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스크랩] 한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

@로마의휴일 2009. 1. 24. 17:36

 

1. 조선사회 지주제 - 김홍도 <벼타작> 그림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기념특별전 도록, 1996, 100)
김홍도(1745-1818:영조 21-순조18)의 풍속화첩에 실려있는 그림이다. 볏짐을 지고 오고, 통나무에 태질을 하여 벼를 털고, 갈퀴질을 하는 농민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한쪽에서는 마름인지 지주인지 술병을 옆에 놓고 장죽을 입에 문채 감시를 하고 있는데도 타작하는 표정들이 밝다. 봄부터 논갈고 씨뿌리고 김매다가 수확할 때, 그동안 힘들었어도 타작할 때는 신바람이 난다. 그러나 타작한 뒤 수확의 반이상을 지대로 바쳐야 하는 것이 농민들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설렁 설렁 태질을 하여 벼이삭이 붙은채로 갈퀴로 끌어 모아 북데기로 묶어놓았다가 알곡을 정액이건 분반이건 나누어 지대로 바친뒤 늦가을 다시 털어 자기몫을 늘리기도 하였다.
2. 조선사회 신분제 - 김득신 <노상현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 13 , 812)
양반이 종을 앞세워 나귀를 타고 나들이를 하고 있다. 상민은 허리를 땅에 닿을 만큼 굽혀 굽신거리며 양반을 대하고 있다. 조선사회 신분제의 실상을 실감할 수 있는 그림이다. 이러한 지주제와 신분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조선후기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이었다.
3. 강화도조약 (1876)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9)
1876년 2월 11일부터 2월 26일까지 강화부 서문안의 진무영에서 계속된 조선과 일본 양측 대표의 회담 그림이다. 강화도조약으로 불리는 이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이 외국과 맺는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이 조약은 최외법권인 영사재판권, 조계 설정, 무관세무역, 일본화폐의 유통허용 등 일본의 일방적인 특권만을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부산을 비롯하여 인천과 원산을 차례로 개방하였다.
4. 임오군인폭동(1882)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24)
임오군인폭동 때 일본기를 들고 인천2으로 도주하는 일본공사관원들과 발사 위협에 쫓기는 군인들 모습.
1882년 6월 군인폭동은 개항 뒤 새로 만든 신식군인인 별기군과의 차별, 민씨정권의 부패로 제때 정해진 월급을 받지 못한 것이 동기가 되어 일어났다. 이 군인들은 시골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근교에서 살면서 먹고 살 길을 찾아 군대에 들어간 빈민들이기도 하였다. 군인들은 잠시 왕궁을 점령하고 민씨정권을 내쫓았다. 일본공사관원들은 탈출하였다. 그러나 민비의 요청으로 출병한 청의 무력개입으로 진압되었다.
5. 미국에 파견된 해외사절(1883)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22)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1년 후인 조선은 1883년 7월 8일 전관대신 민영익(1860-1914) 일행을 도미사절로 파견하였다. 사진은 최초로 서양문물을 돌아보고 돌와 찍은 도미사절 일행이다. 앞줄 왼쪽부터 통역관 로우엘, 홍영식, 민역이그 서광범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조선은 저율이긴 하지만 관세권을 인정받았으나 미국에게 '최혜국 조관'을 인정하였다. 그 뒤 1882년 9월에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인정하고 치외법권 확대, 서울 양화진 개시와 내지통상권 허용, 연안무역권 허용, 홍삼수출에 대한 고율관세(30%) 부과 등 불평등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조청수륙무역장정'을 조인하였다. 조선정부는 1886년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구미열강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 문호를 열어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깊숙이 들어앉게 되었다.
6. 갑신정변(1884) - 김옥균(1851-1894)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26)

박규수가 지구본을 한번 돌리더니 김옥균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오늘에 중국이 어디 있느냐.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며, 이리 돌 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어 어느 나라든지 중으로 돌리면 중국이 되나니, 오늘에 어디 정한 중국이 있느냐.
이 말을 듣고 김옥균은 크게 무릎을 치고 일어났다. 이것이 갑신정변 폭발의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박규수와 만나 세계를 논하면서 김옥균은 중세의 동양적 세계관인 중화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근대적 만국공법적 세계관(이것도 서구 열강 중심의 세계관이긴 하지만)으로 인식을 전환하기 시작하였고, 중세적 조선을 정치 사회적으로 변혁하여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 제도를 고쳐 근대국가를 수립하려는 꿈을 갖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 대해 의례적이고 형식적으로 상국 역할을 하던 청나라는 점차 조선을 실질적으로 소국화하려고 심하게 간섭하고 있었다. 민씨 정권은 부패하고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나라 살림을 거덜냈다. 양반지주는 소작료로 농민 생산의 5~6할을 수탈하고, 청국과 일본 상인의 횡포에 농민이나 상인의 살림은 바닥이 났다. 김옥균등 양반 지주 엘리트들은 과감한 개혁없이 이대로는 나라가 지탱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시하였다. 변혁은 불가피했다.
김옥균은 1851년 2월 23일 충청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 농촌에서 안동김씨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병태는 생계를 위해 천안읍 변두리인 원대리로 이사하여 서당을 차렸다. 옥균은 5살 때부터 아버지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7살 때 아버지의 6촌 뻘 되는 김병기(안동김씨 세도가에 줄을 대어 관직에 올라 서울 거주)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 북촌에 거주하며 김홍집과 사귀게 된다. 양아버지가 강릉부사로가자 강릉에서 6년간 이율곡의 사당이 있는 서당에서 수학하다 1866년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학문은 물론이고 시문 글씨 그림 음률에 탁월하여 대원군과 조대비에게까지 알려졌다. 1872년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다.벼슬은 총망한 젊은이에게 주어지는 홍문관 교리까지 올랐다.
김옥균이 개화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20세 무렵인 1870년 무렵 유대치 박규수 등과 접촉하면서부터다. 이들은 김옥균, 홍영식(영의정 홍순목의 아들), 서광범(참판 서상익의 아들), 박영효(철종의 사위), 박영교(박영효의 형) 등을 지도하여 개화사상을 갖게 하였다. 김옥균등은 양반 중인 군인 상민 승려 등 신분을 초월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였다.국왕이 새 문물, 제도에 관심이 많은 것을 기화로 국왕의 신임과 총애를 얻는 데도 성공하였다.
외교기관인 외아문에 김옥균과 홍영식은 협판으로, 변수는 주사로 있어 국왕에게 외교에 대한 상주도 할 수 있고 외국 시찰의 기회도 많아 국제정세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특히,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문명개화'의 실상을 파악하고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지주인 후쿠자와 유기찌의 지도와 도움을 받게되었다.
당오전 등 악화를 남발하여 재정난을 타개하려는 민씨정권에 반대하여,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얻어 개화정책을 추진할 자금난도 타결하고 정치자금도 충당하려 했으나, 민씨정권의 방해공작과 일본정부의 미온적 태도로 개화당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한편, 청국과 전통적인 종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약간의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정권을 지키려는 민씨일파 집권세력은 일본의 명치유신적 개혁과 만국공법적 질서를 꿈꾸는 개화당 인사들을 위험시하였다. 김옥균은,우리들은 수년래 평화수단을 쓰면서 각고 진력하였지만 그 공이 없었을 뿐만아니라 금일에는 이미 사지에 들어가 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바에야 선수를 써야 한다.면서 서둘러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 등은 처음에 미국공사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의 이권 침탈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때라 별반 신통한 이익이 없을 것 같은 조선문제에는 소극적 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어 일본공사에게 접근하여 일본공사관 병력을 동원하는 데 동의를 얻었다. 청국병사가 걱정이 되었으나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는 프랑스와 청불전쟁을 벌이고 있어 상당수의 청국 병사가 빠져나간 사태여서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1884년 12월 4일 10시 경에 우정국 북쪽의 민가에 방화한 것을 신호로 거사는 시작되었다. 최초의 근대적 우정국 개국 연회에는 외국공사들과 민씨정권의 세력가들이 이미 거나하게 취하여 희희낙낙하고 있었다. 민비의 친조카 민영익이 칼을 맞고 맨먼저 쓰러졌다. 일본공사 다께조에는 2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우궁에 도착하였다. 변란의 소식을 듣고 입궐하던 한규직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이 차례로 처단되었다.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은 국왕에게 상주하여 신정권 수립에 착수하였다. 좌의정에 이재원, 우의정에 홍영식, 좌포도대장에 박영효, 우포도대장에 서광범, 호조참판겸 판서 서리에 김옥균, 병조참판에 서재필 등이 임명되었다.
이어서 '혁명정부'의 의도가 잘 나타난 정강 14조가 발표하여 청국과의 전통적 관계 단절, 문벌 폐지와 인민평등권 제정, 지조법개정(삼정문란 해결), 탐관오리 숙청, 근대적 경찰.군사제도 수립, 국왕 전제와 척족의 간섭을 배제한 내각제 수립 등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런 김옥균 등의 웅대한 꿈은 3일 천하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궁궐의 무기는 녹슬어 총알 한번 쏘아볼 수 없었고, 일본공사는 청군이 들이닥치자 소극적으로 저항하다가 슬그머니 철수하고 말았다. 손쉽게 청군과 민씨일파는 정권을 되찾았다.
국왕을 따르던 홍영식과 박영교는 청군에 피살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인천으로 도망쳐 간신히 일본배 '천세환'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정치적 박해와 살해 음모에 시달렸다. 먼 외딴 섬 소립원도나 북해도의 벽지로 끌려가 굶주린 연금 생활 10년을 와신상담하며 재기를 꿈꾸던 김옥균은 민씨일파의 자객 홍종우의 꼬임에 빠져 상해로 유인되어 1894 년 2월 22일 살해당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 개화당 인사들은, 밖으로는 일본이나 미국의 협조하에 청국이나 서구열강의 간섭을 배제하여 최소한이나마 자주국가를 수립하고, 안으로는 봉건적 양반지주제의 폐단을 어느정도 고치어 지주,상인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적,부르조아적 개혁을 단행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이들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기에는 계급적,사상적 한계와 미숙성을 드러냈다. 양반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그들은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이익과 관련한 개혁은 생각지도 않았고, 민중을 동원하려 하지도 안았다. 반대로 전제군주인 국왕에 매달리고, 침략세력인 일본에 의존하였다. 청병을 과소평가하는 등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였다.
중세의 말기적 폐단과 양반.상인의 수탈에 신음하고, 일본.청국 상인의 횡포에 살림이 거덜난 민중은 개혁을 열망하고 있었다. 김옥균 등의 노력에 따라 민중은 혁명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민중과의 단절은 외세의존적인 개화운동, 부르조아 개혁운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이수룡)

