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스크랩] 토마스 이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

@로마의휴일 2009. 8. 19. 23:19

신 존재의 증명

 

  토마스는 이 세계의 매우 가까운 측면에 관해서 성찰함으로써 <후험적으로> 신의 존재에 관한 충분한 증명이 얻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이 성찰 자체는 어려우며, 그는 이 어려움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그는 누구라도 형이상학적인 성찰을 할 수 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동시에 이 성찰의 기초가 되는 경험적인 사실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가까운 것이다.  유한한 여러 사물과 그것들이 의존하고 있는 존재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경험적인 사실을 발견해 나갈 필요는 없다.

  형이상학자가 신을 발견하는 것은, 탐험가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섬이나 꽃을 갑자기 발견하는 방법으로써가 아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연구나 탐험보다도 오히려 주시와 성찰이다.  그러면 아퀴나스가 신의 존재를 잠재적으로 인정한다고 생각했던 가까운 사실들이란 무엇일까?

 

논증의 이해

{이러한 논증에 관한 검토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들에 관해서는 오해가 생기기 쉽다. <코플93,174> 거기서 사용되는 용어나 표현은 우리들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거나, 혹은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이해되기 쉬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다섯 가지 길로(quinque viis) 논증 될 수 있다.


첫째이며 더 명백한 길은 運動變化에서 취해지는 길이다.

(1) 이 세계 안에는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또 그것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2-A) 그런데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 한테서 움직여진다. (omne autem quod movetur ab alio movetur)

(2-A-1') 사실 어떤 것도 그것을 향해 움직여지는 것에 대해 可能態에(in potentia) 있지 않는 한 움직여 질 수 없다.

(2-A-1'') 움직여 주는 것은 그것이 現實態에 있는 한 움직여 준다.

(2-A-1) = 즉 움직인다는 것(movere)은 어떤 것을 可能態에서 현실태로 이행시켜가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2-A-2) 그런데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끌어 가는 것은 현실태에 있는 어떤 有에 의하 지 않으면 될 수 없다.

(+) 그러나 같은 것이 같은 관점에서 동시에 현실태에 있으며 가능태에 있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은 다른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2-A-3) 따라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2-A)]

(2-Ba) 그러므로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그것이 움직인다면 그것 또한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하며 그것은 또 다른 것 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2-Bb)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소급해 갈 수는 없다.

 (2-B+) 그 이유는, [만일 움직이는 것의 무한한 소급이 인정된다면] 어떤 첫 움직이는 자(aliquod primum movens)가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다른 움직여 주는 자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한테도 움직여지지 않는 어떤 第一動者(aliquod primum movens)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3')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런 존재를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발견되어 (Met XII; Phys VIII) 마이모니데스와 알베르투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었다.} <코플88,436>

(1) 이 세계 안에는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또 그것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여기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운동'이라는 말을 '변화'라는 의미(가능성의 상태에서 현실성의 상태로 옮겨 가는 것)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장소적인 이동만이 아니라 가능유에서 현실유에로의 모든 이행을 의미한다. 즉 변화 일반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구체적, 경험적 운동만이 아니라 그런 운동에서 파악되는 형이상학적 운동 까지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대전제/소전제>는 감각경험으로부터 적어도 움직이고 있는 사물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이것들을 아리스토텔레스 Phys VII,1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운동의 원인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 운동은 여기서 단순히 (현대적인 의미에서) 물리적인 운동으로만 이해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비물체적인 운동 따위의) 형이상학적인 운동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감각적인 사물들에게 있어서 물리적인 측면과 동시에 존재론적-형이상학적인 측면을 지닌 하나이고 동일한 운동이다: 즉 움직여진 대상의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운동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범주 즉 실체, 양, 질과 장소 등에 따른 운동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운동에 의한 증명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도 장소의 이동으로부터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여기로부터 동물에게 있어서 영혼이 그 원인이라는 논증이 특별히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2-A) 그런데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 한테서 움직여진다. (omne autem quod movetur ab alio movetur)

이 인과율은 {움직이는 것들의 경험할 수 있는 개별 경험으로부터 귀납적으로 얻어진다. 그것은 단순히 모든 움직이는 것이 도대체 한 운동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그것도 또한 귀납적으로 인식되어야만 하지만)는 것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의 원인이 움직여진 것 자체와는 다르다는 것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것 한테서 움직여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운동의 정의 (Arist. Phys. III,1-2)로부터 증명되고 있다. 움직여진 것은 아직도 가능성안에 있고 현실화되어 있지 않다는 뜻에서 가능태 그 자체가 현실태로 된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것이 "같은 관점에서", 즉  같은 운동에 관련해서 동시에 가능적이며 현실적이거나, 움직여지면서 움직일 수는 없다.

