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생 애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가 세운 안티오키아 교회의 2대(혹은 3대) 주교로서 110년에 로마의 꼴로세움(원형극장)에서 맹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선고를 받고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7개의 서간을 쓰게 되었다. 안티오키아 도시는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게 된 곳이며(사도 11,26),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출발하였던 선교의 중심지였다.
특히,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부터 안티오키아 교회와 로마 교회는 초대교회 안에 두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티오키아의 주교가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간다는 소식은 전 교회의 슬픔이었다. 순교지를 향한 그의 여정이 스미르나에 도달하였을 때에 에페소, 마네시아, 뜨랄리아 교회 등에서 보내온 위문 사절단과 만나게 되었다. 이냐시오는 이곳에서 자기에게 사절단을 보낸 세 교회에게 감사의 마음이 담긴 권고의 편지를 각각 보내고, 순교를 당하게 될 로마 교회에도 편지를 보낸다. 다시 뜨로아스에 와서는 안티오키아에 박해가 멎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필라델피아 교회와 스미르나의 주교인 뽈리까르뽀에게 편지를 보낸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해서는 우리가 고전영화 쿼바디스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맹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후에 신자들이 그의 유해를 안티오키아로 옮겨 안장하였다. 교회는 그의 순교일에 따라 10월 17일에 축일을 지낸다.
3.2. 일곱 서간
이냐시오가 보낸 7개의 서간들 중에서 6개는 교회 공동체(에페소, 마네시아, 뜨랄리아, 로마, 스미르나, 필라델피아)에 보낸 것이고, 1개는 뽈리까르뽀 주교 개인에게 보낸 것이다. 뽈리까르뽀 주교에게 보낸 편지는 선배 주교로서 후배 젊은 주교에게 사목자로서 지녀야 할 자세와 덕을 가르쳐주는 내용이고, 로마 교회에 보낸 서간 외에 다른 5개 교회 공동체에 보낸 서간들은 서로 그리스도 안에 일치하고 교회의 장상들에게 순명하며, 그릇된 이단들에 조심하라는 권고를 담고 있다. 특기할 점은 이냐시오가 최초로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를 일컬어 "가톨릭 교회"(스미 8,2)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가톨릭"이란 단어는 '보편적'이란 뜻을 갖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공동체로서 그 안에는 반드시 주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로마 교회에 보낸 서간은 다른 여섯 서간과 성격을 달리한다. 이 서간에는 교회 장상들에 대한 순명의 권고나, 이단에 대한 경고가 없는 대신 이냐시오 자신의 신앙 자세와 주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승화된 인간의 신비적인 면을 감동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 서간은 신학전망 24호(1974년 봄)에 우리나라 말로 번역되어 있다. 이냐시오의 서간들은 평상시에 보낸 편지가 아니라 순교지로 가는 여정에서 쓴 것들이기에 그 호소력이 강하며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 매우 크다. 사실 이냐시오가 순교한 후에 편지를 받은 각 교회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들도 이 편지들을 서로 돌려가며 보거나 복사하여 보관하였기 때문에 교회 안에 널리 유포되었다.
3.3. 로마 교회에 대한 존경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는 다른 여섯 편지와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이냐시오는 원로주교로서 다른 교회들에게는 일치와 조화를 권고하고 있는 반면, 로마 교회에 대해서는 이런 권고를 감히 줄 수 없는 이유는, "나는 베드로와 바오로 같이 여러분에게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었고, 나는 한 죄수에 불과합니다"(로마4,3)라고 설명한다. 특히 로마 서간의 인사말에 나오는, "여러분의 교회는 로마 사람들의 지역 안에서 선도(先導)하며 하느님께 합당하고 존경, 흠숭, 성공, 순결을 지닌 복된 교회입니다. 사랑을 선도하며 그리스도의 법과 성부의 이름을 보유하였습니다"라는 표현에 대해 가톨릭 학자들과 개신교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이 논란은 로마 교회가 타 교회들에 대해 수위권(首位權)을 갖느냐 하는 미묘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선도하다"(prokathetai)라는 동사가 연이어 두 번 사용되고 있는데, 첫째 경우에는 '로마 교회가 로마제국의 교회들에 대해 수위권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경우에는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어 다른교회들 보다 앞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다른 편지들에서 이냐시오는 "사랑"이란 단어를 교회와 동의어, 즉 '사랑의 공동체'라는 뜻으로 여러번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들을 선도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미묘한 표현상의 논쟁을 차치하고라도 이냐시오는 로마 교회에 대해, "여러분은 아무와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로마3,1)라고 칭찬하고, 끝으로 주교를 잃게 된 시리아 교회를 위해 기도해주고 염려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로마9,1).
