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스크랩] 한국민족청년회 "민족정기운동"투쟁 목록~!!

@로마의휴일 2009. 2. 5. 22:56

한국민족청년회 "민족정기운동"투쟁 목록~!! 스팸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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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골공원에서ㅡ김친주최"사회양극화반대" 집회에서~박정희가 쓴 "삼일문현판" 철거과정을 설명하고있다.                

   

 

 

ㅡ한국민족청년회가 함께한 민족정기운동ㅡ 

 

 1,백범암살범 안두희처단운동,참여.(성공)

 

 1,민족반역자 안두희처단 박기서동지 탄원 서명운동,참여.(성공)

 

 1,국민학교 명칭개정운동,참여.(성공)

 

 1,왜군장교 "박정희 기념관건립"반대 서울시청앞1인시위 운동,참여.(성공)

 

 1,민족운동의 성지,탑골공원에 왜군장교 박정희가 쓴"삼일문현판"철거운동 "주도" (성공)

 

 1,성남고등학교 왜군장군 "김석원동상철거"운동,참여.(성공)

 

 1,광신고등학교 민족반역자 "박흥식동상철거"운동,참여.(성공)

 

 1,미군 고압선사망 전동록선생 범국민대책위운동,참여. (성공)

 

 1,미군장갑차 "여중생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운동,참여.(성공)

 

 1,이라크"파병반대 국민행동" 운동,참여.

 

 1,WTO 쌀개방반대운동,참여. 

 

 1,인천 자유공원 동족상잔의 원흉 "맥아더동상 철거운동" 참여,

 

 1,한,미  FTA협상 반대운동,참여.

 

 1,신친일 민족반역자 김완섭작가 응징운동,참여.

.

 1,여름<민족통일>학교 운영(2회째진행).

 

 1,"친일인명사전"편찬발간사업 참여. 

 

 1,조중동 광고불매운동"언론소비자주권 국민켐폐인"운동 참여.

 

 ㅡ한민청~공식후원계좌(농협 013-02-233448 예금주:한민청 or 우경태)ㅡ

 

 


▲민통련 간부 수련회 사진으로 왼쪽에서 세번째가 곽태영 선생. 이 사진은 당시 민통련 의장이던 문익환 목사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사진이라고 한다. 임채정 전 국회의장, 백기완 선생 등의 모습이 보인다.


                                                                     ㅁ 민족정기를 위하여~!!

"친일파 현판, 우리가 뗐소!" 23일 새벽 탑골공원 삼일문 현판을 제거한 것으로 밝혀진 곽태영(가운데), 우경태(오른쪽) 씨가 지난달 26일 '현판제거 촉구집회'를 보도한 오마이뉴스 기사를 들어보이며 "진작에 제거했어야 할 친일파 현판을 오늘에서야 떼어냈다"고 말하고 있다. 삼일문 현판은 이미 세조각으로 찢겨 흉물이 돼있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정운현기자] 

박정희 친필'삼일문'철거 비화 있다 2001-12-01 6695 

 

지난달 23일 새벽 2시 30분경 한국민족정기소생회 곽태영(郭泰榮·65·박정희기념관반대 국민연대 공동대표)대표와

한국민족청년회 우경태(禹瓊泰·39)집행위원장은 서울 종로 탑골공원 정문 현판인 ‘삼일문’을 철거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 향린교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철거이유,

경위를 밝힌 뒤 현장에서 경찰에 긴급체포됐다.

 

사건 발생후 언론에 보도된 내용은 여기까지가 전부다.

평소 이들과 교류를 가져온 덕분에 이 사건의 발단,경과,이후의 처리결과까지를 소상히 알고 있는 

필자는향후 역사적 기록을 위해 감춰진 ‘비화’를 포함해 이 사건의 '전부'를 여기 기록해 두기로 한다.

 

우선 이 사건을 전후해 필자는 곽태영 선생 일행과 서너 차례의 만남이 있었다.편의상 날짜순으로 기록해 두겠다.

 

지난 10월 26일 소위 ‘10·26사건’22주기를 며칠 앞두고 오후에 곽태영 선생이 회사로 나를 찾아왔다.

