩한 사람들은 주님의 기도에서 제시된 일곱 가지 청원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았다고 주장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어떤 지향을 놓고 기도할 때 주님의 기도의 청원들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다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 대하여 별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본받아야 한다. 그분이 가르치신 기도의 형식은 확실히 우리 모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성장되어 하느님께 이르게 되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란 때때로 마음속의 깊은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필설(筆舌)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음만이 있을 것이고 그 신음이 점진적으로 깊어져 기쁨의 환호성으로 변화될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아!"라는 탄성만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기도의 체험을 양떼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하느님은 선하십니다. 그분이 어떤 식으로 선하신지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말할 수도 없거니와 침묵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만일 말할 수도 없고 침묵을 지킬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오직 기쁨의 환호성을 외칠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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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예수님은 의사이시다.
마음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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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는 참 스승인 동시에 모든 병고와 마음의 상처 그리고 온갖 질곡까지 치유해 주시는 참된 의사이시다. 그분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무질서하고 잘못된 사랑 때문에 발생한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부서진 마음의 조각들을 재결합시켜 주심으로써 우리가 올바른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 안에서 활동하시는 의사이다. 이교인들 뿐 아니라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을 사랑하여 그 안에서 참된 행 |
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안에 빠져 버리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 안에 활동하신다는 것은 이런 잘못된 사랑을 제거하신다는 뜻이다.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가정(假定)들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신앙 안에서 그분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분은 인간의 사랑에 혁명을 일으키실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아우구스띠노는,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불신의 영역에서 신앙의 영역에로 나아가는 통로를 만드신다"하고 하였다. 그분은 인간을 당신에 대한 믿음에로 이끌기 위하여 갖가지 시련을 주시며 그분에 대한 충성심에 위기를 주신다. 이 외에도 그분은 다른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심으로써 행복과 성취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 보이신다. 이런 과정은 실제로 아우구스띠노 안에서 일어난 연속적인 체험이었다. 그는 "오 주님,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혼이 시련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을 기억했나이다. 우리의 무지는 우리를 더욱 더 불안스럽게 하였고 마침내 우리는 얼굴을 돌려 당신께로 향하였더니 빛이 생겼나이다."하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한 인간의 회심은 본질적으로 개개인 안에 있는 사랑의 회심이며 그 사랑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다시 돌리는 작업이다. 이 과정은 인간 실존의 모든 관점에서 볼 때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자기의 사랑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사랑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에 관해 그는 여러 가지 명언을 남겼다. "중력의 법칙에 끌리듯이, 영혼은 사랑에 이끌려 어디로 이끌든지 그리고 끌려갑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각 사람은 그의 사랑이다. 그대가 땅을 사랑하는가? 그러면 그대는 땅이 될 것이오. 그대가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여기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대는 하느님이 될 것이오. 여기에 대해서 감히 나의 권위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군요. 성경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 모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인 신들이라고 말하노라"하는 말이 있지 않소.
말하자면, 각 사람은 이미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결단과 의지의 작용에 의해 형성되어 나간다. 이 작용이 신앙 안에서 올바로 형성되고 정확하게 방향을 잡아 나아갈 때 완덕에 이를 수 있다. 아우구스띠노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잘 파악하여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고 대단히 중히 여기는 것과 자기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여기는 것을 붙들려고 하며 그 안에서 살아간다"라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이와 같이 사랑의 대상에 따라 영성의 원리인 집착과 초탈의 대상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이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 종속될 것이나 사랑이신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면 그는 온전히 하느님께 종속될 r서이다. 그러면 그 결과로 그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기쁨과 행복과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갈망하는 행복의 가능성을 하느님 안에서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와는 달리 인간이 행복이나 만족의 근원을 피조물에게 두고 그것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피조물의 희생물과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자기의 과거 경험을 근거로, "이런 사람은 자기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필연적으로 피조물을 섬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피조물이 이끄는 데로 끌려가기 때문이며 그것을 제거하려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하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도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사랑을 쇄신시켜 인간 자신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사랑을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되돌린다는 의미이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의 시야를 넓힐 수 있으며, 그런 좋은 선물을 주신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된다.
기도가 인간의 시야를 넓힌다는 것은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처지를 깊게 묵상하면 잘 알 수 있다. 기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뜻을 갈망하는 단계에 이르도록 이끌어 준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해서, 진정한 기도는 마음속의 갈망들을 하나로 통합시켜 하느님께로 향하게 한다. 아우구스띠노에게 있어서 이런 관점의 기도는 일찍이 시편 저자가 체험하고 노래한 것과 일치한다.
야훼께 청하는 단 하나 나의 소원은
한 평생 야훼의 성전에 머무는 그것 뿐
아침마다 그 성전에서 눈을 뜨고
야훼를 뵙는 그것만이 나의 낙이로다(시편 27,4)
인간이 자기의 모든 갈망들을 이 "하나의 것"에로 통합시켜 나갈 때 기도와 사랑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한편 이와는 달리 하느님께 대한 갈망도 없이 기도하는 사람은 사실 진정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는 아우구스띠노가 지적했듯이, "그의 소리가 인간의 귀에는 요란하게 울릴지 몰라도 하느님의 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시편 저자가 "야훼여, 온 마음 다하여 당신을 부르오니 대답하소서(시편 119,145)라고 간청한 것처럼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데 있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우리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부르짖으면 온전한 마음으로 부르짖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도에서 이런 것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올바로 기도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기도생활에 진보하면 진보할수록 두 번째로 큰 계명인 이웃 사랑을 보다 쉽게 실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열망인 진실한 기도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 그리고 이웃 사람들과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는 데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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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망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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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관하여 하나의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즉 하느님이 사람들을 참으로 사랑하시고 사람들의 영원한 행복을 원하신다면, 왜 사람들은 굳이 그 행복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또한 왜 하느님은 사람이 그것을 청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는가? 이런 물음에 대하여 아우구스띠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하느님으로부터 선물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으면 그 선물을 누릴 수 없다. 이는 마치 귀먹은 사람을 음악회에 데리고 가는 것과 비슷하다. |
그 사람은 무대 중앙과 가장 가까운 특별석에 앉아 있어도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에 감사드리려면, 우선 감사드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한 후 기도에 의해 욕망을 단련시켜야 한다. 만일 이것이 부족하면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아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모두 열망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사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의 일생은 오로지 성스러운 열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복하지만, 사실 여러분은 열망하고 있는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열렬히 열망함으로써 정신이 온전히 열망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장차 보게 될 것을 잠시 연기시켜 놓으심으로써 우리의 열망을 증가시켜 주시고 우리 영혼의 수용력을 확대시켜 주십니다"하고 하였다.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필수적으로 정신의 수용력을 확대시켜야 하며 이는 일생을 통해 수행해야 할 과업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조건은 이 세상이 주는 것들에 대해 불만족을 경험하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어떤 사람도 자신의 현재 상태를 미워하지 않는 한 자기가 되고자 하는 이상형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런 창조적 불만족에 대한 좋은 예는 스승에게 간청한 제자들의 청원에서 잘 드러난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가 17,5).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만일 제자들이 스스로 신앙이 부족하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신앙의 선물이 증가되어도 실제로 큰 효과가 없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신앙의 열망을 실천에 옮겨 보도록 그들이 당신의 문을 두드리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항구한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신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고취시키려고 하셨다. 예를 들면, 정의를 찾고자 노력하는 과부의 비유(루가 18,1-8)와 한밤중에 이웃 사람에게 빵을 구하는 사람의 비유(루가 11,5-8)는 바로 기도의 항구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비록 도움을 늦게 주시더라도 우리가 청하는 바를 진정으로 열망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스승의 말씀에 희망을 가지고 항구하게 청하는 이는 그것을 분명히 얻을 것이다.