현실성과 가능성은 하나의  같은 운동에 있어서는 두개의 서로 다른 원리에 나누어져 있어야 한다.}

{생물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원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스스로에 의해 움직인다고는 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 스스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근원적으로 운동  여기서는 생명을 주는 자(제1동자), 즉 신이 생물에게 스스로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주는 한 그것들이 스스로 (자체를)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움직인다는 정신적 존재는 운동의 실천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한테서 부과된 어떤 것을 향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 지성은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제1원리와 원하지 않을 수 없는 궁극 목적을 향해 스스로 움직여가는 것이다.}

 

(2-Ba) 그러므로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그것이 움직인다면 그것 또한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하며 그것은 또 다른 것 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2-Bb) 무한히 소급하는 계열은 있을 수 없다 (이 원리는 처음 세 증명 모두에 사용되고 있다.)

{이 <소전제/대전제>는 움직이는 것에 관해서 두가지 가능성을 들여오고 있다:

i)    그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움직여지는데, 이 움직여주는 것 자체는 또 다른 것에 의해서 움직여지기  때문에 무한으로 소급하게 된다. 또는

i)    자신은 움직여 지지 않는 어떤 것으로부터 움직여지게 된다.}

to (2-B+ & 2-B++)

{1. 움직여지면서 움직이는 것은 (마지막 움직여진 것과 움직이면서 자신은 움직여지지 않는 첫째 것 사이에 있는 것들) 첫째 것 없이는 움직여지지 않는다.

2. 무한 계열로 소급되는 움직이는 것은 첫째 것 없이 움직여지면서 움직이는 것이다.

3. 무한 계열로 소급되는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또한 움직이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전제 (1)과 모순이 되는 것이다. }

(3)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한테도 움직여지지 않는 어떤 第一動者(aliquod primum movens)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動者는 현실유이다. 왜냐하면 현실로 있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작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부동적 동자는 순수현실유이다.

가능태안에 있는 현실유는 그 가능성이 지향하는 현실에 대해 可動的(mobile), 즉 그 현실로 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동적 동자로서의 현실유는 더 이상 다른 현실을 지향할 수 없는 현실유, 다시 말해 다른 것에서 더 이상 움직임을 받을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하는 현실유이다.}

{그러나 이 첫 번째 길은 실제로 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일까? -

그것은 어떤 최초의 움직여지지 않은 동자의 실존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인격적이고 지성적인, 움직여지지 않은 동자의 실존을 입증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리고 첫 번째 길과 매우 유사한 두 번째의 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오도넬 48>

 

둘째 길은 能動因(causa efficiens)의 이유에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 2권(II,2)에서 제기되어 아비첸나, 마이모니데스, 릴의 알라누스 (Alain de Lille), 그리고 알베르투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능동인의 질서 및 계열에서 시작

 

{여기서 우리는 능동인의 존재에서 신인 제1원인의 존재를 귀결해낼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이 논증은 다음의 우연유에서의 논증과 더불어 '우주론적 증명'(argumentum cosmologicum)이라고 한다.}

{두 번째 논증은 첫 번째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움직이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이 여기서는 능동인이라는 좁은 개념이 사용된다. 토마스는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는 능동인으로부터 출발한다.

(1)  사실 우리는 이 感覺界에 능동인들의 질서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 세계 안에 수 많은 능동인의 질서를 경험한다. <정의채81,113>

예컨대 내가 방망이로 공을 친다면 공은 움직인다. 이때 공은 방망이에 의해 움직이고 방망이는 내 손에 의해, 내 손은 내 팔에 의해 그리고 내 팔은 내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

또 아들은 (그 존재에 있어서) 아버지한테서 있게 되고 아버지는 할아버지한테서  등등의 능동인의 질서가 있다.}

 

(2-A) 그런데 이런 세계에서 어떤 것이 자기 자신의 능동인으로 발견되지도 않으며 또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의 능동인일 수 없다라는 부정적으로 확정된 사실로부터 (소위 인과율에 의해서) 긍정적으로 세계안에 있는 사물들은 능동인에 종속되어있다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2-B) 그런데 능동인들에 있어서 무한히 소급할 수는 없다.

