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기초신학 각론 I
그리스도교 신앙의 종교론적 논증 (demonstratio religiosa) 1
- 종교철학 안에서“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기”
* 참고문헌
● 철학적 이해
김현태, 철학과 신의 존재. 철학과현실사 2003.
정재현, 철학읽기와 신학하기. 신학은 인간학이다. 분도출판사 2003.
● 종교학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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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혜, 종교학의 이해: 종교연구 방법론을 중심으로. 분도출판사 1986.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길희성 옮김. 분도출판사 1995 3판
멀치아 엘리아데, 성과 속. 종교의 본질. 이동하 옮김, 학민사 1983
● 종교신학적 이해
이찬수/유정원, 종교신학의 이해. 신학총서 32. 분도출판사 1996.
송천성, 아시아인의 심성과 신학. 아시아 신학 1. 분도출판사
월프레트 캔트웰 스미스, 종교의 의미와 목적. 길희성 역. 분도출판사 1991.
존힉,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이찬수 옮김. 도서출판 창 1991.
폴니터,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변선환 역
이찬수, 인간은 신의 암호. 칼라너의 신학과 다원적 종교의 세계, 분도출판사 1999, 61-76 (하느님 체험과 초월론)
● 기초신학적 이해
한스 큉, 신은 존재하는가 I, 분도출판사 1994.
제랄드 오콜린스, 기초신학, 분도출판사 1994, 91-210 (3장 신적 자기통교, 4장 그리스도와 비그리스도교)
칼 라너,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현대 가톨릭 신학 기초론. 이봉우 역, 분도출판사 1984, 163-236 (4장 - 하느님의 자유롭고 관대한 자기양여사건으로서의 인간, 5장 – 구 원과 계시의 역사)
박진량, 그리스도교 계시론, 분도출판사 1983, 17-56 (신적 계시의 가능성 문제, 역사적인 하느님의 자기계시)
요셉 라찡거, 그리스도교 신앙 어제와 오늘, 분도출판사 1983, 73-121 (1장 신 – 성서적 신신앙, 신앙의 신과 철학자의 신, 오늘에 있어서의 신에 대한 신앙고백)
1,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신학)하는 다양한 학문적 영역들
그리스도교 신앙의 “희망의 근거(베드전 3, 15)”에 대한 기초적 해명을 담당하는 기초신학은 신학의 정체성과 신학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의 변천과정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구체적인 인간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 사건에 대한 해명을 목표로 한다. 신학이 본래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신학의 중심주제는 “하느님”이고,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과 관련된 인간의 체험을 전제로 전개되어야 한다.
기초신학의 제1주제 영역인 “종교론적 논증(Demonstratio religiosa)”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인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관계에 대한 성찰을 중심으로 한다. 즉 절대자인 하느님(神)을 마주한 인간의 관계성을 지칭하는 종교(宗敎)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적인 접근과 더불어, 신학적 성찰을 돕는 현대 정신과학들의 도움, 예를 들면 종교철학, 종교학, 종교신학 등을 통해서 개진된 하느님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체험 영역을 주제로 삼는다. 따라서 기초신학에서 다루는 종교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그리스도교 밖에서의 하느님 체험의 가능성과 그러한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둘러싼 인간의 자기 체험적 영역들을 문제 삼고 이를 그리스도교적인 신관에로 연결시키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포함한다.
1) 종교철학(宗敎哲學 Religionsphilosophie)적 이해
전통적인 기초신학의 첫 번째 주제영역은 주로 종교철학에서 다루는 종교와 신에 대한 철학적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다. 신(神)에 대한 인간의 체험이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이성(理性)을 통해서 인식되어진다는 것이 중요한 출발점이자, 이 점은 신이 단순히 현전(現前)하기 이전에 인간의 인식에 합리적이고 명증적(明證的)이라는 사실을 해명하려는 철학적 노력이 여기에 포함된다.