시간이 마침 기사마감 때여서 지하다방으로 모시지 못하고 로비에 선 채로 얘기를 나누었는데 내용인즉

 26일 탑골공원 앞에서 행사를 가지면서 전격적으로 ‘삼일문’을 철거할 계획이라며 취재를 부탁하셨다.

 필자는 ‘성공을 빈다’는 얘기를 전하고 올라와서 사회부장에게 이같은 얘기를 전했다.

 

26일 사회부 기자와 사진부 기자 각 1명이 일찌기 탑골공원 시위현장에 파견됐다.

 

사진부 기자에게는 시위도중 전격적으로 삼일문을 철거할 계획이니 시위대를 눈여겨 볼 것을 특별히 주문했다.

그러나 이날 삼일문 철거는 불발로 끝났다

 

.이미 정보가 새어나가 경찰들이 삼일문을 겹겹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거사주최측에서 언론사 몇 군데 취재를 부탁하는 과정에서 소문이 흘러나간 모양이었다.

 

지난 11월 23일 아침 8시경 잠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내가 한통의 전화소식을 전해왔다.

 

아내가 곽 선생과 친분이 깊은 S선생님에게서 한 시간전에 전화가 왔었다며 내게 전화를 부탁하셨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S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곽 선생에게서 정기자에게 연락을 부탁받았다”며 

 

“오늘 오전 10시 향린교회에서 곽 선생 일행이 삼일문 철거 관련 기자회견을 가질 계획이니 취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나에게도 연락을 안한걸 보니 이번에는 분명히 성공했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서둘러 출근을 해서 사회부에 취재를 부탁하고 나도 향린교회(담임 홍근수 목사)로 향했다.

 

도착하니 9시 40분경이었다.

교회 주위에는 벌써부터 기자들과 경찰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당에 삼일문 현판 전각 조각들이 부숴진채 벽에 기대 있었다.

 

마당옆 1층 강당을 들어서니 기자회견 준비가 한창이었고,강당 구석에 부숴진 ‘삼일문’이 감춰져 있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우리회사 사진기자에게 얼른 찍어둘 것을 부탁하고 현장에 있던 육철희 신시민운동연합 의장에게 

곽 선생 일행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더니 2층 홍근수 목사 방에서 식사중이라고 일러주었다.

 

2층 홍 목사 방으로 들어섰더니 곽태영 선생과 우경태 위원장,

그리고 이관복(70) 박정희기념관반대 국민연대 공동대표가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홍 목사는 기자회견문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으셨다.나는 식사를 하는 세 분에게 기자회견후에 경찰에 연행되면

 제 때 식사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양껏 드시라고 말씀드리고는 몇 마디를 물어보았다.

 

곽 선생은 “보안유지를 위해 이번에는 정기자에게도 연락을 안했네”하시며 거사 성공을 만족해 하시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10시가 조금 넘어 나는 곽 선생 일행과 함께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섰다.

 

벌써 신문,방송 등 각 언론사 기자들로 1층 강당은 가득찼고,정문 입구에는 

곽 선생 일행을 연행하러온 사복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기자회견장에 곽태영,우경태,이관복 3인이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그들의 등뒤 칠판에는

왜군장교 박정희가 쓴 삼일문 현판을 민족정기의 이름으로 철거한 우리들의 입장을 밝힌다-민족정기소생협회’라는 

문귀가 적힌 전단이 붙어 있었다.

 

신혼여행을 갔다가 막 도착한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의 사회로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먼저 이관복 대표가 삼일문의 개요에 대해 설명했다.

이 대표는 “이번에 철거한 삼일문은 지난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필로 쓴 것으로,

앞서 해방후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이 쓴 것을 떼내고 대신 건 것”이라며 

 

“민족의 성지에 걸린 친일경력자의 글씨를 뗀 것이 위법이라면 이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 합법이냐”고 되물었다.