청하시오,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여러분에게 열어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그에게 돌을 주겠습니까? 또는 생선을 청하는데 그에게 뱀을 주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은 악하면서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 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야 당신에게 청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후하게 좋은 것들을 주시겠습니까! (마태 7,7-11)
아우구스띠노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내적인 갈등 속에서 받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주고자 하신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하는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부족한 부분을 성찰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 아우구스띠노는 친구에게 빵을 청하는 사람의 비유를 우리에게 제시한다(루가 11,5-8). 그 비유에서 빵을 여유 있게 가지고 있지 않던 그 사람은 평소에는 빵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가 예기치 않은 손님의 방문을 받고는 비로소 자기 집에 빵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친구의 우연한 방문의 결과는 그가 남에게 베풀고자 할 때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어느 기회에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희망에 대하여 말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그는 자신의 삶과 믿음에 대하여 한층 더 새롭게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참조. 1베드 3,15).
아우구스띠노의 표현처럼, 누구든지 질문을 받게되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정리하게 되고, 부족함을 깨닫게 되며, 또한 가르치고자 할 때는 스스로 배우고자 노력한다.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께서도 비록 사람들의 청원에 더디 응답하신다 해도 사람들이 반복해서 청하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더디 주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청하는 것을 더욱 더 갈망하도록 배려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너무 빨리 주시면 그 은혜가 너무 값싸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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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위한 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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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들이 가끔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릅니다(로마 8,26)라는 사도 성 바울로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실제로 가치 있는 것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표시이다. 쁘로바(Proba)라는 로마의 귀부인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아우구스띠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 질문의 요지는 이러하였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이 영성생활에 오히려 크나큰 장애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이 질문에 대해 아우구스띠노는 만일 우리가 행복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우리는 올바르게 기도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행복에 대한 갈망은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모두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행복의 대상과 주체가 다를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소위 철인(哲人)이라는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궁리하고 토론하느라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비해 왔다. 아우구스띠노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키케로의 호르뗀씨우스(Hortensius)를 숙독한 후 많은 영향을 받았고 사실 그의 호기심은 비록 늦게 이루어지긴 했으나 실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키케로의 사상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하여 쁘로바(Proba)에게 행복한 삶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누구든지 자기가 바라는 것을 모두 소유하고 있고, 원해서는 안될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진술에 의하면 행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한 개인의 욕망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근원을 소유하는 일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자기가 추구해본 행복한 삶에 대한 체험을 근거로 하여 오직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만이 행복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충족시킨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따라서 쁘로바가 아우구스띠노의 도움을 받아 추구한 행복도 자기의 모든 열망을 오직 하느님께만 두고 실제로 하느님을 소유하는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진실한 기도는 하느님 자신을 소유하기 위한 열망이며 한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다른 여러 가지 부수적인 열망들을 모두 이 하나의 열망에로 모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는,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근본적 욕구인 하느님을 향한 방향을 자기 삶의 한 가운데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가 쁘로바에게 조언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행복한 삶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그는 키케로의 주장에 따라 행복한 삶이란 "영혼과 육신이 영원 불멸하고 타락하지 않는 상태일 때 하느님의 영광을 영원 무궁토록 관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하느님을 영원토록 관상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므로 이런 열망을 키우기는 참으로 힘들다. "행복한 삶"은 모든 이해를 능가하는 "하느님의 평화(필립 4,7)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우리 마음속에 그릴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 해도 우리는 적어도 그것을 열망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완전한 행복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으로 알 수 잇다. 재산과 명예가 좋고 어느 정도 필요하며 행복의 조건은 될지언정 그것이 인간에게 완전한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 더구나 이런 것을 잃고 난 후 괴로움을 느낀다면 우리는 인간의 한계성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는 제한적 행복의 조건들을 넘어 영원히 지속적인 행복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을 적절한 대상에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 안내자는 성령이시다. 사도 성 바울로가 로마서에서 적절하게 표현한 것처럼 인간이 영원한 행복을 향하여 정진하고 있으나 신음할 수밖에 없으므로(로마 8,25)영의 인도를 받아 나갈 때 무지에 빠지지 않고 올바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까지도 승화시킬 수 있게 된다. 아우구스띠노는, "구하라, 받을 것이며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한 16,24)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행복의 주제와 연관시켜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였다. 몸이 아픈 사람은 하루 빨리 풀려나도록, 그리고 항해하는 사람은 무사히 귀향하도록 하느님께 간청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상급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실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이런 청원들보다는 오히려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청하기 전에 먼저 무엇이 우선(prioritas)적인지 곰곰히 성찰해 보아야 한다. 아우구스띠노는 물질적인 축복을 청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즐길(frui) 수 있는 것을 청한다면 나머지는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각자에게 맞도록 배려하신다고 가르쳤다. "형제들이여,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에 대한 희망 안에서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착한 목자였던 그는 양떼들에게 이 세상을 것들, 즉 재산, 건강, 부귀, 명예도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므로 좋은 것이지만 더 좋은 것, 즉 영적인 선물을 청하도록 가르치곤 하였다. "하느님 외에 어떤 것도 하느님께 청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거저 사랑하십시오. 오직 그분만을 갈망하십시오."
