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운동의 영성신학적 의미
박현준(신학, 박사과정)
1. 머리말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 제기되어
왔다. 구성원간의 공동체적 관계가 전제되지 않으면 삶 자체가 불가능했던 원시시대부터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고 세분화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에
대한 인간의 향수와 열정은 식지 않고 있다.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열정이 조직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은 19세기
서구 사회이다. 18세기 이후 등장한 합리주의와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을 중심으로 모든 사회적 관계를 재편하였다. 합리주의적 과학기술은 인간의
생산력을 엄청나게 증가시켰고 인간의 물질적인 삶을 풍요롭게 변화시켰으며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지식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창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와 더불어 희생의 대가 또한 치루어야 했다. 사회 구성원간의 형식적인 관계와 경쟁의 원리가 지배함으로써 구성원간의 내밀한
인격적 관계와 협동 정신은 퇴색하고 말았다. 이른바 얻은 것은 개인의 자유와 기계 생산이요 잃은 것은 공동체적 삶과 형제애였다.1) 이 당시 유럽에 등장했던 오웬, 생시몽, 푸리에, 톰슨 등의 공동체 사상은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 공동체적 실천의 전형들이었다.2)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생산 관계로 인해 파괴된 공동체적
요소들 즉, 사랑, 헌신, 형제애, 협동, 연대 등을 부활시킴으로써 좀더 행복한 인간의 삶을 창조하고자 한 것이다. 계급간의 모순을 극복하고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를 추구하고자 했던 맑스주의 운동도 공동체운동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공동체적 실천들은 20세기
초까지 진행되었으나 이후 발생한 두 번의 세계 전쟁에 휘말리면서 약화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1950년대부터
공동체 운동은 대대적인 부흥기를 맞았다. 계급간의 격차가 심화되고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소규모의 공동체 운동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르테면 1960년대 미국 전역에서 등장했던 소규모의 꼬뮨들이 그것이다.3) 이들은
철저한 평등주의에 바탕을 둔 완전주의자들이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가치인 경쟁과 물질적 관계로부터 이탈해 평등과 협동, 우애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시도하였다. 이 밖에도 세계 전역에서 이러한 노력들은 시도되고 있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가 해체됨으로서 상실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의 대안으로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부쩍 고조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공동체 운동들은 단순한 사례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를 지향하는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희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4)
한국 사회의 형편도 예외는 아니다. 1980년대 말부터 고양되기 시작한 공동체
운동에 대한 관심은 일정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 사회주의적 편향의 변혁운동가들 가운데 일부는 사회주의권 해체 이후 대안 운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운동을 진지하게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 과학 문명에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는 생태계 파괴 문제는 자연과의 공생이라는 성찰을
반영함으로써 공동체 운동의 외연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공동체 운동에 관한 한국 천주교회 내의 관심은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보적인 성향을 견지해온 천주교 농민, 빈민 사목은 1970년대부터 이미 공동체 운동을 제기하였고 현재까지 질적 발전을 위해 활발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 교구를 비롯한 많은 교구들은 소공동체운동을 주요 사목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이를 교회의 활성화를
위한 장기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외에도 천주교사회운동을 이끌어 왔던 평신도 가운데 많은 사람들도 공동체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을 새로운 신앙운동의 대안적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견된다. 천주교회 내의 이러한 움직임은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담론으로 모아진 것은 아니지만 실천의 외연에 있어서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크고 본격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른바 “공동체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사회적 환경과 문제의식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인간의 근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집단 구성원간의 협동적 관계, 개인의 고유한 인격적 존엄성과 구성원간의 전인적 이해, 이를 바탕으로
