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스크랩] 구노의 [아베마리아]

@로마의휴일 2007. 11. 3. 09:43

 


 

좋은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합니다. 아름다운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글말고도 음악도 그런가봅니다.

어린 구노는 음악 신동이라 불렸습니다. 빠리 외방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는데 같은 학급에는 구노가 따라잡을 수 없을 소위 ’음악 천재’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였고 선의의 경쟁자였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친구가 음악을 하리라고 생각했던 구노는 신학교에 들어간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 그 친구 소식도 묻어 왔습니다. 사제가 된 그 친구가 빠리 외방 선교회에 들어갔다고...
구노는 그 친구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중국으로 발령받아 갔다는 소식만 접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구노는 그 친구를 위해 틈틈이 기도를 했습니다. 오랜 사목 후에 휴가라도 오면 옛 추억을 나누며 차를 함께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자신이 그 친구가 있는 중국에 가서 동양 문물도 구경하며 그 친구가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가끔씩 학교 게시판에는 붉은 글씨로 ".... 순교" 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볼때마다 평화 속에서 주님을 믿는 순박한 사람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습니다. 구노도 물론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가슴 아파했고 그 친구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선교의 자유가 주어진 중국이기에 내심 안도했습니다.

어느날 이었습니다. 게시판에 그 친구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빨간 글씨는 아니어서 안심을 했지만 내용을 읽어본 구노는 경악스러웠습니다. 그 친구가 "조선 대목구 주교"로 임명되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구노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들다는,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는, 차라리 순교하기 위해서 조선으로 들어간다는 말까지 횡횡했던 바로 그 "죽음만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들어간답니다. 구노는 날마다 주님과 성모님께 그 친구가 제발 무사히 돌아와 단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가족들과 학교 정원에서 산책을 하던 구노는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삼종 시간도 아닌데 이렇게 요란하게 종이 울린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의례 그랬듯이 순교자가 또 나온 것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달음질 쳐서 뛰어간 구노는 실신지경이 되었습니다.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엥베르 주교 조선에서 순교"

눈물이 앞을 가려 서 있을 수 조차 없던 구노는 정신없이 뒷동산으로 뛰어갔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를 내려다 보시는 성모상앞에서 구노는 목놓아 울며 성모송을 바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Ave Maria는 성모송입니다. 그렇게 친구이자 조선의 주교이자 순교자이며 후일 영광스러운 성인의 관을 쓰신 성 엥베르 주교를 기리며 만들어진 노래가 "구노의 아베마리아"입니다.

그 지구 반대편, 인종도 모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소위 "미개인"들의 나라에 와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하느님의 씨앗을 뿌린 우리의 성인은 지금도 명동 대성전 지하에 잠들어 계십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이시며 전교 회장을 역임하시다 역시 순교하시고 성인반열에 오르신 "성 최경환 방지거"와 나란히...

-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을 가슴에 되새기는 오늘 ... 가톨릭 굳뉴스게시판 62227번(서한규)을 옮겼습니다.


구노 (Charles Francois Gounod) 는 19세기 푸랑스의 대작곡가입니다. 그는 한때 사제가 되려고 한 때가 있는 열심한 신자이였습니다. 그는 1851년 "사포"를 작곡하고 1959년 "파우스트"로 대성공하고, 1867년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하는등 사회적 명성을 얻었으나, 1855년 성녀 세실리아 장엄미사를 작곡하고는 세속적 명성을 버리고 종교 음악에 저념케 ?榮? 합니다.
구노는 빠리외방전교회 성가대장이었을 때, 당시 조선에서 전교하던 빠리외방전교회의 사제들이 순교하는 소식을 듣고, 영감을 받고 즉흥적으로 성가를 작곡하였습니다. 이 성가는 조선교회와 순교자를 위한 성가입니다. 우리나라를 위한 구노의 단 하나의 성가입니다


 

 

 

앵베르 [Imbert, Laurent Joseph Marie, 1797.4.15~1839.9.21]

/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소속 신부로 한국에 와서 활약하다 순교한 성직자.