고대 형이상학에서부터 근대의 실존주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존재의 근거와 원리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존재한다는 것, 혹은 참되다는 것(眞理)이 인간과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의 중심이 철학의 역사적 변천에 따라서 이동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고대 형이상학(形而上學)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지닌 고대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두 축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가시적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진리에 대한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집중되어, “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 속에서 신의 문제를 다룬다. 한마디로 “만물의 뿌리는 있음인가 없음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쟁 속에서 신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이루어진다.
중세 형이상학은 같은 맥락에서 신의 문제를 다루지만, 이미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꾀하던 중세의 스콜라 철학 안에서는 신의 존재의 자명성과 필연성이 이미 전제된 상태에서 때로 초자연적 진리 자체인 신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신앙의 우위를 강조하는 성 안셀모나 성 아오스딩의 철학적 형태나, 상대적으로 이성의 우위를 중심으로 신앙과의 조화를 꾀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이 큰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 시기는 “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의 영역을 이미 전제된 철학적 당위성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신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는 지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 혹은 생각이 참을 인식하는 조건인지, 아니면 초자연적 진리를 신앙하는 인간의 태도가 존재의 근원에로 다가설 수 있는 조건인지에 대한 철학적 해명으로 발전하였다.
이른바 정신역사의 근대적 전환기를 거친 근세의 데카르트에서부터 출발한 합리적 사유의 발전은 더 이상 하느님을 자명한 전제로서가 아닌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사유능력을 출발점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자명성을 이해하려는 주체로의 전환을 겪었다. 이른바 생각하는 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데카르트, 라이프니쯔), 혹은 신의 존재를 인격적인 신이 아닌 자연의 원리로서 이해하려는 태도(스피노자)와 더불어 신앙의 하느님을 다시 찾으려는 노력(파스칼)을 통해서 이 시기는 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관심을 지닌 이전 형이상학적 입장과는 달리 “참은 어떻게 인간에게 알려지는가?”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칸트가 선천적 종합판단 안에서 신을 더 이상 인간의 순수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다는 입장과 더불어 단지 실천적으로 요청될 뿐이라는 근대 인식론적 전환기를 거쳐서, 독일의 관념론 속에서 헤겔에 이르는 절대 정신으로서의 신에 대한 인식론적 관심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현대철학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인식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의 실존(實存)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신의 체험과 세계 내 현존에 대한 문제에로 중심이동을 시작했다. 신의 존재는 형이상학적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이 과연 신을 체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게 되었다. 니체나 쇼펜하우어가 신의 부재(不在)의 체험을 실존적으로 선언하거나, 인간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 신의 무기력성을 강조한 키에르케고르를 넘어, 현대의 해석학 속에서는 인간을 세계내 존재로서 파악하면서 참(진리)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실존적 상황, 죽음과 삶과 얽혀 있으면서, 왜 참이 참일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철학적 흐름 속에서는 참이 왜 인간에게 중요한지, 참(진리)를 참되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의 근원적 체험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2) 종교학(Religionswissenschaft)적 이해
종교학이 종교철학과는 달리 인간의 현실적 체험 범주에서 일어나는 종교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철학과는 다른 신에 대한 인간의 관심을 표현하는 학문적 영역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이다. 이미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종교에 대한 관심과 사후(死後)에 이루어질 사건들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절대자인 신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인류의 역사의 흐름을 지배해왔다.
근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종교학의 흐름을 이끌어온 다양한 학자들 중에서 종교를 철학적 영역과는 달리 인간의 주관적 체험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대표적인 학자들로 슐라이어마허와 루돌프 오토, 멀치아 엘리아데를 꼽을 수 있다.