하는 내밀한 관계, 사랑 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은 “익명성에 의해서 파괴된 현대인의 감정적 안정과 의사소통의
필요성”5)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물질적 풍요로는 채울 수 없는 인간의 궁극적인 요구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 과정은 “하느님과 올바른 가치들을 재발견하는 것과 같은 가장 심오한 갈망이 솟아나는 개혁과 쇄신의
단계와 관련이 있다”6)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공동체 운동을 인간의
근본적인 갈망이 표출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하나의 영성적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공동체 운동은 인간의 존재론적인 욕구의
사회적인 표현이며 따라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가 절박하게 요구하고 있는 시대적 영성의 한 형태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2. 초월체험으로서의 공동체
공동체는 인간의 삶 전반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복합적인
차원을 가진다. 따라서 공동체의 각 차원은 이해하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되는데 사회학자들의 수많은 개념 정의가 가능한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7) 이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공동체의 근본적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연대성과
일체 의식이다. 다양한 차원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의 근저에는 성원간의 공동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매키버는 구성원들 사이의 공동 유대나 연대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공동체는 공동의 생활방식을 공유하는 것에 대한
자각으로서의 “공동체 감정”이 존재한다.8) 공동체 감정은 문화적으로 먼저 공동의 가치와 신념
및 목표 등을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문화체계들이 인간의 자연에 대한, 또는 초자연적인 시간, 인간 활동의 양상 및 다른 인간 존재들에
대한 공동의 가치 지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 감정은 규범을 수반한다. 즉 공동체 성원들은 그들이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련의
공유된 행동의 기대들을 지닌다는 것이다. 한편 심리적인 차원에서 공동체 감정은 “우리임”의 느낌을 포함한다. 많은 공동체 성원들은 각각을
우리로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그들’로서 생각한다. 또한 개개인이 누리는 어떠한 심리적 안정감도 공동체의 성원이 됨으로서 가능하다. 고도의
복합성을 가지는 사회에서 개개인이 보다 거대한 사물들의 틀 속에 자신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마도 그들의 출신 공동체와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결국 공동체는 사람들이 안정감과 귀속감, 일체감을 느끼는 기본적 단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와 사회체계, 거대한 2차 집단들의 틈바구니에서 정서적 안정 또는 정체성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며 공동체는 이러한 필요에 응답하는 기본 단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이러한 특성은 단순히 정서적 또는 심리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삶의 태도,
이웃과의 관계 형성 방식, 재산의 소유 방식, 의사결정의 방법 등 모든 것이 공동체의 원리에 입각해 실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공동체는 의식적
차원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차원에 연대성의 원칙이 적용되는 생활단위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구성원간의 공동 의식은 구체적인 생활 양식의
공동체적 실현을 통해 형성되는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공동체는 근본적인 인간 관계를 연대성의 원리에 기초한 상호 일치의 표현인 것이다.
인간 상호간의 이러한 관계는 인간의 근본적 갈망에 속한다. 고립된 개인으로서 인간은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며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항상 타인과 주위 사물과의 상호관계를 통해서만 존립 가능한 이러한 상태는 인간의 근본적 구조이다. 인간의 육체성에 대한 현대 철학의
깊은 이해는 이를 명료하게 분석하고 있다.
인간은 육체를 통해 세상과 우주의 한 위치를 차지한다.
육체는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 내 존재”로 서게하며 세계의 일부분이 되도록 한다. 육체성은 인간에게 공간 내의 어떤 장소를 지정해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공간적으로 그와 가까이 있는 존재들과만 관련을 갖도록 제약한다. 그와 가까이 있는 존재들만이 그의 육체와 교섭하게 되고 그의 삶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다.9) 이러한 육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자신의 주위와 관련을 맺게
한다. 인간은 육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일정한 물리적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육체성은 필연적으로 어떤 관계를 요구한다. 물리적 공간을
점유한다는 것은 다른 육체성과의 일정한 분리를 전제로 하지만 동시에 상호관계도 전제한다.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서 진공의 영역에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물리적 공간이든 사회적 공간이든 혹은 심리적 공간이든 마찬가지이다.
