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적 양심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인간 지성이 지니는 양심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텍스트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인간은 양심 속 깊은데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법이다. 이 법의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사람을 타이르고, 필요하면 '이것은 행하고 저것은 피하라'고 마음 귀에 들려 준다. 이렇게 하느님이 새겨 주신 법을 인간은 그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며 이 법을 따라 인간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로마 2,14-16 참조).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이며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그 법을 놀라운 방법으로 밝혀 준다 (마태 22,37-40; 갈라 5,14 참조).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결합되어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에 따라서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야기되는 여러가지 윤리 문제들을 해결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른 양심이 우세하면 할수록 개인이나 집단이 맹목적 방종에서 더욱 멀어지고 객관적 윤리기준에 더욱 부합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1).
1. 양심의 개념
1.1. 개념
양심(Conscientia)이라는 개념은 라틴어의 cum(함께)와 scientia, scire (지식, 알다, 지각하다)의 합성어에서 유래된다 (함께 알다). 양심은 인간의 윤리적 능력이며,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내면적 중심이며 성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상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만남으로써만 반사적으로 우리자신과의 참된 만남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우리 자신 안에는 우리를 창조한 말씀의 부르심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당신과 함께 있도록 우리를 늘 초대하시는 스승의 부르심이 들려온다. 우리의 양심은 이렇듯이 우리를 존재에로 부르신 말씀을 통해서 생동력을 가지며, 우리 인간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매 순간 부르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 존재의 심연을 통해서 양심은 우리들의 참된 자아가 그리스도와 일치되게끔 하며, 또한 우리들을 각자의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고 계시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의탁함으로써만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우리 각자의 고유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양심의 섬세함과 성실함은 우리를 내외적으로 진리의 성령에로 무장시켜 주시는 스승 그리스도를 신적조명을 통해서 우리 안에 더욱 크게 자라게 해준다.
양심은 비록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양심이 말하는 말은 자기의 것이 아니다. 곧 양심이 하는 말은 모든 사물을 창조하신 말씀, 즉 우리 인간과 함께 지내시기 위하여 육체를 취하신 말씀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양심이라는 은밀한 목소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며, 곧 이 양심이란 우리 인간의 전존재를 통하여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우리들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은 그 자체로 불꽃이 없는 하나의 초에 불과하다. 이 초는 진리이시며 빛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진리를 수여 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빛을 밝히며, 그리스도의 열을 발하는 것이다.
양심은 진리의 탐구를 통해서 양심의 상호교류 안에서 경험과 반성을 함께 공유하는 촛점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약간의 지식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지식 모두를 함께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자유롭게 됨으로써 우리는 서로의 진실된 양심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시각에서 우리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을 때,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 서로가 서로의 한 부분임을 인정할 때 우리들의 양심은 충만하게 살아있는 양심이 될 것이며, 또한 창조적인 양심으로 형성 될 수 있을 것이다.
1.2. 성서적 관점에서의 양심
1.2.1. 구약성서 안에서의 양심
구약성서 안에 나타난 양심에 관해서 우리가 연구하기를 원한다면, 다시말해서 '양심'이라는 개념을 지칭하고 있는 히브리적 혹은 희랍적 개념들을 찾아보면서, 그리고 단순히 언어적 연구에만 중점을 두고 '양심'에 대해서 연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커다란 실망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을 가리키는 용어인 희랍어 syneidesis (불경한 양심 혹은 악한 양심을 지칭함)는 지혜서 17,10 (악은 원래가 소심해서 제 입으로 자신을 단죄하며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으면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에서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우리가 양심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하는 실제적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다.
다른 기타의 문화가 그렇듯이, 히브리적 사고 안에서도 하나의 발전을 찾아 볼 수 있다. 성서 형성시기중 가장 초창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적이고 객관적인 면에서, 그리고 가끔은 집단적인 측면에서 선과 악의 경험을 바라보곤 했었다. 하느님의 의도는 그들의 전통과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전달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내부에서 자신들을 부르는 그 어떤 소리, 즉 하느님의 소리를 체험했던 것이다. 내적인 그 어떤 것으로서의 양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위대한 공헌 중의 하나였다. 양심이란 하느님께 충실하도록, 그리고 계약의 백성으로서 충실하도록 불리운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것이며, 이는 인간 자신이 자기 자신을 활짝 열기를 원한다면,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여 인간을 인도하는 정신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번 더 인간의 마음에 대한 구약성서의 위대한 시각에 우리의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여받으며, 선을 행하도록, 그리고 자유로움 안에서 정직하게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기 위해 불리움을 받았다. 인간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인 인간의 마음은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손상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셈족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그들 사상과 원의, 감정, 그리고 또한 윤리적 판단의 중심이었던 것이다"2).