근대 해석학의 원리를 창안한 슐라이어마허(Friedrich . Schleiermacher 1768-1834)는 종교를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무한한 종속의 느낌”이란 말로 표현하면서, 종교를 인간의 주관적 체험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려는 입장을 견지한 반면, 루돌프 오토 (Rudolf Otto 1869-1937)는 종교를 하나의 현상으로서 이해하면서, 그 안에서 드러나는 “성스러움(Das Heilige)"의 의미를 해석하고, 이른바 근대의 합리주의적 종교비판에 대항하여 비합리성의 종교적 의미와 성스러움 앞에서 인간이 지닌 두렵고 황홀한 체험에 대한 종교학적 가치를 새롭게 입증하였다. 또한 세계의 종교현상들 속에서 드러나는 성(聖)과 속(俗)에 대한 관심을 종교학적으로 연구한 멀치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1986)는 모든 종교현상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성현(Hieropanie)과 현현(Theopanie)의 의미의 해명을 통해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깊이를 새로운 각도에서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마디로 종교학에서는 기존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신에 대한 관심을 인간의 체험적 영역 안에서 새롭게 전망할 수 있는 비전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크게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
3) 종교 신학(Religionstheologie)적 이해
종교 신학이란 철학적 입장과는 달리 신앙을 전제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입장에서 종교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기초신학의 한 분야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교가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타종교들 속에서 드러나는 종교적 체험과 신에 대한 해명이 그리스도교 계시 사건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지 해명하고자 하며, 이들 종교의 신 체험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계시사건의 해명 가능성도 타진된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해석학적 철학의 도움을 받고 있는 종교 신학적인 입장들은 근래 다원주의(Pluralismus)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주제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타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교 계시 신학을 보편적으로 주장하려는 입장은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이론과 폴 틸리히의 문화신학에서 전개되며, 종교사적 시각에서는 캐나다의 종교사가인 웰프레트 캔트웰 스미스가 주장하는 세계 신학, 종교 다원주의적 입장에서는 존 힉과 라이문도 파니카의 종교신학과 대화신학 등이 주목받고 있다. 또한 아시아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해방적 의미를 되찾으려는 송천성이나 알로이시우 피어리스의 입장 역시 그리스도교 계시 사건을 타문화 안에서 발견하려는 계시신학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들 종교 신학적인 입장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과거의 스콜라 신학적 범주에 갇힌채 타종교에 대해 가졌던 배타적인 태도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세계의 종교적 체험과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교 계시사건을 적극적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여기서 그리스도교가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중개성의 원리가 다원주의 신학에서 부분적으로 문제시 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 신학을 타종교, 타문화 속으로 육화시키려는 학문적 노력이 인정되고 있다.
2. 기초신학적 주제 및 접근방법
기초신학에서 다루는 종교에 대한 관심은 우선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조건 하에서 그러한지 그리스도교 신학이 지향하는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에 관심이 집중된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관심들은 모두 기초신학을 전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보조 학문의 성격을 띤다. 종교철학과 종교학의 연구뿐만 아니라 종교 신학적 관점에서 연구된 학문적 결실들은 기초신학의 종교론적 논증의 중요한 소재들이며, 이와 더불어 오늘날 하느님 이해에 관련된 인간의 제반 체험들, 하느님의 부재와 무신론적 태도 역시 하느님에 대한 이해에 관련된 상황(context)으로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궁극적으로 기초신학의 종교론적 논증은 인간이 종교적인 존재로서 어떻게 하느님을 이해하는지, 하느님 체험의 가능성에 대한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도움을 받는다.
기초신학의 방법론적 원리에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종교론적 논증은 신학의 기초인 하느님에 대한 개념의 이해로부터 출발해서, 인간 역사와 체험 속에서 드러난 종교의 현상,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이성적 인식 가능성에 대한 학문적 연구들이 개진되고, 그 이후에 그리스도교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이해해왔는지 그리스도교의 기본 입장(Text)이 신학의 출발점으로 전제되어진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기본 입장에 대한 해명은 오늘날 새로운 하느님 체험의 관점들(Context)과의 만남을 통해서 기존의 하느님 체험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의문에 처하는 동시에 새로운 이해 지평에서의 하느님 인식과 체험의 가능성들이 해명되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하느님이 단순히 철학적 인식론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체험과 인간의 해석학적 자기이해의 지평 속에서 이해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기초신학이 다루는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교적인 자기이해의 범주를 뛰어 넘는 “문지방의 신학”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고 볼 수 있다.
