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짜르트'는 1782년 부터 1785년에 걸쳐서 오랜만에 현악4중주곡을 6곡 작곡하였다. 그리고 이 6곡은 어린이에 비유되고 어린이를 내보내서 고명한 사람에게 보호를 의뢰할 마음을 편지와 함께 "친애하는 하이든"에게 바쳐졌다. 이리하여 이것들 (K.V. 387, 421, 428, 458, 464,465)의 6곡의 4중주곡은 현재에는 [하이든 4중주곡]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모짜르트'는 이것들 6곡을 사실은 하이든에게서 자극되고 계몽되어서 작곡한 곡이다. 오랫만에 현악4중주곡에 손을 댄 것도 결국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든은 1781년 12월에 '전혀 새로운 특별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다'고 자부하여 [러시아 4중주곡]이라고 일컬어지는 6곡의 현악 4중주곡을 발표 하였다. 그리고 '모짜르트'는 곧 이것들의 작품을 알게 된 것이다. '하이든'의 경우, 새로운 특별한 방법에는 여러가지 사연이 포합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주제노작 및 그 처리에 의한 형식의 완성. 각 악기의 균등한 다룸과 그것에 곁들인 성부의 충실성, 각 악장에 대한 보편적인 공통된 성격의 부여 등은 특히 간과 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다. '하이든'은 이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노작과 그 동기적인 처리를 벌써 1770년대의 교향곡에서 신중하게 유의하여 채택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그것을 이 [러시아 4중주곡]에서 결실 시킨것이다. '모짜르트'는 현악 4중주곡을 비롯하여 다른 곡에도 그것을 적용하였다. 교향곡에서는 라장조의 [린쯔 교향곡]K.V. 425정도가 그 최초의 두드러진 것이다. 아뭏든 '모짜르트'의 [하이든 4중주곡]은 하이든의 방법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흉내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세 소화되었을 때에만 나타나는 자신이 만만한 모습을 보이며 그러니 만큼 '하이든'으로부터의 진전의 의 흔적도 역연히 나와있다. 이를테면 주제로작이나 그 동기적 처리도 '모짜르트'는 반음계적 작법을 풍부하게 써서 '하이든'에게서 볼 수 없는 색체를 띤 느낌마저도 내고 있는 것이다. 주제의 재현법에 대하여서도 '하이든'은 장식을 더하여서 주제를 재귀시키는 것을 즐긴 것에 대하여 '모짜르트'는 그러한 단순한 재현은유보다도 더욱 본질적으로 재현의 개시를 희미하도록 연구 하였다. 성부의 진행은 한층 독립적으로 되는 일이 많고 충실된 움직임을 보인다. 조바꿈에 있어서도 딴이름한소리(異名同音)조바꿈이나 특수한 조바꿈도 나타나고 '하이든'에세는 미지의 새로움이 열리고 있다. 그러니 만큼 '모짜르트'의 것은 '하이든'의 것보다도 훨씬 로망적인 감각을 풍부하게 지니며 시적인 감정을 띠고 있다. 특히 미뉴에트와 느린 악장에서 그렇다.
또 낱낱의 악장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종합한 전체의 악장의 통일에도 주의가 되어있다. 이 통일은 외면적으로 동기나 리듬이나 조성 등에 의한 것 외에 내면적으로도 고려 되어있다. 내면적인 통일 또는 감정의 자연스런 흐름은 '하이든'에서도 시도한 것인데 '모짜르트'에서는 한층 유기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 6곡중 제 1곡 사장조 끝악장의 저 활기와 생생한 기쁨 또는 제 6곡 다장조 끝악장의 작위적이라고도 생각될 정도의 정서의 대비는 선행하는 각각 3개의 악장으로부터의 필연의 결과인 것이다.
이리하여 [러시아 4중주곡]으로 근대의 현악 4중주곡이라는 것의 개념이 고정시켜진 것이라면 [하이든 4중주곡]으로 오락적인 것에서 참으로 예술적인 높은 지위의 것으로 4중주곡이라는 장르가 향상된 것이다.
