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스크랩] Franz Joseph Haydn - Quartet in E, Op. 2 No. 2

@로마의휴일 2007. 11. 3. 09:11

 

Franz Joseph Haydn

Quartet in E, Op. 2 No. 2

 

 

                              I. Allegro - Julian Bream, Cremona

                              II. Adagio - Julian Bream, Cremona

                              III. Menuetto e Trio - Julian Brea

                              IV. Finale. Presto - Julian Bream,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 3. 31. ∼ 1809. 5. 31.) 오스트리아
(1732 로라우 쉬르 라 라이타, 니더에스터라이히 주-1809 굼펜도르프가, 빈)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마차를 만드는 목수 마티아스 하이든 Mathias H.과 안나 마리아 콜러 Anna Maria Koller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3월 31일). 어머니인 안나 마리아는 결혼 전에 로라우의 귀족 하라흐 백작의 요리사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12명의 아이가 태어났으나 그 중 6명만이 성인이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이 12명 중 둘째 아들로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경 근처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그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확실하다. 하이든은 두 차례의 런던 여행 외에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과 빈에서 보냈다.


빈에서의 청춘기
하이든은 5세 때 아버지의 의붓여동생의 남편 마티아스 프랑크 Mathias Franck의 집에 맡겨지게 되었으며, 그에게서 음악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했다. 1740년부터 1749년까지는 당시 게오르크 로이터 2세가 거느리는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 부속 성가대의 소년 성가대원으로 있었는데 변성기가 되자 그만두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에 대해서는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갑자기 빈 거리로 내聖긴 그는 갖은 고생을 다 겪어야 했다. 하이든은 음악을 가르치거나 바이올린이나 오르간을 연주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1753년경 시인 메타스타지오의 주선으로 작곡가 포르포라의 조수 겸 제자가 된 그는 교제 범위도 넓히게 되었으며, 특히 푹스의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과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의 초기 소나타 작품에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본질적으로는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했다. 1757년경에는 그를 바인치에를의 저택에 초대한 칼 요제프 폰 퓌른베르크 Karl Joseph von Fürnberg 남작 밑에서 최초의 현악4중주곡 몇 곡을 작곡했다. 1758년인가 1759년에는 모르친 Morzin 백작을 섬기게 되어, 여름을 보헤미아 지방 필젠 근교인 루카베츠에 있는 백작의 성(城)에서 지냈다. 하이든은 이 백작을 위하여 초기의 교향곡 몇 편과 관악 디베르티멘토 곡집을 작곡했다. 그러나 갖가지 불운이 겹쳐서 모르친 백작은 자기의 악단을 해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에스터하지가
1761년 5월 1일, 이것은 그가 빈에서 결혼한 1760년 11월 26일 보다 조금 후인데, 이날 하이든은 헝가리에서 가장 유복한 귀족 파울 안톤 에스터하지 후작과의 사이에 계약서를 주고 받았다(이 계약은 구체제하에서 음악가에게 주어지는 갖가지 조건의 전형적인 예로서 종종 인용된다). 이 계약은 종교 관계를 제외한 모든 음악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부악장에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종교음악만은 원칙적으로 그 책임을 악장인 그레고리 요제프 베르너가 지기로 되어 있었다(1766년에 베르너가 죽은 뒤에는 하이든이 그의 뒤를 이어 악장이 되었다). 빈 이외의 지역에서의 후작의 주요 거성(居城)은 아이젠슈타트였다(헝가리어로는 키스마르톤이라 했고 헝가리의 서쪽에 위치하였으며, 현재는 부르겐란트 지방의 오스트리아 동부지대의 수도가 되었다). 파울 안톤 후작이 1762년 3월 18일에 세상을 떠난 뒤에 후작의 동생인 니콜라우스 요제프 Nikolaus Joseph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는 니콜라우스 장려(壯麗)후작이라 불려지게 된다. 하이든은 니콜라우스 후작을 30년 동안, 즉 1790년 후작이 죽을 때까지 섬기게 된다. 아이젠슈타트의 성은 머지 않아 니콜라우스에게는 너무 좁게 된다. 