3. “하느님”이란 말 - 신학의 전이해
칼 라너(K. Rahner)는 “하느님”(God/Gott)이란 용어가 지닌 풍요로움이 이미 서구 유럽에서는 상당부분 상실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서구의 사상적 풍토 속에서 ‘신’(神)을 표현하는 “God”란 단어가 서구인들에게 전달해주는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역사적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이 단어가 담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하느님이란 단어가 인간들에게 살아 숨 쉬는 역동적 개념으로 이해되기에는 너무 오랜 역사 속에 왜곡된 신관이 자리잡고 있다.
흔히 ‘하느님’으로 명명되는 신(神)의 속성은 실로 다양하다. 일상적인 용어에서부터 철학적인 용어에 이르기까지 신의 속성과 연관된 표현들의 다양성은 그 만큼 신을 규명하는 데 인간이 겪는 어려움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하느님이란 단어가 우리가 개념으로 언급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인식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 스스로의 언어역사와 정신 역사 속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는 단어이고, 그리스도교 문명 밖에서도 이미 인류 역사의 시작과 더불어 접할 수 있는 인간의 지향점으로 예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철학적 신학적 논의 이전에 인간에게 이미 소여(所與)된 개념으로서, 인간의 유한성과 내재성과 상반된 무한과 초월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이란 단어가 품고 있는 종교철학적, 종교 신학적 관점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의 신학적 사유의 전개를 돕고 있다.
첫째로, 인간은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인식으로 파악되는 분이시며,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가능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과 관련된 신앙과 과학, 종교와 철학의 갈등 구조가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둘째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인격적으로 자신과 만나 대화하며 통교할 수 있는 신앙의 하느님으로 만나고 있다. 인격적 하느님에 대한 성찰은 하느님을 기도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철학의 신과는 다른 신앙의 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준다.
셋째로, 인간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흔히 하느님을 남성적 가부장의 입장에서 규명해온 철학과 신학의 역사는 오늘날 하느님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모호한 입장에서 탈피하여 성(性)이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를 돕고자 하는 여성신학자들의 입장에 큰 공감을 얻고 있다.
넷째로, 하느님은 “단수이면서도 복수로 이야기”될 수 있다. 유대-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확립된 유일신 신앙은 고대 근동의 다신론(多神論)과의 투쟁의 역사 속에서 정착된 그리스도교의 신관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 진화론자들의 입장에서 유일신 신앙이 하등 종교의 다신신앙에서 진화된 가장 완전한 형태의 종교라는 입장이 오랫동안 그리스도교의 배타적인 유일신 신앙을 지탱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오늘날 이러한 유일신관이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신앙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학문적 토론은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근래 들어 다원주의자들에 의해 거론되는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유대-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사상과는 다른 형태의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삼위일체 신관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지지를 얻고 있다.
다섯째로, 인간은 하느님을 “특정한 언어와 문화권”에서 이야기 한다. 하느님이란 단어가 품고 있는 문화적 배경들은 특정한 문화와 언어적 특성 속에서 발전되어왔다. 가령 한국에서 하느님을 말할 때, 일반적으로 하늘의 주인으로서 만물의 보편적 주재자로서의 신을 이해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이란 개념이 “하늘(天)”에 대한 한국인의 문화적, 종교적 체험들과 무관하지 않게 이해된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리스도교의 신관 역시 특정 역사와 문화 속에서 이미 선이해로 주어진 종교적 체험 속에서 형성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하느님과 관련된 이런 다양한 학문적 논의 영역은 오랜 철학과 종교의 역사 속에서 신앙의 하느님을 철학의 하느님과 분리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철학이 형이상학적 관심 속에서 하느님(神)을 존재의 근거이자 원리(초월과 내재)로서 이해하거나, 신의 존재와 체험의 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무신론, 불가지론)로서 다루려는 입장이 있었던 반면, 신에 대한 종교 역사적인 관점은 신을 다신론(多神論)적 관점에서 이해하거나(무교, 샤머니즘), 범신론(汎神論)(힌두교), 각성종교 혹은 신비종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도 하고(불교), 유일신에 대한 철저한 신앙으로 이해하는 입장(유대교, 이슬람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의 신관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느님 (Text)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초신학의 