{이 부분에서는 능동인을 무한 소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힌다. 무한히 소급되는 능동인들의 계열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은 어떤 한 능동인에 종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3')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런 존재를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부동의 원동자나 제1원인 또는 필연적인 존재가 하느님으로 불리운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칫하면 토마스가 행하는 경솔한 짓/ 토마스로서는 자칫하면 경솔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분명 적어도 어떤 무엇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하나의 필연적인 존재가 있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이 전적으로 거부되지 않는 이상은, 사고는 그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필연적인 존재가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위격적인 존재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분명하지가 않다.

  순수철학적 논증은 과연 위격적인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하겠는가?

  토마스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어쩌면 그 논증의 결론 가운데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의 것을 그 속에서 찾아내지 않았을까? 토마스는 자신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논증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가 성급하게도 제1동자나 제1원인 그리고 필연적인 존재를 그리스도교의 종교적인 경험의 하느님, 즉 인간이 기도할 수 있는 위격적 존재와 동일시하고 있지 않았을까?

 

  토마스가 '신학대전'에서 제시한 증명에 덧붙인 그 실제적인 구절들은, 그것만을 떼어 생각한다면 성급한 결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신학 대전'이 하나의 개요이며, (그리고 주로) 신학적인 교과서라는 사실을 떠나서라도, 그 구절들은 따로 떼어내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하나의 필연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에 대한 실제로 요약된 증명에는 그 존재가 물질적인지 비물질적인지를 제시하는 명확한 논증이 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존재는 모든 사람에 의해서 하느님으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그 증명의 마지막 말은 충분한 보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 문제의 첫 항에서 토마스는, 하느님은 물질적인가, 즉 하나의 물체인가 어떤가를 문제로 하여, 하느님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논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의 구절은 하느님은 하느님을 믿고 있는 모든 이들에 의해서 제1원인과 필연적인 존재라고 인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될 것이지, 그 이상의 논증에 대한 부당한 압력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될 것이다.


셋째 길은 可能과 必然에서(ex possibili et necessario) 취해진 것이다.

{마이모니데스가 아비첸나로부터 계승하여 발전시켰던 세번째의 증명}

어떤 존재자는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사실에서 출발.

우연유적인 것 (contigens)

필연적인 것(necessarium)

'실제로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즉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것에 의해 충족한 것(heterosufficiens)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 충족)

분유적 유(ens per participationem)

본질에 의한 유(ens per essentiam)

다른 것에서 유래되는 존재 혹은 타자의존유 (ens ab alio)

자체유(ens per se)

존재와 비존재가 전혀 무관한(indifferens) 것

비존재에 단적으로 반대된다.

피조물의 속성

신만의 속성

생성소멸하는 유, 그 작용에 있어서 작용할 수도 안할 수도 있는 불확정적인 것

이런 작용은 외적 원인에 의해 장애를 받을 수 있는 것.

지금 있는 것과 달리는 있을 수 없는 것.

존재양식에 있어서 불변이며 확정적인 것

그 본성상 어떠한 외적 힘으로도 소멸될 수 없으며 그 작용에 있어서도 어떠한 외적 힘으로도 장애를 받을 수 없도록 확정적인 것.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자들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1) 즉 우리는 사물세계에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인간계, 동물계, 식물계를 비롯하여 무기물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변화, 즉 생성 소멸함을 수없이 경험한다. 즉 우리는 이 세계에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有를 만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세계에서 만나는 有는 우연유(ens contingens)이다.}

 

  <대전제/소전제>는 이 가능적이고 생성, 소멸하는 것을 또 다시 가능적이지 않고 필연적인 원인들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 [가능적인 것이] 또 다시 가능적인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모든 유가 가능한 것 뿐일 수는 없고"로 끝나고, 귀납적으로 모든 경험가능한 가능한 것이 포함되는 가능성으로부터 끌어내는 논증에서 배제하고 있다.

1. 한번 존재하지 않거나 않았던 것은, 지금 있는 어떤 것의 원인 일수 없다.

2. 가능한 것은 한번 존재하지 않거나 않았던 것이다.1)

3. 가능한 것은 지금 있는 어떤 것의 원인일 수 없다.

이제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단순히 가능적인 것만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2) <소전제/대전제>는 다시 조건적으로 필요한 원인들과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원인들 사이의 상충을 보여주고 조건적으로 가능한 한 원인으로 무한 소급해 가는 것을 (첫번째와 두번째 증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배제한다.