7. 갑오농민전쟁(1894) -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
(1994년 찍음)
1894년 고부농민항쟁의 직접 동기였던 고부군수 조병갑이 쌓은 보가 있던 곳에 세운 기념비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 상류에 민보(舊洑 또는 禮洞洑)가 있었는데도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하류에 다시 신보를 쌓게 하고 물세를 징수하였다. 그외에도 황무지에 과세하는가 하면 불효, 불목죄 등 애매한 죄목을 들어 재산을 빼앗는 등 온갖 폭정을 다하였다.
1894년 1월 10일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무기고를 열어 무장하고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눈뒤 수탈과 탐학의 상징이었던 만석보를 파괴하였다.
이 비는 1973년 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정읍천과 태인천이 마주치는 동진강 상류에 세웠다. 보의 위치에 대해, 당시 태인천은 고부군 관할이 아니었게 때문에 만석보는 정읍천에만 걸쳐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저쪽에 있는 작은 비는 1987년 10월 1일 세운 [萬石洑遺址淨化記念碑]이다. "이 자리는 1894년 동학농민봉기의 발단이 된 만석보유지이다.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세운 동학농민군의 자주정신은 우리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주어왔다. 선열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던 높은 뜻을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곳을 정화하고 비를 세운다"고 비문이 씌여 있다. '정화', 전라북도지사 이름이 돌로 쪼아졌다.
1994년 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아 비가 세워진 앞 둑을 넓히고 시멘트 블록을 깔아 단장을 한 모습이다.
8. 갑오농민전쟁 - 황토현비
(동학혁명 100주년기념 특별전시회 도록, 1994, 11)
1894년 4월 7일 동학농민군이 전라 감영군과 보부상 부대로 이루어진 농민군 토벌부대를 맞이하여 대승을 거둔 장소를 기념하여 세운비다. 1963년 관주도의 [동학혁명 기념탑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그해 10월에 이 [갑오동학기념탑]이 세워졌다. 1894년 농민전쟁을 기리는 최초의 탑이다.
9. 갑오농민전쟁 - 농민군 그림
(한길사,한국사-12, 1994, 13)
농민군 그림은 1893년 10월 26일 창간한 일본의 천우협 기관지인 이륙신보(二六新報) 1894년 8월 11일자에 실려있다. 이륙신보사 주필 영복(鈴木)은 "동학당원들은 황색, 청색, 흑색의 띠로 각기 부서의 구분을 두었으며, 의복은 진한적색 마포로 해서 입었고, 등에는 화승총을, 허리에는 약통과 화승을 차고 있다"고 삽화를 설명하였다. 지휘관 모습은 8월 12일자에 실린 삽화다. 양산을 들고 칼을 찬 채 말에 타고 있다.
왼편 위쪽 도장을 '제중의인(濟衆義仁) 이라고 새겨진 동학당원의 인장'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제중의소'의 잘못이다. 동학당원 인장이 아니라 1994년 봄부터 여름까지 농민군 지휘소를 지칭하는 지휘부 인장이다. 신문에는 동학당원의 印形이라면서 '濟衆義印'으로 표시하였다
10. 갑오농민전쟁 -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
(우리교육, 1990년 10월호,10)
1973년에 세운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혁명'이 5.16과 유신으로 이어진다는 내용을 새겼다. "그러나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세우노니 ...... 서기 1973년 11월 11일 제자 대통령 박정희 글 이선근 글씨 양재한 동학혁명군위령탑 건립 위원회." 사진의 허연 부분은 5.16혁명, 10월유신, 대통령 박정희 부분으로 누가 망치질을 하여 지워버렸다.
11. 갑오농민전쟁 - '압송되는 전봉준 장군'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30)
전봉준 장군의 유일한 사진에 대하여 '압송되는 모습'으로 알려져 왔다. 압송되는 모습이라면 1894년 12월 2일 순창 피노리에서 서울로 오는 과정의 모습일 것이나 <동경조일신문> 1895년 3월 12일자 기사에 "이미 법무아문의 심판에 회부된다면 사형을 면치 못할 것임으로 그 용모만이라도 촬영하여 두고 싶다는 사진사의 청에 의해서 촬영이 허가되었다."는 내용이 있고, <대판매일신문>에 사진의 구도나 인물묘사가 거의 같은 삽화가 실려있다. 같은 장면을 사진사와 화사가 특별히 사진을 찍고 스케치하기 위하여 연출한 장면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동학혁명 100주년기념 특별전시회 - 이종학 소장 문헌자료전 참조)
12. 갑오농민전쟁 - 김개남비
(1994년 찍어 비 앞뒷면 합성)
1894년 농민전쟁 2대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개남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농민전쟁 100주년을 앞두고 1993년 5월에 세운 비. 다음은 비문의 내용이다.
"우리 민족은 민중이 주인이 되고자하는 자랑스런 항거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그위에 우뚝선 동학농민전쟁이 그렇고 그 지도자로 살다간 김개남 장군이 그렇다.
사천일백팔십육년 전라도 태인땅 지금실에서 도강김씨 대흠(대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개남 장군은 불꽃같은 의지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 죽은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 중 한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던 김개남장군은 봉건왕조의 부패와 수탈로 민심이 흉흉하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탈로 나라가 위태롭자 사천이백이십칠년 삼월 전봉준 손화중 장군과 함께 국가의 안위를 좌시할 수 없어 억조창생의 뜻을 모아 의기를 들고 보국안민을 위해 사생을 맹서하는 창의문과 창생을 도탄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하는 격문을 띄우며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다. 동학농민군은 황톳재와 황룡강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갈재넘어 원평 금구를 거쳐 사월 전주성을 점령했다. 이어 전주화약을 맺은 뒤 김개남 장군은 남원성을 중심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전라좌도를 평정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영주란 본명을 남쪽을 연다는 뜻의 개남으로 바꿨다. 그해 구월 이차기포때 관군의 요충지인 청주병영을 공격했으나 패하여 통한의 눈물을 삼키면서 태인으로 내려와 재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임병찬의 고발로 붙잡혀 십이월 전주성 서교장에서 목이 잘려 효시됐다. 그나이 마흔둘 시신도 거두지 못했고 따라서 무덤도 없다. 구천에 떠도는 그 고혼은 어디서 통곡하고 있는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지 어언 아흔아홉해 그의 높은 뜻을 기리고 맺힌 한을 풀고자 뜻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돌을 세우니 진흙속에 핀 저 연꽃이 더욱 아름답듯이 그의 넋은 역사를 비추는 횃불로 되살아 날것이며 찬란한 태양으로 이땅에 더욱 빛나리라.
사천삼백이십육년오월삼십일 김개남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
13. 갑오개혁(1894) - 군국기무처 그림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대백과사전 3, 802)
군국기무처는 갑오경장의 중추적 역할을 한 기관으로 정치.군사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했다. 봉건적 신분제적 농민수탈을 완화하고 민중의 사소한 불만을 해소시킴으로써 농민혁명을 예방하고 개화파 정권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던 기구였다. 의정부 산하 정책의결기구로 총재와 20인 이하의 회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거기서 채택된 의안은 국왕의 재가를 거친 후 국법으로 효력을 발생하였다. 1894년 7월 15일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자 군국기무처 회의원의 다수가 내각의 대신.협판으로 임명되고 군사 경찰관계 최고책임자들은 당연직 회의원이 됨으로써 합좌기관적 성격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군국기무처는 6월 25일에서 10월 1일까지 3개월 동안 210건의 제도개혁안 또는 정책건의안을 의결하고 국왕의 재가를 얻어 공포하였다. 주요한 내용은 의정부와 궁내부의 분리, 개국기년 사용, 문벌과 양반 상민 차별 혁파, 불법적 경제수탈 금지 등이었다.
14. 아관파천(1896)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101)
러시아 공관 문앞에서 대포까지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이며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일본 군대.
1895년 10월 민비가 시해되고, 대궐을 위협당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여 러시아 공관에서 거처했다. 민비시해로 일어난 1차 의병을 진압하려 지방으로 내려간 친위대의 부재를 이용,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있던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으며, 친러 내각이 성립되었다.
15. 독립문(1897)
(한길사,한국사-11, 1994, 11)
독립협회가 주관하여 1896년 11월 21일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기공하여 1897년 11월 20일 준공하였다. 1904년 당시의 모습이다.
16. 정장한 대한제국 고종황제(1897)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42)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청국의 제후국과 같은 형식을 탈피, 완전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황제는 고종이 계속 즉위하고, 1907년 순종이 계승했으나,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무력점령으로 '대한제국'은 막을 내렸다.
17. 운산금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 16, 539)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금광산. 1896년 미국인 모스가 대한제국으로부터 기한 25년으로 운산군 일원의 금광구를 특허받게 되었다. 모스는 동양합동광업회사를 조직하고 황실에 자본주 100에 대한 25주를 주고 일시금 25만원을 헌납하였고, 또한 매년 2만 5천원을 현상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침해당하자 일본의 광업에 대한 일원화 정책에 따라 다른 외국인 운영의 광산과 함께 운산광산도 1939년 일본인이 경영하게 되었다.
18. 러일전쟁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50)
1904년 2월 8일,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기고시(木越) 여단의 시가행진. 배낭이며 군장이 아직도 우리 눈에 익은 모습이다.
19. 시일야방성대곡(시일야방성대곡)
(한길사,한국사 11, 1994, 24)
1905년 11월 17일 한일신협약(을사조약)이 조인된 뒤 11월 20일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 지난번 이등박문이 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은 서로 말하기를 이등은 평소 세 개의 솥발이 서로 의지해 안정하듯이 동양 삼국의 안녕을 스스로 걸머지고 주선하던 사람이니 이번에 온 것이 반드시 우리나라의 독립 기반을 굳게 다질 계책을 권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까지 관민상하가 더할 수 없이 환영하였다.
그러나 천하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뜻밖에 5조약이 무슨 연유로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우리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삼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빚어냄이니 이등박문의 당초 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러나 우리 대황제폐하의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해 마지않으셨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할 것은 이등박문 스스로가 알아 파기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사사로운 영화를 바라 머뭇거리고 으름장에 겁먹어 떨면서 매국의 역적됨을 달갑게 여겨서 사천 년 강토와 오백 년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 바치고 이천만 동포를 몰아 남의 노예로 만드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부 대신은 깊이 나무랄 것도 없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상으로 단지 부(否)자로 책임만 때우고서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을 계획이었던가. 김청음(김상헌의 호)처럼 항서를 찢고 통곡하지도 못하고 정동계처럼 칼로 배를 가르지도 못하고서 뻔뻔스럽게 살아남아 세상에 다시 섰으니 무슨 낯으로 강경하실 황상폐하를 다시 뵈올 것이며 무슨 낯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할 것인가.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남의 노예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단군기자 이래 사천년을 이어온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20. 문화계몽운동 각 학회의 회보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93)
14. 아관파천(1896)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101)
러시아 공관 문앞에서 대포까지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이며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일본 군대.
1895년 10월 민비가 시해되고, 대궐을 위협당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여 러시아 공관에서 거처했다. 민비시해로 일어난 1차 의병을 진압하려 지방으로 내려간 친위대의 부재를 이용,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있던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으며, 친러 내각이 성립되었다.
15. 독립문(1897)
(한길사,한국사-11, 1994, 11)
독립협회가 주관하여 1896년 11월 21일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기공하여 1897년 11월 20일 준공하였다. 1904년 당시의 모습이다.
16. 정장한 대한제국 고종황제(1897)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42)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청국의 제후국과 같은 형식을 탈피, 완전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황제는 고종이 계속 즉위하고, 1907년 순종이 계승했으나,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무력점령으로 '대한제국'은 막을 내렸다.
17. 운산금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 16, 539)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금광산. 1896년 미국인 모스가 대한제국으로부터 기한 25년으로 운산군 일원의 금광구를 특허받게 되었다. 모스는 동양합동광업회사를 조직하고 황실에 자본주 100에 대한 25주를 주고 일시금 25만원을 헌납하였고, 또한 매년 2만 5천원을 현상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침해당하자 일본의 광업에 대한 일원화 정책에 따라 다른 외국인 운영의 광산과 함께 운산광산도 1939년 일본인이 경영하게 되었다.
18. 러일전쟁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50)
1904년 2월 8일,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기고시(木越) 여단의 시가행진. 배낭이며 군장이 아직도 우리 눈에 익은 모습이다.
19. 시일야방성대곡(시일야방성대곡)
(한길사,한국사 11, 1994, 24)
1905년 11월 17일 한일신협약(을사조약)이 조인된 뒤 11월 20일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 지난번 이등박문이 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은 서로 말하기를 이등은 평소 세 개의 솥발이 서로 의지해 안정하듯이 동양 삼국의 안녕을 스스로 걸머지고 주선하던 사람이니 이번에 온 것이 반드시 우리나라의 독립 기반을 굳게 다질 계책을 권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까지 관민상하가 더할 수 없이 환영하였다.
그러나 천하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뜻밖에 5조약이 무슨 연유로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우리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삼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빚어냄이니 이등박문의 당초 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러나 우리 대황제폐하의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해 마지않으셨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할 것은 이등박문 스스로가 알아 파기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사사로운 영화를 바라 머뭇거리고 으름장에 겁먹어 떨면서 매국의 역적됨을 달갑게 여겨서 사천 년 강토와 오백 년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 바치고 이천만 동포를 몰아 남의 노예로 만드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부 대신은 깊이 나무랄 것도 없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상으로 단지 부(否)자로 책임만 때우고서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을 계획이었던가. 김청음(김상헌의 호)처럼 항서를 찢고 통곡하지도 못하고 정동계처럼 칼로 배를 가르지도 못하고서 뻔뻔스럽게 살아남아 세상에 다시 섰으니 무슨 낯으로 강경하실 황상폐하를 다시 뵈올 것이며 무슨 낯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할 것인가.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남의 노예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단군기자 이래 사천년을 이어온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20. 문화계몽운동 각 학회의 회보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93)
21. 끌려가는 '105인 사건' 피의자들(1911)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39)
1911년 9월, '105 사건' 피의자들이 공판정으로 끌려가는 모습. 일제는 신민회의 주동인물을 포함, 서북지방 민족주이자 700여명을 '데라우찌 총독 암살음모'라는 혐의로 검거하여 1차 공판에서 105인에게 언도를 내린 날조극. 1912년 9월 28일 제 1심 언도에서 양기탁 등 6명은 징역 10년, 차이석 등 17명은 징역 7년, 양전백 등 38명은 징역 6년, 편강렬 등 41명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22. 여순형무소
(독립기념관, 해외의 한민족 조국독립운동 특별기획전 도록, 1995, 39)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처단하고 체포된 뒤 갖혔던 여순형무소.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한국에 이어 만주까지 침략할 야욕을 가지고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려고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등박문을 총알 4발을 발사하여 처단하였다. 의거후 의연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중국 여순에 있는 일제의 감옥에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였다. 그러나 옥주에서도 세계평화를 위한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히 밝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의해 서른 두살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여순형무소는 단재 신채호가 수감되었다가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23. 철도 방해로 처형된 세사람(1904.9)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81)
1904년 9월,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용산부근 에서 철도 방해죄로 처형된 한국인. 이토록 잔인한 사진을 그림 엽서로 제작하여 일본으로 보내지기도 했다({사진기록 일제의 침략} 사진 설명). 그런데 위책에서는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지 이틀 후인 1월 3일, 일본군은 한국인 3명을 철도파괴음모라는 누명을 씌워 공개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헐버트 [Passing of Korea에서 전재)라고 사진 설명을 붙였다. 한편 같은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의병 학살'이라는 조선일보사 {격동의 구한말 역사의 현장} 화보 설명에서는 "이 화보가 조선일보 1986년 3월 9일에 실리자 동경대대학원생인 강창일씨와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의 노력으로 화보에서 처형되는 의병 3명의 신원과 처형 일시, 장소와 당시 상황이 확인되었다. 처형되는 세 사람은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로 1904년 9월 21일 오전 10시 용산과 마포를 잇는 도로변 철도 건널목 부근(지금의 마포구 도화동 야산 기슭)에서 강제 동원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후를 마쳤다."고 하였다.
24. 의병 모습
(최인진, 한국신문사진사, 열화당, 1992, 70)
한말 의병전쟁 당시 의병들의 모습.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에 실려있다.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한뒤 진위대 장병들이 의병에 합류한 1907년 무렵의 모습이다.
25. 현상붙은 의병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79)
'경무분견소' 앞 게시판에는 의병들이 사진을 내걸고 현상수배까지 하였다(위책 사진설명). 그런데 처형된 사진인지 현상붙은 사진인지 모호하다.
26. 훈시하는 친일지사
(한길사, 한국사-12, 1994, 27)
체포된 호남 의병들 앞에서 훈시하고 있는 친일파 전라감사. 총을 든 일본군이 감시하고 있다. 체포된 의병들인지 주민들을 모아놓고 의병에 동조하지 말라고 훈시하고 있는 모습인지 사진만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장소는 목포이다.(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153쪽에 있는 '목포시가지' 사진과 157쪽의 숲에 덮인 1920년대 목포부청 사진과 일치한다)
27. 채응언 의병장(1915)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27)
1907년 숙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평안도.함경도.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다 1915년 성천에서 잡혀 사형당한 채응언 의병장. 붕대로 감고 있는 모양으로 보아 격투를 하다 잡힌 듯하다.
28. 근정전 일장기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141)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걸어놓고 국권찬탈을 철저히 상징화하였다.
29. 3대 통감 데라우치 취임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30)
1910년 7월 23일 일본정부의 현직 육군대신 자격으로 3대 통감에 부임하는 데라우찌 행렬이 일본인 거리를 지나고 있다. 합병과 동시에 데라우찌는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이 되어 무단통치를 감행하였고, 6년 후에는 일본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30. 토지조사사업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41)
일제는 1910년 9월 30일부터 총독부에 '임시토지조사국'을 두고, 1912년에는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여 조사사업을 촉진,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
31. 동양척식주식회사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41)
일제가 1908년 12월 자본군 1천만원으로 설립한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 을지로 2가에 있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아서 한국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났을 무렵에는 7만8천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여 한국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동척의 소작료는 일반 민간보다 상당히 고율이었을 뿐 아니라, 수탈 방법도 악랄하였으므로, 한국인들의 동척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었다.
32. 1910년대 학교교육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33)
사아베르를 손에 쥔 교사들. 1912년 5월 전관리에게 무관복 착용 지시가 내려졌으며, 학교 교사들까지 경찰관 같은 위압적인 복장을 하게 되었다.
1911년에 나온 '조선교육령'이 나왔으며, 교육의 목적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교육칙어'에 있는 것으로 되었다. 그 뒤로 공립학교에서는 '조선어' 수업 외에는 모두 일본어로 행하여지게 되었고, 조선어 수업도 대폭 감축되었다.
33. 토막민의 움막집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34)
땅을 빼앗기고, 소작마저도 할 수 없게된 농민들이 대도시 주변에 움막을 짓고 토막민으로 생활하고 있다. 산으로 올라가 불을 질러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화전민이 되기도 했으며, 만주와 일본등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34. 김알렉산드라
(정철훈, 김알렉산드라 평전, 필담, 1996)
오른쪽 사진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원이자 하바롭스끄시 쏘베뜨 외무부장 시절의 김알렉산드라(1918년). 1924년 전동맹 볼셰비끄 공산당 원동변강 위원회와 원동변강 직업동맹 쏘베뜨가 발행한 한글신문 {선봉}에 실린 것이다. 왼쪽 사진은 김알렉산드라(왼쪽)와 혁명동지였던 마리아 니꼴아예브나 사라판치꼬바. 마리아는 알렉산드라를 도와 소수민족의 권익보호에 앞장선 중국계 귀화인으로 알려져 있다.
김알렉산드라 -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 김(스딴께비치)는 1885년 2월 22일 러시아령 연해주의 우수리스끄에서 멀지 않은 시넬리꼬보 조선인 이민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1919년 3.1운동 이후 항일독립운동이 노령 지역 근거지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김두서는 함경도 경흥사람으로 1869년 두만강을 건너 노령으로 넘어갔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갔으나 아버지가 죽자 친구인 스딴께비치에게 맡겨졌다. 그는 어리아의 불라디보스크로 돌아가서 알렉산드라를 여학교에 보냈다. 여학교를 마치고 교원으로 근무하다 후견인이었던 스딴께비치의 아들과 결혼했다. 가정불화를 견디지 못한 알렉산드라는 우랄지방으로 떠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알렉산드라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과 관계를 맺고, 1917년 초 당원이 되었다. 7월에 당사업을 위해 극동지방으로 떠나 선전.선동 사업을 전개하면서 활동하였다. 10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극동지방대표자대회에 대표로 참가, 1918년 초에 하바로프스끄로 파견되어 당과 소비에뜨 사업에 참여하여 볼세비키 조직의 서기와 회계로 선출되고 외무위원 일도 맡았다. 알렉산드라는 여기서 소비에뜨 권력에 동조하는 전쟁포로들로 이루어진 국제군 조직에 전역량을 투입했다. 1918년 6월 말에는 100명으로 조직된 조선인 적위대에 참가했다. 1918년 9월 백군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나는 조선인민이 러시아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달성하는경우에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고 하였다. 사형당하기 직전 "고을고을마다 공산주의의 씨앗이 자라게 하소서. 그리고 기적의 꽃이 피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꽃이 모든 장애와 바람과 폭풍우를 이겨내고 조선에 자유와 독립을 이루게 하소서. 나는 온 세상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이렇게 죽어갑니다"는 말을 남기고 1918년 9월 16일 새벽 4시 총살을 당했다.
35. 이동휘 (1873 - 1928)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
후한국 무관학교 출신으로 신민회.서북학우회 활동. 1907년 의병을 일으키려다 체포. 1911년 테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에 관련되어 1년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망명하여 만주.시베리아 등지에서 활동하다 191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 19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었다. 21년 고려공산당 결성.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 부른다. 소련으로부터 지원받기로 한 독립운동자금 2백만 루불 중 40만 루불을 임의로 유용, 물의를 빚었다. 그후 상해를 떠나 시베리아로 가서 28년 병사했다.
36. 3.1운동 - 태화관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77)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29인(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4명 불참)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태화관 건물.
37. 3.1운동 - 기념비각의 군중들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75)
시위 행진하는 사람들에 호응하여, 서울 광화문의 기념비각 앞에 모인 시민들.
38. 3.1운동 - 시위 행진을 하는 여학생(기생?)들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35)
39. 상해 임시정부 청사(1919.4)
(독립기념관해외의한민족조국독립운동특별기획전 도록, 1995, 10)
1919년 4월에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번째 청사. 이 임시정부 청사는 중국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역 보창로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이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임시 정부 청사 주변 거주지에는 임정 요인들의 거처가 있었다.
40. 상해임정 임시의정원
(문화일보, 백범김구의 겨레사랑,1995, 41)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촬영.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신익희.윤현진.안창호.손정도.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줄 왼쪽 첫번째 여운형.
1919년 4월 10-11일 양일간,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항일지사들 30명은 각도 대의원 자격으로 제1회 '임시의정원'을 개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선포했다. 같은해 8월 18일 개원한 제6차 임시의정원은 9월 11일 '노령국민회'를 흡수, 국내의 '한성정부'를 통일정부로 삼아 8장 56조의 개정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노백린,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외무총장 박용만, 교통총장 문창범, 참모총장 유동열, 노동국총판 안창호로 내각을 개편하였다.
41. 상해임정 - 안창호.이승만
(조선일보사, 이승만과나라세우기,1995, 71 ; 안창호사진 합성)
이승만은 1920년 12월 대한민국 임정 대통령 취임을 위해 하와이에서 상해로 밀항할 때 중국인 복장으로 왔다. 1921년 4월 상해에서 찍은 이 사진은 밀항당시 입었던 바로 그 복장이다
42. 신채호 - 조선혁명선언
(한길사,한국사-16, 1994, 32)
오른쪽 - 신채호가 집필한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 초판 원문 머리와 꼬리 부분.
왼쪽 - 1919년 겨울 망명중인 상해에서 신석우 신규식과 찍은 사진의 단재 얼굴.

