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스크랩] 성체공경의 역사

@로마의휴일 2009. 8. 19. 23:20

성체공경의 역사**

 

조현권(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

 

머리말

우리 교회는 지난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면서 그 성년(聖年)을 “강렬한 성체의 해”로 보내길 소망하였고, 이를 위해 세계성체대회(제47차)를 로마에서 개최한 적이 있다. 이러한 성체대회는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교회의 신앙표현이라 할 수 있으며, 신자들의 성체에 대한 공경심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다. 성체대회뿐 아니라 영성체, 거양성체, 성체조배, 성체강복, 성시간, 성체행렬 등 이 모두가 성체공경의 연장선상에 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 양상을 달리하여 온 성체공경은 그래서 나름의 역사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당신의 교회에 그 거행을 명하신 성체성사는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을 지니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교회의 처지에 따라, 신학과 전례의 발전에 따라, 또는 사목상의 이유로, 성체성사의 거행과 그에 대한 이해는 계속 변화, 발전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을 비롯한 성체에 대한 공경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되어 왔던가, 특히 미사성제와 영성체 참여에 대한 교회의 이해는 어떠하였던가를 알아본다.


I. 초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1.1. 공동체를 위한 사랑의 만찬

성체성사는 초 세기부터 Eucharistia, 곧 감사의 예(禮), 감사의 말 혹은 감사의 기도라는 말로 불리었는데, 이 말은 감사의 기도를 노래하면서 행하여지는 성찬례를 나타내며, 더욱이 이 기도에 의하여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말로써 신약성서적인 기원을 갖는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1고린 11,23-25).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령강림 이후 먼저 (유대교) 성전에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어서 (그리스도교) 신자의 집에 모여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감사의 의식, 곧 주님의 만찬을 지냈다. 이 만찬은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거행되었는데, 이는 공동체가 나누는 사랑의 만찬으로서 다함께 나누는 식사였고 잔치였다. 일반적으로 배불림의 식사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 이 때의 성찬례였는데, “이 식사는 만연하는 남용(1고린 11,17-34 참조)뿐만 아니라 공동체 식구가 불어나기 때문에도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이 배불림의 식사를 위한 많은 식탁들이 하나인 성찬례의 ‘거룩한 식탁’으로 인해서 분리되었다.”
이렇게 차츰 일반 식사에서 분리되어 거행된 감사의 의식, 곧 성찬례는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리스도교 고유의 성체성사와 미사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차츰 유대교와는 다른 모습의 교회가 되어갔다. 이때 신자들은 축성된 빵을 예식에 참가하지 못한 신자와 가난한 사람, 병자,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까지 나누어 주었다. 박해시대에 성체성사는 신자들의 삶에 큰 힘이 된 것이다.