이스라엘의 믿는자들은 "하느님께서는 마음과 정신을 자세히 살피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성령이 그들의 마음 안에서 자신들을 부른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음은 완성된 행위를 찬미하거나 혹은 비난한다. "내 마음은 이 날 이 때까지 꺼름칙한 날은 하루도 없었네" (욥 27,6). 다윗 왕은 자기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고 과시하기 위하여 병적조사를 실시 한 다음에 그는 양심에 가책을 받는다: "다윗은 병적조사를 하고 나서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제가 이런 못할 일을 해서 큰 죄를 지었읍니다. 저는 참으로 어리석었읍니다. 야훼여, 이 종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2사무 24,10). 범죄자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서 악을 저질렀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는 결코 지적인 앎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의 깊은 가책이 관계된다. 비록 카인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 수 없수 정도가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이러한 마음의 가책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 면전에 여전히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카인이 야훼께 하소연 하였다. '벌이 너무 무거워서, 저로서는 견디지 못하겠읍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쫒아 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아 다니게 되었읍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창세 4,13-14).
구약성서를 통해서는 사실상 선행적 양심과 후속적 양심에 대한 현대신학자와 심리학자들의 어떠한 연구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사건의 실재는 성서저자들에 의해 명백하게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이 악을 저지르고 난 후에 다른 사람이 그 인간을 비난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질책한다. 인간의 마음은 또한 그 마음을 조명하고 정의에로 인도하는 성령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다. 만일 마음이 악을 저질렀다면, 성령의 속삭임은 마음으로 하여금 새롭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정스럽게 부른다. "너희는 가슴이 쓰려 아우성치고 마음이 찢겨 울부짖으리라" (이사 65,14). 시편 저자는 성령으로 충만된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그 구원의 기쁨을 나에게 도로 주시고 변치 않는 마음 내 안에 굳혀 주소서. 죄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빗나갔던 자들이 당신께로 되돌아 오리이다" (시편 51,12-13). 진정한 회개는 마음의 고뇌와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1열왕 8,38 참조)3).
성령으로부터 얻어지고 움직여지는 인간 마음의 심오한 시각은 모든 외적인 윤리를 능가한다. 바로 이 점은 성서의 예언자들이 가져다 주는 매우 핵심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인 인간의 마음에 새기리라 (예레 31,29-34; 에제 14,1-3, 36,26). "죄는 그들 마음의 식탁 위에 새겨져 있다" (예레 17,1). 인간의 마음은 무디어질 수 있지만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무디어진 마음까지도 새롭게 하실 수 있으며, 그들에게 또한 그들의 형제들에 대한 의무와 사랑의 의지에 대해서 새로운 느낌과 열린 마음을 주실 수 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1.2.2. 신약성서 안에서의 양심
신약성서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양심에 관한 경험적 실재는 구약성서의 조명 하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다음은 복음의 메시지이다: 하느님께서 무딘 마음을 제거해 버리시고, 죄인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가져다 주시는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 죄인들은 새롭게 재무장된 정신과 마음으로써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정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때가 이미 도래했다. 만일 죄인들이 새로운 마음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탓이다. 빛이 새로운 광채로써 그들 위를 비추고, 따라서 그들은 주님 안에서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양순함이 부족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완고하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당신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읍니까?" (마태 6,23; 루가 11,33-34).
거짓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리가 바로 위에서 말하는 내적 개혁이며,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정신의 체험인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 안에 늘 울려 퍼지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하나의 종교적 체험이며, 동시에 양심의 체험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을 통해서 불리웠으며, 또한 선을 행하도록 불리움을 받았다4). 우리 인간은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평화 안에 머무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부르심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법이며, 이는 인간의 마음 안에 새겨져 있다.
