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절 로마세계
로마 세계에 의해서 제국(Empire)의 영토라는 말이 의미하게 되었다 : 거기엔 서부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근동의 식민지를 포함했다. 여기엔 황제의 유일한 권위만이 동일한 정치적 이상을 위해 부과되었고(Jus Civitatis : 시민법) 그리고 심지어 광범위하게 다른 성격을 가진 지역들에 로마법(Salus populi suprema lex) 과 그리스 철학을 유지하면서 동일한 형태의 문화가 강요되었다.
각 지방의 무수한 미신들과 의식들을 추상화시켜 생각해보면 종교의 기반은 사실상 그와 매매 계약도 맺을 수 있는 초인(Superman) 외에 다른 것이 아닌 "신들"의 다신교적인 서열(hierarchy)에 근거한 것이었다. 한편, 이따금 동방에 기원을 둔 신비의식들은 진실한 구원의 종교를 갈망하였음을 증명한다. 다신교는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시인되었다 : 신들은 국가를 보호하였고, 기반을 획득한 황제의 신성에 대한 믿음, 결국 국가와 종교는 분리할 수 없는 단일체였다. 타종교들은 단지 외국의 것으로만 보인 것이 아니라 이상스럽고 심지어 수상적인 것처럼 보여졌는데 그것들이 국가의 종교적 기반을 위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종파'(Sect)는 이따금 전복시키는 성격을 지닌 것으로 판단되어 불경스럽고 반역적인 것으로 고발되었던 것이다.
로마세계 안에서의 선교적 모험은 다음 세 시기로 분리할 수 있다 :
1. 사도시대
연대적 윤곽
32년에서 35년 사이 : 사도 바오로의 개종
45년에서 58년 사이 : 사도 바오로의 세 차례의 여행 (소아시아, 그리스, 팔레스타인)
59년에서 67년(?) 사이 : 사도 바오로의 로마 체류
62년 이후 : 사도 바오로의 네번째 여행(스페인 동부 ?)
64년 : 사도 베드로의 죽음
40년에서 100년 사이 : 사도들과 설교가들의 분산
100년경 : 사도들의 마지막인 성 요한의 죽음
이 시기의 선교적 성격은 비 유태계인들에게 자주 연설하였던 성 바오로의 설교 안에서 명백해 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도들의 방법은 순전히 직접적으로 혹은 새로 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이교세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제국의 도시들 안에 있는 회당들(Synagogues)을 통하여 일하는 것이었다. 사도들 특히 바오로는 계략적으로 쓸모 있는 도시중심지를 신속하게 혹보하려고 하였다. 바오로는 심지어 제국 전체를 돌 '여행' 계획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공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기껏해야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편의들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 공통된 언어와 문화, 넓은 도로들과 해상로들,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법정, 세계주의적인 전망과 호기심등, 그러나 박해의 사건 안에서 바로 이러한 요인들은 교회를 반대하여 말하는 것이 되었다. 바오로의 방법은 때때로 자기 청중들이 지닌 신심들에 자신을 적응시키는데 있었으며(사도 18,22-31), 혹은 어떤 경우엔 자신을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도록 적응시키는데 있었다(1고린 9,22). 그것은 適應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것이 자기 설교의 긴박성을 무디게 하진 않았으며, 또한 '유대인들과 십자가에 의한 구원'의 스캔들과 어리석음을 요구할 필요성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대단히 크게 강조했다 : 『그들은 그분에 관하여 말하며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이분은 살아 계십니다(플리니우스). 크리스찬 집단들은 그와 같이 어떤 지역의 교계제도를 형성하고 있는 단체들로부터 원로들과 사제들을 신속하게 선발하여 한몸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복음화는 모든 사람의 일로서 여겨졌다. 공동체의 활동들은 유대회당에서는 보유하지 못했던 활동적인 역할을 여성들에게 주었다. 유대인 울타리 밖에서, 사도직이 개인적 차원에서 수행되기도 했고(필립보와 환관 ; 백인대장 고르넬리우스), 혹은 대중연설로 이루어지기도 했다(아레오파고에서의 바오로의 연설). 이것은 정치적 세력에 변화를 시도한 것이 아닌 순전히 종교적인 확장이었으며(「육체에 따라서는 여러분들의 주인들에게 순종하시오」), 오래되고 흠잡힐 데 없는 관습에 있어서는 그것을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보유하고자 하는 종교적 확장이었다(「선한 것을 보존하고 모든 것을 다하시오」). 또한 심지어 어휘상 이교도에 물든 관습일지라도 그러했다 (☞ 아래). 그것은 현존하는 세계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었고 그 운명을 함께 나누는 일이었다. 그 시대의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이슬람교의 출현(6-7세기)까지 살아 남아야 했고, 그 이후에는 심지어 그와 공존해야 했던 것이다(근동의 교회들). 그 교회들은 비록 때때로 약식인 때도 있었지만, 온실이 아닌 조건들 속에서 견교하게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 교회들은 다음의 세가지 원칙들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 적응, 복음선포의 모험, 그리고 지역조직.