1.2. 성체에 대한 경외심의 태동

사도 이후의 초기 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심은 한마디로 그리스도 중심의 신심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뜻과 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윤리, 도덕의 기준이었으며, 그분이 남겨 주신 성체성사는 현세의 모든 음식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었다. 성체성사에 관해서 전해 주는 초기사료는 많지 않지만, 사도시대 직후에 저술된 ‘12사도의 가르침’(Didache)에 따르면 신도들은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고, 이웃들과 불화 가운데 있는 자는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2세기의 호교교부인 유스티노(Justinus, 100?-165?)가 전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이 음식을 우리는 성체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우리의 가르침이 참되다고 믿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라 죄를 용서하고 생명의 재탄생으로 이끄는 세례욕에서 씻었던 사람이 아니면 이 음식의 한 몫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예물을 보통의 빵이나 보통의 음료처럼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 말씀을 통하여 육(肉)이 되셨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살과 피를 취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가르침에 의하면 말씀께 향한 기도를 통해서 감사기도 아래서 축성된 음식은 그렇게 우리의 살과 피를 변화시키고 양육하기 위하여 이 예수의 살과 피가 되기 때문이다.
이때의 신자들이 성체배령에 대해서 경외심을 가졌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성체현시나 성체강복 같은 미사 밖의 성체공경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신생교회는 아직 전통적인 유대교의 신심형식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유대교 조직의 기본 원칙을 이어 받고 있었는데, 우선 미사 밖에서의 성체 보관은 교회의 모태인 유대교의 관습에 일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대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에는 안식일 전날을 제외하고는 그날 먹을 것 외에 더 모으지 못하였고, 파스카 기념제에서 제물인 양을 먹을 때에도 그날 다 못 먹게 되면 불사르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체 보관에 대해서는 당시 신학자들의 반대도 많았다. 예를 들어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시면서)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고 했지, 언제 다음 날까지 보관하라고 지시하셨던가?”하고 말하였다. 반면 축성된 제병은 만나처럼 금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혹은 다음날까지만 보관할 수 있다고 한 신학자들도 있었다. 유대 관습과의 불일치와 이러한 이견들 때문에 미사 외의 성체 보관과 공경이 정식으로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인 성체보관과 공경은 고대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그리스도교적 관례였다. 즉, 신자들은 미사 후 성체를 집에 모셔 가서 매일의 첫째 음식으로 영했으며, 박해시대엔 미사거행이 어려웠기에 성체를 지녀 보관하기도 했던 것이다. 초대 아프리카 교회의 성체에 관한 신앙의 증인으로서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도 그러한 예를 전하고 있다(물론 이와 같은 방법은 후에 금지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성체에 관하여 상세한 서적을 저술한 일은 없으나, 그는 그리스도인의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면서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던 성찬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성찬례를 ‘희생제를 바치는 식’(De oratione, 19)이라고 불렀고 신자가 성체를 ‘장상의 손’(De corona, 3), 즉 주교, 사제의 손에서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당시의 그리스도인의 어떤 구체적인 문제를 취급한 짧은 말은 특별히 흥미 깊다. 당시의 신자는 교회에서 정한 단식일에 성체를 영하면 그것 때문에 단식을 깨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자에게 다음의 것을 권하고 있다. “단식 날에도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은 좋은 일이어서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단식을 깨고 싶지 않은 신자는 성찬례 때 ‘주의 몸’을 손에 받고 그것을 다음날까지 간직했다가 영할 수 있다”(De oratione, 19).


II. 고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2.1. 바실리카미사와 성체공경의 시작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285-337)가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후 그리스도교회는 바실리카(Basilica)와 같은 로마시대의 공공건물을 미사를 위해 사용하게 되었으며, 321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주일예배가 국법으로 선포되어 소위 ‘제국교회’(帝國敎會)가 되면서 미사를 더 성대하게 드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성체에 대한 공경과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제대에 대한 공경도 높아갔다.

박해 시대가 끝나고 교회가 자유로이 그 신앙을 나타내고 전례를 행할 수 있게 되면서 로마 제국 각처에 큰 성당이 세워지고 신자는 증가되고 일요일에는 성찬례가 성대히 거행되게 되었다. [···]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의식도 점차로 장엄해졌다. 최후 만찬 때의 예수의 말씀을 내포한 감사기도로 빵과 포도주가 축성되는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점차로 초나 향이나 무릎을 꿇는 등의 로마 황제 궁전에서 사용되던 의식이 성찬례에도 도입되어 노래와 행렬로 의식의 장엄성이 증가되었다. 성찬례에 참가하는 것은 뚜렷이 세례를 받은 신자에만 국한되어 있어서, 성찬례 전에 행해지는 성서 낭독과 주교의 강론에 참가하는 것은 세례 지망자(예비신자)에게도 허락되어 있었으나 강론이 끝나고 성찬례가 시작되면 성당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성찬례 동안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성당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성찬례에 참가시키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세례나 성체에 대한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습관도 4세기 교회 전반에 지켜졌다.

