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의혹사건/1.김구암살
/ 한겨레신문, 1999. 1. 1
정부 수립 50돌은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남북 분단 냉전체제 군사독재의 질곡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수 없이 겪어 왔다. 새로운 반세기를 시작함에 있어 그런 잘못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각종 의혹사건을 밝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수많은 사건 중 민족의 장래를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10대의혹을 전문가, 학자들의 자문을 얻어 선정해 문제의 핵심과 진상규명 노력을 시리즈로 다룬다. [편집자]
암살 배후집단 규명 막아와
49년 6월 벌어진 백범 김구 암살사건에서 가장 큰 쟁점은 이승만 초대대통령과 미국이 이 사건에 관련됐는지 여부다.
먼저 `이승만 배후설'은 △당시 육군소위로서 암살 하수인이었던 안두희 △사건 당시 서울지검장으로 기소를 맡았던 최대교 △구국청년단 대표 고정훈, 헌병사령관 전봉덕 및 백범 아들 김신의 증언 등이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이승만이 사건 당시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 부단장으로 암살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김성주(54년 헌병사령관 원용덕 집에서 살해됨)를 사형에 처하도록 한 영문 메모를 보낸게 중요한 단서다. 또 암살 20일 전 친일세력의 영향 아래 있던 경찰에 의해 반민특위가 습격당하고 49년 8월말 마침내 공식해체되면서 이승만의 권력기반이 확고해지는 점도 시사하는 바 크다. 그러나 이승만의 정치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같은 이는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다. 여러 정황과 증언으로 볼 때 이승만은 자신이 직접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도록 부하들에게 암시해 암살을 부추겼을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미국의 개입여부다. 안두희는 92년 4월12일 사건의 진상을 끈질기게 추적해온 권중희에게 암살배후를 토로하면서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 등의 소개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의 한국 책임자 (중령) 등을 알게 됐으며 △오에에스 한국담당 장교와 안두희의 서북청년단이 긴밀히 정보교환을 했다고 진술했다. 안은 이어 △미군 장교는 백범을 제거해야 할 `블랙 타이거'라고 부르며 넌지시 암살의 필요성을 흘렸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특히 사건 바로 뒤 존 무초 대사의 보고를 통해 장례식까지의 정국과 사건의 추이를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암살사건의 내막을 미리 알고 있었거나 이승만 정부로부터 보고를 받았음을 추정케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미국이 암살에 직접 개입한 증거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이 백범의 남북협상노선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적어도 암살을 예상했거나 희망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왜 반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을까? 우선 암살의 주류 및 배후를 이루는 집단이 권력핵심에 똬리를 틀고 진상 규명작업을 막아왔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들어 국회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강신옥)가 구성돼 95년 12월 조사결과를 발표했으나 이전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동안 진상 규명작업이 안두희의 입에 너무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증언을 수시로 뒤집어 정작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준 측면도 많다. [이상기 기자]
90년부터 백범연구 주력 : 도진순교수
백범 암살사건은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북한과 미국을 어떻게 이해 하느냐 여부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90년 이후 백범 연구에 주력해온 도진순(40) 교수(창원대 사학 과)는 백범 암살사건이 최근 새삼 주목을 받는 것은 남북 및 한-미 관계가 새로이 진전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 파묻힌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맥락에서 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백범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사실 백범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분단과 통일'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다가 그의 만년에 주목해 빠져들게 됐다. 백범은 해방정국 역사구조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를 통하지 않고는 분단과 통일을 말할 수 없다.
- 백범연구가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나?