이 대표는 “서울시는 시청 창고에 보관중인 김충현 선생의 친필 현판으로 교체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철거 당사자 소개와 실행과정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먼저 우경태 집행위원장은 “지난 92년부터 백범 시해범 안두희 응징에 관여하면서 민족정기구현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고자신을 소개하고는 “서울시가 탑골공원 성역화작업을 하면서 그 첫번째는 일본군 장교출신의 박정희가 쓴 현판을

 교체하는 것이 첫번째라고 생각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오늘(11월 23일)새벽 2시경 현장에 도착해 길이 3미터 가량의 장대에 낫을 연결해 2차에 걸친 작업끝에

 삼일문현판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계속해 곽태영 선생이 보충발언을 했다.곽 선생은 “수 차례에 걸쳐 서울시에 박정희 친필 현판을 교체해 줄 것을

 진정,탄원하였지만 번번이 서울시가 묵살해 이번에 우리가 민족정기 수호 차원에서 철거했다”고 밝히고는

 “단식농성을 할까도 생각했다가 이번에 우경태 동지의 건의를 받고

 비밀리에 거사를 도모한 결과 마침내 이를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장 테이블 위에 갈갈이 찢겨진 ‘삼일문’현판 조각이 올려놓여져 있었다.

 

우경태 위원장은 “철거해서 향린교회로 가져온 후 만에 하나 다시 탈취당해 재사용될 것을 감안해 향린교회에오자마자

 예리한 정으로 ‘박정희’이름 석 자와 그 아래 낙관 부분을 뭉개고는 다시 이를 여러조각으로 부쉈다”고 말했다.

(필자가 보기엔 현판이 가로로 네 조각 정도로 파손돼 있었다.) 

 

이어 박정희기념관반대 국민연대 공동대표를 겸하고 있는 홍근수 목사가 국민연대 명의의 ‘성명서’를,

우경태 집행위원장이 당사자 2인 공동명의의 ‘성명서’를 각각 낭독했다.

 

이 역시 역사기록차원에서 전문을 밝혀둔다.

 

<성명서>

3.1운동 발상지이고 민족정기의 발원지로 성지인 탑골공원 정문에 우리의 독립군을 학살하고 5·16쿠데타로 

헌정을 파괴한 왜군출신 박정희가 쓴 현판이 1967년부터 34년간 걸려 있었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 후손으로서는 매우 창피한 일이다.오랜 세월동안 뜻있는 애국시민과 애국단체들이

 서울시청,청와대 등에 기왕에 설치했던 일중 김충현 선생의 친필 현판으로 원상복구하기를 청원했으나

 끝내 응답조차 하지않고 전직 대통령임을 내세워 거부해 왔다.

 

이에 울분해 있던 한국민족정기소생회 대표 곽태영 선생과 한국민족청년회 집행위원장 우경태 선생이

 2001년 11월 23일 새벽에 단호히 이를 철거하는 의거를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박정희기념관반대 국민연대는 두 분의 의거에 오랜 한을 풀며 온 국민에게 지지 의사를 밝히는 바이다.

아울러 민족정신의 함양차원에서 당국도 도에 지나친 위법성 논란을 삼가해 주기 바랍니다.

 

2001.11.23 박정희기념관반대 국민연대.

 

<성명서>

3.1운동 발상지인 탑골공원 정문에 우리 독립군을 학살한 왜군장교 박정희가 쓴 ‘삼일문’현판이 1967년부터 

34년간 계속 걸려 있었다는 것은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행위로,이는 지하에 계신 순국선열들을 통분케 한,못난

처사로서 우리 겨레의 분노를 금치 못하게 하는 못난 일이었다.

 

박정희가 피살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뜻있는 애국인사들과 애국단체에서 시 당국과 관계요로에 수차 박정희의 현판을

 떼어내어 교체할 것을 건의,진정,탄원하였으나 서울시 당국은 이를 묵살하고 말았다.

 

우리는 친일파 천국이 되어 민족정기가 쇠퇴한 현실이지만,

민족의 부끄러운 현상이 더 이상 계속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어서 개인의 희생을 무릅쓰고 철거를 결행하게 되었으며,

국민의 존경받는 애국지사의 현판이 삼일문에 복원,헌양되기를 바란다.

