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의 작곡가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상의 과거에 대해서나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현재 속에서 살고 있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18세기의 중요한 특징은 그 사회의 음악환경이 계속해서 새로운 음악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고전적인 음악>은 없었다.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칸타타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야만 했고 헨델은 런던의 청중들을 위하여 매년 한곡 이상의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해야만 했다, 그리고 비발디도 베네치아에서 축제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오라토리오와 콘체르토를 써야만 했다. 이러한 부단히 계속되는 압력은 18세기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엄청난 작품수를 남기고 놀라운 속도로 작곡할 것을 요구하였다. 아직 모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C.P.E.바흐도 매년 마태수난곡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편수가 20여편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또한 상황이 요구하는데 따라서 작곡하였다. 18세기의 대부분의 음악은 주문에 따라 구체적인 목적에 맞추어 쓰여졌다. 그 요구들은 주로 막대한 재산을 지니고 있는 관료적인 궁정이나 교회, 오페라극장, 시의회에서 나왔다. 이러한 일종의 예술후원체제는 18세기의 음악의 원천이었고, 음악가들은 그러한 엄격한 체제 안에서 고용된 사람이었다. 후원자나 고용주가 작곡가의 작품량이나 종류를 조절하였따. 작곡가는 이 후원 치계 안에서 자신의 직위에 따라 활동공간의 제약을 받았던 것이다. 바흐는 자기 자신을 "상사를 만족시키고 동료들을 즐겁게 하고 교화시키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직업인"이라고 생각했다. 헨델의 관현악 모음곡인 왕궁의 불꽃놀이도 고용주의 허가없이 무단히 외유하고나서 용서를 비는 뜻에서의 작곡이었다는 일화가 있다.50세가 되어서야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획득하였던 라모의 행운도 프랑스의 대부호 라 푸플리니에르의 후원에 의해서야 가능하였다.
바로크의 지배계급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누렸다. 대부분의 백성은 겨우 셍계만을 유지하는데 급급했으나, 지배계급들은 사치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궁정이나 장대한 오락물을 통해 그들의 권력과 재력은 과시하려 했으므로 그들에게는 음악이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하나의 궁정이 오케스트라, 교회합창대, 오페라가수단 등을 고유하였는데, 그 규모는 부의 크기에 비례했다. 바흐는 1717년에 한 작은 독일 궁정에서 18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을 지휘하였으나, 당시의 큰 궁정은 80여명을 상주시키기도 하였다. 궁정의 음악감독은 연주회를 주관하기도 하였지만 오페라, 교회음악, 연회음악 등 궁정연주회에서 필요한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 과다한 의무 이외에도 고용된 음악감독들은 젊은이들의 음악교육과 악보, 악기 관리의 책임도 있었다. 음악감독의 자리란 그 명예가 높고 자신이 작곡한 작품이 항상 연주된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항상 고용주들의 의지에 따라 활동하는 봉사자였다.
교회도 음악을 필요로 하였다. 바로크 시대의 많은 교회가 예배를 이끄는 오르간과 합창단 이외에도 오케스트라를 깆고 있었다. 실상 당시에는 교회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악을 듣는 유일한 장소였다. 대중을 위한 연주회도 적었고 궁정과도 거리가 먼 사람들이 음악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교회의 음악감독도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야 했으며, 교회학교에서 소년합창을 지도하여야 했다. 그들은 또한 교회의 정규적인 의무 이외에 결혼이나 장례 등의 행사에도 음악을 제공해야 했다.
시당국도 교회, 대학, 귀빈 접대, 기념행사 등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음악가들을 고용했다. 이러한 도시악사들은 아마츄어와 함께 음악클럽이나, 대학교 음악단체, 가정, 찻집, 술집 등에서 연주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전반의 작곡가로서 당대 최대의 명성을 누렸던 텔레만은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같은 도시에서 대학생을 지도하여 공개연주회를 정규적으로 열었는데, 그 연주회에서는 당시시의 모든 종류의 음악이 연주되었고,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이 구분없이 편성되었다. 그는 또한 가정연주회도 주선하고 아마츄어를 위한 음악을 출판하여 음악의 대중화에도 노력한 사람이다.
어떤 바로크 음악가들은 오페라극장을 위해 작품을 썼다. 베네치아에서는 다수의 오페라극장이 있어서 새로운 오페라를 끊임없이 연주하였고, 영국의 헨델도 1728년에는 자신의 오페라단을 설립하여 지휘자, 경영인, 흥행사 등의 여러 기능을 완수함으로써 최초의 자유음악인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종종 음악가들의 음악적 기능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전수되었고, 훌륭한 음악가가 음악가 집안의 혈통헤서 나왔다. 교육은 도제 방식이 흔하였다. 또한 많은 경우 어린이들이 성당의 소년합창단에 입단하여 음악교육을 받았다. 비발디가 일생동한 일했던 베네치아의 피에타 오스페달레는 고아나 사생아들을 보로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일종의 종교기관이었다. 비발디는 그곳에서 지휘자, 작곡가, 교사, 음악감독으로 활약하였고, 여기에서 교육된 젊은 음악인들이 그 도시의 성당이나 교회의 음악회에서 연주하였다. 음악가들은 직장을 얻기위해 어려운 시험을 치렀고 회사금을 내거나 전임자의 딸과 결혼해야하는 조건은 드믄 일이 아니었다.
작곡가들은 바로크 사회에서 필수적인 존재였다. 궁정을 위해, 또한 교회나 상업적 오페라단을 위해, 당시의 구체적인 필요성과 목적을 위해 작곡하였지만, 그 작품들의 음악적 가치는 현대에서도 빛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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