작품 구성 및 해설
모차르트가 남긴 6곡의 하이든 셋 중에서 3번째에 해당하는 곡이 바로 이 곡이다. 14번 "봄", d단조의 15번에 이어지는 곡 이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하이든 셋의 사중주들을 들었을때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뒤의 3곡은 앞의 3곡보다 깊이가 덜하다." 이 말은 사실인 듯하다. 14번이 가지는 막강한 피날레, 15번이 가지는 모짜르트 단조의 애틋한 애절함.. 그리고 여기 소개하는 16번이 갖는 기가 막힌 형식과 내용의 조화에서 오는 음악에의 열의... 이 모든 것이 17번 "사냥"이나 19번 "불협화음"에서 나타나는 외향적인 효과를 훨씬 뛰어넘는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사중주들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음악의 창고에 묻혀 그 아름다움을 간직한채 잠을자고 있다. 현악사중주를 연구하는 사람이라 면 누구나 모차르트의 하이든 셋을 들어보고 생각해본다. 학문적으로는 가장 연구해 볼가치가 많은곡이 바로 이곡이 아닐까 한다.
Alban Berg Quartett
Gunter Pichler, 1 Violin /Klaus Maetzl, 2 Violin
Gerhard Schulz. 2 Violin /Valentin Erban, Violoncello
Hatto Beyerle, Viola-Alto
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2/2박자의 큰 리듬이 어울리는 E flat 장조의 당당한 악장이다. 멀리서 당당한 트럼펫소리와 같은 현악기의 도약음이 들린다. 멀리서 여리게..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 오는 듯한 음형으로 바로 내 앞에까지 와서는 다시 한 번 포르테로 두터운 화음에 쌓인 도약 음을 들려준다. 이어 오페라 아리아 같은 유장함을 가진 선율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비올라와 첼로의 활약이 눈부시고 충실한 내성으로 풍부한 화음이 들린다. 유창함 뒤에 따라 나오는 날카로운 리듬감을 가진 제 2주제. 당당한 저현이 제 2주제의 뒤를 잇는다. 현악기들의 길게 늘어지는 선율들이 화음을 이루며 들리다 가 계속되는 제1바이올린의 글릿산도로 코데타가 이끌려 오면서 제시부가 끝난다. 계속되는 전개부는 현악 사중주가 가지는 악기 4개의 조화와 균형의 미가 유감없이 펼쳐져 있다. 놀라운 저현부의 움직임. 리듬감 있는 선율을 차례로 끊임없이 연주하는 첼로. 비올라.바이올린들. 멋있는 비올라와 첼로의 활약이 돋보이다가 저현부의 반주가 받쳐주는 긴장감 있는 제 1바이올린의 활약이 1 악장을 끝낸다.
2악장 (Andante con moto)
바이올린, 비올라가 화성을 담당하고 첼로가 멜로디를 이끌어 나가면서 깊은 명상의 세계로 음악이 빠져들어간다. 단순한 음들이 화성을 이루고 길게 이끌릴 때, 그때의 모차르트는 정말 아름답고 애수에 차 있다. 다시 저현이 화성을 만들고 바이얼린이 선율을 이끌 때 가라앉았던 감정이 일어나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철로가 첫 선율을 반복하고 바이얼린이 그 위에서 두번째의 선율 을 이끌어 낼 때 우리는 속마음을 드러낸 채 울고싶어하는 모짜르트를 만날 수 있다. 4개의 악기가 모두 울고싶어한다. 그것이 이 악장을 들을 때 우리 자신의 느낌일 것이다.
3악장 (Menuetto [Allegretto], Trio)
날카롭고 짧은 도약음으로 시작하는 미뉴엣,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분위기의 첫 소절이다. 두번째 소절에서는 짧은 16분 음표들 이 4개의 악기가 이루는 화음으로 들려온다. 점점 감정을 고양시 키면서 올라가던 음악이 저현의 단순한 리듬을 거쳐 트리오로 들어간다. 모차르트의 다른 트리오에서도 그렇듯이 긴 음들이 이끌 듯이 단순한 화성을 구사하면서 만들어지는 놀라운 애수를 띄고 있다. 다시 첫 부분부터 반복된다.
4악장 (Allegro vivace )
이 악장은 론도이다. 이 악장에서 중요한 요소는 4개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짧고 단순한 선율과 제1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질주하는듯한 선율이다. 다른 성격을 지니는 두개의 선율로 모차르트는 그가 극한까지 발전시킨 형식, 론도를 짜 나간다. 론도의 에피소드는 놀라운 박진감과 힘을 보이는 큰 하나의 선율이 있고 다른 하나는 바이올린들의 호흡이 긴 멜로디에 다른 악기들이 반주를 붙이는 선율이다. 코다가 오기 약간 전 부분의 리타르단토 가 인상적이다.