 

곽태영 한국민족정기소생회 대표(박정희기념관반대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

우경태 한국민족청년회 집행위원장.2001.11.23 [향린교회]

 

기자회견을 마치고 이들은 부숴진 삼일문 현판을 교회 앞마당으로 들고나와 소각할 예정이었다.

 

곽 선생은 이미 신나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마당에 현판 조각을 모아놓고 곽 선생이 그 위에 신나를 뿌린 후 불을 그으려는 순간 사복 경찰들이 급습,

이들을 격리시키고는 부숴진 현판을 수거했다.

 

우경태 집행위원장은 마당으로 나오자마자 이미 사복경찰관 한 사람에게 붙잡혀 꼼짝달싹도 못하는 지경이 됐다.

이 과정에서 곽 선생 일행과 경찰들간에 몸싸움이 있었고,

일행이 교회문을 나서자 경찰들이 에워싸기 시작했다.

 

곽 선생은 “우리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경찰서로 자진출석하기로 했는데 왜들 이러느냐”며 항의했다.

 

곽 성생은 자신이 종로경찰서 수사과장이라고 밝힌 사람에게

“당신도 친일파 글씨 떼어내니 기분 좋지? 말해봐요!”라고 묻자 그는 대답은 않고

“연행해!”하고 한 마디를 던지자 경찰관들이 즉각 두 사람을 경찰차로 끌고가 연행해 갔다.

 

경찰승합차에 올라탄 우경태위원장은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우리는 정당하다,우리는 전혀부끄럽지않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필자는 두 사람이 탄 경찰차가 사라질 때까지 한 동안 현장에 서 있었다.

육철희 의장과 함께 시청앞까지 걸어오면서 필자는 곽 선생이 작년 문래동 박정희 흉상 철거후 아직 재판(12월 12일 재판임)이 진행중이어서 어쩌면 이번에 진짜로 ‘고생’을 하실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주고 받았다.

 

사건 다음날인 지난주 토요일 오후 5시경 나는 두 분이 유치돼 있는 종로경찰서로 면회를 갔었다.

 

(내가 경찰서 유치장으로 유치인 면회를 간 것은 강정구 교수에 이어 두번째다)

정문에서 주민증록증을 맡기고 청사 1층 오른쪽에 위치한 조사계로 들어갔더니 

토요일 오후여서인지 경찰관 1명만이 당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면회신청을 하자 그는 유치장쪽으로 가서 면회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와서는 가능하다고 하길래 

곽태영.우경태 두 사람의 이름을 댔더니 유치자명부를 확인하고는 “석방됐어요”하는 것이었다.

 

선뜻 믿기지 않아 명부를 좀 보여달라고 해서 봤더니 두 사람의 이름 옆 ‘죄명’란에는

‘공공기물 손괴죄’라고 적혀있고 그 옆에는 ‘석방’이라는 큼직한 도장이 찍혀 있었다.

 

경찰관에게 물어보니 곽 선생은 검사의 수사지휘 과정에서 검사가 석방했고,

우위원장은 판사의 영장실질심사에서 영장기각으로 석방됐다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석방이라도 된 듯이 기뻤다.

 

지인 한 분에게 전화로 이 소식을 전하고는 갑자기 면회일정이 취소되자,

다음 약속시간이 어중간해 인사동으로 일단 접어들었다.

 

입구에 있는 고서점 ‘통문관’엘 오랫만에 들렀다.

출입문에 마침 안두희가 쓴(실지로는 특무대에서 작성함)‘시역의 고민’원본이 전시돼 있길래 

당장 가진 돈이 부족해 주인에게 예약을 해두고 나왔다.

다시 내려오다 가끔씩 들르는 전통찻집 ‘수희재’로 들러서 차 한잔을 마시며 

가방 속에 있던 ‘상해 한인사회연구’를 꺼내 잠시 시간을 보냈다.

 

찻집을 나와보니 철늦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싫지 않아 비를 맞으며 인사동을 빠져나오다가 탑골공원이 저만치 보이길래 발길을 그리로 돌렸다.