종교론적 논증이 “하느님”이란 단어를 둘러싼 인간의 체험적 지평들을 이야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면, 이제 이러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체험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해되어온 성찰의 역사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즉 그리스도교가 종교철학이나 종교학에서 언급해온 하느님에 대한 이해와는 다른 독특한 신관의 형성을 유지해온 데에는 종교의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 자기 정체성을 지켜온 중요한 신학적 성찰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분히 그리스도교의 계시의 원천인 성서에서 드러난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기준이자 원리가 될 수 있겠다. 성서는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하느님을 이해해왔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텍스트(Text)이자, 초기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교회의 경전으로 수용하면서,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신관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했는 지를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원전(元典)이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교의 모체로서 유대인들의 야훼 하느님 체험
그리스도교의 신관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하느님께 가졌던 독특한 신관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이미 초기 교회부터 그리스도교를 역사의 시작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예표된 표징이라고 스스로 이해해온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유대인들의 창조주이자 해방자로서 체험한 야훼 하느님이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이해를 위한 전표이자 준비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서 완전한 의미의 하느님이 드러났음을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세상의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직선적 역사관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창조주로서 이해하는 동시에 인류 역사의 첫 번째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계약의 과정을 성조들의 역사 속에서 바라본다. 따라서 구약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성조들을 축복하고 이끌고 계시는 하느님(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으로서 나타나며, 모세의 출애굽 역사에서 정점을 이루듯이 당신 백성을 위한 해방자이자 그 해방을 성취하기 위한 계약의 하느님(시나이계약)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들은 하느님을 고대 근동의 다양한 토착신과의 관계 속에서 유일하면서도 전지전능한 최고의 신으로 이해하며, “야훼”라는 이름에서 나오듯이 “있는 자 그 자체”, 혹은 “있게 하는 자”로서의 하느님의 절대성과 배타적 유일성을 강조해왔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하느님 체험의 역사는 모세의 출애굽과 시나이 계약에서 완성되어 역사의 종말론적 성취를 향한 이스라엘의 독특한 종교적 체험 속에서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과거의 출애굽의 해방 사건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재현하여, 미래를 향한 하느님 약속의 성취를 대망하면서, 역사 속의 갇혀진 야훼 하느님과 인간의 긴장관계를 성서 속에서 체험적으로 언어화해왔다. 유대인들이 역사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업적에 대하여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동시에 이를 다양한 경신례를 통하여 기억하고 현재화하려던 것은 하느님의 자신들의 역사를 동반해 주심에 대한 신뢰에 찬 감사이자 동시에 그들의 불충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뢰해주신 하느님에 대한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에게 기억(momoria)과 기념(anamnesis)가 특별한 종교적 가치를 갖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을 크게 몇 가지의 특성 속에서 이해해 왔다. 하느님은 무엇보다 먼저 당신의 현존을 인간에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해 주시는 분이시며, 인간은 그 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해왔다.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성조들을 부르시고, 예언자들을 파견하실 뿐만 아니라, 직접 당신이 역사의 주관자로서 행동하시는 하느님으로 묘사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의 역동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조로서 구원을 이끄시는 말씀이며, 백성들과 신뢰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이 계약의 상호 신뢰에 따른 정의와 분노의 하느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유대인들의 바빌론 유배 이후에는 하느님을 유대 민족신의 범주에서 벗어나 창조주, 보편적인 인류의 주재자(主宰者)로 이해하려는 입장들이 강조되면서, 하느님은 초월과 내재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며, 때로는 신비(묵시문학)이자 역설적인 형태(고통받는 야훼의 종)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분으로 이해되었다.