한편 4세기부터 발견되는 성체에 관한 기적 이야기들이 신자들의 신심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성체를 ‘노자’(路資, Viaticum)로서 임종을 앞둔 신자에게 영해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인데,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안전을 위해서 성체를 지니고 다녔다. 5세기 경부터는 매일미사가 일반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 중에는 성체를 직접적인 공경의 대상으로 삼아 집에까지 성체를 모셔 가서 경배하는 사람도 있었고, 급기야 성체를 훔쳐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한편 로마에서는 미사 중에 교황이 성체를 축성하여 시내 각 성당으로 보내 그 성체 조각을 성혈에 넣는 관습도 있었고, 영성체 예식 후에 환자들에게 봉성체도 행하였다. “거룩한 것을 거룩한 사람에게”라는 동방교회의 전례문이 시사하듯이, 영성체를 하려는 사람은 먼저 죄가 없이 거룩한 상태에 있어야 하였다. 영성체 전의 공복상태를 요구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인데, 9세기까지는 손으로 영성체를 하되 엄격한 규정을 따르도록 하였다.

 

2.2. 엄격한 영성체 준비 규정

시간이 흘러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로마제국의 여러 요소를 받아들인 교회는 바실리카미사를 더욱 더 성대하게 거행하였으며 성사의 외적인 의식이나 전례 행사 등에 더 치중하기 시작하였다. 미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사제석은 신자석과 멀어져 갔고, 제대는 높은 곳에 설치되어 신자들의 접근이 어려워졌다. 자연히 신자들의 미사 참례는 적극적일 수가 없었고, 이미 4세기엔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들의 영성체가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고,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영성체자가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하며, 이후 오랜 시기 동안 영성체는 사제만 행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506년 지금의 프랑스 악드(Agde)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에서는 적어도 성탄, 부활과 성령강림날 영성체를 하지 않으면 신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공의회는 동시에 영성체를 위한 엄격한 준비도 강조하여 영성체 권장에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신자들이 영성체를 멀리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이렇게 교회가 너무 엄격하게 영성체를 위한 조건을 정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체사리오(Caesarius, 470-542)는 영성체를 위해서 며칠 동안 금욕을 요구하였고, 심지어 신혼부부는 한 달 동안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권고까지 하였다.

 

2.3. 성인신심의 성행

이제 매일의 미사는 잦은 영성체와는 무관해졌고, 성체성사는 차츰 공동체의 만찬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은혜를 위한 신심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자들은 좀더 감각적인 종교행위를 찾고자 하였고, 이제 그리스도교 신심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성인 중심으로 변질되어 갔다. 특히 6세기 말에서 7세기 걸쳐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교회 전례 안에 정식으로 도입되었고, 이와 더불어 성지순례와 순교자, 성인들의 유해와 유물 공경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신자들 중에는 이 제대에서 저 제대로 옮겨 다니면서 제대에 모셔져 있는 순교자나 성인의 유해 앞에서 기도하는 이가 많아졌다.


III. 중세교회에서의 성체공경

 

3.1. 개인신심미사의 번성

중세에 들어 성체성사의 공동체적인 특성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사적인 미사가 점점 더 성행하게 된다. 여기에 대한 네메세기의 설명을 보자.

7세기 이후 서구 교회에서는 사제들이 성찬례를 공동 집전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성찬례를 집전하는 관습이 일반적인 것이 되어 왔다. 이 관습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직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는 각 신자 공동체에게 하루에 한 번의 성찬례가 행하여질 뿐이었다. 작은 도시의 경우 성찬례는 주교에 의하여 집전되고 사제들은 하나의 사제단으로서 그 성찬례에 참가하였다. 더 큰 도시의 예를 들면, 로마 같은 데서는 하나의 성찬례로는 부족하고 주교가 주례하는 성찬례 외에 도시의 각 성당에서 그 교회의 주임 사제가 각각 한 번씩 성찬례를 주례하였다. 그러나 점차 성찬례의 수가 늘어갔다. 순교자의 묘 위에 세워진 제단에서 거기 모이는 순례자를 위하여 수많은 성찬례를 행하는 관습이 차차 성행하였고, 한편 큰 수도원에서는 다수의 사제가 있어서 그들은 성찬례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것 외에 자신의 사제로서의 권한을 써서 혼자 성찬례를 행하는 것까지도 원하여 그렇게 되었다. 각 사제가 혼자서 성찬례를 주제하는 관습은 극히 최근에까지, 서방 교회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옛 관습을 굳이 지켜오던 동방 교회에서는 오늘도 역시 사제가 성찬례를 공동으로 주례하고 있다.