1.2.3. 사도 바울로의 사상 안에서의 양심
"신약성서 안에서 모두 30번 사용된 syneidesis 개념은 사도 바울로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만 모두 14번 사용되고, 그외의 사목적 서한에서 6번,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9,9.14; 10,2.22; 13,18)에서 5번 사용되고 있으며,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 3번 (2,19; 3,16. 21),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2번 (23,1; 24,16) 사용되고 있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syneidesis 개념은 사도행전에서의 두 번, 베드로의 편지에서의 세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도 바울로의 입을 통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말이며, 따라서 이 개념은 사도 바울로의 독특한 사상을 표현하는 개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사도 바울로는 이 세상에 인간의 육체를 취하여 오신 그리스도로부터 소개된 인간의 윤리적 책임감과 내면적 생활을 위한 핵심적인 가르침을 우리에게 가장 잘 제공하고 있는 사도라고 말할 수 있다5).
사도 바울로 외에 신약성서의 다른 저자들에게서도 syneidesis 개념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인 καρδια (heart, inner self, mind, will, desire, intention etc.)를 찾아 볼 수 있다 (마태 15,10-28; 마르꼬 3,5.6.52; 8,17; 1요한 3,20-21 참조).
바울로가 취하고 있는 사상의 문화적 배경을 통해서 볼 때 그가 사용하는 syneideis 개념은 무엇보다도 헬레니즘의 영향과, 또 그 반대로 셈족의 영향, 이 두가지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하나의 정확한 균형을 이루는 사도 바울로의 독자적인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로 사도의 텍스트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만일 윤리적 양심에 대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의미가 이미 전에 알고 있었던 의미가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의미의 해석대로 바울로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사도 바울로는 syneidesis 개념으로써 윤리적 양심이 지니고 있는 실천적인 의미에로 우리를 인도 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1.2.3.1. 고린토 전서 8-10장과 로마서 14장
윤리적 양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로의 언급들 중에서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는 성서 본문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한 본문이다. 이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 1고린 8장에서 사도 바울로는 지식(gnosis)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사랑(agape)도 함께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1-2절) 본문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사랑은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이미 사랑받은 사람이 가지게 되는 어떤 지식이다 (3절). 어떤 형태로든지 Gnosis 가 지니는 참된 의미는 분명한데 즉, 이 세상에는 어떠한 우상도 없다는 것, 왜냐하면 한 분이신 하느님, 그리고 한 분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일 수 없기 때문이다 (4-5절).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아직까지도 우상들에게 젖어있기 때문에 고기를 정말로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것으로 알고서도 먹는다"(7절).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양심도 약해져서 오염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올바른 자유를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이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8절).
곧 그러한 자유는 분명히 올바른 것이며, 그렇지만 그러한 자유가 형제들을 무지로 빠뜨리는 자유는 아니다. 사도 바울로가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자유로써 그들을 스캔들에 빠뜨리거나 허약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9절).
그러므로 만일 gnosis로부터 나타난 어떤 행동이 허약한 양심을 가진 어떤 형제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의 양심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행하도록 강요한다면, 바로 그 허약함 때문에 그러한 행동은 단죄받게 될 것이며, 또한 올바른 행동으로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죄라고 말할 수 있다 (10-13절). 사도 바울로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끌어들이면서 그리스도적 자유의 전망에 관한 하나의 고유한 돌파구를 열어놓는다(9장). 그런 다음 현명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호소하면서 다시 우상숭배자들의 문제로 되돌아 온다 (10장 1-12절).
10 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성체성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된다(14-18절): "나는 여러분이 귀신들과 친교를 맺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교도들이 바치는 희생제사는 귀신들에게 바치는 것이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절).
그리고 사도 바울로는 성찬 밖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를 더 상세하게 언급하면서 gnosis에 의해 생각되어지는 단순히 할 수 있다는 사실에만 의지하는 행동에 대해서 한 번 더 거부한다: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유익하거나 (synterei) 건설적인 것(oikodomei)은 아닙니다"(23절). 이어서 사도 바울로는 "아무도 자기 자신의 유익을 찾지 말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찾으시오"(24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장에서 파는 모든 것은 양심을 가지고 따질 것이 없이 다 먹으시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25-26절). 이와같이 만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에는 양심을 가지고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27절 참조). 그러나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렇게 알려주는 사람의 양심을 생각해서 먹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27-29절 참조).
이러한 경우에 사실 자기 자신의 고유한 양심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판단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내 자신의 양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29-32절 참조).
이러한 텍스트와 함께 이제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서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몇가지 점들을 제시해 보려 한다.