2) 나자렛 예수의 하느님: 예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야훼 하느님 체험은 신약의 나자렛 예수의 하느님 체험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나자렛 예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며, 유대의 문화와 종교적 전통 속에서 성장하였다. 예수가 언급한 하느님은 결코 구약의 야훼 하느님을 이해해온 종교적 지평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구약의 전승 속에서 사용된 다양한 하느님에 대한 표현 역시 신약의 하느님 이해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가령 하느님을 왕, 목자, 아버지로서 표현하던 예수의 말씀 속에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하느님 체험의 전승들의 연결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나자렛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체험은 이전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면모도 포함하고 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의 경외함을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새롭게 이해하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Abba)”로서 새롭게 이해한다(루가 11, 2).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속에서 하느님은 하늘의 무한함과 초월적 특성,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의 도래, 아버지의 뜻의 성취를 강조하며, 인간과 하느님과의 근본적인 연관성 속에서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다. 예수는 결코 학문적 영역에서의 하느님을 언급하지 않고 철저하게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계신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을 언급한다. 이런 점에서 나자렛 예수의 하느님 체험은 철저하게 하느님과 인격적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기도의 형태 안에서 하느님 체험의 자리를 발견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초기 예수의 제자 공동체의 하느님 체험
예수의 하느님 체험이 면모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신약성서의 대부분은 초기 예수의 제자 공동체와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 신앙을 토대로 발전된 그리스도론의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제자 공동체의 신앙이 성서 속에서 어떻게 예수의 하느님 체험을 언어화 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미 초기 교회는 예수의 인격 안에서 현존하신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계시의 면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역사 안에 갇힌 한 실존 인물인 동시에 하느님의 신성을 온전히 갖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하느님과 함께 계신 분이었으며(요한 8, 58), 야훼 하느님 외에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표현인 “나는... 이다(ego eimi)"라는 표현을 예수의 말씀 속에서 자주 드러냈다.
또한 예수가 지녔던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인격적 일치성에 대한 신앙 역시 신약성서의 곳곳에 고백되고 있다. 즉 예수는 하느님과 유일무이한 친밀성을 가지신 존재로 표현되며, 역사의 어떤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하느님의 자기계시로서 이해된다.
초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느님 약속의 대망의 성취이며, 그 분이 스스로 약속의 말씀이자 역사를 변화시키는 창조적 말씀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세상의 창조 이전에 선재(先在)한 하느님 말씀(Logos)의 육화이며(요한 1장), 구약의 모세의 권위을 뛰어 넘는 새로운 권위로서 율법을 완성하는 분이시다. 예수의 말씀과 업적 속에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아버지로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랑의 행위로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치시는 분이시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은 예수를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동반하고 있으며, 예수의 인격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한 제자들의 신앙 속에서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는 신앙의 하느님을 전해주고 있다 하겠다.
5. 오늘날의 하느님에 대한 질문들 (Context)
앞에서 살펴본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신학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종교론적 논증의 핵심 텍스트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분명히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는 오늘날의 인간의 체험 지평과 무관하게 주장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결코 우주만물의 보편 원리로서 인가의 체험 범주 밖에 머무는 초월적 신으로서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은 인간이 체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만 하느님일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을 온전히 인간을 위해서 선물로서 양여하심을 고백하고 있다. 이른바 “하느님의 자기계시”로서 이해되는 오늘날의 하느님 체험은 철저하게 인간의 하느님 체험의 가능성의 지평 속에서 이해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1) 하느님에 대한 상실체험
하느님 존재가 자명하게 전제되었던 중세 전후의 신관은 스콜라 철학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보편적 인식의 원리로 이해하려던 태도에서 비롯된다. 17세기 서구의 계몽주의 운동과 동시에 시작된 인간의 이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은 기존의 자명하게 전제된 신의 존재와 현존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신앙의 우위를 주장한 근대의 합리주의적 지평은 신의 체험에 대한 궁극적인 상실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주장해온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인식 지평에서 자명하게 전제되지도 않고, 그 분의 초월성이 인간의 체험 범주에 명백하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인간의 자신에 대한 의미체험의 가치를 상실하는 동시에 인간의 생의 목표로서의 하느님 인식과 체험 역시 상실해가고 있다. 한마디로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질문은 인간의 의미와 유래, 삶과 역사의 의미와 목적과 관련하여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할 사항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의 부재(부재)의 체험은 인간의 자기완성에 대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2) 하느님의 부재(不在)체험