이는 "하느님을 거저 사랑하는 것이고 그분께 모든 희망을 두는 것이며 그분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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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통하여 기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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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인간을 가르치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그분은 특히 고통과 번민을 통하여 가르치신다. 이는 이 지상의 삶에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진리를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하여 알 수 있도록 배려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다소 역설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부와 쾌락을 누리는 사람들보다도 영원한 고향과 거기서 누릴 행복에 대한 욕망과 동경을 더 많이 지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우구스띠노가 사목하던 양떼들 중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
따라서 그는 목자로서 그들에게 이 세상의 고통은 주님의 포도밭에서 포도 짜는 기계에 넣는 포도와 같아서 고통은 좋은 열망들로 채워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이 세상의 삶을 통해서 참 행복을 갈망할 수 있기 때문에 홀로 하느님만이 행복의 대상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어느 누구도 지적인 분석을 통하여 물질에서 이탈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다.
오히려 인간은 이 일상의 삶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행복의 근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신앙 안에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양떼들에게 "규율은 듣고 읽거나 생각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임으로써 지켜진다"라고 가르쳤다. 그가 의미하는 규칙은 환난을 통한 가르침(instructio per tribulationem)이었다. 하느님은 고통과 번민을 통하여 개개인에게 말씀하신다.
이는 고백록의 여러 곳에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가 어려서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의 매질에 대한 두려움은 생생히 기억에 남는 고통이었다. 어느 강론에서 그는 "왜 하느님은 이 세상의 기쁨에 고통을 주십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이러한 고통과 환난의 아픔을 통하여 영원한 달콤함을 동경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고통을 통하여 통찰력을 주시도록 청해야 한다. 이런 유의 통찰력은 각자의 고통과 실망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며 그것을 관념적으로 파악할 뿐 아니라 실제로 빠스카의 신비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고통과 좌절, 낙심 등은 우리의 인간성이 어떠한지를 깨닫게 하여 인간 내부의 무질서를 알게 해주며 그 무질서를 치유해 줄 수 있는 분을 찾게 한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조화와 무질서를 통하여 악에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될 때 그런 요소를 제거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도움을 주시는 분에게 진심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인간 내부에 잠재해 있는 무수한 악의 요소를 제가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느님과 순조롭게 일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양떼들에게 애써 가르쳤던 것이다.
인간의 내적 고통과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천상의 의원이신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늘 강조한 그는 순박한 교우들에게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였다. 의사는 환자의 몸을 끈으로 붙잡아 매거나 어떤 때는 살을 도려내어 수술을 하기도 하며 마실 물과 음식을 금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환자에게는 고통스럽지만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사를 신뢰하고 이런 고통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안다.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의 백성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큰 마음으로 신뢰하면서 이 세상의 고통을 참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 안에 얼마나 많은 무질서가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그들은 고통받기를 기대할 것이고 사실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기들의 진정한 성찰의 기회로 이용하라고 호소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환자가 의사에게 자기가 원하는 치료법만을 강요한다면 그는 결코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에 하느님께 기도할 때는 그분께 사정하여 그 순간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과 상의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병에 걸리면 건강을 위해 하느님께 쉽게 도움을 청한다. 이런 점에서 병은 사람들을 위하여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아우구스띠노의 주장은 병이 사람들에게 유익할 수도 있으므로 비록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 해도 이를 계기로 자신을 성찰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라면 훌륭하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건강이든 어떤 일이든 시련의 때에는 일단 뒤로 물러나 하느님께 호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그는 충고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 호소할 때는 무조건 호소하기보다는 자신을 겸손 되이 낮추면서 우선 죄를 고백하고 그분을 찬미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런 식으로 애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로하게 될 뿐 아니라 치유될 수도 있다. 물론 큰 고통이나 깊은 좌절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이런 방법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결코 타협할 수는 없다고 가르쳤다. "아무리 큰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통을 당하는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기도 하였다.
여러분 자신을 의사의 손에 맡겨져 있는 환자로 상상해 보십시오. 사실 여러분은 병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온 생애가 하나의 병이고 오래 살게되면 누구나 병에 걸리게 마련입니다. 지금 병에 걸린 사람이 술을 마실 수 잇다는 생각은 그 사람을 기쁘게 해 줍니다. 의사에게 청해서 술 한잔을 얻어 마실 수 있다고 상상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술이 여러분에게 해롭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의사에게 청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한 순간도 지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상상하여 시무룩하게는 되지 마십시오. 그대의 몸을 책임지고 잇는 의사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면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영육의 의사이신 하느님에게는 얼마나 더 기꺼이 참고 견디어야 하겠습니까?
가끔 사람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 하느님께서 열심히 기도하다가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쉽게 낙심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해 버리는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예수님과 함께 비탄의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 분은 큰 소리와 눈물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구하였다(히브 5,7).
올리브 동산의 기도에 이어 십자가상에서도 시편 22장을 읊으셨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우구스띠노가 지적하였듯이, 비록 하느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미루시는 것처럼 보여도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신다. 그분이 미루시는 것은 그분의 신비스러운 뜻이지만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고 더 심각한 병, 특히 영혼의 병들을 치유 받을 수 있는 준비 기간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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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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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들의 체험이지만 하느님께 아무리 간절한 청원을 드려도 그분이 응답을 미루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 자체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신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아우구스띠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양떼들로부터 기도를 하여도 응답이 없다는 불평을 듣고는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에 대하여 여러 번 설명하였다. 기도를 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체험에 따라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다는 푸념을 늘어놓을 때가 있다. |
이런 현상은 성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인가? 기도의 스승이신 아우구스띠노는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신약 성경에서 응답 받지 못한 기도의 예는 사도 성 바울로의 기도의 체험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그 사도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늘 자기를 괴롭히던 육체의 가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제거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해도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다(2고린 12, 7-8).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정신에 온전히 사로잡혔던 사도까지도 청원기도가 응답 받지 못한 좋은 예를 우리 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다. 사도의 청원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주님의 제자가 건강한 몸으로 전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간청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주님께서도 그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누구든지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인간의 예상과는 달랐다. 일찍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55, 8-9).
이런 예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의 생애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종종 언급되고 있듯이 악한 사람들이 잘 되고 성공하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잘 들어주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사탄이 하느님께 욥을 유혹하도록 청하자 하느님께서는 그 청을 쉽게 들어주셨다(욥 1,11-12). 이와 비슷하게 신약성경에서도 마귀들이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은 쉽게 허락해 주셨다(마태 8, 31-32).218) 이어서 아우구스띠노는 응답 받지 못한 기도의 대표적인 예는 십자가의 죽음을 멀리해 달라는 당신 아드님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하였다(마태 26, 39).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훼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는 용케도 응답을 받아 그들은 사막에서도 물릴 정도로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민수 11장).
이상의 예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뜻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과 가끔 착한 사람들의 기도는 거절되고 반대로 마음씨 고약한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러면 응답 받지 못한 기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은 언제나 사람들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신다고 하지 않는가?