1)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내 자신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선함 혹은 악함을 규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이다. 이 양심은 그 행위가 연약하든지 혹은 강하든지와는 관계가 없으며, 다만 구체적으로 내 자신이 행해야만 하는 것을 항상 나에게 명령하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지식과 자유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 둘의 조화이다. 그러나 이 양심은 그 어느 한 쪽에만 치우쳐서는 안된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지식과 자유는 애덕에로 향해야만 하며, 따라서 애덕에 따라서 실천되어야만 한다.
3) 그러나 애덕으로서의 양심은 새로운 존재의 전 심연을 애덕에로 향하게 하면서, 사도 바울로가 양심에 대해서 촛점을 맞춘, 교회와 성령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4) 또한 신자들의 양심으로부터 나타나는 유익은 개인적이거나 이기적인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곧 유익이란 모든 사람들을 위해 드러나고 선포된 구원을 의미한다.
1.2.3.2. 로마서 14장
우상숭배자들에 관한 문제는 로마서 14장에서 다시 언급된다. 이 텍스트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1고린의 내용과 아주 비슷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면서 약한 자들에 대해서 더욱 자세한 내용을 제공해 주고 있지만 신앙에 촛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로는 신앙이 약한 사람들의 소신에 시비를 걸지 말고 형제처럼 받아들이라는 요구와 함께 14장을 시작한다 (1절). "어떤 이는 무엇이나 다 먹을 수 있다고 믿는가 하면 약한 이는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이는 먹지 않는 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이도 먹는 이를 심판하지 마시오" (2-3절). 그리고 어떤 날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다느니 하고 구분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이와 꼭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5절).
그러나 각자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판단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5절).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우리들의 현실에 다가 오시고,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시다(5-9절).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강조된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 속해 있는 사람들이며, 그러기에 우리 각자는 자신에 대해서 낱낱이 하느님께 보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2절).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로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맙시다. 오히려 형제에게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도록 조심하시오"(13절).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고 있는 사실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서 부정한 것은 없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혹시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부정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그가 부정하다"(14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대의 형제가 음식물 때문에 슬퍼하게 되면 그대는 이미 사랑을 따라 거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그런 이유 때문에 비난 받아서는 안된다"(15-16절).
게다가 하느님의 나라는 "실상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의로움과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17절). 여기에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하느님께도 마음에 드는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봉사가 성립되는 것이다"(18절). 평화와, 서로를 위한 건설, 즉 사랑은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진리와 자유를 부여하여야 한다(19-21절).
14 장의 결론 부분은 결국 고린토 전서와는 달리 신앙에 촛점을 두고 있다: "그대는 그대가 지니고 있는 믿음을 하느님 앞에서 그대 나름대로 견지하시오. 복되도다, 자기 생각대로 하면서도 자신을 단죄할 것이 없는 이여! 그러나 먹으면서도 망설이는 이는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믿음에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죄입니다" (22-23절).
이 텍스트에 대한 Schlier의 해석은 매우 영감적이다: "확실한 생각 없이 먹으면서도 망설이는 사람, 즉 자신의 신앙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먹는 사람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될 것이며, 그에게는 고기를 먹는 것도 금지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는 ουκ εκ πιστεωs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를 드러내는 하나의 행위가 되는데, πιστιs는 분명히 1고린 8,10-12에서의 syneidesis와 공통적인 점을 지닌다.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믿음은 양심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지만, 반면에 양심은 항상 믿음의 질문이 될 수는 없다. 신앙 안에서 완성되지 않고, 그리고 신앙에 대한 복종에로 이어지지 않는 행위는 양심을 거스리는 행위이며 따라서 죄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 안에 특별히 확신과 여러가지 종류의 행위를 내포한다. 예를 들면, 연약한 사람들의 행위와 강한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서 믿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그것은 분명 주님(κυριοs: 14,6-8))으로 고백되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분 안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믿음 안에서는 그 믿음과 함께 나타나는 다양한 행동이 가능하게 되며, 그 믿음으로써 모든 행동이 결정되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과 행위의 이러한 연결이 끊어지고 판단과 행위가 더 이상 믿음으로부터 비롯되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자기 충족이 되며(로마 15,1 참조), 따라서 죄가 된다. 자기 충족이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연약함을 경멸하면서, 그리고 연약한 자신의 모습에 당황해 함으로써 어떤 강한 것을 지향케 하는 일종의 위협이며, 따라서 이는 믿음 안에서 드러나는 애덕에 반대된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죄는 연약함 때문에도 생겨나는 일종의 위협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드러나는 강인함도 요구되기 때문이다"6).
