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ccini
The Romantic Era_ late 19 to early 20 century
Puccini
Giacomo Puccini (1858-1924)
REPRESENTATIVE WORKS
고전음악의 역사
History of Classical Music
위대한 고전음악 작곡가의 대표작품을 MP3 format로 듣는다.
♪ 골든 음반이 아래 링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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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ama Butterfly" | |
"Edgar" | |
"Turando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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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e Brown |
푸치니 Giacomo (Antonio Domenico Michele Secondo Maria) Puccini
1858. 12. 22 토스카나 루카~1924. 11. 29 브뤼셀.
이탈리아의 작곡가.
사실주의 오페라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실상 이탈리아 전통 오페라의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대표작으로는 〈라 보엠 La Bohème〉(1896)·〈토스카 Tosca〉(1900)·〈나비부인 Madama Butterfly〉(1904)과 미완성의 〈투란도트 Turandot〉 등이 있다.
Original poster for Puccini's Tosca
초기생애와 결혼
푸치니는 2세기에 걸쳐 루카에 있는 산타마르티노 성당의 음악감독을 배출했던 가문의 마지막 자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개인적인 직업을 구한 것이 아니라 가업을 잇기 위해 음악에 입문했다. 5세 때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루카 행정 당국은 소액의 연금으로 푸치니의 가족을 부양했으며 그가 성년에 이르기까지 성당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비워두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의 제자였던 두 사람의 음악가로부터 배웠으며 지방의 작은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1876년 피사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Aida〉를 관람하고는 오페라가 진정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1880년 가을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그는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실내악 작곡가인 안토니오 바치니와 오페라 〈라 조콘다 La gioconda〉를 작곡한 아밀카레 폰키엘리에게 배웠다. 1883년 7월 16일에 학위를 받았으며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기악곡 〈카프리초 신포니코 Capriccio sinfonico〉는 밀라노의 영향력 있는 음악계의 주목을 끌었다. 같은 해 그는 단막 오페라 경연대회에 〈요정 빌리 Le villi〉를 제출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작곡가이자 대본가인 아리고 보이토가 이끄는 친구들의 모임은 이 작품의 공연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했다. 1884년 5월 31일 밀라노의 달 베르메 극장에서 있었던 이 작품의 초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요정 빌리〉는 극적인 힘과 오페라적인 선율이 두드러졌으며 관현악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바그너 오페라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음악 출판업자인 줄리오 리코르디는 2막으로 확대한다는 조건을 명시하고 즉시 판권을 사들였다. 아울러 그는 라 스칼라에서 공연할 새 오페라를 푸치니에게 의뢰했고 월급도 지급했다. 이때부터 푸치니와 리코르디 사이의 오랜 협력관계가 시작되었으며 리코르디는 푸치니의 충실한 친구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어머니가 죽자 푸치니는 유부녀인 엘비라 제미냐니와 함께 루카를 떠났다. 서로 정열에 휩싸여 비윤리적 결합으로 야기된 엄청난 스캔들을 개의치 않을 만큼 대담했던 그들은 먼저 밀라노 근처 몬차에 보금자리를 꾸몄고 그곳에서 아들 안토니오가 태어났다. 1890년 그들은 밀라노로 거처를 옮겼고 1891년에는 토스카나의 마사추콜리 호숫가에 위치한 어촌인 토레델라고로 이사했다. 푸치니에게 이 집은 삶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죽음을 3년 앞두고 비아레조로 거처를 옮기기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엘비라와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고분고분하기보다는 격정적인 성격의 그녀는 질투심이 많았으며 결코 이상적인 인생의 동반자는 아니었다. 엘비라의 남편이 죽자 두 사람은 결국 1904년 결혼했다. 1889년 프랑스의 작가 알프레드 드 뮈세의 시극에 곡을 붙인 푸치니의 2번째 오페라 〈에드가 Edgar〉가 라 스칼라에서 공연되었으나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코르디는 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독일의 바이로이트로 보내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를 듣게 했다.