(3) 따라서 우리는 자기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지 않고 다른 것들에게 必然性의 원인이 되는 어떤 것, 즉 그 자체로 필연적인 어떤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넷째 길: 완전성의 제 단계에서의 논증 (단계론적(climacologicum) 논증, 또는 통일성(henologicum)의 논증)

 

{많은 철학자들이 이 논증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중 고대 철인으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역시 플라톤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향연, 210c~211d)과 플라톤 학파 사람들은 이 방법에 의해 최고의 善, 최고의 美에로 상승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설을 즐겨 인용한다. (De civitate Dei, I,8,c.6; C. Boyer, Cursus Philosophiae II,1954, 325)  <안셀무스적>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중대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논증을 사용하고 있다.

{관념론자들은 이 논증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들의 인식론적 결함 때문에 다만 내재적 절대자에만 도달한다.}


  {넷째 증명은 사물들에게 다양한 정도로 존재하고 있는 특정한 속성들, 즉 선함, 참됨, 고상함등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이 속성들을 양이나 질의 범주에 속하면서 단계를 가지고 나타나는 속성들, 예를 들면 더 길거나 짧음, 더 진하거나 흐린 빨강 등과 같은 것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 증명에서는 존재자의 모든 범주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그래서 그것을 "넘어서는"), 그러나 다양한 정도로 발견되는 그러한 초월적인 속성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1) <대전제>는 선함과 착함과 같은 (초월적) 속성들을 지니고 있는 사물들이 최고도로 있는 어떤 것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확정하고 있다. 이것과의 멀거나 가까운 것에 따라서 그 속성들이 지니는 단계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 최고의 것은 바로 그 속성들이 최고로 높은 단계로 그것에 속하는 존재자이고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존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함, 착함 그리고 존재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형이상학 II,1; 니코마코스 윤리학 I,4)에서 서로 치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소전제>는 그 최고도의 것이 자기에게 연관을 맺고 있는 속성들, 그러므로 그 존재의 측면에서 그 사물의 원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선성 혹은 완전성은 그 자체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고, 그 자체로서 순수가지적이며 절대로 최고인 어떤 첫째의 것과 관련시킴으로써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계적인 것은 그 본질상 최고적인 것(maximum)과 관련된다.

즉 단계적인 것은 주관적 필연성에서가 아니라 본성상의 필연성  때문에 최고의 것과 관련시키지 않고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계적인 것은 최고적인 것을 내포적으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주장될 수 없는 것이다.} <정의채81,134>

(3) 결론은 소전제에서 언급된 그 최고도의 것이 세상 사물들의 최고의 존재 원인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 증명은 이제까지의 다른 증명들과 마찬가지로 귀납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약간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증은 이제까지처럼 매개 가능한 원인들  쉽게 보충할 수도 있을텐데  을 통해서 첫째 원인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대전제에서는 즉시 사물들이 최고의 존재자와 맺고 있는 관련을 밝히고 있고, 그 다음 단계 소전제에서는 이 최고의 존재자가 첫 번째 존재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이 네 번째 길은 우리로 하여금 앞의 세 가지 길을 넘어 한 걸음 더 진일보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계 속에서 관찰하는 피조된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가 지성(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른 또 한 가지는 인간 인격이다. 그런데 만일 최고의 존재자가 먼저 그것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 속에 전적으로 제한되지 않은 (무한적) 방식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최고의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들 안에서 발견되는 이 완전성들의 원인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인격적이고, 지성적이며, 최초이고, 필연적이며, 어떠한 원인도 가지고 있지 않은 원인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존재자를 사람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오도넬 51-2>

 

다섯째 길: 우주의 질서에서의 논증.

다섯째 길은 사물들의 통치에서(ex gubernatione rerum) 취해진다.

(1)사실 우리는 인식을 갖지 못하는 사물들, 자연적 물체들이 목적 때문에 작용하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은 自然物들이 가장 좋은 것(optimum)을 얻기 위해 항상 혹은 자주 같은 모양으로 작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1')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우연에서가 아니라 어떤 意圖에서부터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명백하다.

(2) 그런데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은 인식하며 깨닫는 어떤 존재에 의해 지휘되지 않으면 목적을 지향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지휘되는 것과 같다.

(3)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목적에로 질서지어주는 어떤 이성적 존재가 있다.