- 신채호 주요 연보 -
ㅇ 1880년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암리 도리미에서 신광식씨의 2남 중 막내로 태어남
ㅇ 1887년(8세) 부친 사망 이후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이사.
조부 신성우 사당에서 한학 공부
ㅇ 1892년(13세) 형 재호(20세) 사망
ㅇ 1895년(16세) 조부의 명으로 풍양조씨와 결혼(아들 한명을 두었으나 아들 곧 죽음)
ㅇ 1898년(19세)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교
ㅇ 1901년(22세) 가덕면 인차리의 문동학원 강사 역임. 애국계몽운동 전개.
ㅇ 1905년(26세) 성균관 박사가 됨.
관직을 버리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논설 기자 및 주필로 활동
ㅇ 1907년(28세) 신민회 참가, 국채보상운동 참여
ㅇ 1910년(31세) 일본의 조선병탄 이전에 중국으로 망명, 청도회의 개최
망명 직전까지 {독사신론} {이태리 건국 삼걸전} {을지문덕전} 등 간행.
수많은 사론과 시론을 집필하면서 반일 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의식을 고취.
ㅇ 1911년(32세) 권업회 기관지인 근업신문 주필
ㅇ 1912년(33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광복회 조직
ㅇ 1914년(34세) 만주에서 고구려.발해 유적지 답사
ㅇ 1915년(36세) 이회영의 안내로 북경체류(4년간)
중국의 중화보. 북경일보에 논설 발표, 필명을 날림.
ㅇ 1916년(37세) 중편소설 {꿈하늘} 발표
ㅇ 1919년(40세)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참가.
국무총리 후보자로 천거되었으나 낙선.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당선되자 그의 위임통치안에 반대하여 임시정부와 결별
ㅇ 1920년(41세) 북경대학에 유학중인 박지혜와 재혼(아들 둘을 둠)
ㅇ 1922년(43세) 상해국민대표회의에서 그의 무장투쟁노선에 의한 군사통일안 채택(곧 무산)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 작성(만해의 [조선독립의 서]와 함께 식민지시대 2대 문장으로 평가됨)
ㅇ 1924년(45세) 북경 교외에 있는 관음사에서 6개월간 승려생활을 함
ㅇ 1927년(48세)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참가,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 시력이 악화되어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가 됨
ㅇ 1928년(49세) 무정부주의 선전기관 설립과 일제의 관공소 폭파를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수표를 위조하여 몰래 옮기려다 대만에서 체포 됨
ㅇ 1930년(51세) '치안 유지법 위반', '유가증권 위조' 죄명으로 10년형 확정
ㅇ 1931년(52세) 조선일보에 {조선사} {조선상고문화사} 연재
ㅇ 1936년(57세) 중국 여순 감옥에서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