Giacomo Puccini with conductor Arturo Toscanini
완숙기의 작품과 명성
푸치니는 오페라 〈마농 레스코 Manon Lescaut〉에 대한 계획을 품고 바이로이트에서 돌아왔다. 대본은 아베 프레보가 쓴 18세기 소설을 기초로 했으며, 프랑스의 작곡가 J. 마스네도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오페라 〈마농 Manon〉을 작곡했다. 이 오페라를 작곡하면서부터 푸치니는 오페라의 주제를 선택하는 데 신중을 기하게 되었고 대본작업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여주인공인 마농 레스코의 심리적 묘사는 이 작품에 이어 발표된 푸치니의 다른 오페라들의 극적인 성격을 지배한다. 청중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던 그는 그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작품을 써나갔으며 그것이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극적인 면에서 생동감을 가지고 있는 〈마농 레스코〉의 악보는 〈라 보엠〉·〈토스카〉·〈나비부인〉·〈서부의 아가씨 La fanciulla del west〉(1910) 등 성숙기에 작곡된 오페라들에서 찾을 수 있는 세련된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이들 네 작품들 역시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여주인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비극적인 결말을 담고 있다. 아울러 네 작품의 관현악 또한 모두 정제되고 투명한 어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주제를 상기시키는 섬세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음악은 항상 가사의 의미와 느낌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에서 그는 작가인 주세페 자코사, 루이지 일리카와 함께 공동작업을 했다. 1904년 2월 17일에 있었던 〈나비부인〉의 초연은 완전히 실패했는데 그 까닭은 관중들의 눈에 이 작품이 푸치니의 이전 작품들과 너무나도 흡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1908년 카이로에서 여름을 보내고 토레델라고로 돌아와 〈서부의 아가씨〉에 몰두했다. 이때 엘비라가 느닷없이 여러 해 동안 푸치니의 집에서 하녀로 일해왔던 근처 마을 출신의 어린 하녀 도리아 만프레디와 푸치니와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었다. 엘비라는 도리아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그들의 집에서 내쫓았다. 그후 하녀는 음독자살했고 그녀의 부모가 의사에게 의뢰하여 시신을 부검한 결과 처녀였음이 드러났다. 그녀의 부모는 학대와 중상모략을 한 죄로 엘비라를 고발했고 이 사건은 당시 가장 유명한 스캔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엘비라의 유죄는 입증되었지만 변호사의 협상을 통해 판결을 받지는 않았다. 푸치니는 도리아의 부모에게 배상금을 지불했고 그들은 고소를 취하했다. 결국 푸치니 부부는 공존의 길을 택했으나 그때부터 그는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다. 〈서부의 아가씨〉는 1910년 12월 10일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뉴욕 시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 작품으로 그는 완숙기의 끝에 서게 되었다. 그는 오페라를 작곡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했다. 세기의 전환기에 서 있는 대표적인 정통 오페라 작곡가였던 그는 무자비하게 전진하고 있는 새로운 세기가 더이상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같은 동시대의 사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1917년 모나코의 몬테카를로에서 오페라 〈제비 La rondine〉가 초연되었지만 곧 잊혀졌다.
항상 동시대의 오페라 작품에 관심을 가졌으며 클로드 드뷔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아르놀트 쇤베르크,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등의 작품을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3부작 단막 오페라들을 작곡해 1918년 뉴욕 시에서 발표했다.〈3부작〉. 이 세 작품들은 서로 성격을 달리했는데 〈외투 Il tabarro〉는 멜로 드라마적인 내용이었고, 〈수녀 안젤리카 Suor Angelica〉는 감상적이었으며, 〈잔니 스키키 Gianni Schicchi〉는 희극적이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는 18세기 이탈리아의 극작가 카를로 고치의 희곡 〈투란도트〉와 마찬가지로 투란도트의 전설을 기초로 만들어졌는데 이 작품은 이탈리아 오페라 가운데는 유일하게 인상주의적 양식으로 작곡되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사랑의 2중창을 작곡하지 못하고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인후암을 앓았던 그는 수술을 위해 브뤼셀로 옮겨졌으나 며칠 후 〈투란도트〉의 미완성 악보를 손에 쥔 채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인 1926년 4월 25일 〈투란도트〉는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의 지휘를 맡았던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죽기 전 작곡했던 지점에서 작품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두 장면은 푸치니의 스케치에 따라 프랑코 알파노가 완성했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는 푸치니를 위한 엄숙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토레델라고로 옮겨졌으며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엘비라와 안토니오 역시 그곳에 묻혔다. 그곳에 있는 푸치니의 집은 현재 박물관과 자료보관소로 사용되고 있다.
업적
대다수의 푸치니 오페라들은 〈외투〉에서 정의된 하나의 주제인 '사랑을 위해 살았던 자는 사랑을 위해 죽었다'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주제는 그의 여주인공들, 즉 연인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마침내 고통의 형벌로 파멸해버리는 여인들의 운명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주제를 처리함에 있어 푸치니는 여주인공에 대한 연민과 동정에 강한 새디즘적 경향을 결합시켰다. 이로 인해 그의 오페라는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으며 아울러 이러한 점은 푸치니식의 오페라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다. 그의 음악극 양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 자신을 주제와 동일시하는 능력이며 각각의 오페라는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균형잡힌 극적 구조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으로 그는 연기·감동·갈등만이 오페라의 전부가 아니며 그 안에는 안식·명상·서정성의 계기들이 내포되어야 함을 알았다. 이러한 계기들을 마련하기 위해 독창적인 선율을 만들었는데, 그와 같은 선율들은 밝고 정열적이지만 병적인 성향이 내포되어 있다. 그 예로는 '이별' 및 '죽음'의 아리아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아리아에는 그 자신이 인생에서 겪었던 영원한 우수가 반영되어 있다.
오페라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은 "오페라의 기초는 주제와 그 처리에 있다"라고 한 그 자신의 말에서 표출되고 있다. 즉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감동적인 무대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작곡가가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며 자신도 작곡을 하는 데 쏟는 것만큼이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이러한 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오페라에서 연기적인 요소는 복잡하지 않고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사를 이해하지 못한 청중들이라도 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파악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푸치니의 온음계적 선율 개념은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에 입각한 것이지만 화성과 관현악 양식을 보면 그가 당대의 새로운 경향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파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비록 관현악단에 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가수 중심으로 전개되는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고수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전형적인 세기말적 예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푸치니는 사실주의 오페라의 가장 위대한 대가로 자리잡고 있다.
C. Sartori 글 | justinKIM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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