그는 이미 후작이 되기 이전에 노이지들 호의 남쪽에 있으며 헝가리 평원에 위치하는 쉬토르(오늘날에는 페르퇴드라 불려지고 있다)에 있는 사냥용 관(館)에 살고 있었다. 이 토지는 늪지대였으나 후작은 그곳에 성을 짓게 했고, 당시 사람들은 이 성을 거침없이 베르사이유 궁전에 비유했다. 1766년 이래 이 성은 공적으로 에스터하지라 불리게 되었다. 하이든과 그 악단원들은 1768년에 완전히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러나 에스터하지의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1784년 중앙 궁전의 맞은편에 폭포가 완성된 때이다. 성은 126개의 방을 갖추고 있으며 건축에는 1300만 플로린이 들었다(1761년에 하이든의 연봉은 400플로린으로 정해졌었다). 20여 년 동안 연주회, 오페라 상연, 연극 상연(하이든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몇 개 볼 수가 있었다), 축하행사나 일루미네이션의 개최의 이러한 행사가 특히 여름에 연속적으로 궁전에서 개최되었다. 겨울이 되면 후작과 측근들은 빈으로 옮겨갔다. 가령 1778년의 시즌(1월 23일부터 12월 23일까지)에는 총242회의 공연이 있었다. 에스터하지에서 개최되는 큰 축제으로는, 그 당시 빈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의 대사이며 목(悴)을 장식하는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던 로앙 추기경을 초빙하여 개최된 1772년 7월의 축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을 위하여 개최된 1773년 9월의 축제, 여왕의 셋째 아들 페르디난트 대공을 위하여 개최했던 1775년 8월의 축제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악장 하이든
하이든은 가수와 기악 주자들로 구성된 에스터하지가 악단의 우두머리였다. 그리고 악단원들은 확실히 재능이 뛰어나기는 했지만 때때로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이든은 이들과, 특히 바이올린 주자 루이지 토마지니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결과 하이든은 악단원들의 결혼에 입회하거나 이들 자녀의 대부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생활은 항상 목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청원, 불화, 그리고 소송 등이 다반사로 일어났으며, 하이든은 대개 후작과 이해 당사자 사이에서 조정자 역을 맡았다. 1765년 말경, 플루트 주자 프란츠 닉스트 Franz Nigst가 해고되었는데, 이것은 닉스트가 후작의 집 지붕 위에 올라가서 새를 잡으려고 엽총을 겨냥했을 때 총이 폭발하여 집 한채가 전소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폭력사태도 일어났다. 1771년 11월, 아이젠슈타트의 한 술집에서 첼로 주자 프란츠 크사버 마르토 Franz Xaver Marteau와 플루트 주자 차카리스 폴 Zacharis Pohl과의 사이에서 생긴 사건으로 인해 차카리스가 한쪽 눈을 못쓰게 되었다. 그리고 1769년에는 두 첼로 주자 이그나츠 퀴펠 Ignaz Kffel과 요제프 바이글 Joseph Weigl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교향곡 고별의 유명한 일화(1772. 11)는 그러한 일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하이든은 에스터하지궁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없었으며, 자기가 바라는 대로 빈에 가지 못하는 것을 이따금 한탄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황이 몇 가지 이점을 갖고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 악단의 장이었던 나는 갖가지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즉 자유롭게 변경하는 일, 개량하는 일, 덧붙이는 일, 삭제하는 일, 갖가지 대담한 시도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상과 동떨어져 있던 나를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결국 독창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역시 이러한 상황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사적으로도 업무면에서도 외부와의 접촉을 더욱 갈망하게 되었다. 1780년까지의 하이든의 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1766년 아이젠슈타트에 집을 한 채 구입했는데 이 집은 1768년과 1776년 두 차례나 화재를 당했다. 1768년 그는 니더에스터라이히의 츠베틀 수도원에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 아플라우스를 10개 항목에 걸친 주의사항을 첨부하여 보냈다. 이 주의사항은 첫째 18세기의 연주 사정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하이든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귀중한 것이다. 1770년 3월 22일에는 그보다 2년 전 에스터하지궁에서 연주된 오페라 약제사가 빈에서 상연되었는데 그때 하이든은 직접 지휘했다. 1775년 4월 2일과 4일에는 오라토리오 토비아의 귀환이 수도에서 상연되었다.