로마 교회에 대한 그의 이런한 존경심은 개인적인 겸손이나, 또는 로마가 로마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 교회 자체가 두 으뜸 사도들로부터 세워져 그 권위를 받은 교회라는 논리에서 나온다. 안티오키아 교회 역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가르침을 받아 세워진 교회이지만, 로마 교회는 이 두 사도의 가르침이 그들의 순교로써 증거된 교회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교회보다 권위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로마의 끌레멘스 주교가 고린토 교회에 대해 취했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3.4. 순교영성
우리는 안티오키아의 아냐시오 주교의 생애와 그가 맹수형의 선고를 받고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쓴 7개 서간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가 지녔던 순교에 대한 열망은 여러 서간에 나타나 있다. 그는 순교를 그리스도께 대한 불붙는 사랑, 그분과의 완전한 일치로 표현하고 있다. [지금 왜 내가 목숨을 바치려는 것입니까? --- 내가 맹수들 가까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는데 완전한 인간이 되신 그분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스미 4,2). [나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자가 못됩니다. 그런데 지금에야 비로소 그분의 제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에페 3,1).
순교에 대한 그의 열망은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더욱 생생히 표현되 있다. [불도 좋고 십자가도 좋고 맹수의 무리도 좋으며 사지를 짓이기고 찢어도 좋고 배를 갈라도 좋으며 팔다리를 자르고 온몸을 난도질 해도 좋습니다. 가장 잔인한 형벌도 좋습니다. 다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갈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쾌락도 지상의 모든 왕국도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이 세상 극변까지를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와 일치하기 위해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바로 그분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바로 그분입니다. 내 출산의 때가 가까왔습니다.](로마 5,3-6,1)
여기서 순교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출산]으로 표현되어 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기쁨을 얻듯이 이냐시오는 순교의 수난을 통해 하느님 안에 새로 태어나는 부활의 기쁨을 얻게된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자신의 순교일을 애타게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냐시오의 이러한 믿음에 따라 교회는 순교자들의 순교일을 [천상 탄일](dies natalis)이라고 부르고 순교일을 그들의 축일로 정하고 있다.
이냐시오 주교가 로마로 압송되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로마교회는 훌륭한 지도자를 구해내기 위한 구명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이냐시오 주교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이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기를 위한 어떠한 호의도 베풀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보이는 것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아무것도 내가 그리스도께 가는 길을 질투해서 방해하지 말 것입니다](로마 5,3). [나는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다시는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일 침묵을 지켜준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나의 육신을 사랑하게 되면 나는 또 다시 달음질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나를 위해 하지 마십시요. 제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로마 2,1-2).
그는 한시라도 빨리 순교하고 싶은 열망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 때문에 마련된 맹수떼를 빨리 만나고 싶습니다. 그 맹수들이 나에게 성급히 달려들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맹수들이 겁을 먹어 달려들지 못한 경우가 있지만 나는 그들과는 달리 나를 급히 잡아 먹도록 유인하겠습니다. 그리고 맹수가 나를 거절하면 나는 강요하겠습니다](로마 5,2). [나는 더 살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동의하면 내 원의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동의하십시오---. 나의 원의가 채워지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요](로마 8,1-2).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다. 우리는 성 이냐시오의 생생한 글을 통해 우리 순교자들이 지녔던 열정과 기쁨을 보는 듯하다.
3.5. 순교와 성체 신비
이냐시오가 자신의 순교를 성체의 신비와 연결시킨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맹수들을 유인해서 그들이 나의 무덤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최후 잠듦에 있어 아무에게도 폐가 되지 않게 맹수들이 내몸의 어떤 부분도 남겨두지 말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세상이 내몸을 볼 수 없을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해주십시요](로마 4,1-2).
여기서 이냐시오는 자기가 하느님의 밀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마치 밀이 맷돌에 갈려 가루가 되고 그 가루로 빵이 만들어 지듯이 자신의 몸이 맹수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자신의 순교를 성체신비에 동참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맹수들이 자기 몸을 깡그리 먹어치워 장사지낼 수고까지 없애주었으면 하는 그의 바람은 당신의 몸과 피를 인류 구원을 위해 내어 놓으셨고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다.
자기 몸이 사자의 이빨에 짖이겨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겠는데, 이냐시오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어떻게 이처럼 담담히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평소에 미사를 봉헌하면서 성체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신비를 너무나 잘 깨닫고 묵상하였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순교가 그리스도의 극진한 사랑에 대한 자신의 응답이라고 보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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