고린토 전서 8-10장에서 양심에 관해서 간단하게 요약했던 것처럼, 로마서 14장 역시 다음의 두가지 전망 하에서 양심의 개념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 믿음과 양심과의 관계에서 볼 때, 양심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인간 존재의 심연을 책임지기 때문에 양심은 곧 바울로적 pistis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든 생활을 인도하고 생기를 주는 살아있는 실재인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양심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2) 양심에 대한 존중에 있어서, 이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결코 손상해서는 안된다는 점은 무척 중요하다. 양심에 대한 이런한 존중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양심과 믿음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왜냐하면 판단한다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2.3.3. 사도 바울로의 그밖의 서간들
Syneidesis 개념이 표현되는 기타의 사도 바울로의 서간들 중에서 몇가지 중요한 텍스트를 소개하면서 설명하려고 한다.
- 로마 2,14-16: 여기서 양심은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재산으로 표현된다: "실상 이방 민족들이라도 비록 율법을 갖지 못했을망정 타고난 본성대로 율법의 요구를 실천한다면 이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그들 자신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들은 자기네 마음 속에 율법의 행업이 적혀 있음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도 마찬가지로 이를 증언하고 있으며 그들의 판단도 서로 엇갈려서 혹은 고발하거나 혹은 변호합니다. 이 사실은 하느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에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숨은 속을 심판하실 그날에 판명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진리 안에서 우리 각자의 양심을 호소할 수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러한 봉사직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는 일이 없습니다. 창피해서 숨겨 두어야 할 일들을 우리는 버렸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동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밝혀 드러냄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 각자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내세웁니다" (2고린 4,1-2).
비록 사람들의 양심이 항상 깨끗하고 완전무결하게 남아 있을 수는 없지만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정신과 양심마저 더러워졌습니다" (디도 1,15).
- 따라서 양심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되며, 탁월하게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행위가 된다: "사실 우리의 자랑거리는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바 이렇습니다. 곧, 우리가 세상에서 처신할 때, 특히 여러분을 대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순박함과 순진함으로, 따라서 육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처신하였다는 것입니다" (2고린 1,12; 로마 9,1; 사도 23,1; 24,16 참조).
그러나 근원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하에서 말하게되는 증언과 판단이 결정적으로 양심과 관련된다: "내가 여러분에게 심문받든, 사람들의 법정에서 심문받든, 내게는 별로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심문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나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문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고린 4,3-4).
- 사도 바울로가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와 둘째 편지에서 언급되는 양심은 무엇보다도 인간 행위 전체를 총괄하는 내면으로서 드러나고 있다. 1디모 1,5에서 사도 바울로는 거짓교사들을 겨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설교의 목표는 깨끗한 마음과 고운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울로는 하나의 새로운 경고로써 1장을 끝맺는다: "그대는 이 예언의 말씀에 힘입어 훌륭한 싸움을 하고 믿음과 곧은 양심을 지니시오. 어떤 사람들은 이 양심을 저버리고 믿는 일에 파선을 당했읍니다"(1디모 1,18-19). 사도 바울로는 계속해서 봉사자들은 "깨끗한 양심으로 신앙의 신비를 간직해야 한다"(3장 9절)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올바른 길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릇된 정신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양심에 낙인이 찍힌" (4,2) 사람들이다. 1디모와는 달리 2디모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부터 시작된다. 즉 사도 바울로는 디모테오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조상들을 본받아 깨끗한 양심으로 내가 섬기고 있는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2디모 1,3)라고 고백한다.
-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들의 양심에 참된 의미의 순수함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인간의 내면으로서의 양심에 대해 다시 정리하고 있다. 사실 옛 계약에서는 제물과 함께 제사를 봉헌하지만 "그것이 예배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하고" (히브 9,9), 반면에 그리스도의 피는 "그 죽음의 행위로부터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9,14). 또한 율법이 미래에 있을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도 제사를 반복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해마다 그들이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사를 통해서는 가까이 가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완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제사 드리기를 중단하지 않았겠습니까? 예배하는 사람들이 단번에 깨끗하게 되어 더 이상 죄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0,1-2). 이제 이와는 반대로 믿는 사람들의 행위는 진실된 신뢰의 행위가 된다: "... 우리는 진실된 마음과 풍부한 믿음을 지니고 나아갑시다. 악한 생각을 떠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깨끗한 물로 몸을 씻고서 나아갑시다" (10,22). 이와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기도에 대한 요구가 나타난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사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며 모든 일에 올바르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13,18).