한편 인간은 끊임없이 행위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활동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차원에서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움직여야만 한다. 따라서 인간은 행위하는 존재이고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인간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함으로써 존재한다. 인간은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행위를 통해 모든 것에 참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고립된 자아나 배타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동적인 관계 안에
놓여있는 존재이며 행위하고 있는 세계의 한 부분인 것이다. 인간은 행위 통해서 자신의 행위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타인과 만나고 이러한 관계 구조
안에 존재한다. 결국 인간은 타인에 의해 지지되거나 제한되는 자신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인간 이해의 출발점이며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과의 함께 함”이라는 성격으로 규정된다.10) 따라서 인간의
육체는 교류와 친교의 수단이며 공존 공생의 수단이다. 육체는 무수한 통로를 통하여 나를 다른 사람들과 결합시킨다.11)
육체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성서의 인간관과 맥을 같이 한다. 성서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여 이해하지 않는다. 육체, 육, 영혼, 영으로 번역하는 히브리어들은 인간의 구성요소나 부분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전체로 본
인간의 여러 측면을 지적하는 용어들이다. 신약성서가 “육”을 말할 때 그것은 영혼과 구분된 육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육은 나약하고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진, 그리고 유혹 받고 죄를 범하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가리킨다.12) 따라서 인간의
육체성은 적어도 성서적 관점에서 본다면 저급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성서의 육화 사상은 바로 인간 육체성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아뭏든 인간은 육체성으로 인해 좋든 싫든 필연적으로 자신의 주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한 개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다른 개인의 존재와 자연,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는 모든 차원의 관계를 함축한다. 개인의 존재에
필연적으로 관계성이 전제된다는 것은 물리적 차원뿐만 아니라 의미론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한 자아란 없으며 순수한 자아의
의미는 없다. 그것은 항상 타인과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 안에서만 발생한다. 맥머레이는 이러한 관계성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별적 독립성은 하나의 환상이다. 독립적인 개인, 고립된 자아란 허망한 말이다. 우리 자신을 찾기 위해 눈을 안으로 돌린다면 우리는
공허만 찾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오직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타인들에 의해
의미가 주어질 뿐이다. 우리는 자신 스스로가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를 영위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리나 힘 또는 자유는 이웃들의
은총과 호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13)
이러한 의미에서 엄밀한 개인의
주체성이란 불가능하다.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인간의 모든 인식과 경험은 상호주체적으로 이루어진다. 타인은 항상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나 또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개인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따위의 행위는 결국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을 착취함으로써 스스로 소외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지적은 이러한 의미에서 옳다.
인간의 관계성과 상호주체성은 일종의 한계로 체험된다. 자아의 무한한 확장과 무한한 자유에 대한 욕구는 그것을 제한하는 타인과
제반 조건에 부닥치면서 한계를 체험한다. 설사 타인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홀로 실현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한계이다.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한계 체험인 것이다. 그리고 자아의 의미가 항상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성립된다는 것 또한
한계체험이다.
한계체험은 유한성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대조적으로 무한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인가가 유한한 것으로 체험되면
그 경계선상에서 무한한 것으로 상승하게 된다. 인간은 유한한 것의 부정을 통해서만 무한한 것에 대해 알게 된다. 따라서 체험된 유한성의 경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본래의 인간 체험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초극하는 초월체험이다.14) 이러한 의미에서 공동체는 관계성의 한계체험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자 초월체험이다.
관계성으로 한계지워진 인간의 존재 구조를 공동체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으로 전이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례로 공동체는 개인주의를 통해서는 도저히
도달 불가능한 인간의 행복을 모색하는 가운데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매김한다. 공동체를 통한 인간애의 무한한 확대, 하고싶은 것과 해야하는 것의
일치, 소외구조의 혁파, 완전 가능성 등은 바로 이러한 초월 지향의 구체적인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인간의 근본적인 갈망과 깊은 관련이
있다.
3. 하느님 체험의 사회적 표현으로서의 공동체
1) 역사적 투신으로서의 하느님 체험
우리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일상의 역사와 그것이 가지는 초월적 차원에 대한
발견이다. 현대인들은 황홀경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 같은 초월에 대한 이전의 모델들에 대해 별로 귀를 귀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초월은 일상적인
것, 역사적인 것, 인간적인 것 안에서 체험된다. 초월은 모든 것 안에 내재해 있고 그 초월성에 대한 개방이 인간 실존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15)
초월에 대한 이러한 태도의 근저에는 성령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성령을 우주만물에게 생명력을 제공하는 원리로 이해함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보는 것이다. 보프는
이에 대해 그리스 정교의 전통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전통(그리스 정교) 안에는 성령이 자리할 수 있었다. 성령은 무엇보다도 관계,
생명, 창조성,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는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성령(하느님의 기운)은 태초의 혼돈 위에서 휘돌고 있었다(창세 1,1).