- 조선혁명선언의 외교론.준비론 비판 -

강도 일본의 구축을 주장하는 가운데 또 다음과 같은 논자들이 있으니, 제1은 외교론이니, 이조 5백년 문약정치(文弱政治)가 외교로써 호국의 좋은 계책으로 삼아 더욱 그 말세에 대단히 심하여 갑신(甲申)이래 유신당(維新黨).수구당(守舊黨)의 성쇠가 거의 외국의 도움의 유무에서 판결되며,위정자의 정책은 오직 갑국을 끌어 당겨 을국을 제압함에 불과하였고, 그 믿고 의지하는 습성이 일반 정치사회에 전염되어 즉 갑오.갑신 양 전역(兩戰役)에 일본이 수십만의 생명과 수억만의 재산을 희생하여 청.노양국을 물리고, 조선에 대하여 강도적 침략주의를 관철하려 하는데 우리 조선의 "조국을 사랑한다.민족을 건지려 한다"하는 이들은 한 자루의 칼 한 방의 탄알을 어리석고 용렬하며 탐욕스러운 관리나 나라의 원수에게 던지지 못하고, 탄원서나 열국공관에 던지며, 청원서나 일본정부에 보내어 국세의 외롭고 약함을 애소하여 국가존망, 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 그래서 <을사조약> <경술합방>-- 곧 <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뒤 몇 천만년에 처음 당하던 치욕에 대한 조선민족의 분노의 표시가 겨우 하르빈의 총, 종로의 칼, 산림유생(山林儒生)의 의병이 되고 말았도다.
아! 과거 수 십년 역사야 말로 용기 있는 자로 보면 침을 뱉고 욕할 역사가 될 뿐이며, 어진자로 보면 상심할 역사가 될 뿐이다. 그러고도 나라가 망한 이후 해외로 나아가는 모모지사들의 사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외교가 그 제1장 제1조가 되며, 국내 인민의 독립운동을 선동하는 방법도 "미래의 일미전쟁.일로전쟁 등 기회"가 거의 천편일률의 문장이었고, 최근 3.1운동에 일반 인사의 <평화회의> <국제연맹>에 대한 과신의 선전이 도리어 2천만민중의 용기있게 힘써 앞으로 나아가는 의기를 없애는 매개가 될 뿐이었다.
제2는 준비론이니, 을사조약 당시에 열국공관에 빗발돋듯 하던 종이쪽지로 넘어가는 국권을 붙잡지 못하며 정미년의 헤이그 밀사도 독립회복의 복음을 안고 오지 모하매, 이에 차차 외교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전쟁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판단이 생기었다. 그러나 군인도 없고 무기도 없이 무엇으로써 전쟁하겠느냐? 산림유생들은 춘추대의에 성패를 생각지 않고 의병을 모집하여 높은 관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지휘의 대장이 되며, 사냥 포수의 총든 무리를 몰아가지고 조일전쟁의 전투선에 나섰지만 신문 쪽이나 본 이들--곧 시세를 짐작한다는 이들은 그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에 "오늘 이 시간에 곧 일본과 전쟁한다는 것은 망발이다. 총도 장만하고 돈도 장만하고 대포도 장만하고 지휘관이나 사졸감까지라도 다 장만한 뒤에야 일본과 전쟁한다"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준비론 곧 독립전쟁을 준비하자 함이다. 외세의 침입이 더할수록 우리의 부족한 것이 자꾸 나타나, 그 준비론의 범위가 전쟁 이외까지 확장되어 교육도 진흥해야 겠다, 상공업도 발전해야 겠다, 기타 무엇 무엇 일체가 모두 준비론의 부분이 되었었다. 경술 이후 각 지사들이 혹 서.북간도의 삼림을 더듬으며 , 혹 시베리아의 찬 바람에 배부르며, 혹 남.북경으로 돌아다니며, 혹 미주나 하와이로 돌아가며, 혹 경향에 출몰하여 십여년 내외 각지에서 목이 터질 만치 준비! 준비! 를 불렀지만 , 그 소득이 몇 개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없는 단체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의의 부족이 아니라 실은 그 주장의 착오이다.강도 일본이 정치 경제 양 방면으로 구박을 주어 경제가 날로 곤란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입고 먹을 방책도 단절되는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실업(實業)을 발전하며, 교육을 확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양성한들 일본전투력의 백분의 일의 비교라도 되게 할 수 있느냐?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로다.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43. 신채호 묘
1936년 2월 18일 단재 신채호는 여순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다. 급보를 접한 부인과 아들 수범, 친우 서세충이 여순으로 달려갔으나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한해 전 단재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자 형무소 당국에서는 맡아서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통고하였다. 이에 서울의 친지들이 단재의 옛친구이며 일가뻘되는 친일파 부호 한 사람의 보증 아래 가출옥을 종용하였으나 친일파에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이를 단호히 거절함. 이즈음 민족주의자 행세를 하다가 대거 친일의 길에 들어섰던 민족 반역자들의 변명을 무색하게 하는 단재의 비타협적인 삶의 면모를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단재는 늘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고 했으나 후손들을 생각하여 국내에 묘를 쓰기로 하고, 여순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봉안해 왔다. 유골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 기슭 단재가 살던 옛집터에 일제 당국 모르게 모셨다. 그는 민적(民籍)이 없어 정식으로 묘소허가를 얻지 못하여 친척뻘되는 면장의 묵인하에 암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발각되어 면장은 파면되고 말썽이 많았다. 그는 살아서 "곡하고 노래하기 그마저도 어려워라"고 했지만 죽어서도 편히 묻힐 곳이 없는 형편이었다.
묘비 돌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구하고 오세창이 [단재신채호지묘]라고 써서 새겼다. 만해가 따로 비문을 쓰기로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실현되지 못하고 묘비만 신백우가 몰래 내려다 세웠다.
44. 의열단 사건 기사와 김원봉(1923.3)
(염인호, 김원봉연구, 창작과비평사, 1993)
제2차 암살.파괴 사건을 실은 동아일보 호외. 사진은 21세 때의 김원봉.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되었다. 일본인 관리 암살과 관청파괴등 테러활동이 중심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었으며 처음 단원은 13명, 1924년에는 70여명에 이르렀다. 김원봉은 1922년 의열단 제2차 암살.파괴 활동 계획에 착수하였다. 1923년 1월에 제2차 암살.파괴 책임자 김한이 서울에서 잡혔고, 3월에 국내에 잠입했던 의열단원이 대거 체포되어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45. 블라디보스톡 3.1운동 1주년 기념 항일시위(1920.3)
(독립기념관 해외의 한민족 조국독립운동 특별기획전도록, 1995, 76)
1920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3.1운동 1주년을 맞아 기념 항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은 1910년 전후부터 서북 간도와 함께 중요 독립군 기지로 개척된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일찌기 1910년대 초반부터 국내의 수많은 의병과 민족운동가가 망명하여 한인의 이주와 개척을 촉진하는 한편, 십삼도의군.성명회 등의 항일결사를 조직하였다. 또한 1914년에는 권업회가 주관하여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장투쟁을 주도하려고 하였다. 연해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양성된 많은 독립군들은 한.러의 국경인 두만강을 넘어 국내진입 유격전을 펼쳤다.
러시아 지역 독립군 기지는 만주 지역 독립군들의 또 다른 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러시아에 잔류하여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1937년 소련정부에 의해 강제 실시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이주정책이 있기 전까지 무장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하여 조국광복의 일부분을 담당하는 해외기지의 몫을 담당하였다.
46. 청산리전투 (1920.10)
(문화일보, 백범김구의 겨레사랑,1995, 45)
1921년 동북만주에서, 사진 맨앞이 김좌진 장군. {독립운동 하}는 "청산리 전쟁에서 대승한 '대한독립군'은 승전 축하 기념 사진을 찍었다. 맨 앞에 앉은 사람이 김좌진 장군"으로 설명. 고증이 좀더 필요한 사진이다.
청산리 전투 - 삼둔자, 봉오동 전투 등을 비롯한 1920년을 전후한 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과 간도내의 여러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1920년 10월 2만여명의 일본군 대병력을 간도로 침입시켰다. 이들 일본군의 임무는 간도내의 한국독립군을 전멸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대병력의 침입을 사전에 간파한 독립군은 일본군 첩자들에 의해 간파된 근거지를 버리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이동하였다. 독립군단들은 백두산록 서쪽 울창한 산림지대를 새로운 근거지로 정하여 10월 20일 무렵 청산리라 불리는 화룡현의 2.3도구 일대에 약 10여개의 독립군단이 결집하였다. 이같은 사실을 알게된 일본군은 이지역으로 5천여명의 병력을 투입하였고 독립군은 이들을 상대로 백운평 천수평 어량촌 등 청산리 골짜기에서 6,7일간 10여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였다.
47. 임시정부 이동로
(문화일보, 백범김구의 겨레사랑,1995, 46)
상해(1919.4)→ 항주(1932.5)→ 가흥(1935.11)→ 남경(1937.4)→ 장사(1937.12)→ 광주(1938.7)→ 유주(1938.10)→ 중경(1940.4)
48. 동아일보.조선일보 창간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70.71)
3.1운동 후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꾸고 1920년 민간언론지 {조선일보}{동아일보}{시사신문}의 발행을 인가,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왼쪽 {조선일보}는 창간기념 제3호(1920년 3월 7일자)이고, 오른쪽 {동아일보}는 창간호(1920년 4월 1일)이다. 두 신문은 일제의 언론탄압에 따라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는 지령 6923호, {동아일보}는 6819호로 자진 폐간하였다.
49. 민립대학설립운동
(한길사,한국사-14, 1994, 15)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창립총회 기념 사진, 1923년 3월 30일)
50. 경성제국대학
(독립기념관,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정책 특별기획전 도록, 1995, 11)
51. 김제 동진수리조합
(한길사, 한국사-15, 1994, 44)
김제 동진수리조합, 1925년 9월.
52. 군산항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11)
일본 본토로 반출되는 쌀이 산더미처럼 쌓인 군산항.
53. 암태도 소작쟁의
(한길사,한국사-13, 1994, 38)
위 오른쪽 - 암태도 사건이 실린 1932년 4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왼쪽 - 지주가 소작인에게 써준 계약문서. 아래쪽 - 1930년대 소작인 위안잔치.
54. 목포항에 집하된 면화
(한길사,한국사-13, 1994, 40)
1927년경 목포함에 쌓여있는 면화
일제는 '육지면'이라는 왜래 품종인 면화를 한국에 강제로 재배시켜, 이것을 싼값으로 수매하고, 일본에서 면직물로 가공한 다음 다시 한국에서 비싼 값으로 팔아 넘기는 이중의 착취를 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의 전통적인 면직 공업은 파괴되어 갔다.
55. 전조선노농총동맹 창립(1924.4)
(한길사,한국사-16, 1994, 20)
전조선노농총동맹창립총회.
56.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1925.4.)
(최인진, 한국신문사진사, 열화당, 1992, 167)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에 참가했다가 해산되고 준비사무소에서 경관대에 의해 밖으로 밀려나는 참가자들(조선일보, 1925.4.21)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는 1925년 초부터 화요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 농민, 노동자, 청년, 여성, 형평사와 사상운동 단체 등 425개 단체 5백여명의 참가 의사를 받아 대회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1925년 4월 20일 대회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경찰 당국은 집회 금지조처를 내리고 무력으로 집회 자체를 원천봉쇄하였다. 수 개월에 걸쳐 준비했던 대회가 강제로 무산되자, 대의원 3백여 명은 대회 장소인 파고다 공원에서 탄압경찰을 규탄하는 집회를 가지려 했으나 이것도 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밤 9시경 민중대회 관련자들은 또다시 종로 단성사 앞과 관철동 우미관 앞에 재집결하여 시위대 수백 명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무산자 만세!'를 외치며 규탄시위를 벌였다. 대규모 시위는 무장경찰의 진압으로 해산되고 현장에서 대의원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57. 조선공산당 관계기사
(한길사,한국사-16, 1994, 21)
조선공산당 검거와 재판을 다룬 신문기사
58. 순종 장례 행렬(1926)
(한길사,한국사-15, 1994, 34)
59. 6.10만세운동
(한길사,한국사-15, 1994, 35)
6.10 만세운동의 공판속보를 상세히 보도한 조선일보 1926년 11월 3일자 {조선일보}
6.10만세운동은 1920년대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에 맞서 조선 민중이 전개한 대표적인 대중적 반일투쟁의 하나였다.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새로운 사회계급적 제관계의 변화 속에서 투쟁지도부의 목적의식적 활동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다.
1926년 4월 25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순종(李拓)이 사망하자 전국 각지에서 조선 민중들의 반일감정이 급격히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조공은 순종 장례일을 기해 통일적인 전국적 시위투쟁으로 전화시키고자 산하에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총책임자 권오설)를 설치하였다. 투쟁지도부를 중심으로 당원 및 인쇄직공조합원들은 격문 5만여 매의 인쇄와 전국 58개소의 지역을 잇는 조직연락망을 완성하였다. 지방과의 연계사업은 주로 노동단체, 소작인조합, 천도교 교구, 청년단체, 신문사지국, 개벽 지사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학생들과의 연계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책임자 이병립/연희전문 문과 2년생)를 통해 주로 이루어졌다.
투쟁은 종로3가, 관수교, 황금정, 훈련원, 창신동 등 장례행렬이 지나는 길로 이어지면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특히 동대문 부근에서의 투쟁은 시위대들이 혈서을 쓰기도 하였으며, 시위대가 일제경찰의 군화발에 밟히는 등 처절하고 피어린 투쟁이 전개되었다. 지방에서는 인천의 만국공원, 순창, 병영, 통영, 원산, 개성, 홍성, 전주, 신천, 평양, 마산, 공주, 하동, 당진, 이원, 강경, 구례 등에서 전개되었다.
6.10만세운동으로 전국에서 5천여 명이 연행되었고 일제의 야만적 폭행으로 160여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였다. 또 감옥에서 고문으로 불구가 된 사람이 10명이 넘었으며, 6.10만세투쟁 총책임자였던 권오설은 적들의 간악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살해되었다.
60. 신간회 창립 (1927)
(역사학연구소, 우리역사를 찾아서 3, 심지, 1994, 86)
1927년 2월 15일 서울 YMCA회관에서 오후 7시 회원 500여 명과 방청객 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신간회는 1931년 해체될 때까지 4년여 동안 민족의 반일 역량을 결집하여 일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창립대회에서 신간회가 내건 강령은 1.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1.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1.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이었다. 신간회의 회장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상재가, 부회장은 홍명희가 맡았다. 신간회는 창립 10개월 만인 1927년 12월 27일 1백번 째 지회를 갖게 됐고, 1928년 말에는 모두 143개의 지회, 회원 수는 2만 명에 이를 정도로 조선 민중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
61. 광주학생운동(1929.11)
(한길사,한국사-15, 1994, 36)
위 - 광주고보와 광주중학교 충돌사건을 보도한 1929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아래 - 광주학생운동을 왜곡보도한 일제기관지 {광주일보} 규탄 시위, 1929년 11월 3일)
62. 원산총파업(1929.1-4)
(한길사,한국사-15, 1994, 40)
오른쪽 - 원산부도노동자 대파업 광경.
왼쪽 - 원산노동연합위원장의 수감기사를 실은 {조선일보} 1929년 2월 11일자 기사.
1929년 1월에서 4월에 걸쳐 원산의 노동자 3천여명이 군대와 경찰의 탄압을 둟고 3개월에 이르는 동맹파업을 감행하였다.
한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의 횡포에 대한 규탄으로 발단된 이 동맹파업은, 임금인상, 8시간 노동제 등의 요구를 내걸고, 원산 시민들까지 가담한 투쟁이 되었다. 소련, 중국, 프랑스의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도 받았다.
63. 을밀대에서 농성하는 강주룡(1931)
(역사학연구소, 우리역사를 찾아서 3, 심지, 1994, 119)
1931년 5월 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은 회사 쪽의 일방적인 임금인하 통고에 대응하여 파업을 시작하였다. 5월 28일 노동자들은 단식투쟁을 결의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폭력에 의해 회사 밖으로 쫓겨났다. 밤 11시, 회사에서 쫓겨난 강주룡은 밤새 광목을 마련하였다.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고 을밀대 누각에 던져 걸치고 줄타기를 해서 12미터 높이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 농성을 시작하였다. 그는 일제가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착취와 수탈을 고발하면서 9시간 반 동안이나 외치고 외쳤다.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76시간 동안 단식으로 대항하다 검속기간 만료로 일단 풀려났다. 평원공장 파업이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오를 때 평양서는 '정달헌 중심의 당조직사건'을 발표하고, 강주룡은 6월 9일 동료 노동자 최용덕과 함께 검거되었다. 강주룡은 또 다시 옥중단식을 벌인 뒤 '극심한 정신쇠약과 소화불량' 증세로 보석되었다가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졌다.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64. 경남 적색교원노동협의회사건(1933)
(최인진, 한국신문사진사, 열화당, 1992, 193)
경남 적색교원노동협의회 사건에 관한 {동아일보} 1933년 12월 12일자 본지 부재록(不再錄) 호외. 적색교원노동협의회 사건으로 검찰에 송치된 열아홉 명의 인물사진을 전부 삭제했다. 많은 인물사진을 삭제한 경우의 하나이다.
65. 브나로드 운동
(한길사,한국사-15, 1994, 43)
민족주의 우파 계열이었던 동아일보는 1931년 7월부터 방학을 이용하여 '문맹'과 '비위생적인 상태'에 있는 농민을 계몽한다는 목표로 '배우자, 가르키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했다. 브나로드운동은 1934년까지 계속되었다.
66. 혁명적 농민운동
(한길사,한국사-15, 1994, 44)
함경도 단천과 명천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보도한 신문기사.
67. 해방전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들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중간 사진)
1930년대 초.중반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해방전후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들.
왼쪽부터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의 신화적 인물인 이재유, 경성콩그룹.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의 지도자 박헌영, 해방직후 초기 북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 현준혁, 남조선노동당 위원장 허헌, 남로당의 2인자 이승엽.
68. 이재유
(김경일, 이재유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3)
이재유의 체포를 대서특필한 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
69. 간도공산당 사건(1938)
(전민조, 이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7, 문치장 촬영)
1938년 12월 20일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압송되는 사회주의자들. 경성지방법원 대법정 앞. 하나같이 머리에 용수가 씌워져 있다.
70. 황국신민화교육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75)
1938년 4월 1일 실시한 '개정조선교육령'은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요했고, 1941년 2월 28일 히로히토 칙령 148호에 따라 '국민학교' 등장, '황국신민'에서 '국'자와 '민'자를 따왔다. 1941년 4월 1일부터는 국민학교의 조선어 학습 전폐와 함께 일상용어마저 조선어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일본어만 사용토록했다. 사진은 국민학교 '일본어독본'을 읽고 있는 어린이들.
71. 조선신궁
(한길사,한국사-13, 1994, 21)
서울 남산 국사당 자리에 세운 조선신궁, 1925년 10월.
72. 창씨개명(1939.11)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74)
일제는 1939년 11월 10일, '조선인 씨명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1940년 2월 11일 창씨개명을 전국적으로 강요했다. 창씨 개명으로 전 인구의 8할 이상이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은 창씨개명을 계출하기 위해 경성부청 호적과에 줄을 선 광경.
73. 노동자 강제연행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72,73)
위쪽 - 큐우슈우 야하타시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한국인들.
아래쪽 - 큐우슈우 도요스 탄광의 한국인 합숙소 벽에 쓰인 한글 낙서.
전쟁에 필요한 증산체제를 위하여 부족되는 노동력을 충당하려고 일제는 노동자들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강제 연행은 1939년부터 시작되었고, 형식적으로는 '모집' '관의 알선'(1942), '징용'(1944)의 세가지 형태가 있었다. 모집단계에서부터 국가적 차원의 '노무동원계획'에 의하여 통제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연행 업무를 관장했던 '노무보국회' 직원들은 이를 두고 '조선인 사냥' 이라고까지 불렀다. 전혀 인간 취급을 하지 않은 채 논과 밭에서 일하고 있던 농부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하여 트럭에 태워 그대로 일본으로 연행하여 강제노역에 동원하였다. 1045년 8월 일본에는 2백 수십만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강제 연행이 시작된 1939년에는 100명 정도였다. 강제 연행 기간 동안 100만명 이상이 연행된 셈이다. 연행되어 간 곳은 일본만이 아니라 최전선 비행장 건설, 남태평양, 버마전선, 사할린, 아류우샨에까지 도달했다. 한국내에서는 더 많은 징용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수백만명의 한국인들이 징용되었던 것이다.
74. 징병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57)
1942년 5월 11일 일제는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동원해 '징병제 실시' 신궁봉고제라는 해괴한 행사를 하고 한국에 대한 징병제 적용을 '감사'하라면서 신사 참배와 시가행진을 강요하였다.
1937년 중국침략 이후 전쟁이 확대되고 병력이 부족해지자, 일제는 한국인을 군인으로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에는 육군 지원제도, 1943년에는 해군 지원제도 등 명목상으로는 지원제였으나, 뒤에는 할당제가 시행되었다. 1943년에는 '학도병 동원'을 거쳐 1944년에는 전면적인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지원'과 '징병'을 합쳐 싸움터로 몰려진 한국인 병사는 일제의 발표로도 23만명에 이르렀다.
75. 정신대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75)
'여자 정신대'라는 미명 아래, 속아서 끌려간 여성들이 중국에 도착 직후, 검진을 받으러 가고 있다.
76. 놋그릇 공출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69)
일제는 전쟁 말기,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놋그릇은 물론 일체의 쇠붙이를 깡그리 수탈해 갔다. 공출받은 물건들을 쌓아놓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일본인들. '국어상용'의 슬로건이 보인다.
77. 애국부인회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67)
친일 부인단체인 '애국부인회' 경성부분회 종로 6정목 분구회원들.
78. 희망의 아침(1938)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3, 돌베개, 25.114 ; 고등학교 국사 하, 1990, 168 합성)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음악 분야에서는 안익태가 애국가를, 홍난파가 봉선화를 작곡하였는데, 당시의 음악인들은 일제에 억눌린 민족의 감정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표현하였다." 고 기술하고 있다.
79. 친일 만화
(역사문제연구소, 인물로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비평사, 1993, 232)
노수현, 멍텅구리({신시대} 연재만화, 1941.1)
심산 노수현은 일제때는 동양화단의 베스트 10이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베스트 6에 드는 화가. 화랑가에서 6대가에 드는 명망가. 그가 일제때는 만화를 많이 그렸다. 멍텅구리 내용은 "때는 비상시, 국력총동원하는 이때에, 신년새해 놀고 있느 건, 잘못도 이만 잘못이 아니란 말이야...에튀, 대륙 제일선에서는..., 야, 멍텅구리, 우리도 나라를 위해 신년새해 일을 하세!, 지원병은 어떨까?, 오십당년에 못될 소리..., 차라리 자동차 운전을 배워가지고 전선에 나감 어떨까? 역시 바람이 제일이야, 그럴듯한 일일세, 그러면 내일부터라도 운전수 지망 ..., 만세 ... 만세." 청년들처럼 총들고 전쟁터에 나갈 수 없으니까 이 중년 신사들은 운전을 배워 전선에 나가겠다는, 이른바 성전에 복무해야 한다는 친일적인 내용을 드러내는 만화이다.
80. 해외이주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259)
1930년대 말엽, 만주의 한국인은 100만명이 넘었다. 이 숫자의 절반이 정주한 간도 지방은 항일 빨치산의 근거지이며,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81. 조선광복회와 보천보
(한길사,한국사-16, 1994, 46 )
오른쪽 - 보천보 전투를 보도한 {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자 호외.
왼쪽 - 재만 한국인 조국광복회의 지하공작원들.
82. 조선의용대(1938)
(한겨레신문사, 발굴한국현대사인물 3, 1992, 167)
1939년 10월 10일 중국 광서 장족 자치구(광서성) 계림에서 찍은 조선의용대 창립 한 돌 기념사진. 가운뎃줄 왼쪽에서 열번째가 약산 김원봉. 오른쪽 위는 조선의용대 명찰.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8년 10월 10일, 한구(漢口)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부대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어 대장에 김원봉, 부대장에 신악이 취임했다. 조선의용대는 약 300여 명의 대원이 3개 지대와 부녀대, 3.1소년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김성숙 등).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유림),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연합체였다.
83. 광복군 (1940)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36)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능빈관'에서 개최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 단상에 임정 김구 국무령과 김학규 총사령부 참모. 백범의 주례사, 선언문 낭독, 조소앙의 경과보고, 홍진.조완구의 축사, 중국요인의 격려사.축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84. 일제항복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82)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 정막한 '미조리'함상에서 연합군 총사령과 맥아더 장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대표.
85. 태극기 게양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6)
1945년 8월 전남 광양서국민학교 교정에 일장기를 변조해 만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86. 서대문형무소 출감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25)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와 해방 만세를 외치는 독립투사들과 형무소 앞에 모인 군중들이 해방의 기쁨에 환호하고 있다.
87. 서울거리시민들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90)
1945년 8월 16일,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를 메운 120만 서울 시민들.
88. 여운형과 건준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95)
해방 다음날 8월 16일 휘문중학교에서 '건준' 여운형 위원장을 환호하는 시민들. 여운형은 이날 '정치집회 제1호'를 열어 해방의 의의와 민족의 나갈 길에 대해 연설하였다.
89. 지방인민위원회
(브루스커밍스.존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23)
90. 김순남 '해방의 노래'
(한길사,한국사-17, 1994, 24)
91. 미군 진주 1 (1945. 9. 8)
(브루스커밍스.존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22)
해방된 한국에서 정치적 폭력으로 인해 죽은 첫번째 한국인 희생자. 9월 8일 미군이 상륙할 때 일본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는데 피살자는 아마도 그날 죽은 노동조합 지도자인 권병권이거나 평화운동 활동가인 이석구 중 하나일 것이다.
92. 미군진주 2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24)
열차편으로 서울역에 도착, 시내로 들어오고 있는 미 7사단 32보병 연대. 주위의 삼엄한 경계로 행인은 보이지 않는다.
93. 일장기하강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85)
1945년 9월 9일, 아베총독의 통치이양문서 서명과 동시에 서울에 진주한 미 7사단 32보병 연대가 총독부 광장의 계양대에서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있다.

94. 성조기게양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25)
총독부 건물 앞에 걸렸던 일본기가 내려지고 미군악대의 연주속에 미군기 게양.
95. 임정귀국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29)
임정 요인들은 미군정의 뜻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1진이 1945년 11월 23일 귀국하였고, 12월 2일 귀국하였다. 사진은 임정요인 2진 귀국 기념(12월 3일). 앞줄 왼쪽에서부터 두번째가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뒷줄 왼쪽 두번째 황학수, 성주식, 김성숙, 김상덕, 유림, 조경한, 김봉준, 유동열, 김원봉.
96. 모스크바삼상회의 왜곡 보도(1945.12)
(역사학연구소, 바로보는 우리역사 2, 거름, 144)
모스크바삼상회의를 왜곡 보도한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기사. 동아일보는 소련이 모스크바 결정안을 주도하여 한국에 대해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최대 왜곡 보도였다고 할 수 있다.
97. 신탁통치반대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204)
98.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정 지지
(한길사,한국사-17, 1994, 26)
99. 소집점호시의 국립 경찰(1946)
(브루스커밍스.존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33)
100. 친일경찰도표(1946.11)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상, 청사, 1986, 280)
101. 미소공위(1946.3, 1957.5)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30)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소 공위' 절차를 토의하는 미측의 하지 중장(왼쪽)과 소측의 스티코프 중장.
102. 아이 업은 아이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58)
동생을 등에 엎고 사과를 파는 소녀 행상의 모습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팍팍한 삶의 현실을 볼 수 있다(1947년 10월)
103. 쌀공출(1946)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40)
1946년 12월 전남 담양에서 공출하는 광경.
104. 9월 총파업(1946.9)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93)
사진은 1947년 4월의 철도 노조원들의 집단 시위. 46년 9월 총파업 때도 시위 양상은 비슷하였을 것이다. 9월 총파업 관련 사진을 구하지 못하여 이 사진을 대신 넣었다.
1946년 9월 27일 '남조선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 사무실. 대구에 있는 각 산별노조 간부들과 청년들이 이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간부가 아닌 노조원들은 직장 안에 있는 노조사무실에 모여 구호와 노래로 분위기를 띄웠다. 노동자들은 다 같이 '쌀을 다오 !' '일급제 반대 !' '임금인상!' 등의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그리고 각 직장노조 사무실이나 투쟁위원회 사무실 앞에 모여 '적기가'와 '해방의 노래' '농민의 노래' '인터내셔날가', 그리고 '나아가자 조선' 등의 투쟁가들을 함께 불렀다.(정영진,{폭풍의 10월},한길사.).
'쌀획득투쟁'이 온나라 곳곳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1946년 7월과 8월, 주로 기관차 와 차량을 고치던 '서울 철도국 경성공장'에서도 전평의 분회대표를 중심으로 쌀배급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적자타개와 노동자관리의 합리화'라는 핑계를 대면서 운수부 종업원 25 %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방침을 밝혔다. 노동자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가슴에 묻어둔 투쟁의 불씨에 기름을 부운 셈이었다. 드디어 9월 13일 경성공장 노동자 3천 700여명은 태업에 들어갔다. 16일 노동자들은 요구사항을 문서로 만들어 미군정 운수부장에게 전달하고 21일까지 성의있는 대답이 없으면 파업한다고 통고했다. 19일부터 부산철도 당국에 같은 요구조건을 내걸고 부산철도공장 노동자 약 7천명이 23일 오후 1시 파업에 들어가면서,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날 서울의 1만 5천명 철도노동자들이 부산노동자들에 호응하여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곧 전국 철도노동자들로 번져 4만명이 참가함으로써 모든 열차가 멈췄다. 9월 26일 전평은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남조선의 4만 철도노동자를 선두로 일대 민족투쟁을 전개한다."는 '총파업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와 함께 정치범 석방, 반동테러 배격, 정간된 신문의 복간과 구속된 사원 석방, 지명수배와 체포령 철회 등을 요구했다. 이것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함께 벌인다는 전평노선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9월 28일부터 10월초까지 서울의 중앙전신전화국,우체국,경성전기주식회사, 부산전신국등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남한 일대의 운수와 통신기관은 마비되었다. 이밖에 10월 2일 인천부두노동자 3천명이 파업하고, 출판부문노동자도 파업했다. 전평의 아성인 조선해원동맹 산하 선원은 인천 목포 부산 등 항구에서 실업선원생활보장을 요구하며 9월 27일부터 태업을 하고 10월 3일 파업에 들어갔다.(김사옥, {한국노동운동사}, 산경문고)
9월 총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얼마일까. 그때 통계들은 서울에서만 295개 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나 3만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고, 1만 6천여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했으며 남한 전체로 보면 25만 1000여명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한다. 또 다른 자료는 서울 6만 5천을 비롯 남한 전체에서 26만 4000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한다.( 성한표, [9월총파업과 노동운동의 전환] {해방전후사의 인식} 2) 이 9월 총파업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큰 총파업이었다.
미군정이 파업노동자를 가장 크게 친 것은 '남조선 총파업투쟁위원회'가 있던 용산 경성공장을 습격한 사건이다. 장택상 수도청장이 지휘하는 2천명 남짓한 경찰들은 농성하던 2천 철도노동자를 30일 새벽 2시에 공격했다. 그리고 '애국청년단'과 '대한노총'사람들이 농성장에 들어가 두명을 죽이고 1400여 파업노동자를 검거했다. 이때 '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큰 몫을 했다. 김두한은 이렇게 떠벌였다.

