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

[스크랩] 민족통일의 화신 백범

@로마의휴일 2007. 8. 7. 19:47
 

백범 김구는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의 제 1 진으로 환국하였다. 백범과 함께 환국한 이는 모두 15인이었다. 제2진 19인은 12월 2일에 환국하였다. 백범은 도착 이튿날 방송에서 미군정측의 요구로 "나와 나의 각원 일동은 한갖 평민의 자격을 갖고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대외적으로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27년간의 독립운동자로서, 임시정부 주석으로 귀국하였다. 그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고 부인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김구 주석이 자리잡은 경교장(京橋莊)에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인사행렬이 줄을 이었고 12월 1일에는 오세창, 권동진, 이인 등이 주선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고 제2진이 돌아온 뒤인 12월 19일에는 김석황, 안재홍, 홍명희 등이 앞장선 임시정부 귀국 환영 국민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김구 주석이 귀국할 당시의 정국은 대단히 착잡하였다.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출범한 여운형,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는 안재홍이 탈퇴한 후 인민공화국을 설립했는데 그것은 좌파의 연합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외에도 미군정청에 등록한 정당이 205개나 되어 10월 5일부터는 주요 정당 대표들이 정당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때에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하자 좌우정당의 연합체로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친일파까지 포함한 단합 방침으로 독립운동자를 실망시켜 그의 정당통합의 초당적 위치는 흔들리고 말았다. 11월 16일에 조선공산당이 탈퇴하면서 20일 인민공화국 산하에 전국인민위원회를 설치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대립했던 것이 그것을 말한다. 그때에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환국한 것이다. 수백개로 난립한 정당, 좌우와 중립으로 노선이 분화된 정국의 수습은 이제 임시정부가 떠맡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중경(重慶)에서 통일전선 형성에 성공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해방 후 9월 3일에는 1940년에 공표한 건국강령에 입각하여 당면과제를 발표하였다. 그에 의하면 임시정부는 귀국하여 과도정부를 세우고 해체한 후 과도정부가 정식정부를 건립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12월 19일 임시정부 환영대회가 열렸을 때 백범은 답사에서 "임시정부는 결코 어떤 일계급, 어떤 일파의 정부가 아니라 전민족 각계급 각당파의 공동한 이해에 입각한 민족 단결의 정부였습니다. … 친일파 민족반도를 제외한 우리 동포는 단결해야 합니다. 오직 단결이 있은 후에야 우리 독립주권을 창조할 수 있고 소위 38도선을 물리쳐 없앨 수 있고 친일파 민족 반도를 숙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좌파가 계급국가를 지향했다면 백범은 모든 계급의 공동이해에 입각한 국가를, 이승만이 친일파까지 단결을 지향했다면 백범은 친일파를 숙청한 단결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환영대회가 끝나고 백범이 민족세력의 총집결체로서 특별정치위원회(特別政治委員會)의 구성을 준비하자 정가의 주목을 한몸에 모았던 것이다.
그런데 뜻과는 달랐다. 좌파의 인민공화국은 임시정부와 대등한 정부적 존재로 자처하였고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임시정부 이상의 권위를 행사하려고 했다. 그런 가운데 한민당이 친일파 숙청을 주장하고 있던 임시정부와 대립이 심화되어 자연 이승만과 한민당의 결속이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백범이 중경에서 계획한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특별정치위원회의 구성도 쉬울 수 없었다. 그럴 때 1943년부터 걱정되던 신탁통치안을 노골화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소식이 전해왔다. 그것은 12월 28일의 일이었다. 5년간의 신탁통치와 그 기간에 필요한 임시정부를 미소 주둔군사령관으로 구성된 공동위원회(共同委員會)가 한국의 정당과 협의하여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오자 백범은 곧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반대결의를 하고 각 정당 대표와 종교 언론 관계자를 모아 반탁운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선포하면서 30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를 결성했는데 이것은 이미 추진하던 특별정치위원회의 대안이기도 했다.

 

반탁위원회는 권동진, 안재홍의 이름으로 조직하여 31일에는 백범이 선두에 선 시민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하는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같은 날 국자(國字) 제 1 호를 선포하여 전국의 행정과 경찰기구를 접수한다는 것과, 국자 제2호로써 "국민은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고 주권행사를 선언함으로써 미군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것은 분명히 자주독립의 적극적인 표현이었으나 미군정으로 보면 반탁정변이었다. 혹은 반쿠테타라고도 한다. 미군점령하니까 반탁쿠테타이기는 해도 외세를 배격하는 백범의 투철한 의지가 극명하게 드러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백범이 선봉에 선 전국적인 반탁열기와 반탁정변에 놀란 것은 미군정 당국과 인민공화국을 이끌던 좌파였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장군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전부터 신탁통치가 알려지면서 한국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한 바 있었지만 백범의 임시정부가 주권행사를 선언하고 나설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지는 임정요인을 감금 추방할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긴장이 극도에 오른 새해 1월 1일 반도호텔에서 김구·하지회담이 열려 가까스로 사태는 수습되었다. 평화적 반탁운동의 전개로 합의한 것이다.