이렇게 미사가 사제의 공동집전보다는 개인적으로 거행하는 신심으로 성행하게 된 데에는, 특히 8-11세기경까지의 미사가 신심미사의 성격이 강하여 공동체의 전례가 아닌 개인적인 기도의 장으로서 미사가 이해되었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그 결과로 같은 성당 내에 여러 제단이 생기게 되었는데, 사제는 여기서 신자와 상관없이 벽을 보고 미사를 드렸다.
13세기에 들어서는 교회 구성원이 다같이 미사를 거행한다는 개념이 사라지고, 미사는 오직 성직자의 전유물이 된 듯이 보인다. 사제가 행하는 것만 “유효”하여, 심지어 평신도는 독서낭독에서도 제외되었다. 게다가 어려운 전례언어가 신자들의 이해를 가로막자, 이제 미사는 말씀을 선포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말씀보다는 전례 의식과 또 예식에 쓰이는 외적인 물건, 성사들의 표지가 더 큰 비중을 갖게 되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미사언어인 라틴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미사에 소극적으로 참여하여, 미사를 바라보기만 하는 시청자, 성체성사의 구경꾼이 되어갔다. 또한 성당이 커지면서 신자석은 사제석에서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평신도와 성직자간의 차별도 심화되어 갔다. 한편 그리스도를 향한 기도가 강조됨에 따라 그리스도에 대한 기도를 중재해 줄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 대한 신심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특히 이때부터 교회력에 많은 성인의 축일이 생기게 되었다.


3.2. 실체변화교리와 영성체 기피 현상

공동체 식탁으로서의 제단이 아니라 신자들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여러 층계, 칸막이, 문턱 등을 넘어 서 있는 제단, 자연히 이러한 높은 제단은 신자들에겐 근접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어갔다. 12세기 말에는 빵 그 자체가 그리스도 자체로 변화한다는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 개념이 등장하여 성체 안의 그리스도, 정확히 말하자면 성체이신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을 강조하였다. 이제 미사성제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이 빵의 형상에만 제한되어 있는 듯이 이해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눈에 보이는 성체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지나친 경외사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무릎을 꿇고 성체를 영하는 관습이 생긴 것이 이때이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그리스도의 성체 현존이 강조됨에 따라 신자들은 영성체를 더 멀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신자들은 “성체를 잘못 영하면 스스로 단죄하게 된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였다.
신자들의 영성체 기피 현상이 심화되자 교회는 이제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영성체해야 한다는 규정까지 발표하게 된다. 1215년의 제4차 라떼란 공의회는 실체변화라는 표현을 정식으로 이용하여 미사성제에서의 축성으로 빵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 하면서, 신자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부활 전에 화해성사를 받고 영성체하라고 한 것이다.  교회의 영성체를 위한 철저한 준비의 규정은 신자들의 영성체를 여전히 어렵게 하였다. 사실 당시 교회가 인간이 죄인임을 너무 강조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철저한 신앙생활이 필요함을 가르치는 분위기 속에서 신자들은 영성체에 지나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신자들은 성체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결과가 된 것이다.

 

3.3. 거양성체의 등장

성체에 대한 경외심이 일방적으로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영성체에 초대받고 있다는 의식이 점점 더 희박해져 갔다. 신자들은 미사 전례 중 말씀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항상 영적인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전례 행위에서 무언가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하면 좋아하였다. 이러한 신자들의 요구에 부합하여 거양성체의 의식이 생겨났는데, 거양성체와 관련하여 일어난 성체기적 이야기들은 신자들의 거양성체에 관한 공경심을 자극하였고, 13세기엔 영성체 대신 눈으로 우러러보며 성체를 공경하는 이러한 신심이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돌프 아담의 설명을 보자.
본당이나 수도원 미사 전례들도 성직자가 평신도의 어떠한 협력없이 모든 것을 혼자서 다 하는 성직 전례가 되어간다. 평범한 신자들에게 미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를 낮은 소리로 말하는 감사기도와 그 밖의 본문으로써 이중의 베일로 뒤덮어졌다. 그들의 주의(主意)는 이제 성변화 때 성체와 성작을 들어올리는 데 집중된다. [···] 성체에 대한 과도한 공경심은 성체를 더 이상 손으로 받아 모시지 않고 혀로 받아 모시는 데로 이끌었다. 성혈 배령은 폐지되었다. 전례적 행위에 대한 점증하는 오해는 유해 공경, 성지 순례, 신비극(神秘劇)과 모든 불행을 막기 위한 주보성인 공경과 같은 수많은 민중 신심 형태로 이끌었다.