여기에 관해서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하느님은 진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사람의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신다는 점이다. 이는 주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잘 드러난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느니라(마태 7,8).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띠노는, "그대가 하느님께 청할 때 이런 지향으로 청하시오.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도록, 그리고 하늘나라를 주시도록, 또한 그분의 아드님이 심판하러 오실 때 그분의 오른편에 설 수 있도록 청할 때 그대는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시오." 사실 그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언제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성경의 약속은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를 성실히 한다면 충분한 자격을 가진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명백한 조건을 제시한다. "야훼는 당신을 부르는 자에게, 진정으로 부르는 자에게 가까이 계신다(시편 145,18). 아우구스띠노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진실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드물다고 보았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관심을 두지만 대부분 기복적인 관심만 둔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은혜보다 오로지 하느님 자신에 관심을 두는 사람만이 그분의 이름을 진실로 부를 수 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만족하며 비록 하느님이 고통을 주시더라도 달게 받아들인다. 요한 복음에서 주 예수님은 응답 받을 기도의 조건을 이렇게 제시하신다. "너희가 나를 떠나지 낳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다 이루어 질 것이다"(15,7).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것(manere in Christo)은,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그분의 뜻에 일치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영생을 갈망하여 쉬지 않고 정진한다는 뜻이다. 기도할 때 소원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그리스도의 뜻과 일치하는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기도의 원형인 주님의 기도 안에 간략하게 나타나 있다. 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것을 사랑하고 그분이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범위 내에서 우리의 욕망을 새롭게 할 때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일 것이며 이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루어 질 것이니라(요한 14,13)는 주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그 의미가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원의를 청할 때는 반드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분의 이름은 구원자이신 임금(Salvator Rex)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과 상관없는 것을 청한다면 그분의 이름으로 청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올바른 믿음을 두면서 그분을 구원자로 여기는 사람만이 이 지상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분의 이름으로 진실히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을 이 지상의 이익만을 성취시켜 주시는 분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이름으로 올바르게 기도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도상에 있는 여행자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대한 희망을 가지면서도 이 지상의 삶을 영위해야 하므로 부분적으로는 이 지상의 삶을 위해서도 청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청하는 내용들이 진실한 행복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것이라도 영생에 나아가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이 지상의 것을 감히 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모를 때도 있다. 그러므로 좋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하지 못하고 세상의 조류에 휘말려 세속 사람들처럼 기도한다고 아우구스띠노는 걱정하였다. 이는 좋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완전히 회개하지 못했다는 뜻이며 이 세상 사물의 가치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해 인생의 최대 염원인 영생에 대해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 지상의 이익을 위하여 기도하는 기복적(祈福的)인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러한 기도를 일단 거절하심으로써 구원자로서 자부적(慈父的)인 사랑을 드러내신다. 인간의 구원을 위험한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심으로써 하느님은 인간을 혼란스런 욕망에서 구하여 주시는 동시에 인간이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 아우구스띠노가 서신 연락을 하던 어느 교우에게 설명한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정당하지 못한 요구들을 거절하심으로써 인간의 탐욕이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신다. 그 사랑은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로마 5,5)라는 사도 성 바울로의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하느님이 참으로 좋은 의사이시므로 환자가 함부로 요구하는 청은 전부 거절하시고 오직 환자에게 필요한 약만 주시는 의사와 같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성 바울로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지혜로 보실 때 그에게 고통을 주던 "그 육체의 가시"는 그 자신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유능한 의사는 환자의 안달에는 개의치 않고 오직 환자의 치유를 위한 치료법만 사용한다. 하느님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활동하신다. 바울로도 그 고통을 통하여 당신 삶의 목적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으므로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수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필립 3,10).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은 아우구스띠노의 어머니 모니까가 자기 아들이 이탈리아에 가지 않도록 간청한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여기에 관하여 아우구스띠노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한사코 나를 붙들며 가지 말라느니, 나랑 같이 가자느니 하던 내 어미를 속이면서… 그날 밤 나는 몰래 떠났고, 어머니는 혼자 남아서 빌고 울기만 했던 것입니다. 주여, 어머니가 그토록 눈물을 흘리며 무엇을 당신께 빌더이까? 그저 떠나지 말게 해 주십사 하는 이것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깊이 통촉하시와 결국 어머니의 긴한 소원을 들어 주시었으나 그 때의 기도만은 돌아보지 않으셨으니 어머니가 항상 빌고 바라는 것을 내게 이루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다시 언급하지만, 사도 성 바울로에게도 일어났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도록 세 번이나 간청하였으나 주님은 오히려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고린 12,9). 이를 두고 아우구스띠노는, "네 상처를 치료하는 이는 바로 나로다. 나는 치료하는 법도 알고 있고 그 상처를 언제 없앨지도 알고 있노라"하고 부언하였다.
한 편, 사탄은 욥을 유혹하도록 하느님께 청하자 하느님은 그 청을 들어주셨다(욥 1,11-12). 또한 악령들도 돼지 떼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께 청하자 그들은 요청을 들어 주셨다(마르 5, 12-14). 이를 두고 아우구스띠노는 결과적으로 사탄의 청은 저주를 받았지만 바울로의 청원은 치유되기 위하여 거절되었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무엇을 열렬히 청하면 그 청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고 반드시 보답해 주신다. 그분께 기도하는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비록 우리가 청하는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아도 다른 면에서 우리는 하느님은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후하게 주시면,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루가 11,13). 여기에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여러분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갖고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순종할 것입니다(루가 17,6). 사도 성 요한은 기도의 효능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 그분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또한 그분께 청한 것들을 이미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1요한 5,15).
아우구스띠노는 성서의 가르침을 주석하면서 인간의 죄가 도덕적이며 영적인 병을 초래한다고 보고 이를 양떼들에게 애써 가르치려고 하였다. 죄의 결과로 인해 우리는 사물의 실제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므로 하느님의 돌보심에 우리의 미래를 맡겨야 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나 그분의 사랑의 표시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환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의사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같은 논리로, 우리가 아무리 하느님께 간청하여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낄 때 실망하지 말고 항구히 청하면서 꼭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진실한 열망은 영원한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므로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을 마음을 정화시키고 참된 청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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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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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심(淸淨心 puritas cordis)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생동안 가꾸어 나가야할 이상적인 덕목이다. 원죄의 결과와 사욕편정으로 인해 흐려진 마음의 정화와 교정은 진정한 회개와 꾸준한 수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청정심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참되게 기도할 수 있게 하고 예수님처럼 타인에게 봉사하게 한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단식과 자선을 함으로써 합당하게 기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은 이기심과 세속적인 쾌락으로부터 자신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
그에 의하면 단식이란 음식을 삼가는 것 이상이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삼가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불화와 불일치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음식을 끊거나 절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독약이 든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미움과 다른 여러 가지 악습들은 영혼을 죽이는 독약과 같다.