1779년에는 에스터하지궁에 여성 가수 루이지아 폴첼리 Luigia Polzelli가 들어오게 된다. 이것은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던 하이든을 다소 위로해줄 수 있었다. 그 무렵 에스터하지 후작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해 정열을 쏟고 있었는데, 그 여파로 오랫동안 연주해오던 비올족의 악기인 바리통에 대한 정열이 급속히 식어져 갔다. 그리하여 하이든은 오페라라는 영역에서 상당히 열의있는 활동을 전개해야 했으며 자기 자신의 작품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의 작품도 지휘하게도 되었다(안포시, 가차니가, 트라에타, 사르티, 피치니, 그레트리, 파이지엘로, 치마로자). 하이든은 작품을 선정하여 연수도 시키고 지휘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면에서도 적지 않은 개정을 가했다. 그래서, 당시의 습관에 따른 어떤 부분의 아리아를 하이든 자신이 만든 아리아로 바꾸는 일도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1780년부터 1790년에 걸쳐서 96개의 오페라 작품을 다루게 되었는데 1786년 한 해에만도 17편을 헤아릴 정도였다. 재상연의 수도 고려한다면 전부 1026회 상연, 더욱이 그 중 1786년에는 125회의 상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이든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작곡을 할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외부 세계로의 눈길
하이든은 에스터하지궁에서의 후기에는 직접 후작을 위하여 작곡하는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작곡활동의 대부분은 외부 세계를 위한 것이었다. 빈을 위하여, 그리고 특히 파리와 런던을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하이든은 유럽 중에서 큰 명성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출판업자들이 그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들은 실제로 능력이 보다 저급한 작곡가들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상품가치를 갖고 있다고 보였던 작품들을 하이든의 이름으로 출판하는 일조차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1780년대가 되자 하이든은 직접 아르타리아 Artaria(빈), 부아이에 Boyer와 지베르 Sieber(파리), 포스터 Forster와 롱맨 앤드 브로드립 Longman and Broderip(런던)과 같은 출판업자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이든도 거리낌없이 각자 자기를 위하여라는 원칙을 적용하여 가령 똑같은 작품을 두 사람에게 팔아 넘겼는데, 그들은 서로 그 작품의 독점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형편이었다. 하이든은 이 시기에 단순히 자기의 작품을 외부로 보낼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기도 했다. 카디스 교회 참사회원의 의뢰로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7가지 말씀에 의한 관현악 작품(1785년부터 이듬해인 1786년에 걸쳐서 작곡)이나 파리의 콩세르 드 라 로주 올렝픽의 의뢰로 파리 교향곡이라 불리는 6곡의 교향곡(제82번부터 87번까지, 1785년부터 1786년에 걸쳐 작곡)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태의 급변이었다. 하이든의 영광과 명성은 그에게 이러한 주문의뢰의 쇄도를 가져왔으며, 그때까지 그가 언제나 상대하고 있던 청중보다 훨씬 한정되지 않은,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 청중을 상대로 작곡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아마도 압박감이나 중대한 창조적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빈에는 하이든과 친근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에스터하지궁에서 격리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가 모짜르트였는데, 모짜르트와의 만남은 연대적으로 가장 늦게 잡더라도 1784년 말아마도 1781년 12월 이후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이든과 그와의 사이에는 우애와 존경의 끈으로 묶여져 있었는데 이러한 것은 음악의 역사에서 볼 때 매우 드문 일이었다. 또 한 사람은 빈에 거주하는 의사의 부인인 마리안네 폰 겐칭거 Marianne von Genzinger이다. 에스터하지궁에서 겐칭거 부인에게 보낸 1789년부터 1790년에 걸친 편지는 하이든과 직접 관계되는 자료 중에서는 가장 개인적인 것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또 다시 이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부인께서는 곧 저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짐작하리라 믿습니다. 끊임없이 속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요. 나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입니까! 끊임없이 일에 몰리고, 쉬지 않고 그리고 친구는 어떻습니까,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한 친구가 있다구요? 그래요! 아마도 한 사람은 있겠지요. 그러나 그녀는 지금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1790. 6. 27)