세 가지를 말할 수 있겠다.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몸을 던진 만년의 백범 연구가 그 첫번째요, 현재 및 차세대 젊은이들에게 그의 진면목을 이해시킬 수 있는 `청년백범연구'가 두번째다. 또 하나는 애국심 충성심 등 전기적 연구수준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시시비비를 가려 그의 오류까지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백범 암살의 배후연구는 그것이 아무리 성층권에 가려있다 해도 뻔히 보이는 주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학문적 논의의 장과 현실인물 에 대한 명예가 분간 안되는게 우리의 풍토여서 아쉽다. 여기에다 정 부의 적극적인 진상규명 의지 역시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이젠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해 공정하고 냉철하게 되짚어 봐야 할 때라고 본다. [이 상기 기자]
사건의 개요
사건 개요는 1949년 6월26일 정오 조금 시각.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던 일요일 서울 서대문 경교장 2층 거실에서 네발의 총성이 들렸다. 육군소위 안두희(당시 32살)가 쏜 총탄에 백범 김구는 머리를 책상 위에 얹고 손은 테이블 한 모서리를 쥔 채 쓰러졌다. 사건 뒤 체포된 안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곧 15년형으로 감형되고 50년 7월 소위로 복귀했다. 그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대령까지 진급했으나 이승만 정권 몰락 뒤 뜻있는 이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암행을 계속했다. 특히 김용희, 곽태영, 권중희 등은 은신 중인 안을 집요하게 찾아내 역사적인 증언을 이끌어내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애초 단독범행이라 던 안은 일부 배후를 털어놓기는 했지만 계속 말을 뒤집어 진상규명작업을 혼란에 빠트리다가, 96년 10월23일 버스기사인 박기서의 습격을 받아 숨졌다. "선생님이 안두희 총탄에 쓰러진 것과 거의 동시에 서대문서 경비주임이 경교장으로 뛰어들어왔어요. 그리고 잠시 뒤 군복차림의 정체불명 청년 4~5명이 들이닥쳐 안을 지프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습니다." 암살사건 당시 백범의 수행비서로 현장에 있던 선우진(77)씨는 31일 범행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는 경찰과 군 등 당국이 이미 선생의 암살 작업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45년 말부터 백범이 암살되기까지 가장 가까이서 모신 측근 중의 한 사람인 그는 49년 봄 남북협상 때 백범을 수행해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래서 선생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여지껏 회한과 죄스러움을 느끼고 있으며, 지금도 사건 관련 의문점들을 떨칠 수 없다고 한다. 그의 생애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그렇게 미워했던 백범의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역시 순탄치 못했다. 특히 자유당 시절엔 친구들도 맘대로 만나지 못했으며, 신분을 감추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때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통역일을 하다가 전후 상경해서는 모래내의 `재민농원'에서 해외귀국 동포들의 재활을 위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60년 4·19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그는 다시 바빠졌다. 11년 만에 치러진 백범 추모식과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을 병행하며 사건 배후 추적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는 백범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줄곧 백범주변을 지켜왔다. 장례 식 직후 설립된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에서 일을 해왔으며, 현재는 이 협회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다. 그는 진상규명이 확실히 돼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을텐데 자꾸만 기억력이 흐려져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상기 기자]
불행한 현대사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야
정부 수립 50돌, 기쁨과 축하만으로 맞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즐거워야 할 날에 우리는 썰렁한 가슴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 단지 오늘의 경제위기때문만은 아니다. 반세기의 긴 세월 동안에도 잊혀지지 않는 많 은 슬픔과 고통이 그 속에 있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의 가족과 이웃 가운데 과거의 상처와 아픔으로 눈물짓는 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 현대사는 그렇게 고난과 형극으로 점철 돼 있다.학살, 암살, 처형, 투옥, 고문, 사건조작, 강제해직, 강제헌납… 미처 그 음울한 말들을 다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로 좌우갈등, 한국전쟁, 1인 장기집권, 군사독재, 권위주의 정부가 할퀴고 간 상처는 크고도 깊다. 제주도민의 3분의 1이 학살당했다는 제주 4·3사태도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50만명의 보도연맹 조직원도 한국전쟁 개전 두달 사이에 정부에 의해 거의 모두 학살당하는 운명을 겪었다. 섯달오름 등 그 이름조차도 낯선 한반도 도처에서 한 맺힌 유골이 발견된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민간인의 죽음은 공식통계에 따르더라도 이미 99만명에 이른다. 억울한 것은 그런 죽음에만 있지 않다. 공권력에 의한 고문 투옥 사건조작 등으로 생겨난 한스런 사연들이 줄을 잇는다. 어이없이 강제 해직당하고 재산을 강제로 헌납당한 일도 부지기수다. 삼청교육대로 목숨을 잃고 병신된 사람도 많다.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 가운데 여러 번 정권이 바뀌어도 수 십 년째 감옥에 있는 사람도 있다.한국의 현대사는 그 자체가 통곡의 장이다. 원한의 박물관이요, 원죄의 창고다. 언제까지나 그 창고, 박물관 문을 닫아걸 수는 없다. 활짝 문을 열어 진실의 햇볕을 쏘이고, 한 맺힌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가해자의 사죄와 처벌이 있어야 한다. 그 모든 끝에 온전한 화해와 용서가 있고 재발방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양심수 출신 대통령 넬슨 만델라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시도한 것이 바로 이런 일을 처결하기 위한 `진실과 화해위원회'였다. 군사독재기간 수 만 명의 실종자를 낳은 아르헨티나가 `실종자에 관한 전국위원회'를 조직해 실종사건을 집대성하여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름 하여 `눈까마스', 다시는 이 불행한 일이 없게 하자는 뜻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구호는 `세계로, 미래로'였다. 그러나 우리는 일찍이 세계 경제전쟁에서 졌고, 미래는 암담해졌다. `세계로,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안으로부터, 과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곪은 내부를 그대로 봉합해 두고 아무리 얼굴과 손을 잘 씻고 화장을 잘 한다고 하여 건강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세기 전반의 식민시대, 후반의 분단시대가 낳은 이 불행의 응어리를 그대로 창고에 처박아두고 21세기의 미래가 행복해질 리 만무하다. 망각을 넘어, 슬픔을 넘어 새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의 창고, 판도라의 상자를 비우자.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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