그러므로 그는 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다음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전제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가 6, 37-38).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적 자선 정신과 더불어 순수한 기도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순수한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그분 자신을 염원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주제를 염두에 두면서 구체적으로 사순절에 맞는 강론을 하였다.
즉 자선과 용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두 날개이다. 첫 번째 날개는 이웃 사람을 용서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마음 안에서 성취되며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하느님과 일종의 계약을 맺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하게 된다. 사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진심으로 용서할 때 사람들은 평화스럽게 기도할 수 있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하는 기도문의 장애물들을 피할 수 있다. 이 청원은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에 함축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하느님께 이르는 두 번째 날개는 외적 활동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이다. 아우구스띠노 시대에는 잉여 재산이 있는 자들만이 자선을 베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간린(avaritia)에 빠진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와는 상관없이 세상과 이웃의 어려움에 무관심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 자선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며 주 예수님의 정신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가 6, 30.38). 사도 성 바울로는 주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전제하면서 자선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엿다.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 아우구스띠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선은 가난한 이웃 사람들을 자신과 대등하게 보는 것일 뿐 아니라 의무라고 가르쳤으며 부자들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면 남의 물건을 훔치는 강도와 같다는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물질적인 희사 그 자체로슨 순수한 그리스도교적 자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참 사랑의 정신에서 나온 희사만이 그리스도인다운 자선이다. 이런 행위는 하느님께 이르는 기도의 날개이며 세속적인 동기나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참조. 마태 6,2-4) 이런 관대한 정신을 지닌 사람만이 하느님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자선을 통하여 변화되고 죄 사함도 받을 수 있다. 이럴 때 그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일치되어 청정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이 두 날개를 달만큼 합당해지면 하느님께 대한 열망은 더 이상 관념적인 것으로 남아 있지 않고 삶 자체가 참된 그리스도인다운 꼴을 갖추게 된다. 달리 표현한다면, 선행이 없는 기도는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양떼들에게 "목소리만으로 청하거나 찾거나 두드리지 마시고 여러분의 생활로써 하느님께 청하시오"하고 가르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지속적인 기도가 되는 것이며 "내 혀로 당신의 옳으심을 찬양하리이다. 온 종을 당신을 찬미하리이다(시편 35,28)라고 노래한 시편 저자의 마음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하루 종일 입으로 찬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해 인정하면서 각자의 임무와 일상 행위를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온 종일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는 일상생활 중 기도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양떼들에게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 목록에는 식사. 유흥, 사업, 농사일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이런 일상의 일들을 성실히 수행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영원히 찬미할 수 있는 준비가 되며 영원한 안식일에 부를 알렐루야의 서곡이 된다. 달리 표현한다면, 평소에 하고 있는 선한 생활은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게 하므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을 찬미하고자 하는 열망과 더불어 완덕 추구에 정진하게 하며 참 의사이신 그리스도께 마음의 무질서를 치유해 주시도록 은총을 구하게 된다는 뜻이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이 세상의 것들로 참 행복을 구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자기의 재산을 나누어주는 자는 예리고에서 주님께 부르짖은 두 맹인처럼(마태 20,29-34) 마음의 혼란을 치유해 주시는 그리스도께 부르짖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분으로부터 마음의 소경됨과 하느님을 볼 수 없는 마음의 캄캄함으로부터 치유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아우구스띠노는 선한 행위와 활동은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있어 청정한 마음을 지니게 되어 실제로 통찰력을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고 보았다.
사실 시편 송가나 성서의 말씀들이 사람들에게 찬란한 빛처럼 비치지만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효과를 받아 누리지 못한다. 오직 계시의 빛을 받아들여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생활에 적용시키는 사람만이 하느님 사랑의 초대에 제대로 응답하여 그 신비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찬미하는 그 진리를 실제로 살지 않으면 결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라는 그의 강론에서 잘 드러난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시편을 노래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목소리만으로 하느님을 찬미하지 말고 여러분의 선행이 그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십시오. 목소리만으로 하느님을 찬미한다면 여러분은 가끔 침묵을 지키게 됩니다. 그러나 온 생활로써 주님을 찬미하게 되면 결코 침묵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는 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드러낸다. 목소리, 생활 그리고 하느님께로 향하는 활동 등이 하나로 조화를 이룰 때 "야훼여, 목청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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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부르오니 대답하소서(시편 119,145)라고 기도한 시편 저자와 같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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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스도는 신비체의 머리이시다
기도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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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띠노는 기도를 가르칠 때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임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이 점을 받아들인다면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방향은 하느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이며 하느님 외의 어떤 것도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인간의 마음을 혼란시키며 그분께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가 영성생활의 장애물이며 심한 경우에는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
사실 죄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장애물이며 하느님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앞세우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죄로 인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분열되어 있고 정도(正道)를 벗어난 대상들을 사랑함으로써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마음의 평정을 맛보지 못함을 스스로 체험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삶의 궁극 목적을 향해 방향을 다시 잡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개입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인간은 자기의 노력만으로는 올바로 기도할 수 없으며 궁극적인 목적에도 이르지 못한다. 원칙적인 이야기이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유한성과 유약성(柔弱性)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는 열망이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자력(自力)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는 올바로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 안에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넣어주시면 비로소 인간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도 성 바울로의 사상이며 아우구스띠노가 기도의 신학을 전개할 때 사도의 영향을 깊게 받은 부분이다. 예를 들면, 바울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하고 하였다(2, 13).
이와 비슷한 내용은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한 6, 44). 여기에 관하여 아우구스띠노는 설명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매력적인 어떤 것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심으로써 사람들을 당신의 아들에게로 이끄신다고 하였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신(Pulchritudo tam antiqua et tam nova) 하느님께 대한 계시(啓示)는 인간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끌려가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사랑의 끌림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사랑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 존재가 어떤 대상을 진실로 사랑하면 거기에는 "왜"라는 설명이 필요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물체는 무게에 따라, 영혼은 사랑에 따라 어디로 이끌리든지 끌려간다"는 표현 그대로이다. 이러한 연유로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는 설명을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보았다.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므로 그는 양떼들에게 한 강론에서, "여러분 중에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시리라 봅니다"하고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열망이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체험이지만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려고 노력해 보아도 인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체험할 때가 많다. 아우구스띠노는 사도 성 베드로와 바울로 대축일 미사의 강론에서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약점을 깨달았고 뉘우친 후에야 거룩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이전 최후 만찬상에서 베드로는 자신 만만한 태도로,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 26,33; 참조. 요한 13, 37)라는 말로 스승에게 충성을 보이긴 했으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베드로는 자만심에 빠져있었으므로 자기가 실제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고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유혹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그는 스승이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인간 노력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스승이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 15)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또한 진심으로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6)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약점과 주님의 이끄심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띠노도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을 찾는 과정에서 고되고 쓰라린 체험을 한 바 있다. 18세의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서 키케로(Cicero)의 호르뗀시우스(Hortensius)를 읽고는 모든 지식을 소유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적이 있었으나 그는 결국 실망하고 말았다. 그 후 12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는 그분께로 돌아설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얻은 체험은 인간은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죄의 감옥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으므로 오직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체험이다. 따라서 인간이 진심으로 회개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 우선권을 돌려드리는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띠노는 이 사실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이오니 명하시는 바를 주시옵소서. 원하시는 바를 명하소서."