- 이상과 같이 살펴 본 사도 바울로의 양심에 관한 단편적인 텍스트 안에서 몇가지 명확한 점들을 이끌어낼 수 있겠다.
1) 양심은 인간의 내면이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은 자신의 행위가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한다. 따라서 양심은 그러한 가치와 무가치에 대해서 결코 침묵할 수 없는 인간 내면에 대한 하나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2) 순수함과 선함은 각각의 인간이 지녀야 할 하나의 기본적인 과제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그러한 순수함과 선함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다. 오직 하느님 만이 진리 안에서 인간의 그러한 면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판단 하실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참된 존중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진실되고 신뢰할 수 있는 양심을 지니게끔 하는 지식-자유-사랑의 길을 격려하고 지지해 주어야만 한다.
3) 신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양심의 차원에서 제시되고 생활화 된다: 구원은 성령으로부터 우리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사랑이 된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양심-사랑 만이 진실되다고 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신자들의 행위는 그들의 삶 안에서 사랑이 효과적으로 드러날 때만이 진실되다고 할 수 있다.
1.2.3.4. 사도 바울로 서간의 종합
주님의 사도로서의 바울로는 자신의 사명 안에 구약성서의 시각을 끌어 들였으며, 또한 자신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만드셨고, 자신을 사도로 불러 주신 주님께 대한 체험을 강하게 부각 시켰다. "다른 사람들의 양심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통해서 볼 때, 그의 감정의 예민함은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양심의 섬세함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2고린 1,12 참조), 또한 하느님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진 것 만큼이나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2고린 4,1-2 참조)를 갖는 것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7). 사도 바울로는 바로 그러한 메시지를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달하였던 것이다. 곧 이방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종교와 양심에 대한 체험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한 빛에로 그들을 이끌어 들였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칭찬 할 뿐만 아니라 스토아 철학의 윤리개념, 즉 syneidesis (양심)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사상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성서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사도 바울로가 스토아 학파의 전통에서부터 자신의 사상을 끌어 들인 것에 대해서 서로 많은 논쟁을 한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사도 바울로가 자신의 설교들 듣는 사람들에게 사용했던 개념이 지닌 본 의미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은 아니며8), 그는 명백하게 희랍어 syneidesis 라는 개념이 지니고 있는 의미 안에서 긍정적이고 수용할 만한 것들을 찾아서 강조하여 사용했던 것이다9) "비록 사도 바울로가 자기 시대의 철학적 용어를 빌어 썼을 수 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히 '마음'이 지니는 역할에 대한 성서적 전승에 크게 기여한 것만은 사실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영(Pneuma)이라는 역동적인 현존을 우리들에게 소개하면서 그 개념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10). 비록 사도 바울로의 메시지가 그의 편의에 따라서 그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통해 전달되기는 하였었지만 그가 생각하고 설교하고, 그리고 저술한 것은 근원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성서적 전통 안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의 시대까지 스토아 학파의 윤리에서는 악한 일에 대한 양심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만 예외적으로 syneidesis라는 개념을 사용했었다는 사실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은 선과 악의 기로에 놓여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존적인 인식과 일체성(一體性)에로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의 존재론적 열망으로서 이해되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syneidesis 라는 용어를 죄인을 고발하는 의미에서의 양심을 지칭하기 위해서도 자주 사용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성서적 전승에서나 희랍적 전통에서나 다 함께 부합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로는 이교도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 볼 때, 양심의 개념을 아주 명백하게 예언자적 전승의 조명을 통해서 확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마서 2,14-15는 아마도 사도 바울로가 옛 것과 새로운 것을 함께 연결하고 있음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실상 이방 민족들이라도 비록 율법을 갖지 못했을망정 타고난 본성대로 율법의 요구를 실천한다면 이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그들 자신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들은 자기네 마음 속에 율법의 행업이 적혀 있음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도 마찬가지로 이를 증언하고 있으며 그들의 판단도 서로 엇갈려서 혹은 고발하거나 변호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syneidesis 개념을 사용하면서 하느님께서 사랑의 법을 새겨 놓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의도하였다. syneidesis 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아주 명백하게 그러한 맥락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안에 당신의 법을 새겨 놓으셨다는 것이 syneidesis 를 이해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후회나 무엇을 고발하는 어떤 양심만을 취급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없다. '마음', 혹은 syneidesis 는 두가지 면을 다 함께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사도 바울로가 syneidesis 개념을 인간의 마음이 지니고 있는 건설적이며 창조적인 질(質)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연구를 하고 있다. 곧 인간의 마음이 지니고 있는 질(質)이란 선하고 의로운 것을 지칭한다. "사도 바울로는 인간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것을 위한 결정들을 규정하기 위해서 이 개념을 사용한다"11).