성령은 질서를 세웠고 모든 것에서 나타나고 움직이고 의사소통하고 타오르고 예언자들에게서 그리고 아직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것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모든 깨뜨림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교적 믿음에 따르면 성령은 생명을 주는 자이다.... 따라서 성자가 육화하는 것처럼 성령도 피조물 안에
거주한다.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 세상에 내재하고 세상을 신적 현실에 투명16)한 것으로
변화시킨다.”17)
이러한 관점에서 성령의 현존은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더욱 깊이 긍정하며, 단순히 세계로서만 긍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어떤 것 또는 어떤 분, 세계보다 더 큰 분, 초월자, 신의
영역 내지는 특별한 발로로서 긍정하게 된다.18) “신이 실재하고 구체적인 존재인 것은 그가
세계 위에나 세계 밖에 살기 때문이 아니고 세계 한가운데서 살고 또 세계 뒤에 살기 때문이다.”19) 따라서 초월적 실재로 인도하는 것은 인간의 삶 전 부분을 포함하는 일상적인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하느님과 따로 떨어져 있는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깊은 내적 연관성을 가지는 것으로 체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교 영성은 인간의 모든 삶 안에서 우주적 에너지, 생명력, 즉 성령을 체험하는 능력이다.20) 이 능력은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이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우주적 에너지를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라너는 “인간은 그 깊은 근저에서부터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영성은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차원으로 내려갈
때, 사물의 다른 측면을 포착할 때, 다른 이의 풍성한 자질, 그리고 우주의 웅대함과 복잡성과 조화 등에 대해 민감할 때, 모든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삶의 한 차원이다.21) 이러한 존재론적 구조로 인해 인간은 신적 실재가 자신 안에서
숨쉬고 있으며 그것이 무한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신적 실재에 대한 체험은 동시에 인간 자신의 한계체험이기도 하다.22) 인간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 자신이 시간과 미래의 주인이 아님을 알게 되고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의식하며 동시에 무한한 실재를 의식하게 된다.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신비 안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됨과 동시에 이웃과 모든 사물 안에 임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이웃에서, 역사에서, 우주 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체험은 필연적으로 그것들에 대한 역사적 투신을 빚어낸다. 하느님 체험은 그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역사적으로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체험이다. 따라서 “역사의 뿌리에서 신은 생명의 길로서, 일상의 투쟁을 견뎌나가는 힘으로서 우리에게
발견된다. 이러한 신은 우리가 당신에게 마음을 열 적에 당신을 체험하려고 감히 노력할 적에 당신을 드러내신다.” 23)
하느님 체험에 대한 이러한 표현의 전형은 역사의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 일상과 역사를 떠나 기도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 임무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구체적인 삶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였고 당시 지배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과 항상 같이 하였다. 물론 예수도 사막이나 한적한 곳에서 자주 기도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행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세상 속에 투신하기 위해
기도하였다. 광야에 나갔던 예수가 악마의 유혹을 극복한 이후(마태 4.1 - 4.11) 갈릴래아로 가 자신의 공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은(마태
4.1 - 4.17) 이를 잘보여준다. 타볼산에서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목격한 베드로가 거기에 머무를 것을 권유했지만 예수는 다시 산을
내려오면서 자신이 고난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간질병에 걸린 소년을 치료하는 일로 돌아간다(마태
16.1-20).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기도 행위가 따로 홀로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체험했던 하느님을 좀더
분명하고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행위임을 알 수 있게 된다.24)
예수로부터
발견되는 하느님 체험과 역사적 투신의 관련성은 특정한 삶의 양식을 요구한다. 즉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은 예수가 보여주었던 삶의 양식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산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이웃과의 형제적 삶이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수많은 연구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큰 아픔을 겪고 있던 거렁뱅이, 병자, 창녀 등의 아픔에
동참하였고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중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근본적으로 하느님 체험에서 출발하는 예수
추종 방법의 전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그리스도교적 신 체험의 공동체적 성격
인간은 한계 체험을 통해 스스로를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부정적 체험이라기 보다는 긍정적 체험으로 나타난다. 하잘 것 없는 존재를 무한히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은총이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자신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로 연장된다.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기 이외의 것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웃이 소중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며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이러한 태도를 총체적으로 종합한 사회적 표현이 공동체이다.