2. 사도시대 이후 초기의 확장
연대적 윤곽
. 100년 이후: 북부와 동부에로의 확장.
. 2세기:호교론자들의 노력, 유스띠누스1), Ep르뚤리야누스2)
. 150 년경: 리용의 포티누스3)
. 180 년경: 인도제국(에티오피아) 에의 선교.
. 3세기 중반: 쾰른과 마인쯔의 주교들.
. 200 년경: 제국의 모든 지역과 심지어 페르시아내에 형성된 공동체들.
. 250 년경: 서부의 교회는 라틴계에 의해 희랍계를 대체함.
. 240-323년: 아르메니아의 계몽가 성 그레고리.
. 4세기부터: 흑해에로의 선교.
. 311년: 신교자유의 칙서.
이 시기는 특히 2세기 말엽 당시 선교적 확장이 제국의 국경방향으로 보다 자주 이루어졌던 것을 제외하고는, 사도시대의 배경과는 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트라얀 황제(Trajan, 98-117) 치하에서, 크리스찬들은 북쪽으로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에 도달했다. 당시 제국사회는 세련되고 세계주의적인 것이 되었다. 제국의 각 지역에서 온 '철학자들'은 지혜와 덕을 가르쳤는데 ; 세네카(Seneca)는 스페인에서, 에픽테투스(Epictetus)는 프리기아(Phrygia)에서 태어났으며, 아폴로니우스(Apollonius)는 트리야나(Tryana, Cappadocia) 출신이었고, 필로(Philo)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다.
사상의 교류처럼, 상품들의 교역도 활발했으며, 제국의 군대도 마찬가지로 활동적이었다. 철학자들, 상인들, 그리고 군인들은 제국을 순환시키고 활력을 제공하는 근원이었다. 이 강력한 세계는 또한 잔인한 세상이었다 : 황제들은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노예들은 동물들에게로 던져졌고, 검술가들은 서로서로 결투하여 죽였던 것이다. 탐욕, 강제노역 그리고 착취는 경제적 생활이나 정치적 생활 모두를 오염시켰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몇 가지 선교방법의 특징들이 추론된다. 그리스도는 새 주인으로서 제시되었다 : 『그분이 오셨을 때, 그분은 새로운 성격을 띤 분처럼 보였습니다』4). 그분의 새 제자들은 학교에서처럼 모여져야 했다. 이 제자들은 이해, 숙고, 선택할 수 있는 성인들이었으며, 그들은 나중에 자신들이 사도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 학교의 법은 형제적 사랑이었으며, 학교는 무엇보다도 형제애로 결속된 곳이었다. 더욱이 이 학교는 개방된 동료의식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외부사람들에게 형제애를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 『그들은 서로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아라』 하고 이 제자들의 사랑의 생활에 익숙하지 못했던 이교도들이 말했던 바와 같다. 이교도들은 이러한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어 회개하고자 했었다. 철학자들은, 포교적 성격을 지닌 저작물들인 호교론 작품들에 의해 굴복당했다(2세기 때부터 성 유스띠누스). 하층계급 사람들, 노예와 장인들은,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적인 연계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 사교계 부인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쳤다(The Flavians).