 

3.4. 성체조배와 같은 성체신심의 확산

신앙생활에서 성체성사를 멀리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2세기경부터는 수도원 내에서, 특히 분도회 내의 엄격수도회인 씨토회와 프란치스코회에서 성체공경이 성행하였다. 성체조배와 같은 일반신자들의 성체신심은 특히 교회내의 위대한 민중운동가라고 할 수 있는 아씨씨의 성 프란치스코의 성체공경에 힘입은 바 크다. 이와 함께 성체를 보존하는 제대 앞에서의 경외심도 정식으로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13세기에 파리 시노드에서 의결되어 다른 교회 시노드로 확산되었다.

3.5. 병자성사를 위한 봉성체와 감실의 등장

본격적인 미사 밖에서의 성체공경은 병자성사 때 성체를 모셔가기 위한(봉성체) 사목적 이유에서 행하여졌다. 10세기 말부터는 임종을 앞둔 병자에게도 소위 ‘노자’(路資, Viaticum)로서 성체를 영해주기 위해서 성체를 성당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성체를 미신적인 사용을 위한 도난과 이교인의 모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체를 감실에 넣고 열쇠를 채우기 시작하였다. 미사 밖에서의 이러한 성체보존은 1215년 9차 라떼란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규정된다. 신자들은 사제가 병자성사를 집전하러 갈 때에도 성체에 대한 공경으로 촛불을 들고 종소리를 울리면서 행렬을 이루어 사제와 동행하기도 했다. 때문에 13세기 말 교회에는 적어도 두 개의 축성된 제병을-병자성사 집전 이후에도 환자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의 성체공경을 위해-모셔가도록 하는 지시도 있었다. 이때 교회는 영성체를 할 수 없는 환자들에게도 성체를 모셔 가서 성체를 바라보며 기도하게 했고,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신령성체(信領聖體)를 하도록 하였다.

 

3.6. 성체행렬과 성체현시 및 성체강복의 시행

이제 신자들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구와 그리스도의 실제적 성체 현존에 대한 신심에 상응하여 성체성사적인 행렬이 행해지고, 13세기부터는 성체성혈대축일과 그 성체행렬이, 14세기엔 성체현시와 성체강복도 성행하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그 전에는 성체를 볼 수 없는 상태로 보관하며 공경하다가 이제는 볼 수 있는 상태로 현시하며 공경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3.7. 미신적인 미사신심의 발생

미사 밖에서의 성체 공경이 성해짐에 따라 제사와 식사로서의 성찬례의 의미는 더욱더 약해지게 되었는데, 14-15세기엔 미사효과에 대한 미신적인 신심도 나타난다. 미사 참례하는 사람은 그 미사 동안 늙지를 않는다든지, 미사 참례하는 날은 벼락을 안 맞는다든지, 급사를 면할 수 있다든지 등등, 미사 끝에 비를 기원하는 예식이 생겨난 것도 이때이다. 한편 미사의 효과에 대한 지나친 생각으로 미사 신청이 쇄도, 수없는 미사를 드리기 위하여 소위 “제단 사제”, 즉 미사를 드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제도 늘어났다. 죽은 이를 위한 미사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이러한 미성숙한 교회전례는 종교개혁의 한 이유가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네메세기의 글을 인용한다.