Wolfgang Amadeus Mozart 모짜르트
잘츠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나타내어 4세 때 건반 지도를 받고 5세 때 소곡을 작곡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각지의 궁정에 알리기 위하여 아들이 6세 되던 해부터 여행을 계획하여 1762년 7월 바이에른 선거후의 궁정이 있는 뮌헨에 가서 연주하고, 이어 빈으로 가서 여황제 마리아 테레사 앞에서 연주하는 등 많은 일화가 있다.
작곡가로서 그의 활동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준 것은 서유럽을 거의 일주하다시피 한 여행(1763∼1766)이었다. 여행에서는 파리에서 알게 된 J.슈베르트, 런던에서 알게 된 J.C.바흐(J.S.바흐의 막내아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또 파리에서는 바이올린소나타를, 런던에서는 최초의 교향곡(제1번 Eb장조) 등을 작곡했는데, 이 교향곡은 8세 때의 작품이었다.
두번째로 빈을 다녀온 후, 1769~1773년에는 3번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는데 그 동안 교황으로부터 황금박차훈장을 받고,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입회시험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볼로냐에서 마르티니로부터 음악이론·작곡을 배운 일과 이탈리아의 기악·성악에 직접 접한 일 등은 그후의 교향곡·오페라·교회음악 창작에 풍부한 자극이 되었다. 그는 이때 10대 소년으로 오페라의 작곡 의뢰를 받고 밀라노에서 작곡한 오페라를 상연(1770)하였는데, 제2회(1771)와 제3회(1772∼1773)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 곳에서 오페라를 작곡 상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후 1777년까지는 주로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미사곡과 사교적인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으나, 차차 그 직무에 불만을 갖기 시작하여 1777년 가을부터 1779년까지 어머니와 함께 다른 궁정에 취직하기 위하여 만하임·파리를 여행하였다.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음악면에서는 만하임악파와 접촉하는 등 수확이 컸고 이때 《파리교향곡》(1778) 외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또한 만하임에서의 아로이지아 베버와의 사랑, 파리에서의 어머니의 죽음 등 인생의 경험도 많이 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궁정음악가로서의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780년 말 뮌헨궁정으로부터 의뢰받은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의 상연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때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대주교 히에로니무스와의 불화가 표면화하여,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와 사표의 반려에도 불구하고 빈에서 살기로 결심, 그의 인생의 후반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빈에서는 처음 작곡·연주(피아노)·교육활동을 하였으며,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1782)와 《하프나교향곡》(1782), 피아노협주곡 등을 작곡하였고 1782년 8월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그가 빈에 머무는 동안에 작곡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은 하이든의 것과 함께 고전파시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는 작품이 되었다. 하이든과는 1785년경에 직접 알게 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빈시대의 후반에 접어들자 모차르트의 작품세계는 한층 무르익었으나, 그 반면 빈의 청중들의 기호로부터는 차차 멀어져, 생활은 어려워지고 친구들로부터 빌린 빚도 많아졌다.
1786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그러한 상황이 눈에 띄게 나타났는데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돈 조반니》(1787) 등의 오페라는 이 시기의 걸작들이다. 후자가 초연된 해 4월 베토벤이 찾아왔고 5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구르크의 뒤를 이어 궁정실내작곡가의 칭호를 받았으나, 이것은 이름뿐이고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닥쳐오는 경제적인 궁핍 속에서 이른바 3대교향곡 《제39번 E장조》 《제40번 G단조》 《제41번 C장조:주피터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그 후에도 모차르트는 몇 차례 여행을 하였다. 1789년의 베를린 여행에서는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알현하여 작곡의뢰를 받았다.
이듬해 초에는 오페라 부파 《코시 판 투테》를 완성하고, 가을에는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대관식협주곡》 등을 포함한 연주회를 열었으나 빚은 늘어날 뿐이었고 1791년 8월 의뢰받은 오페라 《티투스제의 인자》의 상연을 위하여 프라하로 여행하였으나 이 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9월에는 징그슈필의 대작 《마적》을 완성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레퀴엠》을 미완성인 채 남겨 두고 12월 5일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빈시의 성마르크스묘지에 있다.
36세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생애였으나, 어려서부터 창작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은 성악·기악의 모든 영역에 걸쳐 다채롭다. 그의 공적은 하이든과 함께 빈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한 데 있으며, 그를 앞섰던 이른바 전고전파(前古典派)의 여러 양식을 한몸에 흡수, 하이든과도 뚜렷이 구별되는 개성적인 예술을 이룩하였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이 1781년에 발표한 6곡의 러시아 현악4중주곡에 자극을 받고, 1782년부터 1785년까지 6곡의 현악4중주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에게 바쳤는데 이것이 이른바 하이든 세트 6곡이다.