일체의 존재를 그것 자체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야 말로 공동체의 근본 태도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자비의
하느님은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예수의 하느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아무런 조건 없이 구원을 선사하는 자비의 신으로
체험된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을 친근한 애정 표현이 반영된 아빠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 있었다. 하느님을 사랑스러운 아버지로 체험하는 예수는
스스로 무한한 사랑의 태도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예수는 당시 사회의 판단 기준이었던 율법을 넘어 죄인들과 함께 어울렸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는 인간 현실에 투신하는 하느님의
모습에서 더욱 명료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사상은 이를 잘 요약하고 있다.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신 하느님이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자기증여를 뜻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스스로를 내어주는 행위야 말로 무한한 사랑의 증거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증여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서 절정에 이른다. 몰트만은 이를 일러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다.
자비로운 아버지로 계시된 예수의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형제적 관계로 들어가게 한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체험하게 됨으로써 그분으로부터
나온 모든 사람은 형제적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마르 12,31-32;
마태 22,36-39).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이웃 사랑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는 이웃 사랑을 말한다(마르
10,17-22). 이웃 사랑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서로 형제자매가 된다. 이것은 곧 사람들간의 공동체적 관계가 형성됨을
의미한다. 서로에게 헌신적으로 투신하며 지배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철폐된, 그래서 일체의 경쟁과 억압이 없는 그런 관계가 가능해진다.
예수의 가르침 또한 공동체적 관계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메시지를 공동체적 관점에서 해석한 로핑크의
복음서 분석은 이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백성들을 다스린다는 사람들은 그들을 내리누르고 그 높은 사람들은 그들을 내리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서 크게 되고자 하는 하는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마르 10,42-45).
로핑크에 의하면 이 대목은 지배구조의 철폐에 관한 구절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공동체로 불러 모았다. 따라서 제자 공동체는 당시
사회의 일반적 질서가 통해서는 안된다. 제자 공동체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의 질서가 지배되어야 하는 일종의 대조사회를 요구하고 있다는
말이다.25) 랍비나 선생님, 지도자의 호칭을 금지하는 예수의 말씀(마태 23,8-12)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된다.
예수가 요구하고 있는 대조사회의 실천적 원리는 섬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스스로 지배하는 자보다
섬기는 종이 되고자 할 때 공동체는 가능해진다. 섬김의 구조는 공동체의 다른 표현이다. 섬김을 통해 사람들은 상대방을 진정한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게 되고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예수는 스스로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할 뿐만 아니라(루가 22,27) 사람들에게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한다.
로핑크는 공동체에 대한 예수의 이러한 의지를 보다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개인에게 선포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단위로 하는 공동체에 선포하려 했다. 즉 구원의 단위를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포사업이 여의치 않자 예수는 12 제자단, 12이라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이스라엘을 대표하도록 의도한다. 즉 이스라엘
전체의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느님 나라의 임박함의 선포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공동체를 지상에 건설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세우고자 하였고 그것을 준비하도록 했다. 종말에 있을 하느님의 백성은 어떤 물리적인 힘에 의해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쇄신되고 그 나라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따라서 예수가 선포했던 복음의 구체적인 현실태는 공동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수의 이러한 의지는 보선을 통해 12제자를 채우는 제자들의 모습과 뒤이어 출현하는 초대교회의 생활상을 통해 연장되고
있음을 발견하게된다.26)
공동체에 대한 예수의 의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의 하느님 체험은 사랑 그 자체였고 그것의 현실적 표현이 공동체로 집중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동체적인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교 정신의 핵심이며 복음적 삶의 구체적인 현실태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3)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적 전통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적 전통은 사실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느님 체험의
표현으로서 나타나는 공동체적 노력은 이미 원이스라엘 평등공동체로부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에 대한 원초적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경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규정짓는 시금석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기준으로 평가됨으로써 끊임없는 긴장을 보유할 수
있었다. 불평등한 왕정체제가 들어서자 출현한 예언운동은 근본적으로 가나안 공동체의 원초적 기억을 지향하고 있다. 예언자들의 주요 메시지는
하느님의 정의를 역사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의 기본 목표는 원이스라엘의 평등한 공동체로 돌아가자는 데 있었다. 이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다. 묵시문학운동이 그렇고 천년왕국운동이 그렇다. 이들은 모두 원이스라엘 평등공동체에 대한 원초적인 기억을 기준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했다. 예수의 운동도 바로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적인 전통은 그리스도교회가 성립된
이후로 연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교회 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마다 공동체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사실은 공동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보여준다. 공동체에 대한 교회사적 전통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은 수도원이다. 스스로 형제자매의 관계로 살아갈 것을
서약하고 일체의 소외구조를 허락하지 않으며 모든 재산의 공유를 생활 원리로 하는 수도원은 그리스도교의 공동체 전통을 가장 풍부하게 보존하고
있다.