사실 중세 말기의 그리스도인은 신학에 의한 충분한 지도를 받지 않았으므로 일반의 신앙생활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리고 성체에 관해서도 사람들 간에 다양한 미신이 생겨났다. 예를 들면, 일정한 수의 성찬례를 계속 바치고 청원하면 그 청원은 꼭 들어 허락함을 받는다는 미신이나, 또 어떤 특정의 기원을 위하여 성찬례를 봉헌하도록 사제에게 청하는 경우에 신자가 사제에게 주는 예물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혼란한 방법이 취해졌다. 사제 중에는 예물을 받기 위하여 매일 3-4회나 성찬례를 바치는 것을 유일한 업으로 삼고, 그것만으로 하루 종일 태만하게 지내는 사제가 중세 말기에는 허다했다. 동시에 이 시기의 교회의 상태는 일반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성찬례의 집행 방법도 충분한 경건이 결핍되고 사람들은 성당이 더러워도 모르는 척하고, 또 성찬례 중에 부르는 찬미가는 신심을 더하기보다는 세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더욱이 신자가 성체를 영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성체에 관한 그릇된 생각이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만하다.

 

3.8.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한 교회 전례법규의 확정

사람의 의화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이다. 의화를 위한 조건으로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하느님의 자애에 대한 신앙만을 근본교의로 내세우는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교회의 사제가 행하는 성찬례에 의하여 사람들에게 분배된다.” 라는 가톨릭 교회의 교의를 배척한다. 종교 개혁자들의 대부분은 성찬례가 봉헌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였지만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해서는 의견이 크게 달랐으니, 루터는 (실체변화라는 이론은 배척하면서) 복음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을 굳게 믿었던 반면에, 쯔빙글리나 그의 제자인 칼슈타트(Karlstadt), 에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는 성체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현존은 상징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실질적 현존을 부정하면서 거양성체와 감실의 성체보관을 공격했다. 이에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과 공격에 대한 반발로 성체공경을 더 강화하게 되는데, 프로테스탄트에서 공격받은 성체론의 주요한 점을 명백히 하였던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는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만 미사가 드려져야 한다는 자는 파문에 처한다.”라고까지 하였다. 공의회는 유감스러운 상태에 있었던 전례에 대한 심도 깊은 개혁을 관철하지 못한 채로 교황에게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의 도움으로 모든 전례서적을 새로 발행하도록 위임하여, 1570년에는 로마 미사 경본의 규범판이 처음으로 출판되고, 1588년에는 교황청 내 예부성성이 창설되어 전례법규를 규제, 감독하게 됨으로써, 이후 400년간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완전히 획일, 고정화되었다. 다음의 글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전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전례는 “중세기의 계속으로 [···] 성직자의 특별한 전례로 [···] 남아 있었다. 언어는 예전과 같은 라틴어이며 강론을 제외하고는 하느님 백성을 약간 고려했을 뿐이다.”(Jungamann, Welt konzil, 329 이하) 백성은 “미사에 참례”하고, 그들의 참여는 듣고 보는 데에 한정되었다. 평범한 백성에게 미사 전례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로 남아 있었다.
바로크 시대에 와서 교회의 공적 전례는 점점 더 화려하게 거행된다. 수많은 바로크 성당들의 화려한 공간, 다성의 노래와 악기가 동원된 음악은 미사 전례를 하나의 “눈과 귀의 향연”으로 만든다. 강론은 대부분 미사 전에 행해졌으며 그럼으로써 말씀의 전례의 구조적인 틀에서 벗어났다. “중세기의 발전은 출발점을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계속된다”(Jung mannm Erbe, 118).