* 별칭 : 한국명 범세형
* 국적 : 프랑스
* 활동분야 : 종교
* 출생지 : 프랑스 프로방스 알프코프다쥐르주 부슈뒤론현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Lurent Marie Joseph, 한국명 : 범세형(范世亨)] 주교는 1796년 프랑스 까브리에(Cabries) 지방의 조그마한 촌락에서 태어났으며 비록 가난하였지만 총명할 뿐 아니라 기도와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갖고 신앙을 전파하러 갈 결심을 굳게 다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액시(Axi)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리하여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 신품을 받고 곧 중국의 사천성 포교지에 임명되어 프랑스를 떠난다. 앵베르 신부는 12년 이상을 사천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그는 포교를 행하고 중국의 언어와 관습을 익혔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고 또한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또한 조선이라는 포교지에 파견될 것을 열렬히 희망하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1836년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 이어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그를 임명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곧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중국 내륙을 횡단한 후 1837년 12월 16일에 봉황성의 변문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북경으로 가던 사절단에 다섯 명의 신자가 있었고, 그 중 조신철 가롤로와 정하상 바오로 등의 협력을 얻어 12월 17일 밤에 조선신자와 함께 변문을 떠나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의주 관문을 숨어 넘어서 13일 후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신자들은 교회 창설 53년 만에 처음으로 주교를 맞게 되었다( 초대주교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앵베르 주교는 신도들의 고백을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을 정도였다. 조선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 후라 주교를 맞이하여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신자의 수는 날로 늘어 갔고, 반면 앵베르 주교의 고생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몹시 지쳤고 크나큰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납니다. 세시에는 집안사람들을 불러 기도드리고 세시 반에는 예비자가 있는 경우 성사를 주고, 혹은 견진을 주는 것으로 성무의 집행을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미사를 드리고 감사의 기도가 따릅니다. 해 뜨기 전까지 성사를 받는 신자가 20여명이고 ... 나는 시장기 때문에 고통을 많이 당합니다. 왜냐하면 두시 반에 일어난 다음 정오까지 기다려서야 영양가치도 별로 없는 맛없고 양도 많지 않은 식사를 하는데, 춥고 건조한 기후인지라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생스러운 삶을 보내고 있으니 그것을 끝맺어 줄 칼질을 그리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가 잘 갈 것입니다 ...'

이때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 신부와 샤스땅 정 신부와 함께 그는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영세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고 그 결과 1839년 초에는 신자가 9,000명이 넘었으며 성직자 양성에 힘을 쏟아 세 소년을 유학 보냈고, 어른으로서 적임자를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교회발전에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러던 중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었고 배교하는 신자들이 많았으며 따라서 앵베르 주교와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가 전교하고 있음도 알려졌다. 엥베르 주교는 배교자 김여상의 간계로 체포되었고, 다른 두 신부는 범주교의 권유로 자수하였다. 이것은 신자들을 더 이상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사랑에서였다. 군문효수 언도를 받은 세 선교사들은 1839년 9월 21일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작은 가마를 타고 무장한 일 백명 가량의 군사에게 호송되어 새남터 형장으로 나갔다.

병정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바지만 남기고 모두 벗긴 다음 그들의 손을 가슴 앞으로 결박짓고 겨드랑이 밑에 긴 몽둥이를 끼우고 양쪽 귀를 화살 두개로 내려 꿰뚫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회를 한 줌 뿌렸다. 그리고 병정 여섯 명이 몽둥이를 메고 형장 둘레로 세 바퀴 끌고 다녀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받게 하였다. 그런 다음 한 병정이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한 병정이 사형 선고문과 선고 이유를 모두 읽고 나니 대장이 명하여 수형자들을 무릎 꿀린 후 곧 열 명 가량의 병정이 그들 옆으로 달려들어 각기 지나는 길에 칼로 쳤다. 이때가 1839년 9월 21일 이었으며 성인의 나이 43세 때였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목자를 불과 3년 만에 다시 잃었고 1846년 김대건 신부가 들어오기까지 성직자 없는 교회가 이어졌다. 앵베르 주교는 당시의 신도들에 관한 전기를 모아다가 한양교우회장 현석문에게 맡겼는데, 이것이 1958년 파리에서 간행된<기해일기>이다.

1984년 5월6일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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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Glory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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