이렇게 성장하는 형제애에 영향을 받아 그와 같은 무질서들이 처리되었다. 즉 열교들은 공공연히 비난받았고, 말썽부리는 사람들이 저지되었다. 도당들과 사회악들이 격투당했다. 공동체는 "상호 유익을 누리는 사회"로서 일종의 대가족이 되었는데, 이 공동체에서 부자는 가난한 이를 돕고, 고아와 과부들이 돌보아졌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성찬(Eucharist, 감사행위) 예식에 따라 함께 모여 나눔의 모임인 아가페(Agape)를 거행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본질적으로 친목행위가 전례적인 것이었는데, 이방인들은 바로 이점을 재빨리 주목했다 : 『그들은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리기 위해 모인다』. 이 모든 것은 플리니우스5) 의작품 「비티니아의 그리스도교회들에 관하여 트리얀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자 자신에 의해 잘 기술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그리스도교는 이따금 수상적인 단체로서 의심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점에 대해 언급해 보자. 포교의 대중적인 성격과 다량의 개종때문에 이 혐의를 지배적으로 받게 되었으며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보다 자유스럽고 보다 쉽사리 익명으로 지낼 수 있는 도시들 안에 교회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사도적 삼투성'(Apostolic osmosis)에 의해 서로 서로로부터 너무 멀지 않은 계층들 사이에서 그 효과를 보다 쉽게 성취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때때로 박해를 받았으며, 그때마다 겁많고 비겁한 많은 영혼들은 신앙을 포기하곤 하였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영웅심은 다른 이들에게 모범을 주어, 그 다져진 기반은 의심할 바 없이 잃은 것 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가치있는 것이었다. 떼르뚤리아누스는 크리스찬들이 도시를 채우고 심지어 황제의 궁전 안에 까지 침투된 것을 이미 자랑 할 수 있었다. 자율적이며 영적인 노력에 의해서, 이 선교 기획은 집요하게 추진되어 북아프리카와 남유럽 그리고 근동의 가장 깊은 근원에까지 보내어졌던 것이다.
3. 콘스탄틴 대제 시기
연대적 윤곽
. 311년과 312년 : 신교 자유의 칙령
. 313년 : 밀비우스 다리6)에서 콘스탄틴의 승리. 전반적인 자유의 칙서(밀라노 칙령)
. 353년 : 이교 희생제사의 금지와 로마제국 전체에 그 사원들의 철폐
지난 세기에 관해 방금 언급한 것은 지금 세기(4c)에도 사실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인 정세는 변화되었다 : 이전에 박해받던 교회는 311년 부터는 관용되었고 갈레리우스7)의 신교 자유의 첫번째 칙령이 반포되었고, 313년부터는 명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밀라노 칙령, 콘스탄티누스8)과 리치니우스). 그 몰수되었던 재산들이 복구되었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380년에 가서야 그리스도교는 국교로 선포되었으며, 이미 353년부터 이교 제사는 제국내에서 금지되어 졌었다. 성 암브로시오(St. Ambrosius, d. 397)는 「교회는 진실한 로마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제국은 5세기부터 그리스도교 국가였지만, 군주들과 신하들처럼 반대진영을 꾸미며 열교들이 이미 크리스찬들을 분리시켰다. 제국까지도 395년부터 동과 서로 분리되었다.9) 이렇게 해서 제국내에서의 선교작업은 어떤 고귀한 성격들을 띠게 되었다. 자유와 특혜가 교회에 허용되어 선교사들은 공개적으로 일하고 긴 여행을 수행할 수 있었다. 결국 사회의 모든 계층을 위한 대중설교와 포교와 교육을 위한 텍스트들의 개발에 따른 사도직 활동이 강화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교회가 이미 침투되어 형성된 공동체들은 지리적 제한을 넘어서 지중해 유역 밖으로, 번져 나가고 그리고 도시 주민으로부터 떠나서 사회학적인 제한을 넘어 명실공히 대단히 확장되었다. 뚜르(Tours)의 주교이었던 성 마르띠노는 4세기 말엽 불란서의 이교지방들에서 위대한 사도로서 활약하였다. 