이러한 하느님의 부재체험은 이미 20세기 현대의 정신문화의 변혁 속에서 무신론(無神論)과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통해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분석적 불가지론을 주창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는 유명한 정식을 통해서 인간의 신적 영역에 대한 이성적 판단의 중지를 요청했고, 초월적 신비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강조한 불교적 색채의 신비운동은 인간의 신에 대한 인식이 결국에는 인격적 관계로서가 아닌 미지(未知)의 신비(神秘)로 남는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무신론에 대한 20세기의 종교비판은 유한한 인간 실재를 초월하는 존재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적 무신론의 입장을 지지해왔다. 이미 신의 죽음을 선포한 철학적, 실존주의적 입장(니체, 쇼펜하우어)를 비롯하여, 종교를 인간의 자기소외로 규명하거나(마르크스), 인간의 심리적 자기투사(포이에르바하)로서 신학을 인간학으로 폄하하려던 움직임은 20세기 무신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종교를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심리학적 인간의 산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종교가 지닌 초월적 가치들을 포기하고, 더불어 종교적 확신들의 신빙성과 진리의 인식 가능성조차도 포기하는 방법론적 무신론의 입장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하느님 체험의 부재의 문화는 다양한 인간학적 관심과 더불어 확장되어 갔다.
6. 하느님에로의 길: 하느님 이해를 향한 접근방법들의 해명
오늘날의 하느님 상실과 부재의 체험은 하느님의 죽음이나 종교의 무가치성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무신론의 적극적인 표현이나 종교의 무가치성의 선포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인간의 체험의 중요성과 종교의 종교다움에 대한 역설적인 요청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하느님의 부재는 신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입장에서라기보다는 오늘날 인간에게 하느님이 궁극적으로 체험되지 않는다는 실존적인 고백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깊이 인식하면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유한성을 뛰어 넘는 어떤 초월적 인식에로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에 체념하고 초월에 대한 의지를 지니지 않는다면 단 한 순간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유한한 체험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초월과 영원에 대한 갈망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의 철학과 종교역사는 이러한 인간의 영원에 대한 희망을 언어화하고 체험화한 역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성찰 역시 이러한 인류의 철학적, 종교적 성찰들과 무관하지 않게 발전해왔다. 특별히 오늘날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지평들은 1) 인간의 사유를 중심으로 하느님을 이해하려는 입장과 2) 하느님을 인간의 인식지평의 원리이자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증명하려는 태도를 뛰어 넘어 오늘날에는 3)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인간학적 가능성에로의 전개로 나아가고 있다.
1) 하느님에 대해 성찰(nach-denken)하다.
가)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 (Anselm von Canterbury 1033-1109)
중세의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성 안셀모는 신론적 중심주의의 입장에서 하느님 체험의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모색한 바 있다.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를 주장하는 입장인 그의 “본체론적 증명”은 플라톤과 성 아오스딩의 계보를 잇는 “초월에로의 인간의 향수”를 기억하고 이를 내면화 시키는 입장에서 전개하고 있다.
안셀모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는 정식을 토대로 신앙 없이는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에 서서 이상학적 신 존재 증명에 뛰어 들어선다. 그는 말하기를: “하느님은 인간이 그 분을 넘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더 크고 위대한 것을 생각해 낼 수 없는 분” 이시며 “생각하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 넘어서 더 이상 생각되어지지 않는 분(Aliquid quo maius cogitari nequit)”임을 선언한다. 그의 관점은 근세의 합리적 인식론에서 출발한 데카르트, 칸트, 라이브니츠, 포이에르바하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인간의 관념으로 신에 대한 이해와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에 대한 모상(Abbild)으로서 지성적으로 원형(Urbild)으로서의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입장(플라톤)과 이를 인가의 내면적인 자기 성찰을 통해서 ‘기억(anamnesis)' 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아오스딩)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안셀모의 이러한 입장은 인간의 사유를 뛰어넘는 신적 존재에 대한 오늘날의 새로운 접근방법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기점을 제공한다고 보고 있다. 즉 오늘날 하느님을 신비로서 이해하려는 움직임과 더불어 신비로서의 신적 존재에 대한 충분한 성찰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신비가 인간에게 미지의 미스테리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유한성을 뛰어 넘는 새로운 하느님 체험의 초월적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von Aquin 1224-1274)
중세의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를 구가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안셀모나 아오스딩의 입장과는 달리 신앙의 지평에서 하느님을 자연이성적 사유의 지평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꾀하던 중세의 입장에서 인간의 이성을 우위에 두고 신앙과의 조화를 추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적 관점을 신학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하느님 존재의 자명성을 성찰하였다.