 

모두 비를 피하느라 ‘삼일문’ 현판이 붙어있던 정문 처마밑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삼일문’의 흔적을 살피는 사람은 없었다.

조용히 요모조모를 살펴보니 삼일문 현판이 있었던 주위로 상채기가 조금 나 있었고,현판을 묶었던굵은 철사줄(곽 선생은 이 철사줄이 일본말로 ‘하치부센(八部線?)’이라고 하는 8호선이라고 했다)만이 휑덩그런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이것 하나를 뗄려고 그리도 많은사람들이 애를 썼나 생각하니 허망하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했다.

 

다음 일정은 7시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청년회 초청 배우 문성근씨 특강을 들으러 가는 길인데 

그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조차 정겨웁게 느껴졌다.

(문성근씨 특강 내용은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한다)

 

그리고 ‘삼일문 철거사건’ 발생 한주일만인 어제(30일,금요일)나는 다시 이들과 만났다.

어제 오후 6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에서는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자 동국대 법대 교수인

 한상범(韓相範) 교수의강단 40주년 및 ‘현대법의 역사와 사상’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나와 한 교수님과는 오랜 인연이 있는데 한 교수에 대한 이야기 역시 다음 기회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행사시작 직전에 올라갔다가 잠시 한 교수와 인사를 나누고 사무실로 내려왔다가 7시경 사진기자와 함께 올라갔더니 

행사장에 곽태영 선생과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불쑥 두 분 자리로 가서 인사를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대뜸 내가 곽 선생에게 

“어찌 그리 빨리 나오셨어요?“하고 물었더니 “여론 덕분인 것 같애”하시는 것이었다.

 

비록 ‘삼일문’ 현판이 공공기물이라고는 하나 멀쩡히 있던 김충현 선생의 친필 현판을 떼어내고 

박정희가 쓴 현판을 다시 건데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그러니 철거 당일 보도된 언론의 보도태도는 이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오히려 ‘잘했다’는 쪽이었다.

이날 강정구 교수와도 석방 후 첫 만남이었다.

 

잠시후 나는 참가자들의 면면을 알아보려고 행사장에서 나와 입구의 방명록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마침 낯익은 사람 하나가 저기서 들어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우경태 위원장이었다.

 

안부를 나누고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중 “삼일문 철거에 몇가지 ‘비화’가 있으니 꼭기록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다.

그러마 하고 말을 걸었더니 삼일문 철거는 알려진 대로 자기와 곽 선생 두분만이 아니라 한사람 더 있다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그 한 사람은 곽 선생의 아들이었다.

 

우 위원장은 당일의 거사를 재구성해 설명해 주었다.

 

우 위원장에 따르면,거사 하루 전날인 22일 저녁 그는 곽선생의 자택 인근인 서초역으로 가서 곽선생을 만나

 곽선생 집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다음날 새벽 1시경에 일어나 ‘거사’를 시작했다.

 

곽선생은 그때까지 가족에게 거사를 알리지 않았다가 현관문을 나서면서 부인에게 이를 처음으로 알렸고,

아들 곽승훈(郭承勳·29)에게는 현장까지 운전을 부탁했다.(곽선생과 우위원장은 운전면허가 없다)

당일 새벽 1시 30분 곽선생 집을 출발한 이들은 30분 후인 새벽 2시 탑골공원 현장에 도착했다.

차를 인사동 입구쪽에 세워두고 세 사람이 ‘거사’에 돌입했다.

 

우선 곽선생 부자는 망을 보며 거사를 도왔다.

승훈씨는 인사동쪽을 맡았고,곽 선생은 인근 우측 파출소의 동향을 살폈다.

 

현판을 철거하는 일은 우 위원장이 맡았는데 이는 우 위원장이 ‘거사’를 곽선생에게 제의한 주인공인데다 

자신이 인터리어 업무에 종사하고 있어서 철거업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판 네 모서리에 박힌 대못을 빼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아래쪽 못 두개를 뽑는데 10분이 걸렸다.