이 밖에도 19세기에 시도되었던 많은 공동체가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입각해 있으며27) 현대에 들어 제3세계에서 복원되고 있는 공동체운동의 배경에 그리스도교가 있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28)
4. 맺음말
그리스도교 영성은 근본적인 하느님 체험의 현실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 현실의
모든 차원에서 체험되는 하느님은 현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개혁하고자 하는 원의를 제공한다. 따라서 공동체 운동은 비인간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한에서 하느님 체험의 한 양식이라고 이해된다. 경제적 차원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차원에서 섬김의 원리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공동체운동은 하느님 체험의 내용과 직접 맞닿아 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분으로 체험된다. 즉 하느님은
섬김의 원리로서 체험되는데 이는 공동체적 가치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공동체운동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전형은 예수의 삶과 메시지를 통해 발견된다.
그리고 인간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공동체는 하나의 초월체험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인
관계성은 우리에게 한계체험으로 다가오며 공동체는 이것에 대한 대조 체험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공동체적 욕구는 인간의 근본적 갈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러한 경계선에서 체험된다. 사랑이 없이는 인간의 관계성이라는 한계를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지만 사랑으로 체험되는 하느님을 통해 인간의 관계성은 생명의 구조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고찰로부터 우리는 공동체가 하느님 체험의
현실적 표현인 동시에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나타나는 공동체 현상은 이러한 맥락 안에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적
언어들로 표현되는 운동이든 그렇지 않은 운동이든 상관없다. 인간의 총체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공동체운동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현대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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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용하 편, 공동체 이론, 문학과 지성사, 서울, 1985, 12쪽.
2) 공동체, 특히
유토피아 공동체 운동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참조하라. 윤형근 엮음, 선구자들, 신용협동조합중앙회, 서울, 1993. ; George R,
Melnyk, 공동체 탐구, 김기섭 옮김, 신용협동조합중앙회, 서울, 1992. 미국의 공동체 운동 전통에 대해서는, 로자벳 켄터, 공동체란
무엇인가?, 김윤 역, 탐구당, 서울, 1983.
3) 미국의 유토피아 공동체 운동에 대해서는 로자벳 켄터의 앞의 책
참조.
4)스페인 바스크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몬드라곤이나 이스라엘의 키브츠, 라틴아메리카의 기초공동체운동 등은 이러한
사례이다.
5) S.De Fiores, "spiritualié comtemporaine", in: Dictionnaire de la vie
spirituelle, 1061-1078, cerf Paris, 1987(“현대인의 영성” 주수욱 역, 신학과 사상 제15호,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서울 1996, 257-292, 261쪽)
6) 위와 같은 곳.
7) 사회학자들의 공동체 개념에 대한 논의는 Dennis
E. Poplin, Communities: A Survey of Theories and Methods of Research, Macmillan
Publishing Co., Inc., N.Y., 1979의 1장(신용하 편, 공동체 이론,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7, 18-51.에
번역되어 실려 있다.)를 참조하라.
8) Robert M. MacIver & Charles H. Page, Society: An
Introductory Analysis(N.Y.:Holt, Rinehart and Winston, 1949) 10쪽.
9) B. 몬딘,
인간: 철학적 인간학 입문, 허재윤 역, 서울, 서광사, 1996, 278쪽.