런던 체재
니콜라우스 후작이 죽자(1790. 9. 28) 하이든은 그리 탄식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작의 죽음으로 상황은 풀리게 되었다. 니콜라우스의 아들이며 그 후계자이기도 한 파울 안톤 Paul Anton은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 하이든의 지위와 그의 연금은 그대로 두었지만 아무 것도 명확하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유롭게 된 하이든은 런던의 흥행사이며 바이올린 주자인 요한 페터 잘로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제안이란 오페라 1편당 300파운드를, 새로운 교향곡 6곡에 300파운드를, 20회의 연주회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200파운드를, 그리고 하이든 자신을 위한 연주회 1회마다 보증금 200파운드를 각각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안은 런던을 여행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1790년 12월 15일 하이든은 58세의 나이에 잘로몬을 따라 고국을 떠났다. 그는 1791년 1월부터 1792년 6월(또는 7월초)까지 런던에 체류하면서 6곡으로 된 최초의 런던교향곡(제93번부터 98번)을 비롯한 작품들을 썼다. 1791년 12월에는, 잘로몬의 조직과는 라이벌 조직인 프로페셔널 콘서트가 하이든에 대항하여 그의 옛 제자인 이그나츠 플레이엘을 초청했다. 그 달은 또 모짜르트의 부보(訃報)를 받은 달이기도 했는데, 하이든은 처음에는 그 부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런던에서의 생활은 그가 에스터하지궁이나 빈에서 알았던 생활과는 전혀 달랐으며, 런던 체류의 예술적 및 개인적 성공은 더욱 선명한 것이 되었다. 30년에 걸친 고독한 생활 끝에 하이든은 리셉션에서 리셉션으로 불려다녔고, 사전에 알고 있거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한정된 청중 대신 익명의, 더욱이 시끄러운 관객을 열광시켰던 것이다. 1791년 7월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가 수여되었다. 신문은 그의 연주회의 실황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다른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마리안네 폰 겐칭거에게 보낸 몇 통의 편지와 또한 다행히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수첩 속에 생생하게 적혀 있다. 매우 흥미깊은 것으로는 아스코트 경마에 관한 기술이 있다. 하이든은 특히 수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런던에서 1년 동안에 소비되는 석탄의 양, 중국 황제의 연령, 와이트 섬 둘레의 길이). 수첩의 구석구석에는 당시 런던을 채우고 있던 지독한 소음, 영국인들이 술을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놀라고 즐거워하고, 그리고 걱정하는 하이든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체삼 Chatham 각하는 육군 대신이며 피트 수상의 동생뻘 되는 사람인데 사흘 동안에 걸쳐서 만취해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이름조차 서명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함대(艦隊)는 런던을 출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클레어몬트 Claremont 경이 성대한 야식회(夜食會)를 개최했다. 그리고 모두 국왕의 건강을 축하하여 건배를 할 때, 각하는 옥외, 그것도 눈보라 속에서 국왕 만세 God Save the King를 연주시켰다. 이처럼 영국에서는 상궤(常軌)를 벗어난 방식으로 술을 마신다.

런던에서 돌아오던 중 바트 고데스베르크의 숙박지에서, 하이든은 젊은 시절의 베토벤을 소개받는다. 베토벤은 하이든의 뒤를 따라 빈으로 갔고, 하이든은 1793년 전기에서 이야기되는 것보다도 훨씬 결실이 큰, 많은 것을 베토벤에게 가르쳐 주었다. 확실히 하이든은 대위법 연습은 좀 소홀하게 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창작의 정수에 닿게 해주었다. 실제로 베토벤에게는 교향곡 제99번의 피날레 초고(草稿) 중 일부를 베낀 것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교향곡은 1793년에 하이든이 두 번째 영국 여행을 위하여 작곡한 것이었다. 이 두 번째의 런던 체재는 1794년 1월부터 1795년 8월까지로, 머무는 동안 하이든은 제2의 런던 교향곡(제99번부터 104번까지)을 발표했다. 이 6곡은 그가 작곡한 최후의 교향곡이기도 했다. 이 체재도 최초의 체재와 마찬가지로 대성공이었으며 금전적으로도 많은 이익을 하이든에게 안겨주었다.


