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의 끝부분은 '나의 소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다. "무릇 한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에 동경을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없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김구의 단호하고도 분명한 민족지도자로서의 모습과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동안 김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제각기 다른 배경과 동기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져 왔다. 광복직후 전개되기 시작한 이전투구(泥田鬪狗)보다 더한 권력투쟁과 반민족적인 이념적 갈등의 와중에서 이른바 우파적 시각에서는 좌파성향의 지도자로 비판했는가 하면, 이른바 좌파적 시각에서는 그를 우익적 성향의 지도자로 매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광복 반세기가 지난 오늘, 아직도 민족과 국토가 분단되어 있는 현실에서 순수한 열정으로 민족의 자주 독립과 통일한국의 건설을 염원한 민족 지도자로서의 김구를 다시 조명해 보고, 그리고 그의 사상과 지도노선을 다시 정리해서 그것을 복지천년(福至千年)의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할 때가 왔다. 광복 50년의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통일한국의 건설이라는 진정한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는 이미 반세기 전에 김구가 제시한 방략(方略) 이외에 또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 다만 형식논리적 표현만이 그때와는 달라졌을 뿐이다.
김구의 일생은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한다. 19세기 후반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은 격변의 시기에 태어난 김구는 청소년시절부터 배외(排外) 구국운동에 뛰어들었고 일제가 한국을 강점했던 암흑의 시기에는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으며 특히 3·1 운동 이후에는 온갖 고초와 역경을 뚫고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민족의 자존과 민주체제의 정통성을 지켰던 것이며 광복 이후에는 우리 민족 자신에 의한 민족의 자주통일과 독립정부의 수립을 위해 전력투구하다가 비극적으로 그 생을 마쳤다. 그의 서거는 바로 그 자신의 비극이기에 앞서 민족의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비극적 서거는 한국현대사의 전개에 헤아리기 어려운 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의 서거는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주도세력이 상실되었음을 뜻하였다. 많은 수의 항일애국지사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에서 온갖 고초를 당한 끝에 순국하였고 일제에 쫓기면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다행하게 살아서 광복을 맞이한 인사들도 분단과 혼란의 군정기에 권력투쟁과 이념적 갈등으로 영일(寧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남한의 사회체제 관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한다는 이유로 일제식민당국의 앞잡이였던 경찰, 법조인, 교육자, 기업인, 행정관리, 언론인, 문화인 등등의 친일세력들을 다시 채용하여 미군정의 하부조직으로 충원하였고 이에 이들 친일세력들은 건국과정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조직화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안보를 위해서 친일세력의 숙청을 소극적으로 하다가 드디어 친일세력을 정치적으로 충원하였다. 이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비극의 씨앗을 심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승만에 의한 친일세력의 정치적 충원은 그 이후 한국 정치체제의 '정통성 위기'의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을 열정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마지막으로 남은 지도자는 김구뿐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의 서거는 분단된 조국을 주도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민족적 양심을 가진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세력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김구는 1948년 2월 13일에 발표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한다'는 성명서에서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는 소신을 확고히 밝히고 있다. 그는 정권과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통일문제에 순수하게 접근하였으니, 비록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문제는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풀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대북 접촉을 과감히 시도하고 단독정부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구의 그러한 통일을 향한 신념과 대북 접촉이 공산주의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순진한 노력이라고 비판하는 소리도 컸고, 실제로 그의 제1차 대북접촉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과정에서도 이념적 갈등을 심각하게 경험한 그가 공산주의의 본질을 간과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민족의 양심에 따른 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것이며 만약 그가 더 오래 생존했다면 또다른 대안들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실천하였을 것이다.
셋째로 김구의 서거는 한국현대 정치사에서 폭넓은 국민적 지지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민주적 지도자가 상실되었음을 뜻하였다. 한국헌정사에 있어서 비록 망명정부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전근대적 군주정치체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근대적 민주정치체제가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상해로부터 중경에 이르기까지의 망명지에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몇번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민주공화정으로서 민주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김구 자신이 임시정부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도 물론 민주적으로 임시정부를 운영하였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한국현대 정치사에서 그 정통성의 문제에 비교적 반론이 적은 것이다. 또한 김구는 이렇게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임시정부의 정치과정을 통해서 민주적 지도자로 훈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민족공동체를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운영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지도자였으며 이러한 배경이 그로 하여금 결코 카리스마에 의한 지도자가 될 수 없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가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 비밀결사적 성격을 가진 조직활동이나 테러리즘을 이용하였다고 해서 그를 반민주적 지도자로 비판하는 견해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항일투쟁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가 생존했더라면 이승만의 카리스마적 권위주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의 정치발전에 기여하였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김구는 식민지 유산의 청산문제, 민족분단의 극복문제, 그리고 민주적 체제운영 문제에 있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지도자였다. 따라서 그의 비극적 서거는 엄청난 민족적 손실이었으며 곧 민족의 비극이었다. 그렇지만 광복 50년이 되는 오늘에 와서야 그의 이와 같은 순수한 민족적 열정과 사상의 체계는 우리들에게 더 이상 역사적 오류를 범하지 못하게 하는 지침으로 남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김구의 사상체계가 서있는 기초는 정치적 리더쉽에 있어서의 고도의 도덕성이다. 이 도덕성을 지닌 정치적 리더쉽이 민족공동체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면서 헌신적으로 민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드디어 높은 문명의 수준을 누리는 문화적 대국을 건설하는 것이 김구의 원대한 이상이었다. 백범 김구는 높은 도덕성을 가진 민주적 지도자로서 민족의 영원한 사표로 남을 것이다.
출처 :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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