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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Debussy, Claude Achille(1862.8.22~1918.3.25)

@로마의휴일 2007. 11. 3. 09:10

드뷔시

Debussy, Claude Achille(1862.8.22~1918.3.25) 프랑스      

프랑스가 낳은 20세기의 세계적인 음악가인 그는 인상파 음악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다. 도자기 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그를 해군에 보내려 했으나 모테 부인에게 발견되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드뷔시는 놀라운 음악적 재질을 나타냈다. 그는 11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11년간 그 곳에서 배웠다. 그는 재학 시절에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 메크 부인의 초청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러시아 국민악파의 음악과 집시의 즉흥 연주를 듣고 색다른 음악에 흥미를 느꼈가고 한다.

1884년, 칸타타 [방탕한 아들]을 출품하여 로마 대상에서 1등을 차지하였으며 그것으로 인해 모라에 유학하게 되었다. 그는 로마의 생활에 권태를 느꼈는데,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할 교향 모음곡 [봄]과 칸타타 [은혜받은 소녀] 등 2개의 작품을 냈지만 심사 위원들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파리의 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창작의 세계에 눈뜨게 해주었다. 당시 시인과 화가들은 말라르메의 집에 모여 새 예술을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였다. 드뷔시는 그 때까지만 해도 바그너를 대단히 숭배하고 있었고, 그 후 다시 러시아의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고두노프]의 대담한 수법에 경탄하였다. 한편 파리의 만국 박람회에서 자바와 캄보디아 등 동양 음악의 이국적인 정서에도 눈을 뜰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지금까지의 음악처럼 멜로디와 하모니, 리듬에 의한 정연한 형식의 음악을 버리게 되었다.

그는 인상파 회화의 수법에 알맞은 음악의 표현을 창안하였다. 그림에서 빛을 중요시하듯이 음악에서 감각을 중대시하려 하였다. 새로운 감각을 위해서는 새로운 음의 조성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대담한 화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1894년에 완성한 말라르메의 시에 의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통하여 새로운 음악의 양식을 수립했는데, 그것은 인상주의 음악이었으며 또한 바그너 이후 가장 새로운 음악의 시작인 것이다. 인상주의란 외계로부터 받은 자연의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해 낸 예술이다. 그것은 선이 명료하지 않고 불분명하지만 유현하고 신비스런 기분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적이라 하겠으며 감각의 생활에서 얻은 묘사의 기술이다. 그것은 극적이 아니고 서정적이다. 표현의 예술이 아니라 인상의 예술인 것이다. 그가 1902년 4월에 초연한 오페라 [펠레아스어와 멜리장드]는 또하나의 대담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상주의 음악이 성숙기에 달했을 때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관현악 작품으로서 3개의 녹턴, 3개의 교향적 스케치, 피아노를 위한 [영상][바다]와 [어린이의 세계][현악 4중주곡], 실내악곡 등 많이 있다.
그 밖에도 가곡과 피아노곡 등을 창작하여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그의 예술은 새로움을 가지고 전통에 도전함으로써 음악적 유산의 질서를 변혁시켰던 것이다.

생애

그는 대단치 않은 도자기상을 하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자 아버지지는 장사를 그만두고 회계원으로 취직했다. 집안이 어려워 아홉 살의 그는 동생들과 함께 칸느에 사는 숙모에게 보내졌다.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자라면서도 그는 약간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고 과자를 사먹을 때면 양은 적더라도 꼭 비싼 고급과자를 사서 혼자먹곤 했다는
것이다.

양친은 아들을 음악가로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일찍이 그의 악재를 발견한 모테라는 부인의 권유로드뷔시는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다. 드뷔시는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의 집에서 열리는 집회를 통해 인상파 화가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노선에 따라 자기 음악을 전개하여 완성시켰다. 세인들이 그의 음악을 '인상주의 음악'이라고 하는 것도 거기에서 연유한다.

1888년 1889년, 두 번에 걸쳐 독일 바이로이트로 가서 바그너의 음악을 접하고 그는 한때나마 열렬한 바그네리안이 되기도 했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자바, 캄보디아 등 동양의 음악을 접하고 그 신선한 매력에 홀딱 반한 것이었다. 그는 낭만파의 다른 많은 작곡가들처럼 단지 이국적인 분위기에 일시적으로 끌린 것이 아니라 대담하도 거칠 것 없는 음악적 표현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드뷔시는 타고난 청개구리와도 같은 저항정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둔 암울한 시대의 유럽 중심에서 혼자만의 꿈속을 살다간 작곡가라고 볼 수 있다. 그가 키운 후배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전쟁주에도 그는 세 곡의 소나타를 쓰고 1918년 3월 25일 밤, 독일군의 폭격이 맹위를 떨치던 파리에서 56년의 생을 마쳤다.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의 이상과 목표는 피아노 음악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의 한 사람인 클로드 드뷔시에 의해 음악 분야에 도입되었다. 화가들은 그에게 명암화의 변화무쌍한 아름다움, 빛과 그림자의 대비, 인상의 어슴프레한 표현, 색채의 상호작용을 보여 주었다. 상징주의 작가들은 - 아마 보다 강력하게 - 단어, 프레이즈의 변화, 半音의 드라마, 소리를 위한 소리의 아름다움을 통해 암시의 예술을 보여 주었다. 이 모든 것이 프랑스 클로드(Claude de France)의 기질(genie)을 형성하는데 주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는 독특한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이 아이디어들을 개성있게 해석하여 표현했다. 즉 스타일은 드뷔시 개인에 의해 전개, 형성, 발던되었던 것이다.

형식과 전개에 관한 그의 아이디어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드뷔시에 있어 피아노 음악은 어느 정도 유기적으로 전개된다. 즉 하나의 아이디어가 도입되고 확대되며, 곡이 진행됨에 따라 또 다른 아이디어가 논리적인 듯한 방식으로 피어나 순서에 의해 동일한 수법으로 처리된다.

그는 자기 음악에 세심한 연주 지시를 주었는데, 그의 음악은 피아니스트가 임의로 해석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가 요구한 대로 연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아노 반주자로서 한 여름동안 러시아를 두루 여행한 것은 그의 음악적 지평을 넓히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는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들었으며, 화려한 슬라브 민속 음악에
탐닉했다.

그는 또한 음악 작곡에 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소개했는데, 이 방식은 순전히 음악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다른 예술로부터 더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드뷔시가 이런 독특한 수법으로 만들어 낸 음악은 그후 20세기 음악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피아노곡>
<베르가마스크 모음곡(Suite Bergamusque)>
<전주곡(Prelude)> <파스피에(Passepied)>
<메누엣(Menuet)> <월광(Clair de Lune)>
<피아노를 위하여(Pour le Piano)>
<두개의 아라베스크(Deux Arabesque)>
<꿈(Reverie)> <발라드(Ballade)> <낭만적 왈츠(Valse Romantique)>
<마주르카(Mazurka)> <야상곡(Nocturne)> <舞曲(Danse)>

 

출처 : Glory Of God
글쓴이 : 늘 새롭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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