빈에서의 만년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로 들어왔을 때 하이든은 전유럽을 통틀어 생존한 작곡가 중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보였다. 그는 니콜라우스 2세가 4대째의 에스터하지 후작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니콜라우스 2세는 위신 관계도 있어서 할아버지인 니콜라우스 후작의 궁정악단을 다시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에스터하지궁을 떠나 아이젠슈타트로 옮겼다. 하이든은 다시 이 궁정의 악장이 되었는데 이전에 비해볼 때 확실히 책임이 가벼워졌으며 여름의 2~3개월 동안 아이젠슈타트에 머물 뿐이었으며(이것은 그의 최후의 음악활동의 해인 1803년까지 계속된다), 나머지는 빈에서 살았다. 특히 후작은 해마다 미사곡 1곡을 부인인 마리아 헤르메네길트 Maria Hermenegild의 명명축일을 위해 작곡하는 것밖에는 요구하지 않았다(1796년부터 1802년에 걸쳐서 6곡의 대미사곡이 작곡되었다). 그 이외에는 하이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작곡할 수 있었다. 그러한 곡으로는 최후의 현악4중주곡,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7가지 말씀의 성악용판(1796), 오스트리아 국가 신이여 황제[프란츠]를 보호하소서(1797), 그리고 특히 2개의 장려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1798)와 4계(1801) 등을 꼽을 수 있다. 1803년 말, 하이든은 건강상의 불안 때문에 모든 활동을 중단하게 되는데, 하이든은 이 해에 이르기까지 빈 사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종종 자기의 작품이 공개 형식으로 또는 비공개 형태로 연주될 때 직접 지휘했으며, 베토벤은 하이든과 똑같은 연주회에 종종 참가했다. 이러한 만년은 그에 관한 증언이 가장 집중되는 시기였다. 하이든의 전기 작가 그리징거는 하이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묘사했다. 하이든은 키가 작았으나 단단한 체구였다. 얼굴은 넓적하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피부는 까무잡잡했으며 눈은 생기있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의 용모와 행동은 신중함과 조용한 위엄을 반영하고 있었다. 1796년부터 1803년 사이에, 빈에 주재하던 스웨덴의 외교관 프레데릭 사무엘 실베르스톨프 Frederik Samuel Silverstolpe는, 하이든에 대해 말하자면 두 개의 인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고상한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는 무겁고 통찰력에 찬 인상을 나타낸다. 숭고한 말을 듣기만 해도 그의 감정은 확실히 눈에 뜨일 정도로 생기를 띠게 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러한 정신상태는 곧 멀리 사라져버리고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분으로 바뀐다. 이리하여 그는 다시 명랑한 기분에 둘러싸여 만족감이 글자 그대로 표정에 나타나서 마침내 농담이라도 말할 듯하다. 이러한 인상의 사람이야말로 흔히 할 수 있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어떤 특수한 자극이 없는 한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1804년 이후 하이든은 1793년 빈의 굼펜도르프가에 산 집을 거의 떠나는 일이 없었다. 잇따라 악상이 떠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산뜻하게 마무리하지 못하고, 작곡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는 이미 그 자신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세 번째 장대한 오라토리오 최후의 심판은 아직도 초안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의 집은 이제 명소가 되어 있었다. 하이든은 그곳에서 특히 그의 전기 작가인 디스와 그리징거, 그리고 콘스탄체 모짜르트 Constance Mozart와 그 막내아들, 그리고 칼 마리아 폰 베버와 만났다. 1808년 5월에는 에스터하지가의 악단원 전원이 빈에서 연주회를 갖는 것을 기회로 악장 요한 네포무크 훔멜의 인솔 아래 하이든의 집을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그가 최후로 청중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1808년 3월 27일 천지창조를 들으러 갔을 때였다. 이때는 베토벤을 포함한 몇몇 음악가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러 왔었다. 하이든은 1809년 5월 31일 굼펜도르프가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날은 나폴레옹에 의한 두 번째 빈 점령이 있은 지 며칠 후의 일이었다. 아마도 이 빈 점령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820년 그의 유해는 아이젠슈타트로 옮겨졌으며, 1954년 이래 1932년 파울 에스터하지 후작(뒤에 박사가 됨)에 의해 건립된 묘지에 안치되었다.


하이든과 그 시대
하이든은 그보다 연하인 모짜르트나 베토벤(하이든은 모짜르트가 죽고도 18년이나 살았다)과 더불어 이른바 빈 고전파의 삼위일체라 불리는 것을 형성하고 있다. 그에게서는 19세기 이래 전해져 온 음울한 노인이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모짜르트와는 반대로 관습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을 쓰려 하지 않았다. 생존시부터 사람들은 유머와 서민적인 특징이 그의 예술적인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격렬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1760년부터 그 세기의 말까지의 음악의 역사는 점차 그의 역사 그 자체가 되어, 최종적으로는 그의 사후 150년에 이르는 시기의 음악에 대하여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하이든은 현악4중주곡을 창시한 것도 아니며 또한 교향곡을 창시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러한 것들에 고귀함을 부여했고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렸던 것이다. 하이든이야말로 참으로 멋지게 소나타 형식을 사용했으며, 무한한 재능을 가지고 소나타 형식이 갖는 변증법적인 모든 잠재력을 주제학작(主題學作), 그리고 여러 가지 관계의 차원에서 철저하게 개척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말하자면, 베토벤은 단순히 그의 가장 위대한 제자라는 데 그치지 않고 유일한 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짜르트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그와는 다른 전제에 의해서 하이든은 음악의 흐름을 극적인 행위(이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의 표현으로 만들었다. 하이든은 간결한 정신, 즉 서사시의 본질이라는 응축과 확장 사이의 멋진 통합을 나타내는 그의 민첩하고 집중력이 풍부한 정신으로 교향곡, 4중주곡, 그리고 오라토리오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모짜르트는 오페라 및 피아노 협주곡을 의심할 여지없는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올렸다. 하이든의 오랜 음악활동은 바로크 시대의 말기부터 낭만주의 초기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서였다. 이미 슈베르트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던 1800년경에도 하이든의 음악은 아직도 초기의 구체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하이든의 음악이 가진 금관악기의 잘 통하는 음, 리듬의 격렬함, 추진력, 그리고 형식에 있어서의 불규칙성 등은, 청춘시대의 빈에서 적어도 교회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음악이 폭스의, 그리고 칼다라의 음악이었음을 충분히 상기할 수 있는 특색이다. 하이든에게 있어서 문제는 이러한 특색을 소멸시킴이 없이 어떻게 대담한 평형 및 통일성 안에 통합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보다 1세대 젊은 모짜르트에게 있어서는 문제가 어떤 면에서는 그 반대였다.