위의 체험과 비슷하게 다른 여느 사람들처럼 그도 하느님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고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자기의 실수와 기대에 어긋나는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뿐이었다. 하느님이 어떤 사람 안에 사랑의 불을 질러 놓으시면 그 사람은 끌려갈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한없는 은총이다. 이는 아우구스띠노의 신학에 수없이 등장하는 핵심사상이다. 그는 자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은총이 인간의 사랑에 작용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은총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였다. "은총은 사랑의 영감으로서 우리가 개념적으로 파악한 거룩한 사물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행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사랑의 영감을 구체화시킨 것으로서 기도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주장하기를 하느님은 인간이 기도하기를 원하시며 기도를 통하여 인간이 당신을 갈망하게 하신다. 그 결과는 인간이 더욱 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온전히 하느님의 선물이다. 은총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은총이 없이는 인간은 여러 가지 욕망의 충동을 받아 마음이 혼란해지므로 유아도 통치욕(統治慾, libido dominandi)이 있어 사람들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 자기 주위로 끌어 모으려 한다. 이는 인간적인 모든 경향들 중 가장 파괴적인 욕망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열망이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
달리 표현한다면, 인간은 범죄함으로써 사욕편정의 희생물로 전락되고 영원한 사물보다는 현세적인 사물을 더 탐하게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이를 영혼의 욕구라고 정의하였다
(…libido quoque ipsa recte definitur, Appetitus animi quo aeternis bonis quaelibet temporalia praeponuntur).
그러므로 인간이 영혼의 파괴적인 이런 욕구를 극복하려면 구원의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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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삶으로 인도되는 그리스도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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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의하면, 아버지 하느님은 주도권을 취하사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파견하셨다(참조. 요한 3, 16). 인류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그 아드님은 강생을 통하여 하느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되신다(참조. 1디모 2,5).
성령은 믿는 자들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내적인 것으로 만드신다.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상이한 역할들은 한 위격의 활동이 끝나면 다른 위격의 활동이 시작되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대내적 활동을 통하여 교류하신다(circumincessio). 아우구스띠노는 여러 저술에서 세 위격이 각각 독립적으로 활동하신다고 주장하지만 이 신비를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의 고백록에는 하느님의 세 위격의 관계가 다음과 같이 오묘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누가 전능하신 삼위일체를 알아듣겠나이까? 제대로 알아듣는다면 이를 들어 말 못할 이가 뉘리이리까마는 성삼에 대한 말을 하면서도 그 말하는 바를 아는 영혼이란 매우 드무나이다. 억지를 쓰고 토론을 벌여도 이를 정관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띠노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애써 설명하려고 시도하였고 세 위격이 어떻게 존재하며 또한 어떻게 활동하는지에 대해서는 희미하게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마치 인간 안에 있는 기억, 지성, 의지가 존재와 기능의 관점에서 볼 때 서로 다르게 작용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다(창세 1, 26).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시라면 그것에 대한 희미한 관념이 인간에게도 있을 수 있다.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의 모상이 인간의 영혼 안에 있으므로 영혼의 기능들이 각각 분리할 수 없이 작용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그와 비슷하게 작용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세 기능에 대하여 각각 분리하여 설명한다 해도 두 기능을 제외시켜 놓고 다른 기능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와 비슷하게 인간의 영적 기능들의 활동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하여 약간의 관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세 위격이 독립적으로 구분되지만 인간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는 동시에 그리고 상호 분리됨이 없이 작용하신다.
아무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없이 성부로부터 구원될 수 없고 성부와 성령의 작용 없이 성자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없으며 성부와 성자 없이 성령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없다. 우리는 한 분의 진실하시고 유일한 하느님, 불사 불멸하시며 영원하신 성부 성자 성령에 의하여 구원되는 것이다.
인간의 회개와 성화에 있어서 세 위격이 분리될 수 없이 함께 활동하신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성삼의 다양한 역할에 대하여 알아보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노력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있는 무질서한 욕망의 존재를 꿰뚫어 보시며 당신의 아름다우심을 계시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 인도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여기에 관해 사도 성 바울로가 고린토인들에게 "아무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없다(1고린 12,3)라고 가르친 것처럼 인간에게 성령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승에서 예수님을 만났거나 사도들이나 그 후계자들의 말을 들었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신앙을 받아들여 구원의 길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으며 이 모든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도에 있어서도 비록 주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아버지 하느님께 말씀드리지만 기도 그 자체가 벌써 세 위격 모두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된다. 바로 이것이 삼위일체 신비의 한 부분이다. 이 진리는 주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치셨고(참조. 요한 10,38 ; 14,23 ; 15,1-6 ; 17,21 ; 1요한 4,16 ; 1고린 3,16-17 ; 6,19 ; 2디모 1,14)기도를 하느님께 대한 열망이라고 하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열망을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신앙 안에서 믿고 고백하고 있다.
삼위일체적 삶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났다(1요한 3,9)는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세례성사를 받은 이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그분과 친교를 맺고 은총 상태에 머무는 한 그분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는 마치 복중(腹中)에 있는 태아가 어미로부터 끊임없이 영양을 공급받고 있듯이 은총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도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며 그분의 도우심을 받아 더욱 더 풍성해지는 삶을 살아가고(요한 10,10)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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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 4,6)로 부르며 영적인 인간이 되어 이상적으로는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라 2,20)라고 자신 있게 고백한 사도 성 바울로의 정신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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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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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제 2위 성자께서는 사람이 되심으로써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중재자가 되신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조심스럽게 설명하기를 성자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람들 사이에 단순한 중재자가 아니라 인간과 삼위일체 사이에 중재자가 되신다고 가르쳤다. 그분은 실제로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실 수 있고 인간에게 완전한 행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도록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분이다. |
하지만 그분은 신적인 진리를 가르치신 단순한 스승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죄로 인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을 구하시는 겸손한 의사이시다. 아우구스띠노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25-37)를 다음과 같이 주석한 것은 참으로 재미있게 보인다. 길에서 반쯤 죽은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을 발라 싸매 준 사람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얻어맞고 모든 것을 빼앗긴 이 세상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의 치유활동은 그분의 지상 활동으로 끝나지 않고 하늘 나라에서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전구하심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 내용은 사도 성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에 잘 명시되어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시는 분입니다(로마 8,26).