 반탁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좌파가 놀란 것은 임시정부가 주권행사를 선언하고 나서면 그들의 인민공화국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아니더라도 반탁운동을 통해 백범과 그의 임시정부가 전국민적으로 부상하여 인민공화국이 무척 격하되고 있었다. 그래서 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는 1월 1일 임시정부에 대해 두 정부를 해체하고 통합할 것을 제의하고 이튿날 10시까지 회담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거절당하자 좌파는 북한의 찬탁정국에 맞추어 2일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변하고 3일 찬탁대회를 열었으며 백범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찬탁·반탁 정국은 좌우익의 대립구도로 대치되어갔고 그 가운데 백범은 반탁과 우익의 영수로 자리 잡혀져 갔다.

 

백범은 1월 4일 좌파를 향해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좌파가 참여한 정부로 확대개편하고 이어 임시정부를 대신하고 정식정부를 수립할 과도 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의했다. 그를 위하여 김원봉, 김성숙, 조소앙, 조완구, 장건상을 대외교섭위원으로 파견하였다. 여기에서 통일전선을 추구하면서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잇던 백범노선을 살필 수 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전제한 모임에 좌파가 호응할 것으로 기대하기란 힘들었으나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둔 마당이어서 1월 7일 한민당, 국민당, 인민당, 공산당의 4당회의가 8일에는 신한민족당이 참가한 5당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것이 무산되자 백범은 20일부터 5일간 비상정치회의 준비회의를 개최하여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합류할 것을 합의하고 이승만 김구 김규식을 중심한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키로 결의하였다. 이승만 합류에 임시정부의 혁신계 인물인 김원봉, 성주식, 김성숙, 장건상이 탈퇴하여 국민회의는 우파의 집결체가 되었다. 2월 1일과 2일에 그러한 비상국민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군정청에서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위원으로 그들의 자문기구인 민주의원을 구성하여 비상국민회의는 사실상 민주의원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때 좌파에서도 1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이 좌우익 조직이 구조적으로 정착해갔다.

 

백범 김구의 인품은 소박하면서도 다양성을 포용할 아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고 사상은 다원주의에 근거하면서도 자주적 민족주의를 추구했고 독립운동의 경력으로 보면 시종 임시정부를 지킨 유일한 지도자라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대표적 독립운동자로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인격과 사상과 경륜이 뛰어난 백범이지만 미소의 대립이 냉전체제로 치달아 남북의 국토분단으로 전이됨에 따라 정국도 좌우구도로 고착되어가는 것을 약소민족의 지도자로서 극복하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소공동위원회 제1차 회의가 열리던 3월 20일부터 5월 6일까지 또 미군정의 알선으로 5월 25일부터 김규식,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백범은 그것을 관망이라도 하듯 자체 정비에 나섰다. 4월 18일에 국민당(안재홍)과 신한민족당(권동진)을 흡수하여 한국독립당을 확대개편하고 '백범일지'도 손질하기 시작하였다. 5월 18일부터 반탁운동의 맹장 조소앙, 신익희를 앞세워 민립대학 설립을 돕는 한편, 독립운동에서 신세진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투신한 이래 연고지를 찾아 은혜를 보답하는 여정을 갖기도 했다. 그것은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백범다운 행각이기도 했지만 70을 넘은 노경이기도 했다.

 

그러던 6월 3일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한 정읍(井邑) 발언이 들려와 그후부터 이승만과 반탁운동을 함께 전개하면서도 노선을 달리했다. 즉 백범의 반탁은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난 2월 8일에 반탁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를 결성했지만 6월 29일에는 이승만이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를 결성하며 독주하는 등 이승만과의 노선차이가 노골화되자 어떤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6월 30일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골을 봉환하는 일이 백범으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백범이 1931년에 만든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작전을 완수하고 순국한 의열동지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척한 은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유해를 봉환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일을 끝마친 9월부터 조선공산당이 지하투쟁으로 전환하여 정국은 더욱 긴장된 가운데 대구 10.1 사건이 터졌다.

 

한편 국대안(國大案) 반대문제로 학원조차 시끄러웠고 11월 23일에는 좌파 3당이 통합하여 남로당(南勞黨)이 결성된 숨가쁜 일이 연이어 일어나 백범으로서 이승만이 남한 단정을 발설하고 김규식이 좌우합작운동에 나서 3인 3색처럼 나타난 것을 우파의 분열로 보일까봐 어떤 조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새해 들어서면서 더 참을 수 없어 1947년 1월 24일에는 백범을 중심으로 한 반탁투쟁위원회(反託鬪爭委員會)를 결성했다.