이러한 위대한 사도들로 구성된 전체적인 팀은 유럽의 그리스도교화를 촉진시키는데 요인이 되었다. 성 세르베(St. Servais)는 톤그레스(Tongres, 4세기)에서 활동했으며, 스콧틀랜드에서의 성 니니안(St. Ninian, 4세기), 아일랜드에서의 성 패트릭(St. Patrick, 5세기) 등, 로마 영토내에서의 그들의 활동은 그 시민적 구조에 종교적 틀을 부과하면서 제국을 그리스도교화시켰다. 각종 종교적 제도도 그 지방 정치적 제도의 상대역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 로마에서는 교황과 황제, 각각의 중요한 도시들에서는 주교와 주지사등 교회와 국가는 그리스도교와 로마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손잡고 일했다. 이렇게 해서, 그레고리 대교황에 이르러서 '한' 세계(로마세계)의 끝에 도달했다는 의미는, 마찬가지로 교회의 끝을 포함해서 '그'세계의 끝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 교회는 선교의 새로운 인간적 차원인 야만인들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로마세계에서의 선교는 야만인들의 맹습격을 대항하거나 혹은 새로운 삶으로 대체할 수 있는 크리스찬적 정신, 그리고 공적 조직인 교회적인 중심기관들이 굳건히 설립되고 이루어졌다. 그것은 또한 교회가 여러 세기를 통하여 오늘날까지 전달해 준 전반적 규모의 일련의 이미 존재해 왔던 이방인들의 칭호들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한 것이다 : 교황, 주교, 부제, 기념성당, 전례, 희생제사, 신비, 세례 등. 이것은 단지 단어상의 문제가 아니라, 심지어 이방인의 관습들도 채택된 것인데, 예를 들면 이방인의 신들에게 한 주일의 여러 날들을 적용시키는 일, 전례예식을 위해 길게 늘어뜨린 옷들을 사용하는 일, 정결예식, 분향하는 일 등이다.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표현하고 정식화하기 위하여 수많은 철학적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로마적 용어보다는 희랍식의 용어들이 보다 자주 사용되었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삼위일체와 관련되어 사용된 로고스(????s)와 페르소나(Persona) 이었다. 한 부류의 용어들은 「신비」(Mystery) 그 자체의 단어와 함께 시작되는 「신비 종교」들로부터 차용된 것들도 있었다. 사도들의 으뜸이 제국의 중심에 설립되었으므로, 교회의 어떤 중력이 실제상에 있게 되었는데, 지리적으로 그것은 로마에 중심을 잡게 되었으며, 문화적으로 '로마성'(Romanitas)에 의해 고무되었다. 제국의 붕괴 이후에, 이것은 긴장과 어려움들 그리고 드디어 분열들의 원인이 되었다.
각주 ---------------
1) 유스띠누스(Justinus) ; 100년에 성 나플루즈에서 출생하여 165년 로마에서 순교한 호교론 자이다. 외교철학을 배우고 실천한 후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순교했다. 두권의 호교서와 「트리폰과의 대화」, 「한 유대인과의 논변」 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2) 떼르뚤리아누스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 라틴계 작가 카르타고 [(Carthago) 출생 150-160 / 222(240)- ?]. 문장이 강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나중에 몬따니즘에 물들어 삶을 마쳤다. 주요 작품 : 「여러 민족들을 대항하여」 (197), 「호교론」 (197), 「세례론」, 「반 마르치온」 (210), 「흥행론」, 「여성들의 배치론」, 「왕관론」, 「젊은이론」 등이 있다.
* 몬따누스 (Montanus) : 2세기경 프리기아에서 활약한 사람. 교계제도의 예언직의 우월성과 성령의 즉각적인 도래 그리고 순교를 추구하던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이 운동은 172년 이후에 널리 퍼지고, 떼르뚤리아누스도 이 운동에 가담했다.
3) Pothinus : 소아시아에서 87년경 출생하며 177년경 리용에서 순교 했다. 그는 리용의 초대주교이다. 그의 순교는 리용과 비엔느에서의 다른 42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고올지방의 그리스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4)* 「디오네투스에게 보낸 편지」(Letter to Diognetus), XI, 4.