이와 비슷한 내용을 사도 성 요한은 묵시록에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죽음을 당하고 희생되셨으나 이제는 살아계시며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서 우리를 대신하여 영원한 제물을 봉헌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묵시 5,6).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우구스띠노가 설명하였듯이 그분은 하느님이시고 인간이시지만 인성(人性)으로 인해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전구하시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지만 인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지상 생활 중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지만 당신 자신도 늘 아버지께 기도하심으로써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참조. 루가 11,1-4 ; 마르 1,35 등).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당신의 사명, 즉 그분을 믿는 이들이 모두 하느님의 양자(養子)가 되어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신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이는 사람들이 당신의 영광과 생명에 함께 참여하도록 배려하신다는 뜻이다.
이는 당신 자신을 약한 인간성에 일치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조건을 상승시키사 아버지의 영원한 기쁨을 함께 나누도록 배려하신다는 뜻이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한 그 생명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사도 성 바울로가 다음의 말로써 이미 가르친 바 있다.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고린 12,27). 이 말씀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비록 보이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제 2의 그리스도이며(Alter Christus) 그분과 동형(同形 conformitas)을 이룬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었으니 기뻐하고 감사를 드립시다. 그분이 머리시라면 우리는 그분의 지체입니다. 우리와 그분은 온전히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머리와 지체에 의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머리와 지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당신의 한 부분으로 여기셨다. 실제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의 몸이다.
이러한 일치로 인해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몫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그는 특히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은 이를 잘 증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4-5). 아우구스띠노는 시편 주석서에서, "머리는 지체를 위하여 울부짖었다. 머리는 지체들을 당신 자신으로 변화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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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셨다"라고 하였고 어떤 강론에서는, "우리가 주님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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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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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전체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이며 일부는 영광을 누리는 하늘의 교회이고 또 다른 일부는 죄악과 투쟁하는 지상의 교회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우리 것의 일부가 이미 하늘에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곳은 지존하신 하느님이 거처하시며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본고향이므로 그곳을 그리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키기 위하여 교회 안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와 더욱 긴밀히 일치시킴으로써 머리이신 그리스 |
도에 대한 사랑이 점차적으로 성장되고 완성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아우구스띠노는 개인의 열성과 노력만으로는 이런 열망을 성취시킬 수 없으므로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함을 솔직히 시인하였다.
사도 성 바울로에 의하면 이런 특별한 도움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주어진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로마 5,5). 그러므로 성령은 교회 안에서 일치의 원동력이 되신다. 성령은 교회를 하느님 아버지와 더불어 사랑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며 보다 완전하게 하여 지상에서 강생을 지속시키신다. 아우구스띠노는 어느 강론에서, "마치 영혼이 육체에 있듯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에 있습니다. 영혼이 육체를 통하여 무엇이든 다 하듯이 성령도 전체 교회를 위하여 일하십니다"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성령의 작용으로 드러난다. 성령은 교회 안에서 결합시키는 힘이시다. 그는 성전 봉헌식 강론에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건축의 재료들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듯이 교회도 사랑으로 묶어주는 힘에 의하여 서로 일치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일치와 각자가 그리스도와 맺는 일치를 통하여 서로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여도 이승에서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로 인해 언제나 불완전하고 긴장감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와 언제나 일치하지는 못하는 안타까움과 그분께만 충성을 다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할 때가 많다. 사목자였던 아우구스띠노는 교회 내부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교회는 죄 많은 이 세상에 소수의 작은 단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면서 교회는 결코 그런 단체가 될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그 안에 품고 있으므로 의인들과 죄인들, 구원받을 자들과 잃어버릴 자들이 함께 모여 있다. 그는 교회를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그물처럼 생각하였다. 그물을 열어보면 그 안에는 잡다한 고기들이 있어 좋은 고기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고기도 있다(참조. 마태 13,47-48). 그러나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가려내는 작업은 이승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날에 하실 것이다. 그는 양떼들에게 가라지의 비유(참조. 마태 13,24-30)를 설명하면서 심판의 날에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우리의 목자는 성실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는 산상성훈에 따라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더욱 정진해야 하며 언제나 주님의 기도의 청원문 중의 하나인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를 어느 누구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하느님의 양자(養子)로 받아들여진 후 하늘나라에서 영복(永福)을 누릴 때까지 그 기간은 유혹과 시련, 흔들림과 죄의 연속이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항구한 기도의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세례의 샘과 하늘나라 사이에는 기도의 중간 시간(medium tempus orationis)이 놓여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만 완전한 찬미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며 비록 우리의 신앙이 약하긴 하나 복된 바라봄(visio)과 불멸(immortalitas)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주님 안에 휴식을 취할(requies in Domino)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욕망을 질서 있게 조절하여 하나의 목적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도는 이승의 삶에만 속한다. 그 날에는 영원한 안식과 찬미만 있을 뿐이다. "이렛날만은 저녁도 없고 해넘이가 없나이다. 따로이 축복하시어 무궁토록 길게 하셨음이니이다." 현재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의 결과는 교회의 열망에서 나온다. 그러나 영원의 세계에서는 단순히 바라봄으로써 그 열망이 채워질 것이다. 교회도 출산의 고통을 겪는 여성이 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듯이 현세에서는 비록 어려움을 당하지만 본고향에서는 오로지 찬미만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구성원들은 여러 가지 약점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고 있으므로 교회의 기도는 그리스도 자신의 지속적인 기도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며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이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단순히 우리 자신들의 기도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가 그분을 머리로 하여 그분의 지체로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기도가 되며 그리스도의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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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우리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띠노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바치는 기도 중에서 시편 기도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보았다. |
(신비체 전체의 기도인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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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성경은 모두 그리스도와 연관을 맺고 있고 그리스도는 성경 주석에 있어서 핵심 인물이시다. 아우구스띠노는 "구약에는 신약이 감추어 있고 신약에는 구약이 드러난다"라고 하였다. 달리 표현한다면, 이는 계시의 정점인 그리스도(헤브 1,1)에 관한 기사는 이미 고약성경 안에 감추어진 형태로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 주석가의 임무는 구약성경 안에 숨어있는 그 내용을 밝히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시편은 감추어진 형태로 본 그리스도 자신의 기도이다. |
시편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기도이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강생하신 그리스도의 기도이며 또 어떤 경우에는 홀로 교회의 기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편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도, 고통받는 종의 기도, 그분의 몸인 교회의 기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교회는 고통받는 그리스도의 모습 안에서 자신이 처해있는 고통을 보며 부활하신 그분의 모습에서는 희망을 본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하며 기도 생활에 진보하는 이는 시편에 내포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염원과 일치해야 한다.