실험과 탐색
1760년까지 하이든은 본질적으로 푹스와 칼다라에게서 나온 오스트리아 및 빈의 전통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므로,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바겐자일 같은 선배들 또는 플로리안 가스만이나 레오폴트 호프만 같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의 초기의 작품 중에는 두 곡의 미사 프레비스, 쳄발로 소나타 몇 곡, 디베르티벤토 몇 곡, 오늘날에는 현악4중주곡으로 알려져 있는 10곡의 작품 제0번, op. 1, 2(op. 3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아마도 호프슈테터라는 인물의 작품인 것 같다), 그리고 짧고 미뉴에트가 없는 3악장으로 된 15곡 가량의 교향곡(전집의 교향곡 제37번은 1758년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등이 있다.

에스터하지가에 봉직하던 최초의 시기(1761~65)에 하이든은 결실있는 실험을 특히 교향곡 영역에서 행했고, 주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교향곡을 위하여 4악장이라는, 그 후 지배적으로 되는 틀을 고정시켰다. 즉, 빠른 제1악장(느린 서주를 수반하는 경우도 있으며 없는 경우도 있다), 느린 제2악장, 무곡인 제3악장(미뉴에트), 빠른 제4악장이라는 구조이다. 1761년 그는 교향곡 제6번 아침, 제7번 낮, 제8번 저녁에 의해서 바로크와 고전주의의 멋진 총합을 실현시켰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지는 교향곡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종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즉, 교향곡 제13번과 제40번(1763)에 있어서의 푸가 형식의 피날레, 제22번(철학자[1764])의 코랄의 멜로디, 제28번 및 제29번(1765)의 발칸적인 향기, 제13번, 제24번(1764), 제36번, 그리고 특히 제31번(호른 신호[1765])에 있어서의 독주악기의 활용 등이다. 또한, 이 시기에 하이든은 자기 악단의 음악가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그의 대부분의 협주곡(몇 곡은 상실)도 쓰고 있다. 기회에 적합한 의무적인 작품 외에 오페라 세리아 아치데(1762)와 최초의 테 데움(1763~64경)도 씌어졌다.


보다 깊은 탐구
1766년경 슈트룸 운트 드랑과 더불어 그의 창작활동은 더욱 심도를 더하여 다양성을 넓히기 시작했다. 1773년 내지는 1774년경까지의 8년 사이에 하이든은 대략 25곡 정도의 교향곡을 썼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교향곡들을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의 하나로 꼽고 있다. 교향곡 제49번 f단조(수난[1768]), 제44번 e단조(슬픔[1771경]), 제45번 f#단조(고별[1772]), 제46번 B장조(1772), 제47번 G장조(1772), 제48번 C장조(마리아 테레지아[1769경]), 제51번 B♭장조(1773경), 제54번 G장조(1774), 제56번 C장조(1774), 제64번 A장조(1773경) 등이 그 예이다. 그는 각 악장의 외적인 성격보다도 내적인 구조에 보다 힘을 기울이는 한편, 상당히 주관적인 음조(音調)를 적극적으로 개척했다. 그가 단조의 곡을 이처럼 많이 작곡한 시기는 달리 없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그 외에도 각각 6곡으로 된 3개의 현악4중주곡집(op. 9[1769경]), op. 17[1771], op. 20[1772]), 아름다운 피아노 소나타(제30번 D장조[1767], 제31번 A♭장조[1767~70경], 제33번 c단조[1771]), 스타바트 마테르(1767), G장조의 살베 레지나 (1771), 미사곡 4곡(그 중 1곡은 상실), 오페라 4곡, 그리고 바리톤(악기)을 위한 작품이 있다. 이러한 많은 작품은 여린 음의 울림, 명상이나 우수(특이한 느린 악장), 이색적인 의외의 효과 등을 특징으로 하는 취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두드러진 눈부심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도 있다. 하이든은 이러한 표현상, 형식상의 새로운 획득물을 강화하기 위하여 종종 대위법적 기법을 활용했다. 이러한 대위법의 전통은 오랫동안 믿어져 왔던 것과는 정반대가 되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바로크 시대의 말기 이래 결코 소멸된 적이 없었다(op. 20의 현악4중주곡 6곡 중 3곡은 푸가로 끝나며, 교향곡 제44번의 미뉴에트는 카논이다).