" 여러곳에 숨어있던 전평원을 색출, 창고에 몰아넣고 점검해보니 2000여명이나 되었다. ......너희들 중에 이번 파업간부를 뽑아내어라. 안 그러면 할 수 없다. 개솔린을 뿌리고 불을 지르겠다. ..... 모든 철도원에게 즉각 취업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직장에 복귀하지 않으면 가족까지도 몰살해버리겠다고 말한 후 서약시켰다."

그때 대한노총 영등포 기계제작소 분회 선전부장이었고 이 작전에서 후문 소대장을 맡았던 김말용씨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30일 아침부터 영등포지역 대한노총원들과 함께 출동하여 외부세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비를 섰습니다. 후문 쪽에서는 김두한이가 쌍권총을 들고 서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지요." " 9월말인데도 파업노동자들을 구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가 반소매의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총격전에 밀린 흰소매부대들은 마포강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우익들이 그 뒤를 쫒아가면서 총을 요란하게 쏘아댔습니다. 총을 피해 강으로 뛰어든 사람도 있고 사살된 사람도 수십명이 되었습니다.({월간노동자}, 1989년 창간호.)(최규진)

105. 10월 인민항쟁(1946.10)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63)
사진은 '대구폭동'의 중심지가 됐던 대구역 광장 앞의 상가 건물.
106. 쌀 지키는 의용 경찰대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43)
'대구폭동' 이후 각 지역별로 청년단원을 동원, 의용경찰대를 동원하여 쌀을 지키는 모습.
107. 조선민족청년단(1946.10)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36)
전라남도당 결성식(1947년 여름). 앞줄 맨 왼쪽에 있는 이가 뒷날 신민당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녹영. 우익 단체인 민족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은 국방군에 병력을 공급하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
108. 남조선 노동당 결성(1946.11.23)
(중앙일보사,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992, 239)
1946년 밀담을 나누고 있는 박헌영과 여운형.
109. 제주 4.3항쟁(1948.4.)
(월간 사회와 사상, 1988년 12월호, 중간 사진)
제주도 4.3사건으로 강제 소개된 어린이와 부녀들, 노인들. 1948년 5월. 제주도 거의 대부분 산간 지역의 마을 주민들이 유격대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해안지역으로 소개되었다.
거주지에서 쫓겨난 제주도 주민들.
110. 이덕구의 죽음(1949.6)
(이성광, 민중의 역사, 열사람, 1989, 118 ; 우리교육 1990년 4월호,15 합성)

한라산 유격대 총사령이었던 이덕구는 1949년 6월 7일 교래리 근처 오름에서 경찰의 총에 사살되었다. 6월 8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는 십자형 틀에 묶인 시체가 전시됐다. 때묻은 군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웃도리 주머니에는 수저가 꽂혀 있었다. 입가에는 피를 흘리고헝클어진 머리에 둥근형의 얽은 얼굴, 형틀 옆에 내걸린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는 글이 그가 누구인지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이자는 공비의 수괴 이덕구로서 대한민국 국시를 범한 반역자이다"는 포고가 걸려있었다.
'제주 4.3항쟁'의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의 장두가 효수돼 내걸렸던 바로 그곳에 전시됨으로써 장두의 운명을 따랐다.
이덕구는 1920년 조천읍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 입명관대학 경제학과 4학년 재학중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다가 1945년 귀향하여 1946년 조천중학원 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1947년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대회' 시위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한라산으로 입산해 '4.3' 발발 직후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조직된 인민유격대의 '3.1지대장'을 맡았다. 48년 7-8월 사이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이자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모든 직책을 맡기고 제주도를 빠져나감으로서 그가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제주 4.3항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선 '몸이 날래 지붕을 휙휙 넘어다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제주를 떠나버린 1대 사령관 김달삼과 대비하여 동경을 받기도 한다.
조천중학원에서 학생들은 인기높은 역사.지리 선생 이덕구를 "박박 얽은 그 얼굴 / 덕구 덕구 이덕구 / 장래 대장가심(감)"이라고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경찰쪽은 "사살했다"고 밝혔으나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일족도 비극적인 길을 걸어, 부인 양후상과 5살짜리 아들 진우, 2살짜리 딸도 죽었다. 주민들은 당시 진우가 울며 살려달라고 하자 경찰이 "아버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고 해 산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뒤에서 쏘아 쓰러뜨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큰현 호구의 부인과 아들딸, 둘째형 좌구의 부인과 아들, 사촌동생 신구.성구 등도 경찰에 의해 죽었다. (한겨레신문사,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 3).

111. 남북협상, 방북하는 김구 일행 (1948.4.19)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73)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다짐.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통일을 위한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38선을 넘는 김구 일행. 오른쪽은 아들 김신, 왼쪽은 비서 선우진이다.
112. 5.10 선거(1948)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45)
전남 화순군 능주면의 5.10선거투표 광경. 선거를 시찰한 UPI통신사 특파원은 "미군 정찰기는 상공을 비행했으며, 선거장이 있는 곳에는 야구용 타봉을 든 '향보단' 단원들에 의해 엄중히 경호되고 있었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용 타봉, 곤봉 등을 휴대했고, '조선경비대'는 미제 카빈총으로 무장했다. 분위기는 마치 계엄하의 도시 같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한다.
113. 대한민국정부 수립(1948.8.15)
(한길사,한국사 17, 1994, 31)
중앙청의 정부 수립 경축장. 1948년 8월 15일 오전 11시 20분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정부 수립 기념식은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 부부를 비롯, 해외 사절단과 정부 각료.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1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9.9)
(중앙일보사,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992, 23)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 후 정부 각료들의 사진이다. 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홍명희, 네번째가 김일성 수상, 다음이 박헌영(부수상겸 외상)이다. 김일성 바로 뒤쪽 왼쪽부터 주영하 장시우 최창익의 얼굴이 보인다. 몇명을 빼고 모두 젊은 사람들 모습임을 알 수 있다.
115. 여순사건(1948.10-1949)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73)
1948년 10월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붙잡혀 온 여수여고 학생들.
116. 반민특위 투서함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38)
1948년 10월 전남 광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전라남도 조사부에 설치한 투서함에 투서하는 모습.
국회는 1948년 9월 7일, 전문 3장 32조로 된 반민법을 통과시키고, 정부가 9월 22일 공포하였다.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자 박흥식을 제1호 체포한 반민특위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월 22일 노덕술을 구속하였다. 5월 20일 반민족행위자 처단 사업을 추진하던 이석원 의원등 세 명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반민법 시행을 반대하던 세력은 5월 31일 파고다 공원에서 '민중대회'라는 무허가 집회를 열고 구속의원의 석방결의안에 찬성한 88명의 국회의원을 공산당이라고 몰아붙였다. 6월 4일에는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과 종로서 사찰과 주임을 반민족행위자 피의자로 체포하였다.
117. 끌려가는 반민족자들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76)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의 발효로 친일파들이 포승에 묵여 법정으로 끌려갔다. 1949년 2월 끌려가는 친일파들, 앞에서 세번째가 3.1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의 한 사람인 최린.
118. 반민특위 기습사건(1949.6.6)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중간 사진)
반민특위 기습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앞줄 왼쪽에서 첫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사진은 6.25 당시 노덕술이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던 모습이다.
119. 김구암살(1949.6.26)
(문화일보, 백범김구의 겨레사랑,1995, 120)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서대문 경교장 2층 서재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저격 당한 직후의 백범 김구. 7월 5일 국민장.
120. 여성 게릴라
(월간 사회와 사상, 1988년 12월호, 중간 사진)
1950년 3월 20일자 뉴욕타임즈에 실린 이 사진의 설명문에는 이 21세의 남한 게릴라는 31명의 다른 게릴라들과 함께 붙잡혔다고 적혀 있다. 이 집단의 모든 여성대원들은 그 후 자신들의 지휘관의 잘려진 머리를 들고 있는 채로 사진을 직혔다.
121. 비극의 평양철교(1950.12.4)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82)
폭격으로 파괴된 철난간을 타고 수백명의 사람들이 강을 건너고 있다. 살인적으로 추운 날이었다고 한다. AP 통신의 막스 데스퍼가 찍었다. 1951년 이 사진은 사진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122. 거창 양민학살 사건(1951.2.11)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03)
1960년 4.19이후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조사했을 때 발굴한 금이빨이 박혀있는 유골. 이때까지만 해도 거창사건은 '거창 공비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알려져 있었다.
123. 움막살이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134)
1951년 4월, 전남 화순 난민촌의난민들.
124. 노래하는 이화여대생들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121)
1951년 6월 부산, 이기붕이 국방장관에 취임했을 때 그의 집에 초대된 인사들. 오른쪽부터 무초 주한 미국대사,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콜트장군. 문밖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은 여흥을 돋구기 위해 특별히 초대된 이화여대 여학생들. 검은색 군화와 흰색 얄발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125. 휴전협상(1951. 11)
(조선일보사, 이승만과 나라세우기,1995, 139)
휴전협상이 시작된 직후인 1951년 11월 26일 하나의 안으로 제시된 휴전선을 지도에 그려놓고 서명하는 유엔군 연락장교 제임스 C 머레이 대령(왼쪽)과 인민군 연락장교 장춘산 대령. 판문점에서 있었던 이 서명식에 한국군은 휴전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참석하지 않았다. 정식 휴전협정은 이로부터 1년 8개월 후 53년 7월 27일에 조인되었다.
126. 발췌개헌 (1952.7.4)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13)
발췌개헌안에 대한 거수 표결을 하는 순간. 손을 든 의원들이 내키지 않아 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하다.
6.25 사변을 겪은 국회는 이대통령의 독주를 막기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을 논의했다. 국회의 동향을 알아차린 이대통령은 국회의 간선에 의한 재집권을 포기하고 직선제 개헌안을 시도했으아 부결되었다. 임시정부는 52년 5월 25일 경남.전남북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이튿날 국회의원 40여명이 타고 있는 국회 통근 버스를 빼내 의원들을 협박했다. 결국 공포 분위기 속에서 열린 국회(7.4)에서 이대통령은 직선제에 야당의 내각책임제를 섞은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의사당 주변에는 사복의 군경요원들과 무장 기동경찰 2개 중대가 쫙 깔려있는 상황이었다. 발췌개헌안의 내용은 양원제 국회 구성, 정.부통령의 직선제, 국회의 국무위원에 대한 불신임제가 주된 골자였다. 오후 9시 35분 헌정 사상 최초의 변칙 개헌안은 재적 의원 1백 83명 중 1백 66명이 출석, 1백 63명이 기립 찬성, 3명은 기권, 반대는 단 한명도 없었다. 기권은 박순천, 윤담, 유덕전 의원이었다.
 
127. 6.25 이전의 이야기 한토막
(17인에 의한 판화지상전 도록, 1985)
유연복, 목판, 1985년 작, 35*25cm.
128. 서울 - 1953
(한길사,한국사-18, 1994, 30) 임응식 찍음.
1953년 서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실업자. 한국전쟁 직후의 상황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전쟁은 끝났어도 폐허로 변한 자리에서 일할 사람은 넘처 흘렀으나 질자리가 없었다. 이 시절 "봉지쌀 드셔 보셨습니까"하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29. 못살겠다 갈아보자! - 1956년 대선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34)
1956년 5.15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 부통령 후보 장면,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
대통령 후보 신익희는 1956년 5월 5일 새벽 호남선 제 33열차를 타고 강경을 지날 무렵 심장마비로 급서. 이날은 어린이 날이었으며 비가 부슬 부슬 내리다가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억수로 쏟아졌다
130. 진보당 사건 - 공판정의 조봉암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98)
1958년 1월 13일 조봉암 진보당 당수가 시경으로 자진 출두하는 도중 보안법 혐의로 검거되었다. 사진은 2심 공판정에서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조봉암.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가 급서한 뒤 야당 대통령 후보는 진보당의 조봉암으로 단일화 됐고, 진보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박기출이 자진사퇴해 야당의 부통령 후보는 민주당 장면으로 단일화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핵심 주도 세력인 조병옥 김준연 등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은 지원할지언정 조봉암을 지원할 수 없다", "야당 세력에 조봉암을 가담시킬 수 없다"는 강경론을 폈다.
조봉암은 58년 1월 12일 진보당 간부인 윤길중 김세룡 박기출 등과 거물 간첩 양명산이 체포된 다음날인 1월 13일 구속되었다. 조봉암과 양명산은 1심에서 각각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극우 단체들의 법원.판사집 난입과 정권측의 거센 항의 뒤에 열린 2심에서 둘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59년 7월 30일 대법원은 이들의 재심청구를 기각했고, 이정권은 7월 31일 두 사람의 사형을 신속하게 집행하였다. '이승만의 장기 집권은 용인할지언정 죽산을 지원할 수는 없다'는 야당의 냉전적 사고방식 속에서 조봉암 제거의 역사적 음모는 가능했다.
131. 3.15부정선거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274)
132.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1960.4.11)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15) 부산일보 허종 기자 찍음
3.15 부정선거에 대한 마산 시민들의 항의 시위 당시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김주열군의 시체가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마산상고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3월 10일 전북 남원에서 마산시 장군동 할머니집에 와있던 김주열군(17세)은 그날 밤 속옷 바람으로 구경을 나났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간이 신문에 실린 뒤 학생들 뿐 아니라 시민들도 합세하여 "부정선거 다시 하자"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제2마산시위를 전개하였고, 마산의 시위는 4.19로 이어졌다.
 