음악평론가 박용구(朴容九) 는 그가 쓴 <교양의 음악, 4권 현악 편>에서 모차르트가 6곡의 현악4중주를 작곡하여 하이든에게 보낸 내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친애하는 벗 하이든에게>
한 아버지가 자식들을 넓은 세상에 내 보낼 때, 가장 훌륭하고 고명한 벗에게 맡겨 보호와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곧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경애하는 고명한 벗이여 여기 6명의 자식을 그대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들의 아버지, 지도자가 되어 주시기를.... 이후로 나는 그들에 대한 나의 모든 권리를 당신에게 양도합니다.
모차르트는 자신이 작곡한 6곡을 6명의 자식으로 비유할 정도로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하이든보다 24년 후배인 모차르트는 처음에는 하이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모차르트보다 18년간을 더 장수한 하이든은 모차르트 사후에 모차르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 같은 천재가 하이든에게 허리까지 굽혀가며 현악4중주 6곡을 바쳤다는 사실은 예사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모차르트에게 있어 하이든은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 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이든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넘어서고 싶어서, 6곡의 현악4중주곡 앞에다, 하이든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까지 하이든 극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Alban Berg Quartett 알반베르크 4중주단
ABQ는 1996년에 결성 25주년을 기념하여 월드투어를 실시, 각지에 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마디로 결성25주년이라고는 해도 4명의 개성 적인 멤버로 구성된 현악 4중주단의 경우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히 지루한 노정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ABQ처럼 결성당초부터 고도의 연 주수준을 자랑하며 그것을 점점 고도화 시키고 있는 현악4중주단은 과 거에도 유례가 없다.
빈필의 콘서트마스타 경험이 있는 제1바이올린 귄터 피힐러를 비롯, 연주경험이 풍부한 빈의 음악대학 교수들에 의해 결성된 ABQ는 약1년간 미국에서 라사-르4 중주단의 월터 레빈 등에게 배우는 등 연 찬을 쌓은 후 빈에서 데뷰했다.
그때까지 빈의 현악4중주단은 거의 대 부분이 빈필을 비롯한 오케스트라의 멤버들에 의해 결성되어 있었지만 ABQ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연주활동을 현악4중주에만 한정하고, 명칭 도 작곡가 미망인의 허락을 얻어 ABQ로 한 것처럼, 레파토리에 반드 시 20세기의 작품을 넣는다고 하는 방침을 세워 데뷰, 곧 압도적인 평 판을 획득했다. 현재 결성당초의 멤버는 제1바이올린의 피힐러와 첼로 의 발렌틴 에르벤등 2명이며, 제2바이올린의 게르하르트 슐츠는 1978 년부터 비올라의 토마스 카쿠스카는 1981년부터 참가했다.
데뷰후 바로 하이든, 모짜르트, 브라암스 등 고전파, 낭만파의 작품 과 현대음악의 녹음으로 최고의 평가를 얻은 ABQ는 그후 두번에 걸 쳐 베토벤전집을 비롯, 슈베르트, 드보르작, 스메타나, 야나체크, 드뷔 시, 라벨, 바르톡, 나아가 베르크로 대표되는 20세기의 현악4중주곡을 녹음, 80년대 중반부터는 피아니스트나 다른 현악기 주자들과 공연하는 등 다양한 실내악의 연주와 녹음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피힐러는 야마자끼씨와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는 [현재는 보다 자유롭게 기쁨으로써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기쁨으로 연주 하는 것 자체에 불안감이 있었다] 고 솔직히 말하고, 나아가 이상적인 앙상블에 대해서 [우선 인간적으로 조화될 수 있는 4명이 존재할 것. 즉 서로 자기를 주장함과 동시에 타인에게 양보할 수 있을 것. 인내와 환타지, 타협하는 경우에도 한사람에게 타협하는게 아니라 4명 전원이 토의를 통해 납득할 것. 개개의 전혀 다른 인간이 연주하는 것이므로 바라는 바가 각기 다르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예술가로서 인 간으로서의 협조를 지향하고 있다. 다음으로 이와 같은 예술적 입장의 통일을 전제로 하여 에너지, 규율, 일관성을 유지할 것. 항상 엄격한 자기비판을 통해 만족해서는 안되며 거꾸로 항상 불만만 있어서도 안 된다] 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