(3')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

{이 증명은 스토아학파에 의해서, 특히 키케로와 세네카에 의해서 알려졌다.} <힐쉬83,583>

{이 논증은 이성에 부합하지만 (즉 우리의 이성에 의해서 목적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지만) 그 자체에는 이성이 결여된 사물들이 목적에 알맞게 행동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1) <대전제>는 사물들이 "목적  때문에 작용"하기 때문에 그 사물들의 목적에 부합한 활동들을 내재하고 있는 목적인과 연관을 시키고 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목적인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그 사물이 "항상 혹은 자주 같은 모양으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법칙을 따라 항구하게 규정된 어떤 것을 산출하기 위해 작용한다는 것은 그런 사물 자체가 그런 결과를 내기 위해 생겨났다는 것을 명백히 해주기 때문이다. 즉 그런 사물은 본성상 그런 결과, 목적에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주안에서 우리는 개체의 善과 우주 전체의 善을 위해 사물이 작용하고 있는 사례를 얼마든지 알고 있다.

사실 세계는 놀라운 조화의 작품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고 아주 다양스러운 有가 그 자체의 선과 전체의 선을 이루기 위해 잘 조화있게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는 무식물계의 미소세계인 원자세계에서 광대한 천체계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볼 수 있으며 유기물의 세계인 식물계에서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의 신체구조계에서 이런 사례는 더 잘 나타난다. 각 기관은 전 생명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해 노력하며 그 목적을 위해 전체가 질서를 지키며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2)

(2) <소전제>는 목적인들이 이성에 부합한 행동들을 그 사물들을 초월하는 이성적인 원리와 연관 시킨다. 그것이 내재할 수도 있으리라는 또 다른 가능성은 그 사물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배제된다.

{그런 지성자가 궁극적으로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모든 것을 통치하고 지휘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속하는 것조차도 의도적으로 다 지배하지 못한다.

예컨대 우리의 신체적, 생리적 작용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용하며 우리가 무의식 상태일 때도 계속 작용한다.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의 사물은 인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작용하며 자기의 목적을 추구한다.

(3) 그러므로 결론은 초월적인 이성의 원리, 초월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목적원리의 존재를 주장한다.

{결국 이런 질서자는 가능태를 일체 배제하는 순수현실유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능태는 그 자체 현실태에 질서지어진 것이며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더 고차적인 질서자의 영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성적 질서자는 그 본성상 지성 자체이며, 신적 지성, 즉 신 자신인 것이다.}

  {이 다섯 번째 길은 네 번째 길과 마찬가지로 어떤 지성적인 최고의 존재자의 실존에 관한 증명이기도 하다. 자신의 화살을 표적으로 향하고 있는 궁수의 예는 동물 세계에서 발견되는 본능의 현상에 견주어 본다면 오히려 허약한 예인 것으로 보인다. -

  어떤 특정 종류의 새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 자기 새끼들의 생존과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서 똑같은 재료를 사용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보금자리를 짓는다. 어떤 동물들은 겨울의 혹독함을 견디기 위해서 동면을 하는 데 반해, 다른 동물들은 따뜻한 곳으로 이동을 한다.

  이 본능적 행동 유형들 역시 피조물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관장하기도 하는 지성을 갖춘 최고의 존재자가 의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도넬 52>

  {이 논거는 다음과 같은 중세의 공리에 아주 잘 요약되어 있다. -

  즉 “자연의 작품은 지성의 작품이다.”(Opus naturae est opus intelligentiae) 그 뿌리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이슬람 철학자들의 가르침에 두고 있는 이 말의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말은 플라톤의 추종자에게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와 히브리 인들,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게도 타당하다.3)} <와이355, n.60>

 

토마스의 "다섯 가지 길"의 공통적인 논증 구조

{각각의 증명이 형식상으로 다른 것과 구별되지만, 각 결과(=우주)의 특수한 측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유사한다. 모든 결과는, 그것이 총체적으로 해명될 수 있기 위해서는 결국 궁극적 해명, 즉 신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와이 353>

(SdGB 119-125)

{기본 구조는 귀납적인 논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대전제들>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정한 본성을 지니 사물들 R1,R2,R3  운동, 우연성(생성, 소멸), 완전성의 많고 적음, 자연적인 목적성  로부터 출발하여 그것들을 근접원인들 CA1, CA2, CA3 등과 연결시킨다.