133. 4월 혁명 1 - 4.18 고대생 피습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37) 정범태 찍음
1천여 고대생과 3천여 서울지역 대학생.시민들이 '마산 학생 즉시 석방' '3.1정신으로 민주정치 이룩하자'고 외치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60년 4월 18일 오수 6시 35분경 고대생들이 천일백화점 부근 종로 4가에 이를 무렵 양쪽 길가에서 1백여명의 깡패들이 튀어나와 쇠뭉치, 벽돌, 삽, 몽둥이 등으로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하였다. 선두 학생 40여명이 깡패들의 난동에 피를 흘리며 무더기로 쓰러졌다. 책가방과 신발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당시 조선일보 정범태 기자가 유일하게 4.18 고대생 피습사건을 찍었다.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스트로부를 터뜨리며 세 컷을 찍었는데 사진이 살았다. 4.19 아침에 조선일보 사회면에 톱으로 이 사진이 실리자 깡패들까지 동원 데모군중에 폭력을 행사하는 썩은 정부를 규탄하는 성난 군중들과 학생들로 서울 장안이 가득했다. 다음날 취재차를 타고 종로 4가에 이르렀을 때 경찰이 사격자세로 검문하며 지프에 붙어 있는 조선일보 사기를 찍고 "조선일보 개새끼들, 차에서 내려 손들어"하며 고함을 치는 것과 동시에 총을 발사하였다. 정범태 기자의 겨드랑이를 지나 운전석에 앉아있던 운전기사 조광집이 배에 총을 맞고 피살되었다.
134. 4월 혁명 2 - 4.19 시위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111)
시위대가 돌을 던지며 중앙청 쪽으로 몰려가고 있다.
4월 혁명 과정에서 143명이 사망, 625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35. 4월 혁명 3 - 교수시위
(조선일보사, 이승만과 나라세우기,1995.)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서울시내 각 대학교수들의 시위. 결정적으로 이승만의 하야를 가져오게 했다.
136. 4월 혁명 3 - 쓰러진 이승만 동상
(조선일보사, 이승만과 나라세우기,1995,)
탑골공원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동상이 시위대에 의해 쓰러져 어린이들의 놀이감이 되었다.
137. 통일운동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313)
138. 5.16군사쿠테타 주역들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143)
1961년 5월 18일 시청앞에서 육사 생도들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지켜보고 있는 박정희와 쿠테타 주역들. 왼쪽에서 두번째가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
139. 박정희와 혁명공약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150)
1961.10.18 기자회견중인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뒤에 박태준 준장이 앉아 있다.
박정희 생애
ㅇ 1917.11.14 경북 선산에서 출생
ㅇ 1932 구미보통학교 졸업, 대구사범학교 입학
ㅇ 1937년 봄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 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 교사 생활
ㅇ 1940 일본인이 운영하는 만주 장춘의 군관학교 입학
ㅇ 1942 만주군관학교 수석 졸업 - "대동아 공영권의 완수를 위하여 사꾸라처럼 깨끗이 지겠습니다." 하는 요지의 졸업생 답사를 하였다 함. 그리고 일제는 이 광경을 문화영화로 만들어 만주 일대에 널리 방영하였다고 한다. 만주국 황제 부의에게 금시계 졸업 선물 하사 받음
ㅇ 1942 동경의 일본육사 입학 - 다카기 마사오라는 일본 이름 사용
일본인 교장이 일본인 보다 더 일본인 답다고 칭찬 - 별명 '특등 일본인'
ㅇ 1944 일본 육사 57기 졸업생 중 3등으로 졸업. 일본 육군 소위에 임관,
일본내 마츠야마 제14연대 배속. 중국 열하성에 있던 만주국의 일본
관동군 보병 제8연대 소대장으로 배속, 산악지역의 항일 게릴라에 대 항하여 약100회 전투 참가. "조선놈들의 토벌이라면 내게 맡기라"(사관학교 일본인 동창들의 말) 일본명 오카모도 미노루란 이름 사용.
ㅇ 1945. 7 중위 진급. 제8연대 영안으로 이동하여 영안에서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장해제 당한 패잔병 장교가 됨. 피난민 대열에 끼여 북경으로 건너간 다음 광복군 합류, 북경지구 광복군 제1중대장이 됨. 일본식으로 훈련.
ㅇ 1946.6 미 상륙선 LST 정으로 중국 천진에서 부산으로 귀국
ㅇ 1946.9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사의 전신) 간부 후보생 제2기로 입교, 3개월간 장교훈련 과정을 마친 뒤 대위로 입관. 육군 사관학교 교관을 맡음. --> 남로당 가입, 숙군과정에서 사형 언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의 구명으로 살아남.
ㅇ 1953 육군준장으로 진급
ㅇ 1960 '4월혁명' 당시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ㅇ 1960.12 대구2군 부사령관
ㅇ 1961.5.16 군사쿠테타로 정권 찬탈
11월 14일 케네디와 회담 설정
11월 12일 이케다총리와 회담
"나는 메이지유신을 지도한 일본지사들의 기개를 본받아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하겠다"
11월 13일 아카사카 영빈관을 떠나 하네다 공항으로 향하는 도중, 차가 먼발치로 이중교가 보이는 일왕의 궁성을 지나게 되자, 벌떡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곧추고 정중하게 거수경레를 붙였다 함.
ㅇ 1963.12.17 제5대 대통령당선, 제3공화국 출범
ㅇ 1964 베트남 전쟁에 비둘기 부대 파견
ㅇ 1965.6.22 한일기본조약과 각종 부속협정 조인
ㅇ 1960.5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파병, 이후 최고 5만명의 병력을 월남에 주둔
ㅇ 1967 제6대 대통령 당선
ㅇ 1969 삼선개헌 강행(날치기 통과)
ㅇ 1971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선
4.27 대통령선거 서울유세 연설문
"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서 여러분에게,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십시오'하는 정치연설은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고,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 산적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느꼈읍니다"
ㅇ 1971.12 국가비상사태 선포
ㅇ 1972.7.4 남북공동성명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 천명
ㅇ 1972.10.17 계엄령 선포, 유신헌법 선포, 1인독재의 '유신체제'
ㅇ 1978.12.12 총선에서 야당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에 1.1% 앞섬
ㅇ 1979.5.30 신민당전당대회에서 KCIA와 연결된 이철승을 물리치고 김영삼이 11표차 로 이김
ㅇ 1979.8.9-11 신민당사 YH여성노동자 농성, 11일 경찰 신민당사 난입, 김경숙양 죽음
ㅇ 1979.9.8 서울지법 민사재판, 김영삼의 당수권한 박탈, 정운갑을 총재대행으로임명
ㅇ 1979.9.25 신민당전국긴급당원대회
ㅇ 1979.10.4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박탈
ㅇ 1979.10.17 유신체제 7주년을 기해서 일어난 부마민중항쟁
ㅇ 1979.10.26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사망
140. 군정연장 반대시위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163)
박정희 의장이 1963년 3월 16일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하자 야당과 재야 정치인들 중심으로 군정 연장 반대 데모가 3월 20일부터 일제히 벌어졌다.
141. 굴욕외교 반대 시위(1965)
(구와바라 시세이, 촬영금지, 눈빛, 1994, 42)
일본과의 굴욕적인 외교에 반대하는 서울 시민들의 시위.
142. 한일협정 조인(1965.6.22)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75)
한일협정 조인 후 6개월 후인 1965년 12월 18일 한일협정 비준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이동원 당시 외무부 장관, 김동조 한일회담 수석대표, 정일권 국무총리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143. 월남 파병(1965)
(구와바라 시세이, 촬영금지, 눈빛, 1994, 55)
건국 이래 최초로 해외 파병되는 한국군. 1965년 해병 청룡여단 장변들이 수송선에 승선하기 위해 열차편으로 부산항으로 출발했다.
1965년 가을부터 본격적인 월남 파병이 개시되었다. 맹호.백마부대가 각 1개 사단, 청룡여단과 그밖에 보급과 기술관계 인원을 포함해서 약 4만 명이 월남에 상주했고, 1973년 철수할 때까지 40여만 명이 월남전을 체험했다.
144. 국민 교육 헌장(1968.12.5)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119)
국민 교육 헌장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 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45.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7.7)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89)
1968년 2월 1일 기공식을 갖은지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준공식이 끝난 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 건설 담당 기업체 사장들을 실은 승용차가 고속도로를 달리기 위해 출발하고 있다
146. 새마을운동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147. 전태일 분신(1970.11.13)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91)
전태일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몸부림치는 어머니 이소선 여사.
1948년 봉제노동자인 전상수.이소선씨 사이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어린 시절 껌팔이 신문팔이를 하다 17살 때 평화시장의 노동자가 되었던. 그는 평화시장 시절 열두 살짜리부터 열대여섯 살짜리 노동자들이 다락방 작업장에서 하루 열다섯 시간씩 일하는 광경을 보고 그것을 개선해 보려고 69년 6월 '바보회'를 만들었다. 그 조직을 통해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관으로부터 묵살당하고 그는 해고되었다. 그후 그는 '삼동친목회'를 결성해 노동운동을 벌였으나 아무 것도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온몸을 불사름으로써 그의 뜻을 알리려고 하였다
148. 광주대단지 사건(1971.8)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145)
149. 유신체제(1972.10)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161)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를 발표했다. '10월 유신'의 선포였다. 그해 11월 21일 국민투표를 실시, 유신헌법은 투표자 91.5%의 찬성으로 확정되었다.
1970년대 초 동아시아에 새로이 몰아닥친 데탕트가 냉전구조에 의존하던 박 정권에 압박을 가하고, 무차별적으로 끌어들인 외채에 의한 고도성장.수출주도 경제정책이 파탄으로 치닫고, 독재와 수탈에 저항하면서 꾸준히 성장해온 민중들의 힘은 박정권의 절대권력화를 서두르게 되었다.
150. 동아일보 광고해약 사태(1974.12)- 백지광고
(동아일보, 1993.4.1)
동아일보의 유신반대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2월 광고무더기 해약이라는 보복조치를 가했다. 이들 광고지면은 독자들의 격려 광고로 채워졌다. 격려 광고의 내용들 가운데 일부이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선포된 뒤 두 해째인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대회'를 개최하였다. 긴급조치 1,4호가 발동되어 군사법정에서 종교인, 문인, 언론인, 대학교수, 변호사, 대학생 등 수많은 양심적인 인사들에게 사형, 무기징역, 15년 징역이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을 때였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창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 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은 아니다..."고 천명하고 1)외부간섭배제 2)기관원 출입 거부 3)언론인 불법 연행 일체거부 등 3개항을 결의하였다. 경영진이 이 내용의 기사화를 거부하자 기자들은 제작거부로 맞서 10월 24일자 신문은 나오지 못하고 10월 25일자에 실리게 되었다. 이후 여러해 동안 금기로 되어 있던 데모, 인권회복기도회, 노동자들의 쟁의, 야당의 체제비판 발언, 개헌문제까지도 기사로 다루었다. 그러자 74년 12월 30일부터 정권의 압력을 받은 대광고주들의 광고철회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광고지면이 백지로 나가자 세계 광고 사상 유례가 없는 '자유언론 격려광고'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학생.지식인.종교인은 물론 주부까지도 참여하여 민주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민중의 염원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이에 대해 정권과 경영주들은 기자를 비롯한 언론인들을 해임하는 것으로 맞섰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축출된 자유언론의 주역들은 동아자유언론소호투쟁위와 조선자유언론투쟁 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자유언론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80년 해직언론인협회를, 84년 12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고, 기관지로서 '말'을 창간하였다. 87년 6월항쟁 뒤 자유언론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이들이 주축이 되어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다.
151. 긴급조치9호(1975.5.13)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229)
긴급조치 9호 선포를 보도한 1974년 5월 14일자 조선일보. 긴급조치 9호는 유언비어 유포, 학생의 정치 관여 금지 및 위반 사실을 보호하는 언론사도 정.폐간시킬 수 있다고 규정했다.
152. 명동사건 구속가족 시위(1976.5.4)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4)
1976년 5월 4일 명동사건 피고인 가족들이 대법원 후문 앞에서 '공개 재판, 민주인사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일부는 검은색 테이프로 입을 십자가로 봉하고 침묵시위.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기념미사 후에 마무리 기도 형식으로 이우정이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함세웅, 이우정, 정일형, 윤반웅,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문정현, 문동환,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은명기 10명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하였다. 3월 2일부터 연행이 이루어지기 시작, 정부는 기도회가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발표하였다. 3.1민주구국선언은 1)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고 하는 세부문으로 이루어졌으며, 결론에서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착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다가오고 있는 그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위축시키고 있는가?" 묻고 "민주주의 만세"로 끝을 맺고 있다.
153. 함평 고구마피해보상운동(1976-78년)
(노금노, 땅의 아들 1, 돌베개, 1986)

