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선생은 참으로 큰 사람이다.
그 크신 특징은 무엇일까? 인물로서의 백범의 가장 큰 특징을 들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것은 그의 지고지순한 애국성과 애국심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청년으로 민족의식이 정립된 이후 모든 것을 다 희생해 가면서 전 생애를 일제의 침략하에 신음하는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 나라와 겨레의 크기만큼 영구히 그를 역사에 기릴 큰 사람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범의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은 일제의 고문으로 의식이 거의 희미해진 죽음 한 걸음 앞에서도 강철같은 힘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신민회사건(105인 사건)으로 일제에게 모두 17년형의 언도를 받을 무렵, 일제의 잔혹한 고문으로 야밤에도 몇차례 죽었다 깨어나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 철장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그는 쓰러져 육신이 아파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다음과 같이 반성하고 있다.
「저놈(왜경찰…인용자)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백범일지 중에서-
이러한 지극하고 지순한 나라사랑, 겨레사랑이 어찌 그를 '큰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인물로서의 백범은 또한 매우 '정의감'이 높은,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비단 일제 침략에 반대하는 정의로운 독립투쟁 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주변 사회생활 문제에까지 '정의'로운 일이 아니면 결코 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백범이 일찍이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유학자 고능선(高能善)선생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고 평생 이를 지켰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한 백범의 성품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은 그의 '담대성'과 '용감성'이다. 그의 담대한 성품은 어릴 때부터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백범일지'의 소년기 회상록속에 보인다. 백범은 나라를 위하는 일이고 정의로운 일이라면 남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들을 담대하게 용감히 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케 하였다. 백범이 19세의 어린 나이로 동학의 팔봉접주가 되고 선봉장이 된 일, 김이언 의병부대에의 투신, 일본군 특무장교 쓰치다(土田)의 처단,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조직과 이봉창(李奉昌)의사,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의거, 어려운 조건에서의 광복군 창군 등은 그의 이러한 담대한 성품과 관련된 일들의 임무였다고 할 수 있다.
인물로서의 백범의 큰 특징은 또한 '성실성'과 '열성'이 매우 강한 것이었다. 백범은 어떤 일을 맡거나 하고자 하면 그것이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매우 성실하게 열성껏 하는 품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범이 실제로 맡아서 한 일은 무엇이든지 잘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맡은 일을 열성껏 성실하게 집중해서 해내기 때문이었다.
백범의 품성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실질'을 매우 좋아하는 것이었다. 백범은 공리공론을 가장 싫어했으며 '실질'적 논의와 '실천'을 중시하고 좋아하였다. 백범이 동학 유학 불교 기독교의 여러 가지 종교를 모두 섭렵했을 때에도 그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주고 독립을 지원해주는 종교내용의 '실제'를 취하였지만 그 종교의 이론에도 집착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백범은 종교적 배타성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백범의 인물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포용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백범은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달라도 협상과 연합을 통하여 서로 포용하고 협동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였다.
백범이 임시정부의 국무령(1927년)이 되었을 때에 민주적인 국무위원제를 추진한 것이라든지, 임시정부 말기에 좌파 독립운동 단체들과 인물들을 포용하여, 일제 패망 후의 좌우분열을 사전 방지한 통일정부의 수립을 준비한 것은 그의 인품의 포용성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백범은 임시정부 말기에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공포한 후 좌파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를 포용하여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해서 광복군을 통일군대로 만들었으며 의정원에도 좌파 사회주의 정당과 단체대표들을 야당의원으로 영입하여 의정원을 통일의회로 개편하였고 임시정부에 부주석제를 신설하여 주석에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대표로서 백범이 취임했지만 부주석에는 좌파 단체들을 대표하여 민족혁명당위원장 김규식을 선임하였다.
백범이 광복 후에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처음부터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한 것도 이러한 백범의 포용성과도 관련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적 성품을 가진 백범이 실현하려고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그의 사상과 이념의 특징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백범의 사상의 몇가지 특징을 들라고 요구한다면 다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완전독립사상'이다.
이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하여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요'라고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나의 소원 중에서-
둘째는 '자유민주사상'이다.
백범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정치이념은 한마디로 표시하면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 … 나는 어떠한 의미든지 독재 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가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자유를 누려서 국민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와,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 -나의 소원 중에서-셋째는 '아름다운 문화국가 건설' 사상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나의 소원 중에서-
물론 백범도 우리 나라의 부강을 경시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나라가 가난하고 약한 상태에서는 반드시 부강을 실현해야 하지만 그것은 최선진 부강국과 같은 수준에 도달하면 족하고, 그보다는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가진 아름다운 문화국가를 건설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백범이 가리킨 문화는 남을 모방하는 문화가 아니라, 자주성을 가진 창조적 문화였다. 백범은 우리 나라가 아름다운 높은 수준의 창조적 문화국가가 되어 세계평화가 우리 나라로 말미암아 실현될 것을 소원한 것이었다.
넷째는 '통일조국 건설'의 사상이다.
백범은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목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
백범은 처음부터 통일조국을 건설하지 않고 38선의 남북에 각각 두 개의 정부를 수립하면 남북분단이 고착되고 동족상잔의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를 매우 염려하였다.
백범은 이렇게 크고 큰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희생당하더라도 동포들의 비극을 사전에 막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유민주의 통일조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한국 민족의 영원한 큰 스승이었다
출처 : 백범김구선생 기념 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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