시편을 낭송할 때 겪는 실제적인 어려움은 가끔 앙심과 저주를 표현한 구절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 특히 사랑의 계명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경우이다. 아우구스띠노는 시편이 그리스도의 참 기도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편에 나오는 저주와 증오심은 실제로 저주와 증오심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은유적으로(allegorice) 성경을 주석하면서 저주를 예언이라고 주장하였다.
거룩한 시편에서 가끔 원수를 저주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원수를 저주하지 않는 의인이며 실은 그 사람들에게 저주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앞날을 예언하고 있다. 예언은 전하는 자의 선포이지 청원자의 원의는 아니다. 예언자는 악이 누구에게 일어나리라는 것과 선이 누구에게서 나오리라는 것을 영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 미래의 일을 보듯이 말한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띠노도 시편 137장 마지막 부분의 저주를 주석할 때는 다소 어려움을 느낀 듯 하다. "파괴자 바빌론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악을 그대로 갚아주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네 어린것들을 잡아다가 바위에 메어친다"는 표현에서 그는 어린것들을 젖먹이들이 아니라 싹에서부터 짓밟혀야 하는 악한 욕망들로 보았다.
이런 식의 성경 주석은 오늘날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가 시편을 기도로 이용하도록 가르친 것은 큰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시편에 나오는 증오심과 저주는 우리 안에서 제거되지 못하고 도사리고 있는 악의 욕망을 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므로 기도할 때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잇는 좋은 기회도 되는 것이다.
기도 중에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모두 수용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사실 아우구스띠노도 청년기에, "정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을 때 그는 자기가 청한 것을 실제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청년기의 그 거만한 기도가 진실한 기도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기도할 때의 자세는 진실한 마음이다. 제 아무리 세상의 온갖 좋은 아름다운 말로 기도한다 해도 마음이 하느님께 있지 않으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은 우리 자신을 잘 알게 해주는 동시에 기도하는 방법까지도 제시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 안에 일치되어 그분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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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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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때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 마음을 들어올리도록 도움을 주는 내적인 힘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 도우심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성화시키시는 성령은 우리 안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다. 사도 성 바울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로마 8, 26)라고 솔직히 고백한 바 있다. 우리가 영생을 위하여 기도한다 해도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모를 때가 있다.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희미한 생각마저 나지 않으므로 원의나 열망을 일으킬 수도 없음을 체험하기도 한다. |
이런 경우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령은 우리의 열망이 식지 않게 하며 그것을 꾸준히 염원하도록 도와주신다. 아우구스띠노의 표현을 빌리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청원과 염원으로 간청하게 하고 우리를 고무시켜 주신다." 우리를 고무시키신다는 표현은 우리의 협력 없이도 독립적으로 활동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성령의 작용을 분명히 도움이라고 하며 사도 성 바울로의 다음 말씀을 근거로 제시한다. "성령은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로마 8, 26). 이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기도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다. 그 선물은 인간의 어떤 선행적(先行的) 공로에 근거하지 않는 오직 하느님께서 거저(gratis) 주시는 은총이다.
여기에 관해 아우구스띠노는, "성령은 우리가 받기를 갈망하는 분이며 우리로 하여금 청하도록 하시고 우리가 찾고자 하는 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찾도록 도와주신다. 성령은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기를 원하시며 그분도 우리로 하여금 두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시면서 우리의 열망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열망과 합치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을 보다 진실히 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우리를 그분의 사랑스런 자녀가 되게 하신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은 점진적으로 성삼의 삶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성삼의 완전한 일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간의 완전한 사랑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이 성삼의 이러한 유대 관계 안에 참여할 때 성삼의 내주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모든 기도의 마지막 목적이며 이 경지에 이른 그리스도인은 이승에서도 충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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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끊임없는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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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언급한 것처럼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기도는 세례와 마지막 심판 사이에 있는 갈등과 유혹의 중간 시간(medium tempus)이다. 기도가 끊임없는 찬미로 이어질 곳은 본고향, 즉 영원한 안식일에서만 가능해 진다.
이런 사상은 그가 한 어느 부활절 강론에 잘 묘사되어 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봅니다. 우리는 입술과 생활, 마음과 목소리, 또한 여러 활동으로 주님을 찬미합시다. |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동안 우리 안에서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알렐루야를 노래합시다. 따라서 우리의 입은 우선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의 행위를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천사들이 얼마나 기쁘게 알렐루야를 노래하겠습니까?"
그는 하늘 나라의 찬미와 연관시켜 사도 성 요한의 말씀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이러한 변형(變形 transformatio)은 비록 필설(筆舌)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의인들 안에서 분명히 일어난다. 사도 성 요한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이 지상생활의 한계점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의인들의 미래의 삶에 대해서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천상에서 누릴 의인들의 복된 상태는 인간 사고의 영역을 초월하지만 이승에서도 깊은 내적 기도를 통하여 조금은 맛볼 수 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띠노는 확신에 찬 어조로 축복 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할 일은 아멘과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찬미의 말은 입에서 나오는 외침이 아니라 의인들의 마음의 탈혼을 의미한다. 그는 의인들이 하느님의 아름다우심에 매혹되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곳에서는 죽음이나 그것이 그림자조차 없으며 잠을 자지도 않는 영원한 안식일만 지속될 것이므로 오직 영원한 탈혼적 찬미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가르침에 놀라는 양떼들에게 아우구스띠노는 본 고향에서는 지루함이나 피곤함이 없는, 오직 만족할 줄 모르는 만족(insatiabilis satisfactio)만이 인간의 한없는 욕망을 채워줄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하느님은 "그렇게도 오래고 그렇게도 새로운" 분이시므로 그분을 누림(frui Deo)은 결코 중단되거나 약해지는 법이 없다. 하느님을 대면하는 그 복된 상태가 바로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이며 영원한 휴식이므로 더 이상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나이다"라는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든 욕망과 잠재력은 바로 그 곳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며 인간의 모든 노력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아우구스띠노에 의하면, 기도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노력의 일부이지만 결국에는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requiescere in Deo)으로 끝날 것이며 그 행복은 활동이 없는 휴식이 아니라 완전한 휴식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멸의 선(善)안에서 휴식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를 만드신 그분이 바로 불명의 선(善)이시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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