오페라의 세계
1775년에는 7년 내지 8년에 이르는 하나의 시대가 시작된다. 하이든은 이 기간에 교향곡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오페라쪽에 보다 전념했다. 뜻밖의 만남(1775)에서 아르미다(1783)까지 그는 7곡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에스터하지를 위하여 작곡된 최후의 작품이었다. 이 장르는 하이든이 완벽하게는 자기를 표현할 수 없었던 몇 안 되는 장르의 하나이다. 그러나 에스터하지를 위하여 씌어진 그의 모든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에서 생겨난 빈 고전주의의 최초의 절대적인 걸작 오페라인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1786)에 연대적으로는 선행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활동 중에서 참된 정조(1778, 개정판 1785), 보상된 충성(1780) 또는 기사(騎士) 오를란도(1782)와 같은 하이든의 오페라 이상으로 뒤의 모짜르트에 의한 위대한 오페라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은 없었다(특히 하이든의 작품의 장대한 피날레에 의해서). 피가로의 결혼의 초연 후 1787년에 하이든은 프라하를 위한 오페라를 의뢰받았는데, 그는 그것이 모짜르트에게 의뢰되지 않음에 놀라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1781년 5월에 출판업자 아르타리아 앞으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그는 결코 착각하지는 않았었다. 이러한 음악은 결코 파리에서도, 나아가서는 빈에서도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나의 불행은 시골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해인 1781년에는 전혀 새로운 특별한 방법으로 현악4중주곡 6곡(op. 33)이 작곡되었다. 이것들은 op. 20 이래 최초의 현악4중주곡이었다. 또한 피날레가 3중주 푸가형식으로 씌어진 제70번(1779), 제77번(1782) 등도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미사곡은 오라토리오 토비아의 귀환(1775)이나 미사 브레비스 상티 요아니스 데 데오(1775경)와 더불어 이 시기의 몇 안 되는 하이든의 종교적인 작품의 하나이다.


대기악곡
1785년부터 1790년에 걸쳐서는 기악곡이 다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작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파리를 위하여 작곡된 제82번부터 제92번까지의 11곡의 교향곡, op. 42(1785), op. 50(1787), op. 5455(1788), op. 64(1790) 등 19곡의 현악4중주곡,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7가지 말씀의 관현악용 오리지널판(1787), 그리고 피아노 소나타 제59번은 마리안네 폰 겐칭거에게 헌정되고 있다. 12곡 가량의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에 의한 피아노3중주곡도 있다. 이 6년간은 빈 고전파 양식의 최초의 전성기이기도 한데, 이 시기에 하이든과 모짜르트는 개인적으로 서로 알게 되었으며 서로가 서로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차이는 더욱 현저해졌다. 하이든은 자기의 음악언어에 민중적인 주제나 가락을 점차 도입해 갔으나 그로 인해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의 음악 언어는 전개에 보다 적합하고 함축성이 풍부한 것으로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악상에, 작품 자체가 그 해결인 듯한 갖가지 충돌을 가득 안고 있는 잠재적인 에너지, 즉 주요 원동력이 소재 자체인 듯한, 내부에서 분출하는 잠재적 에너지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이든은 음악을 혁신했다. 이 시대의 4중주곡, 교향곡 제86번 D장조(1786), 제88번 G장조(1787), 제92번 G장조 옥스퍼드(1789), 제85번 B♭장조 왕비 등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더 이상 능가할 수 없는 모범적인 예인 것이다.