<소전제>들은 이러한 원인들이 다른 것에 종속되어 있고 "제1"의 본래적인 원인에 대해서 選言적인 대당관계에 놓여있는 "제2"원인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이 제2원인들이 무한히 <계속되는 계열>로 연장 될 수 없다는 논증이 삽입된다. 왜냐하면 이럴 경우에는 결국 제1원인이 제거되게 되고 이에 따라서 다른 모든 것들도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외는 넷째 길의 증명으로서 제2 원인을 통한 중간 단계가 생략되어 있다.)

이 제2원인들은 제1원인의 힘에 의해서 작용하고 있고, 자신은 제1원인의 결과로서 드러내며, 귀납적인 논증의 틀에서 매개사로 나타나다.

결론은 세상사물들과 제1원인의 필연적인 관련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러한 제1원인의 존재를 증명한다.

왜냐하면 세상사물 들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물들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사물들이 종속되어 있는 제1원인도 또한 존재해야만 한다. 

II     R  ---    ca

               ̼;   [ca1,2,3  무한으로의 소급]

I     ca  ---  ͔;       

               ̈́;   CA

III    R   ---   CA

연결선(---)은 원인적인 종속성을 의미하고 있고 꺾기 괄호 [  ] 는 그 가능성이 배제되는 선언적인 대당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즉 제2원인들로 無限소급이 불가능하다는 논증을 통한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유의해야한다.

신존재 증명의 소전제에 도입된 원인 개념  다양한 관점에서 운동인, 능동인, 존재인 그리고 목적인 등 은 설령 그것이 제1원인을 내포적으로는 함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제1원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명시적으로는 이것이 귀납적인 논증의 구조 안에서만, 즉 종속적인, 제2원인의 선언적인 대당의 관계에서만 드러난다.

그래서 항상 <소전제들>은 제2원인들과 제1원인 사이에 선언적인 관계를 도입하고 있다: 움직여지고 움직이는 원인과 제1의, 무조건적인 원인 사이에, 자연속에 내재하고 있는 목적인과 형이상학적인 제1원인사이에. (부분적으로는 논증과정안에서 다른, 특수한 선언관계가 도입되었다.)

제1원인은 제2원인들과 본질적으로 다르고 그것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대당관계에 서있다.


다섯가지 길에 대한 평가

  {토마스는 이 다섯 증명들 중에서 제일 첫째 것을 보다 더 명백한 방도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런 단정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기본적인 증명은 실제적으로 셋째 증명 즉 셋째 방도인 우연성으로부터 한 증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럴 것이 첫째 증명에 있어서는 우연성으로부터의 논증이 운동과 변화라는 특수한 사실에 적용된 것이고,

▷ 둘째 증명에서는 인과성의 질서 즉 인과적 산출에 적용된 것이고,

▷ 넷째 증명에서는 완전성의 정도에 적용된 것이고,

▷ 그리고 다섯째 증명에서는 궁극적 목적성에, 즉 우주적 질서를 달성하는 마당의 무기적 대상들의 협동에 적용된 것이다.

  {이 세 번째 길이야말로 실제로 신의 실존에 관한 근본적 증명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움직여진 존재자들’ 또는 ‘어떤 원인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들’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당연히 우연적 존재자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길 과 다섯 번째 길에서 성 토마스는 ‘완전성의 등급’과 ‘지성을 갖추고 있지 않은 자연 물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분명 이것들도 역시 우연적 존재자들이다.} <오도넬 50>

그런데 우연성 자체로부터의 논증은 모든 사물이 그것의 충족이유 즉 왜 그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이유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말하자면 변화나 운동은 그 충족이유를 부동의 원동자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 그리고 제2차적인 원인들과 결과들의 계열은 그 충족이유를 아무런 원인도 안가진 원인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고,

▷ 제한된 완전성은 그 충족이유를 절대적인 완전성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 끝으로 자연 속의 궁극목적과 질서는 그 충족이유를 한 예지, 즉 설계자 속에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Coplestone 1962, 345~6)

여기에 다섯 가지 충족이유에 해당하는 '부동의 원동자' '무원인의 원인' 즉 '제1원인', '절대적 완전성'을 지닌 '최고완전자', '예지적 설계자'인 '최고지성'은 우연유의 충족이유인 '필연유' 즉 '필연적 존재'와 동일한 것이니 이런 것은 바로 유일한 신을 여러모로 밝히는 '다섯 가지 길' 즉 다섯 가지 방도인 것이다.



출처 : 사막의 별 영성자료 순례 그리고 그 이야기
글쓴이 : 사막의 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