사도 바울로에게 있어서 의문은 인간이 범죄 후에, 상처 입은 양심으로서의 마음만이 유일하게 말을 하는지 혹은 마음과 양심이 함께 협력하는지의 여부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의 특별한 관심거리는 양심의 통합성에 관한 것이다. 그는 선한 양심이 주체의 일체성을 표현한다는 점을 주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심이 되는 메시지는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따라서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통회와 회심이 인간에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양심'에 대해서 말할 때 의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심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사도 바울로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은총과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거부할 때, 내면의 자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열에 대해서 설명한다: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정신과 양심마저 더러워졌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그 행실로는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흉측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며 선행이라고는 전혀 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디도 1,15-16).
구원이란 단순히 정신과 사고(思考)의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양심의 깊은 내면에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까지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신뢰를 둔다면, "영원한 영(靈)을 통하여 흠없는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그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것이다" (히브 9,14). 그 뿐만
아니라 양심은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신앙과 삶에 대한 성실성을 드러내 주는 하나의 증거를 제공해 준다. "사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며 모든 일에 올바르게 처신하려고 합니다" (히브 13,18; 2디모 1,3 참조). 그러나 선한 양심은
그 자체로 자동적인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로 역시 자신의 심판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 앞에 겸손하게 서 있는 것이다.
"사실 나는 양심에 꺼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을 주님이십니다"
(1고린 4,4). 사도 바울로는 주님의 면전에서 떳떳하게 생활하고 있는 인간이면서도 결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양심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그것이 어떠 어떠하다고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성숙을 위한 끊임없는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양심의 상호성까지도 의식하면서 생활했던 것이다 (1고린 10,25-29 참조). 양심에 관한 바울로 사도의 이 모든 사상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에 대한 그의 가르침과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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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목헌장, 16.
2). R. Schnackenburg, Moral Teaching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1965, 69-70 (vers. it. Messagio morale del Nuovo Testamento, Ed. Paoline, 1971); cfr. F. Baumg- J. Behm, kardia, in Grande Lessico del NT, V, Brescia 1969, 193-216.
3). 열왕기 상 8,38-39: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마음으로부터 뉘우치고 이 전을 바라보며 팔을 벌리고 간절히 빌거든 당신께서는 자리잡으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요".
4). Cfr. C.A. Pierce, Coscience in the New Testament, London 1955, 113.
5). S. Cipriani, La coscienza in S. Paolo, in Antropologia biblica e morale. Atti del I Congresso dei Biblisti e Moralisti dell'Italia Meridionale, Napoli 1972, 97-98.
6). H. Schlier, La lettera ai Romani, Brescia 1982, 669-670.
7). D. Stanley, S.J., Boasting in the Lord, New York 1973, 131.
8). Cf. J. Stelzenberger, Syneidesis im Neuen Testament, Paderbore 1961; Die Bezihungen der FrSittenlebre zur Ethik de Stoa, M1933.
9). Cf. J.L. McKenzie, Conscience in the New Testament, in ID., Dictionary of the Bible, Milwaukee 1965, 147; C.J. Dodd,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London 1959, 61-62.
10). Ph. Delhaye, Christian Conscience, New York 1968, 36
(vers. it. dal Francese: La coscienza morale del cristiano, Roma 1968)11). R.H.
Preston, Conscience, in J. Macquarrie, A Dictionary of Christian Ethics, London
1967, 67; cf. Ph. Delhaye, op. cit., 42; P. Spicq, La conscience dans le Nuoveau
Testament, in Revue Biblique 47(1938), 63-67; E.D. D'Arcy, Conscience and the
Right to Freedom, New York 1961,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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