함평에서 포대에 담겨져 농협의 수매를 기다리는 고구마가 길가에 방치된 채 썩어 들어가고 있다(1976년 12월).
1976년 여름 농협의 임직원들이 함평군 내 7천여 고구마 생산농가를 상대로 출하희망 전량을 전해에 비해 17.4% 인상된 고시가격으로 수매하겠다고 선전을 하였다. 농민들은 농협의 약속을 믿고 상인에게 판매할 계획도 다른 저장대책도 세우지 않은 채 수확한 고구마를 농협에서 공급해 준 포대에 담아 쌓아 놓고 농협 차가 오기만 기다렸다. 10월이 지나고 11월이 되어도 농협에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고구마는 눈비를 맞고 추운 날씨에 얼어 썩어가기 시작하였다. 농협수매가 진전이 없고 농민들이 불안해 하자 상인들이 1포에 1317원짜리 고구마를 600원에서 200원까지 헐값으로 사갔다. 썩은 고구마를 추려내야 되니 농민들은 이중삼중으로 막심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에 몇명의 농민대표들이 중심이 되어 1976년 11월 23일 함평에서 농민대표자회의를 열고 대책위를 수립하여 피해 농가들을 조직하였다. 경찰과 농협의 방해공작을 피해가면서 조직을 확대하고 피해 보상운동을 78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154. 자동차수출(1977)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213)
1977년부터 길이 트인 자동차 수출은 한계에 이른 일반 공산품 수출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중공업 제품의 하나로 큰 기대를 모았다.
155. 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1976-1978)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동일방직노동조합운동사, 돌베개, 1985)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노조원에게 똥물을 투척. "아무리 가난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
156. YH사건(1979.8.)
(한길사, 한국사-19, 1994, 25)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농성과 김경숙의 사망을 보도한 1979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
YH무역주식회사는 1966년 1월 자본금 1백만원과 10여명의 종업원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종업원 4천명에 국내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하였고 수출실적 1백만 달러를 달성하여 국내 수출순위 15위를 기록하였다. 회사 순이익이 12억 7천만원이나 된 이 해에 상당액의 외화를 도핀시킨 장용호 회장은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동서인 진동희 사장은 장부상 10억원을 사원들의 상여금으로 지급했다고 해놓고 그 돈으로 1973년 대보해운을 설립하였다. 와이에치 노동자들은 하루 13-14시간씩 근무를 하였고 일요일도 격주로만 쉴 수 있었다. 일체의 수당과 상여금도 없었다. 와이에치 무역은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국내의 와이에치 무역에서 수출한 가발대금 3백만 달러를 미국의 장용호 회장이 갚지 않아 1974년에는 은행빚이 6억 3천만원으로 늘어났다. 사세는 급속도로 기울어졌고 1979년 4월에는 폐업을 단행하였다. 7일 동안 농성 끝에 공장문은 다시 열렸으나 미국으로 빼돌린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7월 30일 2차 폐업 결정이 났다. 기숙사에서 농성하던 와이에치 여성노동자들은 8월 9일 신민당사로 농성장을 옮겼다. 8월 12일 새벽 2천여명의 경찰력에 의해 1백 80여명의 18세에서 23세에 이르는 나이어린 노동자들은 강제로 끌려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 양이 추락하여 꽃다운 목숨을 잃었다.
157. 부마항쟁(1979.10.16)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253)
부산 지역의 확대된 통금시간을 알리는 서울역장의 안내문.
158. 최후의 만찬 - 10.26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98)
김재규는 앉은 자세로 오른쪽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먼저 왼쪽에 앉아 있던 차지철 경호실장을 행해 1발을 쏜뒤 곧바로 마주 앉아 있는 박정희 대통령을 쏘았다. 박정희가 왼쪽으로 쓰러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박정희 살해 현장인 궁정동에서 1979년 11월 7일 현장검증을 찍은 것이다. 당시 보안사에서 조간 조선일보와 석간 동아일보에 사진기자 한명씩을 배정하여 두명이 현장검증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찍은 사진을 보안사령부에서 인수하여 7장을 선택, 각 신문사에 보도하도록 나누어 주었다.
159. 12.12 쿠테타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259)
1979년 12월 14일 보안사령부 현관 앞에서 12.12 주역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160.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앞 시위군중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214)
1980년 5월 15일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서울역 앞에서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61. 광주 민중항쟁 1 - 5.18 공수부대의 만행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13) 전남일보 신복진 촬영
1980년 5월 18일(일요일) 오후 3시경 광주 금남로 3가를 지나가는 행인을 무조건 방망이로 내려치고 바닥에 나뒹군 시민을 재차 강타하고 있는 공수부대 병사의 모습이다. 그 잔인한 병사는 그것도 모자라 두 발을 모아 붕 공중으로 떠서 시체나 다름없는 시민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날 오후부터 여기저기서 불시에 나타난 공수부대는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사람이면 사정없이 차고 때리고 박살을 내었다. 19일 금남로에서 데모군중이 소나기 처럼 돌멩이를 퍼붓는데도 그들은 그 돌을 온몸으로 맞으며 한 치의 대열로 이탈하지 않은채 유령의 집단처럼 저벅저벅 다가가는 공포의 병사들이었다. 광주를 얘기하는 사람이 유언비어와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붙들려 가는 세상이어서 신기자도 자신이 찍은 광주의 기록들을 한동안 가족한테까지도 일체 얘기를 안하고 찍은 필름 모두를 비닐에 싸서 조그만 항아리에 담아 화단에 파묻어 놓았었다고 한다.
162. 광주 민중항쟁 2
(황종건.김녕만, 광주 그날, 사진예술사, 1994, 21)
163. 광주 민중항쟁 3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271)
164. 광주 민중항쟁 4
(한길사,한국사-19, 1994, 39)
무장한 시민들, 1980년 5월 22일.
165. 광주 민중항쟁 5
(황종건.김녕만, 광주 그날, 사진예술사, 1994, 87)
166. 광주 민중항쟁 6
(황종건.김녕만, 광주 그날, 사진예술사, 1994, 136)
167.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1980.5.31)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257)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발족. 전두환 상임위원장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6월 5일 현판식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168. 프로야구 출범(1982)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54)
전두환 대통령이 프로 야구 개막식에서 시구하고 있다.
169. 미 문화원 점거 농성(1985.5.23)
(박용수, 민중의 길, 분도출판사, 1988, 12)
1985년 5월 23일 12시 73명의 학생들이 미 문화원 도서실 계단을 뛰어 올라, 미국을 우방이 아니라 광주 학살의 책임자로 규정하면서 72시간 농성. 이 농성을 통하여 전두환 정권에서 금기시되었던 '광주'가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갔는가>라는 성명서를 통해 "우리 민주 학우는 전 한국 민중을 대표하여 미국측의 광주 민중학살 공범 여부를 묻고 군부 독재 지지 철회를 요구하고자 주한 미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다."고 목적을 밝히고, 농성을 풀면서 " 1)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2) 광주 학살 지원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3) 미국은 군부 독재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 3) 신민당은 국정 조사권을 발휘하라, 5) 모든 민주운동 단체들은 광주 학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노력합시다."라는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170. 구로노동자 연대투쟁(1985.6)
(서울노동운동연합, 선봉에서서, 돌베개, 1985)
"이 땅의 양심은 절규한다." - 연대투쟁을 지지하는 22개 민주.민권운동단체 대표들이 농성중인 청계 피복 노조 사무실(85. 6. 26).
171. 애학투결성과 건대농성(1986.10)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225)
10월 29일 건국대학교 사회과학관 옥상에서 농성중인 학생들.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학교에서는 전국 27개대 대학생 1천 5백여 명이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을 발족하였다. 경찰이 퇴로를 차단한채 강제 진압을 감행하자 학생들은 자연 건물로 피하여 농성으로 이어졌다. 10월 30일 '금강산댐'을 발표한 정부는 31일 경찰 8천여명을 투입하여 1525명을 연행하고 그 가운데 1295명을 구속했다.
172. 금강산댐 평화의 댐(1986.10-11)
(조선, 서울, 동아, 중앙, 한겨레 신문스크랩)
1986년 10월 30일 이규효 건설부장관은 '북괴'가 쌓으려는 "2백억톤의 물을 담은 거대한 금강산 댐이 무너질 경우...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완전히 황폐화하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재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기자회견을 벌였다. 이를 받은 언론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수공(물침략)'과 '물폭탄'에 대한 불안과 공포분위기를 확대하였다. 댐이 터지면 중부권일대가 물바다가 되어 서울의 63빌딩 허리까지 찰락찰락하게 되고 국회의사당 머리까지 꼴깍꼴깍 차게 된다는 것이다.
11월들어 교장선생이 학생들을 앞에놓고 손을 들어 구호를 외치고 선동을 해도 잡아가지 않고 오히려 보호해주는 데모, 통반별로 동원되어 금강산댐 추진하는 '북괴'를 규탄하는 관제데모가 수없이 열렸다. 대응댐으로 평화의 댐을 쌓자는 성금걷기 운동이 이어졌다. 봉급에서 본인들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성금을 원천징수 하였으며, TV 카메라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코흘리개 어린아이의 고사리 손으로 벙어리 저금통장까지 깨게했다. 그렇게 모금한 6백61억원의 성금은 어디에 쓰여졌을까, 그렇게 시작한 평화의 댐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토록 떠들석하던 분위기가 곧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다시 88년 여름들어 평화의 댐 문제가 언론과 국회를 통하여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설 시스템공학센터는 200억톤이 아니라 150억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금강산댐을 쌓으려해도 20톤짜리 트럭 1천대가 13년 동안 흙을 퍼 날라야 하며, 그렇게 쌓은 댐에 물이 다차는 기간은 14년이 걸린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모두 27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이 기간은 올림픽이 4년에 한번씩 치뤄지니까 6번 치르고도 3년이 남는 기간이다. 그런데 5공화국정권은 마치 2년뒤의 88올림픽을 치르지 못할 것처럼 요란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정부가 1986년 10월 30일 훨씬 이전인 봄부터 북한이 금강산 댐 건설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10월 30일에 발표를 했을까. 그 해 봄부터 직선제 개헌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 운동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28일에는 전국 26개대학의 학생들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을 가졌다. 5공화국정권으로서는 대학생들이 대립되는 가장 거추장스런 세력이었다. 경찰이 투입되어 빠져 나갈 구멍을 남기지 않고 밀어부치자 학생들은 모두 건물로 밀려들어갔다. 10월 29일 검찰은 학생들을 전원 연행 구속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겨레신문} 조차 없던 그 시절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건대사태'를 과장 왜곡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TV에서는 검붉고 푸르죽죽한 화면에 '광광광'하는 음산한 배경음악을 깔고 건대옥상에서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을 비춰댔다. 다음날, 금강산 댐 사건을 발표하였다. 많은 국민들이 불안속에서 '북괴는 물침략까지 준비하는데 철딱서니 없는 학생놈들이 무얼 안다고, 다 잡아들여!'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다음날 10월 31일, 헬기까지 동원한 상태에서 경찰 8500여명이 건대에 들어가 학생들 1500여명을 굴비엮듯이 연행하였다. 왜 금강산댐에 대해 발표한 10월 30일이 29일과 31일 사이였던가.
관제데모가 곳곳에서 벌어지던 11월에는 당시 재야 민주화운동의 구심체였던 '민통련'에 대한 해산명령이 떨어졌고, 민주화운동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주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종철군도 잡혀들어가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고문치사를 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사건은 그동안 숱하게 있었던 반공이데올로기의 선전.탄압과 같은 맥락의 사건이며, 민주화운동과 '애학투', '물침략'과 '물고문'은 무관하지 않으며, 다음해 급박하게 치달은 '4.13호헌 조치'와 6월항쟁도 내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댐 평화의 댐 사건을 1986년 10월이나 11월의 시점에서 정부가 발표한 내용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연관되는 다른 사건이나 전체의 시대상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는 시간의 긴 흐름 선상에서 어느 때인가, 전후 사정은 어떠한가, 다른 사건이나 인물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사회의 모순 그리고 사회의 모순구조에서 형성되는 대립되는 양대세력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역사적 과제 해결 방향에 합치하는가 역류하는가 등을 종합적.총체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한 평가를 우리는 역사적 평가라고 한다.
173.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1)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228)
1987년 2월 3일 박종철 군 추도 및 고문규탄시위 장면.
1987년 1월 14일 새벽,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수배를 받고 있던 친구의 소재를 추궁당하다가 수사실에 딸린 욕조에서 물고문을 당해 11시 20분경 숨졌다. 그러나 1월 15일 저녁 경찰의 공식 발표는 조사 결찰관이 '탁'하고 책상을 쳤더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물고문 혐의가 밝혀져 고문경관 두 명이 구속되고 내무장관, 치안본부장이 경질되었다. 세인의 기억이 희미해지던 5월 천주교 사제단의 폭로로 범인 축소 조작 사실이 밝혀져 경찰 간부 세명이 추가 구속되고 국무총리와 안기부장, 내무.법무장관이 포함된 개각이 단행되었다. 검찰총장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전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며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74. 학우여! - 이한열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표지) 정태원 찍음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경, 전두환.노태우 화형식을 끝내고 정문 앞에서 1천여명의 학생들과 경찰이 동시에 화염병, 돌멩이, 최루탄이 오가는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한열(연세대 경영학과 2년) 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코와 입에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어버린 이한열군과 마스크를 쓴 채 그를 붙잡고 분노의 눈길로 진압경찰을 바라보는 학생. 이 한 장의 사진은 6.10항쟁의 기폭제가 된 상징적인 사진이 되었다.
175. 6월항쟁 1- 명동성당 농성
(박용수, 민중의 길, 분도출판사, 1988, 411)
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여기서는 간선제를 통해 5공화국 정권을 승계할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대표를 선출하였다. 이날 전국 22개 도시에서는 박종철군 고문 살인 규탄 및 호헌 철폐 시민대회가 열렸다. 서울의 시위대 가운데 일부는 명동성당에 집결 농성에 돌입하였다.
6월 18일 전국에서 최루탄 추방대회.
176. 6월항쟁 2
(마리오 암브로지우스, 분단한국, 열화당, 1989) 김경수 찍음
여학생들도 화염병을 들고 시위에 참가.
177. 6월항쟁 3 - 최루탄을 쏘지 마라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15) 한국일보 고명진 기자 촬영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동 4거리에서 8천여 시위군중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경찰이 다탄두 최루탄을 일제히 발사하자 군중 속에서 갑자기 대평 태극기가 펼쳐지고 그 태극기 앞에 위통을 벗어 던진 청년이 '더 이상 최루탄을 쏘지 마라'며 아스팔트를 달렸다. 그 청년의 절규는 정당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국가 공권력, 그리고 이 사회의 모든 오류와 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양심의 상징 같았으며, 이 사회의 폭력, 탐욕, 무지, 저속, 잔인, 부정에 대해서 몸부림치는 청년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178. 6월항쟁 4 - 6.29 선언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329)
1987년 오전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직선제 수용 선언을 보도한 신문 호외를 읽고 있는 시민. 1987년 6월 29일 오전 9시5분, 서울 관훈동 집권 민정당사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씨의 사면.복권, 지자제 실시, 언룬자유 보장 ... 등 6.29 민주화 선언 8개항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은 "내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느낀다"고 하였다. 노태우는 6.29 선언이 자신의 '고독한 결단'에 의해 나온 것이라 하였으나, 노태우.전두환의 사전협의에 의한 것이었다. 6.29선언은 6월항쟁의 획득물이라는 측면과 지배블록의 '예방혁명' 조처라는 측면이 포함되어있다.
179. 7.8.9 노동자투쟁 1 - 길을 메운 현대 노동자들
(사회사진연구소, 답하라 전세계노동자, 새길, 1991, 69
180. 7.8.9 노동자투쟁 2 - 이석규 장례 행렬
(한길사,한국사-20, 1994, 31)
최루탄에 의해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장례행렬, 1987년 8월 22일.
181. 7.8.9 노동자투쟁 3 - 왜곡광고
(한국일보, 1987.8.18, 하단광고)
1987년 7.8.9 노동자 투쟁이 한창이던 8월 18일 한국일보에 실린 광고. '당파성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파싸움을 끌어들이고, 고용주는 부모, 근로자는 자식같는 존재이므로 고용주는 종업원을 자식으로 대하고 종업원은 고용주를 부모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적인 봉건주의 논리를 펴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왜곡하는 선전이다.

'노사분규?'
지금 이시간에도 외화획득의 귀중한 시간이 소비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나친 노사간의 마찰은 온 국민의 바램을 역행하는 처사입니다.
당파싸움 속에 온백성이 꿂주렸던 이조말기- 가난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받아 36년간이란 긴세월을 나라잃은 설움에 울어야 했던 눈물겹고 슬픈 현실을 우리는 가슴속깊이 되새기면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먹을 것 못먹고, 입을 것 못입고, 놀것 못놀고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였던가요.
고용주는 가정으로 치면 부모가 아닙니까? 부모는 자기가 먹고 싶은것을 참고 때로는 굶주려가면서도 자식에게 만큼은 잘 먹이려고하는 숭고한 마음을 갖고 있읍니다. 부모가 사치하고 허영에 들떠있다면 어느 자식이 부모를 순종하고 존경하겠읍니까?
또, 근로자는 가정으로 치면 자식이 아닙니까? 자식된 도리로 부모에게 대들면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겠읍니까? 우리 모두 어디 불평불만이 없겠읍니까? 국제경쟁이 높아진 지금 대의신용을 지키지 못하면 우린 또다시 경제대국들에 의해 식민지가 될수밖에 없읍니다. 우선 일을 하면서 노사간에 대화로서 해결토록 합시다.
지나친 노사간의 마찰은 온국민의 바램을 역행하는 처사입니다. 고용주는 종업원을 자식으로 대하고 종업원은 고용주를 부모처럼 생각하면서 대화한다면 5천년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민족의 멋진 모습을 또한번 세계에 과시할 수 있을 겁니다.