당초 사다리를 사용해서 할 계획이었으나 행인들의 이목을 감안해 

장대에 낫을매달아 철거하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2시 40분이 지나서야 현판이 쿵! 하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3.1운동의 발상지,민족운동의성지인~탑골공원에 친일잔제를 청산하고,민족정기를 복원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시각이 야심한 시간이기는 했지만 30여분간의 작업 시간동안 ‘방해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 안개가 자욱해 시계도 흐린데다 인근 파출소에서는 평소 있던 경찰 백차도 그날따라 없었고,

30여분 동안 경찰관이 단 한 사람도 나와보지 않았다고 한다.

 

곽 선생은 이를 두고 “지하에 계신 애국선열들이 도운 결과”라고 말했다.

이들은 현판을 떼어내자마자 곧바로 차로 옮겨 싣고는 향린교회로 가 거기서 기자회견준비에 돌입했다.

 

한편 ‘삼일문’ 철거소식은 탑골공원 현관 인근에 있던 노숙자의 신고로 처음 알려졌는데 곽 선생 일행은

‘삼일문’ 현판을 떼 향린교회로 가지고 온 후 재사용을 막기위해 ‘박정희’ 이름 석 자와 낙관을 정으로 훼손한 후,

잠시 논의를 했다고 한다.

 

철거자의 신분을 당당히 밝히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 위원장이 즉석에서 A4용지에

 

‘3·1독립운동의 성지인 탑골공원에 

왜군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쓴 삼일문현판을 

민족정기의 이름으로 철거 함.

 

2001.11.23 민족정기소생회’

 

라는내용의 글을 써서 타고왔던 차를 다시 타고 탑골공원으로 가서 

정문 기둥에 풀로 붙여놓고 돌아왔다고 한다.

 

‘민족정기소생회’라는 단체는 이번에 이렇게 해서 처음 이름이 알려졌는데 

이 모임의 대표를 맡은 곽선생은 기자회견장에서 이 모임의 연원에 대해 답변한 바 있다.

곽 선생은 “해방후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중심이 돼 친일파 청산을 목적으로 ‘민족정기소생회’라는

단체를 발족했는데 (친일파들의 득세로)빛을 못보고 사라진 것을 이번에 다시 결성,소생시켰다”고 밝혔다.

 

한편 경찰서 조사 과정에서 두 사람에게 공공기물손괴죄 이외에 ‘특수절도죄’ 혐의가 붙여지더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삼일문’현판을 철거한 후 이를 다른 장소로 이동시킨 것이 그 사유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에 대해 항의한 후 ‘알아서 하라’고 해버렸다고 한다.

 

이들이 오전11시부터 조사받고 유치장에 입감시각이 (23일)저녁 8시경이었는데 SBS ‘8시뉴스’에서는

 이들의 삼일문 철거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YTN에서도,오후1시 뉴스부터 삼일문현판철거소식을 매시간마다 집중보도했다.

 

그리고 24일자 대한매일,한겨레,경향,중앙,동아,조선 등 조간신문에서도 이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우 위원장은 “이번에 언론자유를 실감했다”며

“특수절도범으로 몰릴 뻔했던 우리들이 불구속으로 풀려난 것은 모두 언론의 힘이었다”고 말했다.

 

오전 11시경 경찰에 긴급체포돼 종일 조사를 받은 후 유치장에 유치돼 밤9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유치장 신세가 생전 처음인 우 위원장은 “이불을 덮고 있으니 상을 주기는 커녕 잡범취급하는 이 세상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며 “유치장 생활이 오래 지속되면 안에서 단식투쟁이라도 벌일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그날 밤 10시경 곽 선생이 먼저 석방됐다.

뒤이어 이튿날 새벽 4시반경 우 위원장도 유치장에서 석방됐다.

예상외로 두 사람이 빨리 석방된 셈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여론이 좋지않다는 것을 수사진이 의식한 때문이 아니겠냐고들 말했다.

 

혹자는 곽,우 두 사람의 행동을 두고 ‘영웅심리’에 불탄 돌출적인 행동이라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이들의 ‘과거’를 설명듣고 나면 다소 이해가 갈 것이다.