그렇지만 나름대로 쇄신의 노력을 기울인 트리엔트 공의회 작업의 결실로, 성체를 새로운 양식으로 깨닫고 적어도 매주 한번은 성체를 모시려고 노력하는 신자들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미사 참례는 여전히 수동적이었고,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에 대한 신심은 여전히 정도가 지나친 상태였다. 17-18세기엔 성체는 그리스도의 가장 효과적인 약으로써 여겨져 “약으로써의 영성체”가 널리 퍼지기도 했다. 한편 프란치스코 회원의 노력으로 십자가의 길 신심과 도미니코 회원이 보급한 로사리오 신심이 신자들의 건전한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IV. 근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4.1. 전례쇄신과 영성체 강조
근대에 들어 전례쇄신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는 프랑스의 솔렘 수도원을 부흥시킨 베네딕토회의 게랑제(Prosper Guėranger, 1805-1875) 신부가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를 본격화 한 비오 10세 교황은 주일의 우위와 영성체의 중요성과 신자들의 능동적인 전례 참여를 강조하고, 1905년 영성체교령(Sacra Tridentina Synodus)으로 적극적인 영성체 참여를 권장하며 어린이들의 조기(早期) 영성체와 그를 위한 첫영성체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때 영성체자는 은총 지위에 있을 것과 올바른 지향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에 따라 교회 내의 전례 쇄신은 활기를 띠어갔다.
그런가하면 이때의 성체신심엔 미신적인 요소도 들어 있었으니, 신자들 중에는 영성체 효과에 대한 과신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영성체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에 1917년에 반포된 교회법에서는 같은 날 한 번 이상의 영성체를 금한다고 하였다. 한편, 19세기 후반부터 세계성체대회를 비롯한 각 지역의 성체대회가 자주 열렸다. 중세기부터 계속되어 오던 예수성심에 관한 신심도 1856년 비오 9세 교황의 예수성심축일 제정으로 심화되었다.


4.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성체신심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회 쇄신의 바람은 먼저 전례에 대한 개혁으로 뚜렷이 드러나게 되는데, 전례헌장(Sacrosanctum Concilium)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 신자들로 하여금 거룩한 전례에 있어 풍성한 은총을 더 확실히 받게 하기 위하여, 자모이신 성교회는 그 전례의 전면적 개혁을 신중히 추진코자 한다. 왜냐 하면, 전례는 신적제정(神的制定)인 연고로 변경할 수 없는 부분과, 시대의 변천을 따라 변경할 수 있고, 또한 그 전례의 본질적인 내적 성질에 덜 부합하는 것이 삽입되었거나, 혹은 덜 적합하게 이루어진 것이 나타나면 변경하여야 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21항).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 신앙의 신비에 마치 국외자(局外者)나 묵묵한 방관자인 양 참여하지 않고, 예절과 기도를 통해서 이 신비를 잘 이해하고, 거룩한 행사에 의식적(意識的)으로, 경건하게,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또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육성되고, 주의 성체의 식탁에서 보양되고, 하느님께 감사하도록, 성교회는 이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또 신자들은 티 없는 제물을 사제의 손으로 뿐 아니라, 사제와 함께 제헌하면서, 자기 자신을 제헌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그럼으로써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 또 자기들 상호간의 일치가 날로 긴밀하게 되어, 하느님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시도록 해야 한다(48항).

전례헌장은 이제 미사성제에 모국어 사용을 전면적으로 허용한다고 하면서(40항, 54항), “사제의 영성체 후에, 신자들이 같은 성제에서 (축성된) 주의 몸을 받아먹도록 하는, 더욱 완전한 미사성제의 참여를 크게 권장한다.”(55항)하였고, 미사의 사제 공동 집전을 원칙으로 하면서 같은 시간에 한 성당에서는 한 대의 미사만 드리도록 하였다(57항).
공의회 이후 1967년에 발표된 ‘성체 신비에 관한 훈령’은 성체성사를 은총의 보고(寶庫)로 제시하면서 일상생활 중에 성체성사적인 삶을 살 것을 권고하였으며,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적극적인 영성체를 권고하였다.

잦은 영성체와 매일 영성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깊게 하고, 영적 생명을 더욱 풍만히 양육하고, 영혼을 덕행으로 아름답게 꾸미며, 영원한 행복의 보다 확고한 보증이 되는 것이 사실이므로, 본당신부, 고백신부, 강론신부들은 자주 열성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백성을 교훈하여 이렇게 신심 많고 유익한 습관을 기르도록 격려해야 한다(37항).