5) Plinius (C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 라틴계 작가로서 꼼므 (Côme)에서 61년에 출생하여 114년경에 사망함. 장 플리니우스 {Plinius Caius Plinius Secundus : 꼼므 (Côme)에서 23년에 출생하여 스타비에스에서 79년에 죽음} 의 조카이며 양자이다. 플리니우스는 변호사, 집정관 (100년경)을 역임했고 비티니아(Bithynia)에서 는 황제의 대사로 지내기도 하였다 (111-112).
6) 로마에서 3km 떨어진 티베르 강 위에 있는 밀비우스 (Milvius) 다리인데,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10월 28일에 이 다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7) 갈레리우스 (Caius Galerius Valerius Maximianus) : 로마황제 (305-311)이며, 디오클레티안(Diocletien)의 박해라는 이름이 붙여진 대박해의 선동자였다. 305년에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황제가 됨. 그는 죽기 전에 '신교 자유령'을 부득이 내게 되었다.
8) 클로르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Ⅰer Chlore :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Chlorus : 로마황제 (305-306)이었다. 막시미아누스 (Maximianus)에 의해 채택되어 고올, 스페인, 브레따뉴 지방을 다스림. 305년에 갈레리우스 (Galerius)와 함께 황제가 됨. 그는 자기 통치 지역에서 크리스찬에 대한 박해를 중지시켰다. 그의 부인은 헬레나 황후이다.
* 콘스탄티누스 1세 대왕 (Constantinus Ⅰer le Grand (Flavius Valerius Aurelius Claudius Constantinus): (Naisse, Mésie, 280.288- Amcyrona 337). 로마황제 (306-337)로서 클로르 콘스탄티누스 1세 (Constantinus Ⅰer Chlore) 와 성녀 헬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그는 디오클레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있었고 그의 아버지가 죽자 (306), 그 통치지역에서 황제 위에 올랐다. 그는 막시미아누스의 딸과 결혼하고 그와 화해했다. 그후 그를 자살케 함 (310). 갈레리우스가 죽자 (311), 그는 리치니우스 (Licinius)와 동맹을 맺었는데, 그는 콘스탄틴 황제의 누이 콘스탄시아 (Constantia)와 결혼했다. 그리고 그는 밀비우스 다리에서 막센스 (Maxence)를 격퇴했다 (312). 그는 「이 표시로 너는 승리 하리라」는 환시를 받은 후였다. 그는 이 표시를 그 군사들의 방패들에 새겼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승리할 것도 확신했다. 312년 부터 그는 교회의 일부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313년에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고 그리스도교를 제국내에 공인하였다. 리치니우스와의 우호는 324년에 끝나고, 그는 제국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다. 그는 정통신앙의 유지를 위해 힘쓰기 시작하고 아리우스의 분파를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단죄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이교분파들 앞에서 가끔 주저했고, 그래서 몇년 후에는 아리우스를 부르고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하기도 했는데,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신앙의 옹호자였다. 321년엔 도나티즘 추종자들에게 전례의 자유를 허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제국의 종교적 통일을 위해 내적으로 복구적인 일도 동시에 추구하였다. 그는 신법의 최상 군주였고, 그는 모든 법적인 결정을 할 수 있었고, 감시 할 수 있었다. 모든 역할은 원로원과 군대에서 이루어졌다. 330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새 수도로 정했다. 제국의 계승문제를 포괄하기 위해, 그는 자기 아들들을 황제의 위엄에로 들어 높혔다. 콘스탄틴 2세 (Constantin Ⅱ), 콘스탄트 1세 (Constant Ⅰer) 그리고 콘스탄스 2세 (Constance Ⅱ). 그의 통치는 그리스도인들의 첫 기념물들을 건설하는데서 유명해졌는데 예루살렘 성무덤(Saint Sépulcre) 성당을 건설했고, 로마에는 라테란과 바티칸 기념성당을 지었고, 또한 콘스탄티노플에는 「사도들의 교회」들과 「성 소피아」 교회를 건설하였다.
9)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칙령 (313)으로 공인되고, 테오도시우스 (Theodosius)황제는 국교로 삼아 기반을 닦았으며, 그가 395년에 사망하자 동쪽은 장남인 아르카디우스 (Archadius)에게, 서쪽은 호노리우스 (Honorius)에게 각각 통치권이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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