182. 대선 벽보
(마리오 암브로지우스, 분단한국, 열화당, 1989, 33)
183. 재야계보도
(한겨레신문, 1994.4.15)
1980년대 재야운동이 전국규모의 공개조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83년 김근태씨가 청년운동단체로 결성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었다. 이후 이부영씨 등이 1984년 조직한 민중민주협의회가 나타났다가 1985년 모든 재야세력을 망라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었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내세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재야와 시민단체를 포괄하는 범국민적인 조직으로 결성돼 직선제 헌법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이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재야는 후보단일화파와 비판적 지지파, 독자후보추대파로 나뉘었다.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내세웠던 임채정 이길재 이해찬 등은 평민연을 거쳐 88년 평민단에 입당하여 13대 총선에서 제도정치권으로 편입하였고, 후보단일화파 가운데 일부는 한겨레당(공동대표 제정구)으로 제도정치의 문을 두드렸고, 독자후보파의 소장세력을 중심으로 일부 그룹이 민중의당(대표 정태윤)을 결성해 총선에 출마했다. 1988년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결성돼 민통련의 법통을 이었다. 같은해 정당추진을 준비하는 인사들이 잇따라 탈퇴해 11월 장기표 등이 중심이돼 진보정당준비모임을 결성했다가 1990년 3월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로 이부영 장기표 제정구 등이 모여 정당화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또한 제도야당과 어떻게 관계를 정립할 것인가 순서를 둘러싸고 '선통합'과 '선창당'으로 나뉘었다. 이부영 제정구 유인태 등 선통합파는 야권통합을 주장하며 '범민주통합수권정당추진회의'(통추회의)를 추진하나 실패한 뒤 이부영 유인태는 민주연합을 거쳐 이기택 총재의 옛 민주당과 합당하고 제정구는 민-민주당 통합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장기표 이재오 조춘구 등 선창당파는 민중당을 창당해 민중노선을 내세우며 14대 총선에 나섰으나 다시 패배를 겪었다. 1992년에는 전노협 전교조 등 부문운동단체들이 전민련과 함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을 결성하였다.
184. 88 통일운동
(한길사,한국사-20, 1994, 25)
서로 팔짱을 낀 채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 1988년 6월 홍제동.
185. 88 노동법개정투쟁 (1988.11.13)
(사회사진연구소,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동광출판사, 1989, 22)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 1987년 7.8.9 치열했던 노동자파업투쟁을 집중시켜 5만여명의 전국 노동자대중이 결집, 6.25전쟁 이후 최대의 노동자대회가 이루어졌다. 여의도까지 행진하여 국회의사당 앞에서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개폐촉구대회]를, 전경련 앞에서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를 열었다.
186. 88 농민투쟁(88.11.17)
(박용수, 민중의 길, 분도출판사, 1988, 271)
1988년 10월 31일 한국 가톨릭 농민회, 한국 기독교 농민회 총연합 등 13단체, 농업 부분별 생산자 단체가 연합, '전국 농민단체 협의회'를 결성하고 '전농협' 주최로 11월 17일 여의도 광장에서 '농축산물 수입저지 및 제값받기 전국농민대회'를 벌였다.
187. 전두환 백담사 은둔(1988.11.23)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341)
1989년 백담사 은둔 1주년을 맞아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 및 봉헌법회에서 불경을 외우고 있는 모습.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오후 3시 20분, 안현태 전 경호실장 등 수행원과 백담사에 도착. 그후 25개월 동안 전두환은 백담사에 머물었다. 백담사 생활을 한지 1년후 전두환은 찾아온 신도들과 대화하면서 " 몇 사람 손봐주고 싶었던 마음을 극복했다"고 신앙고백을 했다고 한다. 또 주지에게 "모든 일이 내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남을 탓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백담사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으니 나는 복있는 사람이죠"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1996년 구속되기전 연희동 골목에서 그의 '똘마니'들을 거느리고 기자회견을 할 때 그 살벌한 표정을 보면 절 생활 25개월은 별무효과.
188. 전교조결성(1989.5.28)
(사회사진연구소,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동광출판사, 1989, 280)
1989년 5월 28일 연세대에서 전국교원노동조합 발대식.
1986년 5월부터 시작한 교육민주화선언은 7월까지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교육문제를 국민 앞에 전면적으로 부각시켰고, 87년 6월항쟁 이후 교육민주화운동역량은 9월 27일 [전국교사협의회]로 결집되었다. 전교협은 창립이후 {전국교사신문}을 비롯해 지역별 교사신문을 발행하여 선전활동을 강화하였고, 87년 하반기부터 교육악법개정운동을 벌여 서명운동, 집회 등을 통하여 교육관계법상의 독소조항을 부각시켰다. 1988년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전교협은 3만8천6백43명이 서명한 교육법개정안을 국회에 청원하였다. 이러한 열기는 11월 20일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참교육 실천을 위한 전국교사대회'로 모아졌다. 전교협은 12월 전국임원연수에서 교직원노조를 건설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후 전국대의원대회 결의와 시도별 결의대회, 89년 5월 14일 1만 5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비위를 결성하고 전국교직원노조발기인대회를 거쳐 5월 28일 결성하였다. 갖은 탄압을 뚫고 연세대에 모인 1천 5백여 명의 교사들은 '전교조 깃발 아래 참교육 쟁취하자'는 함성속에 연세대에서 전교조 발대식을 열었따다. 결성선언문에서 전교조는 '민족.민주.인간화교육 실천을 위한 참교육운동을 더둑 뜨겁게 전개해 나가겠다'고 선언하였다.
189. 3당합당 선언(1990.1.22)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345)
노태우 대통령이 22일 저녁 3자회담을 마치고 청와대 접견실에서 두 김 총재와 자리를 함께한 가운데 민정.민주.공화 합당을 선언했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긴급회담을 갖은 노태우 대통령은 민정.민주.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당명칭은 민주자유당(가칭)으로 하기로 했다. 신당은 우리 헌정사상 계엄령이나 쿠테타 등 물리적 강제없이 집권당과 전통야당의 일부가 결합하는 최초이 사례가 되었으나, 내각제 중심의 개헌을 통한 권력배분을 전제로 합당을 선언하여 여소야대를 만들어준 국민의 주권을 짓밝고, 6공화국 정권의 존립 근거를 스스로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3당은 통합하여 2월 9일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출범하였다. 이들의 합당은 4당 구조로는 앞으로 집권 연장이나 권력배분에 참여할 수 있는 폭이 축소될 것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낀 세 정당이 안정적인 권력분점체제를 구축하려는 데 있었다. 또한 기층민중운동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에 위기감을 느끼고 보수대연합을 통해 기득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전노협 결성일 3당 합당을 선언한 것이 그러한 의도를 바로 보여준다.
190. 전노협 결성(1990.1.22)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 준비모임, 창당소식 3, 1990.2.5)
1990년 1월 22일 낮 12시 40분 경기도 수원의 성균관대 자연과학대캠퍼스 강당에서 열린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대회에서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된 단병호씨가 '전노협출범'을 공식 선언하고 있다.
전노협은 이날 대회 예정장소인 서울대가 경찰에 의해 원천봉쇄되자 대회장소를 수원으로 바꿔 전국에서 모인 노조 대의원 4백여명과 학생 재야인사 등 6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습적인 창립대회를 열고 초대위원장에 단병호(41)씨를 선출했다. 전노협은 이날 창립선언문을 통해 " 이땅의 노동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경제.사회.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자본과 권력의 탄압에 대처할 수 있는 전국조직을 갖게 됐다"고 선언하고 "전노협으로 결집한 우리는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기본권을 쟁취함으로써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노협은 직종, 남녀, 학력간 차별임금 철폐, 고용안정 보장제도 쟁취,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예방할 수 있는 안전한 작업환경 확보, 노동 3권의 완전한 쟁취,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철폐 등 12개 항의 강령을 채택했다.
전노협은 전국 14개 지역노조협의회와 2개 업종노조협의회에 속한 6백여개 단위노조 조합원 20여만명이 전노협에 가입했으며 전국교직원노조, 전문기술노련, 화물운송연맹이 참관조직으로 참가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날 대회 시작 직후인 오후 1시께 5개 중대 7백여명을 학교안에 투입, 대회장 주변을 봉쇄한 데 이어 대회가 끝난 1시 40분께 대회장으로 들어가 모두 1백34명을 연행했다.
전노협 창립선언문
우리는 오늘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깃발을 높이 들어 이 땅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우리 노동자가 이제까지 얼마나 긴 세월을 비인간적인 생활조건과 정치적 무권리 속에서 노예적인 생활을 강요당해 왔던가. 그러나 보라! 억압과 굴종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역사의 전면에 우뚝 일어서서 힘차게 진군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전국적 대오를!
우리 노동자는 생산의 직접적인 담당자로서 이 사회를 유지시키고 역사를 발전시켜온 주체이다.
이 땅의 노동자들은 노동자와 전민중의 인간다움 삶을 쟁취하기 위해 오랫동안 줄기차게 노동운동을 전개해 왔다. 저 멀리 선배노동자들의 피어린 투쟁과 70년대 이후 민주노동운동이 발전, 그리고 장엄한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를 계승하여 우리는 오늘 민주노조의 전국연대 조직, 전노협의 깃발을 힘차게 일으켜 세웠다.
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영구화하기 위해 노동자의 조직적 진출과 투쟁을 가로막았던 자본가와 국가권력의 온갖 탄압과 회유를 분쇄하고, 우리는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광산에서 거리에서 불굴의 투쟁을 전개해 왔다. 단위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투쟁 속에서 '지노협'과 '업종협'을 결성하였으며 마침내 지역과 업종을 뛰어넘어 전노협으로 결집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땅의 노동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경제.사회.정치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자본과 권력의 탄압에 통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국조직을 갖게 되었음을 선언한다. 전노협의 건설로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사협조주의와 어용적.비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해나갈 수 있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조직적 주체가 탄생하였음을 밝힌다. 우리는 또한 정권과 소수 재벌의 억압과 수탈을 제거하여 4천만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제민주세력과 힘차게 연대해나갈 수 있는 전국노동자의 조직적 대오가 출범하였음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전국노동자의 단결의 구심인 전노협으로 결집한 우리는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기본권을 쟁취함으로써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해 가열찬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우리는 광범한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는 경제적 이익실현을 위한 투쟁으로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우리의 조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기초 위에서 노동자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사회구조의 개혁과 조국의 민주화, 자주화,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제민주세력과 굳게 연대하여 투쟁해나갈 것이다.
이와 같은 기본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민주노동운동의 조직역량을 확대강화하는 한편 업종별.산업별 공동투쟁과 통일투쟁을 발전시키는 속에서 기업별 노조체계를 타파하고 자주적인 산별노조의 전국중앙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총매진할 것이다.
우리는 전진을 가로막는 자본과 권력의 탄압과 온갖 장애를 물리치고 우리는 키필코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우리의 투쟁은 정의로운 것이며, 제민주세력을 비롯하여 많은 국민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고, 우리의 나아갈 길이 역사의 발전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억압과 굴종의 세월, 어용과 비민주의 시대를 청산하고 전노협의 깃발 아래 강철같이 단결하여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향해 힘차게 진군하자!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만세!
노동운동 만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90년 1월 22일

191. 철거되는 레닌 동상
(월간 말, 1991년 10월호)
노동자들에 의해 철거되는 레닌 동상.
1991년 8월 29일, 소련최고회의는 소련 전역에서 공산당활동을 정지시키는 결의안을 찬성 283, 반대 29, 기권 52표로 통과시켰다. "당은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자계급의 전위이지 않으면 안된다. 당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훌륭한 모든 분자들, 그들의 경험, 그들의 혁명적 정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업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헌신성을 흡수해야만 한다. 당이 진정으로 전위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당은 혁명적 이론으로, 운동의 법칙에 대한 과학으로, 혁명의 법칙에 대한 과학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레닌주의의 기초])는 소련공산당이 해체되었다
192. 김영삼 대통령 당선(1992.12)
(월간 길을 찾는 사람들, 1993년 1월호)
1990년 2월 3당합당 이후 꼬박 2년이 지난 92년 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중학생 때부터의 꿈을 이룬 김영삼이 민자당사로 향하고 있다.
193. 세계 노동절 기념대회(1993)
1993년 5.1세계노동절 기념집회,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3만여 명의 노동자가 모여 104주년 노동절 집회를 열었다. 노동절을 없앤지 35년 만에 처음으로 허용된 집회였다.
194. 원진레이온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31) 동아일보 김동철 기자 촬영
어두컴컴한 내부, 높은 습도와 온도, 쇠가 녹는 현장, 쇠부속품은 썩어가고 나무에 양초를 먹여야 하는 내부, 방독면을 쓰지 않고는 근무할 수 없는 방사과의 작업장 모습.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송두리채 파괴하는 살인적 독가스 이황화탄소가 유령처럼 배회하는 국내유일의 인견사 생산업체, 경기도 미금시 도봉동 윈진레이온 공장. 한국전력에서 "지독한 이황화탄소의 독성 때문에 2만볼트 고압선의 수명이 보통 20년이나 원진레이온 공장 앞 도농역의 고압선은 1년에 한 번씩 교체해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1959년 화신재벌의 박흥식은 일본의 공해산업 가운데 하나였던 인견사공장설비를 싼값으에 국내로 이전해왔다. 더욱이 이 기계는 이미 20년 이상이나 사용한 낡은 기계였다. 이 공장 노동자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짧은 생애를 에두르고 남을 길고 긴 실을 뽑느라 이황화탄소를 산소처럼 호흡하며 청춘을 바쳐 일했다. 그러나 이들은 돈에 눈이 어둔 회사와 우리 사회의 무관심 속에 이황화탄소중독으로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다. 한편 직업병예방에 치중해야 할 노동부는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에게 두가지 이상 중독의 증이 발견되어야만 직업병으로 판정하는 직업병 인정기준을 적용해 치료가 불가능한 '닫힌 문'에 들어서기를 강요해왔다. 원진레이온은 1993년 6월 폐쇄결정이 났으며, 1993년 8월까지 이황화탄소 중독과 관련해서 사망한 사람은 15명, 노동부로부터 직업병으로 판정받아 병상에서 신음하는 환자가 2백57명에 이르고 있다. 원진레이온의 법정관리를 맡고 있는 산업은행은 1993년 7월 10일 정부방침대로 폐업해 기계를 멈추었다. 그러나 이회사를 마지막까지 지켜온 8백여 노동자들은 아직도 멈춘 기계를 붙들고 공장 안팎에서 직업병대책과 생계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의 이회사를 퇴사했던 노동자는 줄잡아 1만3천여명에 이르고 있다.
195.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농민 시위
(중앙일보, 1993.12.9)
1993년 12월 1일 전주 다가공원에서 열린 '쌀개방반대결의대회'에서 한 여성이 '우리쌀을 애용하자'는 내용의 피킷을 두손으로 번쩍 치켜든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농민들의 반대에도 정부는 12월 5일 '쌀시장 개방'을 발표했고, 정부의 무책임한 농정을 질타하는 농민과 사회단체들의 시위가 전국에서 이어졌다.
196. 삼풍백화점 붕괴(1995.6.29)
(중앙일보, 1995.6.30)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5층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큰 기둥 양쪽에 남아있는 벽 사이 지하 복판에 시멘트 기둥 조각 철근 등이 뒤엉켜 있고, 밑바닥에는 아직 수많은 사람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무너지기 전 조짐을 발견하고도 돈벌이에 눈이 멀었던 자본가의 추악함도 드러났다. 이 참사로 5백 1명이 숨지고 9백 37명이 다쳐 한국전쟁 이후 단일사건.사고로는 최대의 인명피해를 냈다. 그러나 참사 속에서도 수많은 자원 봉사자와 119구조대가 구조활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해 4월 27일에는 대구 도심 한복판 지하철 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폴발해 1백 1명이 숨지고 수억원의 재산피해를 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이후 불과 6개월 만에 또 대형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는 대구백화점 상인점 신축공사 하청업체인 표준개발이 천공 작업을 벌이다 지름 1백mm의 가스관을 파손시켜 새나온 도시가스가 70미터 가량 떨어진 지하철 공사장에 고여 있다가 폭발한 것이다. 정부는 사고 직후 각종 안전관리 대책을 내놓았지만 두달 뒤 다시 삼풍백화점이 무너짐으로 헛된 공약이 되고 말았다.
197. 5.18 학살자 처벌과 특별법제정 운동(1995. 7-12)
지난 1980년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고 집권한 신군부를 단죄하기 위한 특별법이 1995년 12월 19일 제정되었다. 광주문제는 95년 7월 검찰이 5.18관련자 들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림으로써 역사의 몫으로 넘겨지는 듯 했다. 그러나 7월 31일 고려대 교수들의 시국성명을 시작으로 학계 종교계 사회단체 등의 요구가 줄기차게 이어지면서 특별법 제정은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았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적 요구에 밀려 11월 24일 특별법을 제정을 수용하였다.
이러한 특별법 제정과 함께 1995년은 학살자 처단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 두 전직 대통령을 국민과 역사의 이름으로 심판대에 세운 해이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 비자금 보유설'을 계기로 검찰은 11월 16일 노씨를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했다. 이어 검찰은 12.12 쿠테타 세력으로까지 수사를 확대하여 12월 3일에는 노씨에 이어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군사반란 수괴 등 6개 혐의로 안양교도소에 수감하였다.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 이후 16년 만에 그 주역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된 것이다.
198. 민주노총 창립(1995.11.11)

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출범하여 3공화국 이후 처음으로 복수노총 시대가 열렸다. 재야 15개 산업별(업종) 조직과 8백 61개 노조 조합원 41만 8천 154명이 가입하였다. 민주노총은 조직력과 주요사업장 장악력에서 한국노총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대해 정부는 민주노총 설립 신고서를 반려하고 권영길 초대위원장을 구속하는 등 강경 대응으로 치달았다.

민주노총 창립선언문
생산의 주역이며 사회개혁의 주체, 역사발전이 원동력인 우리들 노동자는 오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중앙조직,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을 벅찬 가슴으로 선언한다.
저 멀리 선배 노동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탄압 속에서 민족해방과 조국의 자주적 독립을 위해 피어린 투쟁을 전개했다. 해방 이후 우리 노동자들은 독재 정권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민주노조를 지켜왔고, 87년 노동자투쟁 이후 2000여명에 이르는 구속자와 5000여명이 넘는 해고자를 낳는 등 온갖 탄압 속에서도 끊임없이 조직을 확대 발전시켜 왔으며, 전국적 공동임투와 노동법 개정투쟁, 사회개혁 투쟁 등을 전개하면서 통일 단결을 강화해 왔다.
이에 우리는, 빛나는 투쟁의 전통과 통일 단결된 힘을 기초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전국중앙조직을 결성한다.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우리는 인간다운 삶과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조건의 확보, 노동기본권 쟁취, 노동현장의 비민주적 요소 척결, 산업재해 추방과 남녀평등의 실현을 위해 더욱 가열차게 투쟁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통해 전체 국민의 삶의 질을 개선함과 더불어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가열찬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국경을 넘어서서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하고 침략전쟁과 핵무기 종식을 통한 세계 평화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와 조직의 확대.강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산업별 공동투쟁과 통일투쟁에 기초하여 산업별 노조체제의 견결한 투쟁대오를 갖춘 전국중앙조직으로 발전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자주성과 조합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전체 노동조합운동의 통일 단결을 위해 매진할 것이며, 제민주세력과 연대하여 정치세력화를 실현할 것이다.
자본과 권력의 어떠한 탄압과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 보장되는 통일조국, 민주사회 건설의 그 날까지 힘차게 전진하자!
- 95년 11월 11일

199. 민주노총 창립 노동자대회 (1995.11.12)
11일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대의원 대회를 통하여 민주노총 창립을 선언하고 저녁에는 노천강당에서 문화행사가 이어졌다. 다음날 12일 민주노총은 연세대에서 여의도까지 행진하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 노동자 대회를 열었다.
200. 내릴 수 없는 깃발이여!
(사회사진연구소,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동광출판사, 1989, 272)
역사가 이어지는 해방 사회로 가는 길은 잘 닦여진 탄탄대로가 아니며, 가득한 안개 속에서처럼 전망이 뚜렷하지도 않다. 그러나 역사의 발전은 그 시대의 자기 모순을 해결하면서 이상을 현실 속에서 실현시켜나가는 과정이다. 없어야 할 것은 없애고, 있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드는 파괴와 창조, 노동과 투쟁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좋은 사회, 해방 공동체를 향한 깃발을 내릴 수 없다.

출처 : 너와나에 인생 여행            글쓴이 : 여주몽 님           원문보기
출처 :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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