 

먼저 연장자인 곽태영 선생은 고대출신으로,4·19때부터 반독재투쟁을 전개해 왔으며,

지난 65년 강원도 양구에서 당시 군납업을 하며 호의호식하고 있던,

 백범 김구선생시해범 안두희를 처음으로 응징한 주인공이다.

 

들은 바에 따르면,곽선생은 당시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 컸던 안두희와 사귀기 위해 1년간 안두희 집 인근에

셋방를 잡고 평소 안두희와 바둑도 두고 하면서 친분을 쌓은 다음 기회를 포착해 그를 응징했다고 한다.

 

곽 선생은 지난해에는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 회원들과 함께 문래동 구 6관구 자리에 있던 박정희 흉상 철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 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필자가 알기로 박정희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은 없는 것으로 안다.

결국 그의 행동은 ‘공분(公憤)’인 셈이다.

 

1961년생(호적에는 62년생)으로 아직 미혼인 우경태 위원장은,

안중근 의사의 동지로 안의사의 의거를 도운 우덕순 의사의 직계 후손(단양 우씨)으로,

권중희선생과 함께 안두희 응징에 동참하면서 이 일에 참여하게 됐다.

 

지난 92년 권중희씨가 곽 선생에 이어 안두희를 다시 응징한 후 펴낸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라는 책을 읽고 민족문제 현실에 눈을 떴다고 한다.

 

이후 우 위원장은 권중희선생과 함께 안두희의 증언채취 작업에 줄곧 동참해 왔으며,

지난번(10월 26일) 거사가 불발로 그친 것을 못내 아쉬워 하다가 곽선생과 함께 이번에 거사를 주도했다.

 

백범시해범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응징,처단한 박기서씨 등과도 모두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들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보면 우 위원장의 거사 참여 역시 일시적인 충동이나 소영웅주의적 

발상에서 시작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소위 '확신범'인 셈이다. 

 

어제 한상범 교수 출판기념회 행사장에서 우 위원장은 필자와 애기를 나누다가 불쑥 이런 얘기를 던졌다.

“사람들이 나보고 전라도 사람이 아니냐고 더러 묻는데 나는 경상도 의성출신이며,박정희가 태어난 선산과는 

차로 20분 거리에 있다.나도 고등학교 때까지 박정희를 존경했으며 훌륭한 분인줄 알았다”고.

 

혹자는 박정희 친필 현판 ‘삼일문’을 그냥 걸어두는(혹은 떼어내 보관) 것도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지만,필자 역시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할 경우 즉각 실행에 옮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때론 실정법을 어기면서도 말이다.

 

실정법이라는 것은 시대상황에 따라 그 가치평가가 상반되기도 한다. 

 

마치 지난해 총선시민연대가 낙천·낙선운동을 한 것이 그 자체로는 불법이었지만 

사회적 지지를 받은 것은 명분이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연장선 상에서 ‘악법도 법’이니 지키라는 주장은 맞지 않다고 본다.

악법은 지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강하게 주장해서 고치거나 폐지하는 것이 공중(公衆)을 위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번 ‘삼일문’철거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따지지면 이번에 박정희가 쓴 ‘삼일문’을 철거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앞서 

일중 김충현 선생이 쓴,멀쩡히 잘있던 ‘삼일문’현판을 떼어낸 행위가 문제가 아닐까?

 

일의 선후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전직 대통령의 글씨’ 운운하는 당국자나, 

일부 시민들의 주장은 민족정기라고는 한구석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얼빠진' 행동이 아니고 그 무엇이란 말인가?

 

2001.12.1 정운현기자(전,중앙일보.대한매일기자.오마이뉴스편집국장.친일진상규명위원회사무처장)

 

 *민족사랑,민족정기운동을 실천하는 한민청에 많은관심과 격려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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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단히 감사합니다~!!

 

  독립군
후원해 주셔서,대단히 감사합니다~민족정기운동에 소중하게 사용하겠읍니다~!! 08.10.22 21:23
출처 : 민족정기 !!
글쓴이 : 독립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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