훈령은 또한 영성체는 우리를 일상의 허물과 범죄에서 지켜주는데, 영성체를 위한 준비로서 합당한 통회와 경우에 따라서는 고해성사가 중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각 미사는 중죄가 아닌 가벼운 죄들을 사해 주는 하나의 작은 고해성사라고 할 수 있다. 미사의 도입 부분엔 참회의 예절이 있고, 이때 사제는 사죄경을 외우기 때문이다.
1983년 교회법은 성체의 개인적 보존과 휴대를 금하면서(935조), 성체가 보존되는 성당은 중대한 이유가 없는 한, 매일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신자들의 성체조배를 위해 개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937조). 그래서 성당과 경당들에서는 매년 적당한 기간 동안 비록 연속적이 아니라도 장엄한 성체현시를 하도록 권장되어진다(942조). 교구장의 판단에 따라 가능한 곳에서는 특히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성체께 대한 공경의 공적 증거로 공공 도로에서 성체 거동 행렬을 하여야 한다(944조). 교회법은 사제들이 자주, 더 나아가 매일 성찬을 거행하기를 권장하면서, 사목적 필요 외에는 원칙적으로 하루에 한 번 성찬을 합당한 기도로 준비하여 거행하되, 정당하고 합리적인 이유 없이는 신자들의 참여 없는 사제의 단독 성찬 거행을 금지한다(904-909조).
이제 공의회의 개혁작업을 바탕으로 바야흐로 성체 신심은 그 균형을 찾아가는 듯하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세계성체대회는 교황을 비롯한 주교단, 성직자와 평신도 전체의 일치를 드러내는 공동체적인 사랑의 만찬인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모임으로 부각되고 있다.

 

나오는 말

가톨릭교회는 이천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역사는 여느 인간사(人間事)처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며 동시에 ‘죄 중에 있는 교회’, 또한 ‘성인들의 교회’이자 ‘죄인들의 교회’, 곧 ‘죄인들의 거룩한 교회’(heilige Kirche der Sünder)이다. 이렇게 모순된 상태로 있는 교회를 고대와 중세의 신학에서는 ‘순결한 창녀’(casta meretrix)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교회 공동체가 ‘거룩한 하느님’을 믿는 ‘나약한 인간’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러한 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공식적으로 처음 인정하고 그에 대한 인류의 용서를 구하였다.
파란만장한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체성사의 거행과 그에 대한 이해와 공경도 많은 변천을 겪어왔고, 그 속엔 긍정적인 면과 함께 부정적인 면도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역사가 과오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발전하여 왔듯이, 성체에 대한 공경의 역사도 이상적인 방향으로 발전되어 온 듯이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 성체성사에 대한 거행과 그에 대한 공경의 모습이 결코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결코 완성되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발전 중에 있는 것이며, 발전 중에 있는 것이기에 변화되어야 될 것이다. 물론 변화하되 본질과 정통성을 잃고 퇴보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근래에 식민지 주입 방식의 교회 선교 활동의 반성과 함께 복음전래에 대한 토착화 작업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데, 현대 교회는 토착화 작업을 비롯한 쇄신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이에는 미사전례도 예외일 수 없다. 미사성제는 공동체의 사랑의 만찬으로서의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자리이며, 공동체는 끊임없는 자기 개혁을 필요로 하는 인간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크게 성사생활과 기도생활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러한 신앙생활의 원천은 성체성사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양식과 음료로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와 신비로운 일치를 성령의 활동 안에서 이루고자 하신다. 우리는 성령을 신뢰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또 성의 있게 준비된 상태에서 성체를 영하고 성체성사적인 삶, 곧 서로 나누는 사랑의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어느 연로한 수녀님께서 첫 서원 금경축일을 지내면서 말씀하시길, 오십여 년 수도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뻤고 고마웠던 일은 매일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고 했다. 그 수녀님은 매일의 성체성사에서 삶의 활력을 길러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성체성사는 하느님께서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증거하는 사랑의 성사이다. 매일 매일, 또는 매주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또 그분의 사랑을 그렇게 가까이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여기에 천주교 신자가 된 남다른 보람이 있지 않을까? 성체성사에 참여하고 성체를 공경하며 사는 삶, 이런 삶이 그리스도 신자다운 삶이리라.

출처 : 사막의 별 영성자료 순례 그리고 그 이야기
글쓴이 : 사막의 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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