10) J. Macmurray, Persons in
Relation, Atlantic Highlands, N.J., Humanities Press, 1979, 209쪽.
11) 꼼블린,
그리스도교 인간학, 분도출판사, 왜관, 1988, 108쪽.
12) 호세 꼼블린, 위의 책, 92-94쪽.
13) Macmuray,
같은 책, 211쪽.
14) 심상태, 인간, 서울, 서광사, 1989, 175쪽.
15) Fiores, 앞의 글,
262쪽.
16) 보프는 투명(transparency)의 개념을 초월과 내재의 중간 범주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만물어 꿰뚫어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뜻하고 있다. 따라서 투명은 세상 안의 초월의 현존을 지적한다. 이에 대해서는 L. 보프, 세상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증언하는
사람들, 분도출판사, 왜관, 1990, 47-51쪽 참조.
17) L. 보프, 생태신학, 김항섭 옮김, 가톨릭출판사, 서울, 1996,
186쪽.
18) L. 보프, 세상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증언하는 사람들, 분도, 왜관, 1990, 48쪽.
19) 위와 같은
곳.
20) L. 보프, 생태신학, 188쪽.
21) L. 보프, 생태신학, 158쪽.
22) 심상태, 인간, 서광사, 서울,
1989, 174-175쪽.
23) L. 보프, 세상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증언하는 사람들, 51쪽.
24) 로버트 M. 브라운은
예수의 이러한 행위를 “물러남과 되돌아옴”의 구조로 파악하고 하나의 실재를 파악하는 두 가지 차원의 체험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로버트
M. 브라운, 영성과 해방, 한국신학연구소, 서울, 1990, 49-57 참조.
25) 로버트 M. 브라운은 예수의 이러한 행위를
“물러남과 되돌아옴”의 구조로 파악하고 하나의 실재를 파악하는 두 가지 차원의 체험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로버트 M. 브라운, 영성과
해방, 한국신학연구소, 서울, 1990, 49-57 참조.
26)위와 같은 책, 나,다 부 참조.
27)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공동체운동에 대해서는 Melnyk, 공동체 탐구 下, 17-23쪽 참조.
28) 예컨데 라틴아메리카의 기초교회공동체, 필리핀의
BCC-CO,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룸코 공동체운동 등이다.
참고
문헌
G.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분도 출판사, 왜관, 1985
신용하 편, 공동체 이론, 문학과 지성사, 서울, 1985.
George R, Melnyk, 공동체 탐구, 김기섭 옮김, 신용협동조합중앙회, 서울, 1992.
로자벳 켄터, 공동체란 무엇인가?, 김윤 역, 탐구당, 서울, 1983.
S.De Fiores, "spiritualié comtemporaine", in: Dictionnaire de la vie spirituelle, 1061-1078, cerf Paris, 1987(“현대의 영성” 주수욱 역, 신학과 사상 제15호,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서울 1996, 257-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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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M. MacIver & Charles H. Page, Society: An Introductory Analysis(N.Y.:Holt, Rinehart and Winston, 1949)
B. 몬딘, 인간: 철학적 인간학 입문, 허재윤 역, 서울, 서광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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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꼼블린, 그리스도교 인간학, 김수복 역, 분도출판사, 왜관, 1988
심상태, 인간, 서울, 서광사, 1989
L. 보프, 생태신학, 김항섭 옮김, 가톨릭출판사, 서울, 1996
L. 보프, 세상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증언하는 사람들, 성염 역, 분도출판사, 왜관, 1990
L. 보프, 정 그리고 힘, 박정미 역, 분도출판사, 왜관 1987
L. 보프, 정 해방의 은총, 김정수 역, 한국신학연구소, 서울, 1988
로버트 M. 브라운, 영성과 해방, 한국신학연구소, 서울, 1990
조던 오면, 영성신학, 이홍근 역, 분도출판사, 왜관, 1987
루이 부이에, 영성생활입문, 정대식 옮김, 가톨릭출판사, 1982
장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 성찬성 역, 성바오로출판사, 1985
G. 구티에레즈, 해방신학의 영성, 이성배 역, 분도출판사, 왜관,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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