두 차례의 런던 여행(1791, 1795)을 계기로 하이든은 에스터하지 시대 후기의 장중한 침착성과 청년기의 기발함, 실험에 대한 기쁨을 갑자기 통합했다. 그의 최후의 교향곡이 된 12곡으로 된 런던 교향곡 제93번부터 제104번 외에, 역시 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제60번부터 제62번까지의 3곡(1794)이나 op. 7174의 현악4중주곡 6곡(1793), 멋지고 예언적이기도 한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3중주곡, 많은 성악곡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성악곡 중에는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1791, 상연되지 않음), 콘서트용 아리아 베레니체여, 어찌 하려는가?(1795), 슈베르트에게 가곡의 길을 열어 주게 되는 영어 가사로 된 일련의 칸초네타가 있다. 호화로움, 뛰어난 기교, 그리고 깊이가 이들 모든 것을 특징지우고 있다. 런던 교향곡은 전곡이 다 걸작이다. 그러나 가장 잘 알려진 교향곡, 가령 제94번 놀람이나 제100번 군대보다도 제98번, 제99번, 그리고 특히 1795년에 초연된 마지막 3곡제102번 B♭장조, 제103번 E♭장조 드럼 롤, 그리고 제104번 D장조 런던쪽이 더욱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곡의 교향곡은, 베토벤의 작품 중에서 가장 하이든적인 교향곡은 제1번(1800)이라고 되풀이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내적 구조와 단순한 외면적 특징을 어느 정도 혼동하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런던 교향곡의 후예는 영웅(1804) 속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대합창곡
고립적인 몇 작품은 별도로 하고, 하이든의 음악가로서의 생애는 9곡의 현악4중주곡(op. 76 [1797], op. 77 [1799], op. 103 [1803, 미완성]), 미사곡 6곡(1796~1802),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7가지 말씀의 성악곡판(1796), 두 편의 위대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1798)와 4계(1801)에 의해서 마무리되었다. 현악4중주곡 9곡은 후기의 교향곡과 비교할 때 매우 혁신적이다. 즉, 장조의 작품에 있어서 단조의 피날레(op. 761, 763), 미뉴에트가 실질적으로는 스케르쪼로 바뀌어 졌다는 것(op. 761, 771, 772), op. 766 또는 op. 772에서 볼 수 있는 조성적, 화성적, 폴리포니적, 리듬적인 전대미문의 대담한 시도 같은 것이다. op. 766과 772는 18세기의 소재를 20세기의 방법으로 처리함으로써 관습적인 분석의 기준에 도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사곡 6곡과 두 개의 대오라토리오는 그야말로 모짜르트에 있어서의 대오페라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교향곡 작곡가 하이든은 오케스트라의 중요성과 형식상의 틀에 박힌 형(型)의 부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자기의 존재를 표명하고 있다. 이들 성악곡은 에피소드의 느린 연속이 아니라 견고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구조의 활력은 적어도 정신성을 손상케 하는 일은 없다. 색채가 풍부한 4개의 칸타타로 이루어진 4계가 특히 베버나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있어서의 초기 낭만주의를 연상시킨다고 한다면, 천지창조의 전주곡이 예고하고 있는 것은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다. 천지창조는, 그 시작에 있어서는 18세기 중반의 오스트리아의 무명의 작곡가들과 다를 바가 없던 대예술가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원초(原初)의 혼돈의 표상이 환시적 표현을 초월하여 그의 음악적 사고 속에 일관해서 짜넣어졌기에 더욱 큰 위업이었다.

천지창조의 작자는 음악에 있어서 새로운 사고법을 나타냈다. 그리고 베토벤은 하이든의 가장 위대한 후계자이기도 해서, 그들은 사적인 면에서는 이따금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했다. 하이든만큼 쇤베르크의 소재는 정신의 대기실이라는 지적을 확실하게 나타낸 작곡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이든의 세계에 접근하여 그 속에 들어가는 데는 음악밖에 방법이 없다. 즉, 우리들은 모짜르트, 바그너 또는 베르디의 경우처럼 제재나 오페라의 등장인물을 의지할 수 없으며, 쉿츠나 바흐의 경우처럼 성서의 해석이나 상징체계를 의지할 수도 없다. 베토벤이나 낭만파 작곡가들에 의해 강요된 소설풍의 전기(戰記)같은 것을 바탕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인생이 작품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 속에 움츠러드는 듯한 하이든의 복잡한 개성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일화 이상으로 의미깊은 천지창조의 초연(1798. 4. 30) 대한 기술, 특히 이름높은 1절 그리고 빛이 있었다에 관한 기술이다. 이 기술은 스웨덴의 외교관 실베스톨페가 초연에 입회한 지 40년이 지난 뒤에 쓴 것이다. 이 1절이 오케스트라에서 흘러나온 순간의 그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이든은 곤혹함을 억제하려는 듯 또는 그 어떤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인 듯, 어쨌든 입술을 깨물려 하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빛이 비치기 시작한, 그야말로 그 순간에 마치 그 빛이 이 예술가의 빛나는 눈길에서 쏟아지는 것 같았다.


대표 작품 :
현악 4중주 <세레나데>
['Serenade' from String Quartet No.17 in F major], Op.3, No.5

현악 4중주 <종달새>
[String Quartet in D 'The Lark'],Op.64 No.5

현악 4중주<황제>
[Emperor Variations, Op.76 No.3]

교향곡 45번 F#단조 "고별" [Symphony No.45 in F# minor 'Farewell',1772]

교향곡 73번 D장조 “사냥 La Chasse”(1781경)

교향곡 92번 G장조 “옥스퍼드 Oxford”(1789)

교향곡 94번 G장조 "놀람" [Symphony No.94 in G 'Surprise',1791]

교향곡 100번 G장조 “군대 Military”(1794)

교향곡 101번 <시계> D장조 [Symphony No.101 in D 'Clock' 1794]

교향곡 104번 D장조 “런던 London”(1795)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The Creation Oratorio 14."The Heavens Are Telling",1798
제3번 사계 Die Jahreszeiten(1801)

 

출처 : Glory Of God
글쓴이 : 늘 새롭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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