백범이 새삼스럽게 반탁투쟁위원회를 가결성한 것은 그에 앞서 1월 11일 하지 군정사령관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추진하고 있는 소련과의 왕복문서를 공개한데 대한 조직적인 응수였다. 더구나 지난 연말에는 이승만이 미국을 방문하러 떠나, 무슨 정략이 있을 수도 있는데 대한 강력대응이었던 것이다. 또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빙자하여 임시정부의 비상국민회의와 이신동체격인 민주의원을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義院, 의장 김규식 부의장 최동오, 윤기섭)으로 대체한 마당에 그에 대한 경계도 필요하여 반탁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백범노선의 계승 인력을 위하여 3월 29일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를 개설하였다. 1기생 1백명씩 백범이 암살당하기까지 9기생을 배출하였다. 1946년까지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대동단결을 위하여 정력을 쏟았으나 1947년부터는 백범자신의 조직과 인력이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47년은 5월 21일부터 7월 10일까지 열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로 정국이 크게 변화하였다. 우파에서 김규식과 한민당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수용하면서 좌파와 함께 참가 방침을 세웠고, 한독당에 합류해있던 안재홍도 탈당하여 6월 21일 신한국민당을 결성하고 그에 합류하여 남한의 425개 정당 사회단체(북한 38개)가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공동위원회에 참석하니 백범의 임시정부와 반탁운동을 궁지에 몰린 듯 했다. 그럴 때 반탁을 고집하던 이승만이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노골적으로 추진하여 8월 26일에는 총선거대책위원회(總選擧對策委員會, 위원장 신익희)까지 구성함에 이르러 백범의 반탁·통일정부 수립계획은 최대 시련을 맞게 되었다.

 

미국은 이승만의 단정안을 지원하였다.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시켜 11월 14일 한국 총선거안을 가결하였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하였다. 백범은 총선거안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지만 단독정부로 몰고갈 것을 막기위해 12월 22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경주하였다.


 1946년 후반부터 전국에서 폭력과 폭동이 난무하더니 1947년 7월 19일에는 근로인민당의 여운형이, 12월 2일에는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암살당한 비극이 연출되어 이러한 비극은 통일정부 수립으로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백범은 전망하였다. 아니면 민족의 대참극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한 백범이었다. 대참극이란 말할 것도 없이 6.25와 같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12월 20일 결성한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이 제기한 남북지도자회담에 동의하여 남북협상의 길을 열어간 것이다.

 

1948년은 연초부터 단독정부 수립안이 기세를 올렸다. 1월 8일에 입국한 유엔한국위원단의 입북을 소련측이 거절하자 미군정과 이승만과 한민당이 합작하여 단정수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범음 김규식과 합작하여 단정반대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이때의 일은 복잡하므로 간추린 일지를 통해 보기로 한다.

 

1. 27 김구 김규식, 유엔한국위원단 면담에서 단독선거 반대

2. 3 이승만, 단독선거 촉구 성명(이승만, 단독선거를 위한 다양한 교섭에 2월 26일 유엔한국위원단 매논 위원장의 보고를 심의한 유엔소총회가 단선을 결의했고 3월 1일 하지 사령관이 단선 실시를 발표)

2. 4 김구 김규식, 남북협상에 합의

2. 10 김구, '삼천만 동포에 고함'의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

2. 16 김구 김규식,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협상 제의

2. 27 김규식을 비롯한 단선반대자 20여명, 입법의원 탈퇴

3. 12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단선불참 공동성명

3. 31 김구 김규식, 남북 왕복문서 공개

4. 3 유림이 주도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결성. 남북협상 지원

4. 18 문인 108명, 남북협상지지 성명

4. 19 김구, 평양 남북 대표자회의 참석차 출발(김규식 21일 출발)

5. 5 김구 김규식, 서울 귀환

 

남북협상 이야기는 장황하므로 위의 일지로 대신한다. 북한측에서 6월 2차 회담을 해주(海州)에서 열자고 제의해왔으나 이번에는 '북측에서 홍명희를 대표로 보내라'고 회신하고 응하지 않았다. 결국 그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남북에서 각각 단정이 수립되어 백범의 통일 노력은 봉쇄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범은 남북정부 모두의 냉대를 받았고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까지 탄압을 받다가 1949년 6월 26일 12시 45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운명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민족의 비극이 아니던가.


 백범이 마지막 맞던 새해. 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유일한 최고의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다. … 소련식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공산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해도 독점자본주의로 무산자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시장화하는데는 찬성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민족의 영원한 교훈으로 기억될 것이다.

 

출처 : 조동걸 국민대 대학원장 한국사

출처 : Black & White
글쓴이 : 지킴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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