그의 ‘다섯 개의 길 (quinque viae)“로 잘 알려진 신(神)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은 원인과 결과와의 관련성을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통찰하여 하느님에 대해 성찰한 결실이었다. 이른바 자연과학에서 발견되는 운동의 원리를 통해서 더 이상 그 제1원인을 추적해 낼 수 없는 분으로서 하느님을 상정하고, 인간의 세계 내 이해에서 출발하여 관찰 할 수 있는 사물들의 원리의 근거로서 하느님을 이해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즉 세상에 운동이라는 현상을 직시하면서 운동에 따른 결과가 존재한다는 점을 통해 운동의 존재적 차이를 인식하여 운동원인인 하느님과 운동으로 지향하는 인간과의 상관성을 원리로 신존재 증명을 시도했다.
토마스의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성찰은 운동과 변화를 체험하는 인간의 세계 내 자기이해를 토대로 관찰되어지는 대상을 뛰어 넘는 그 무엇인가에로 인간이 인도되고 있음을 통찰한 데 바탕을 두고 있다. 원인에 대한 무한대한 추적의 불가능성은첫 운동 원인의 존재에 대한 거부의 불가능성으로 귀결되고, 결국에는 최종 목적인 하느님에 대한 존재 증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토마스를 평가하는 오늘날의 신학은 절대자와 유한자간의 스콜라 신학적인 이해가 바탕으로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느님 지향의 초월자임을 강조한 칼 라너의 초월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지만, 신의 존재를 자명하게 전제한 중세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오늘날의 신체험의 지평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2) 하느님을 증명하다: 근대 인식론의 원리로서 하느님 인식
가) 데카르트(René Descartes): 근대 합리론적 신 존재 증명
데카르트(René Descartes)로 대표되는 근대 합리론의 출발점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확신과 합리성에 대한 확실성이 자리 잡고 있다. 명명백백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던 중세의 신앙의 원리와는 달리 인간의 주체적 자각 속에서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태도는 이른바 방법론적 회의의 전환점을 가져왔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 한다”(Cogito, ergo sum)이란 정식을 통해서 근대적 사유의 패러다임의 전이를 알렸고, 신중심적인 중세의 스콜라적 사유를 인본주의적 사유의 체제로 옮겨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관찰대상에 대한 감각적인 지각을 거부하고 권위와 전통적 논증을 통한 모든 신 존재 증명을 거부하면서도 하느님 존재의 자명성을 인간의 이성적 합리성 속에서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이른바 수학적 자명성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인식의 확실성임을 주장했던 그의 사상은 인간의 거부할 수 없는 주체적 사유의 경험을 모든 진리 인식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따르면 하느님 하느님 존재 증명에 대한 이전의 가설적 증명은 완전히 거부되며, 인간 스스로 자명성을 얻지 못하고, 초월자, 절대자, 전지 전능한 신에 대한 신뢰의 태도로부터 신존재 증명을 이끌어 내려는 태도를 비판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신 존재 증명이란 인간의 사유의 가능성의 원리이자 기초로서 신의 존재에 대한 요청이지, 결코 인격적 관계 속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통교적 차원을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이 점은 근대의 이신론(Deismus)을 낳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라이프니쯔나 스피노자에게 영향을 미쳐 신을 더 이상 인격적 신앙의 신이 아닌 철학자의 신으로 이해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 파스칼: 역사 속의 하느님
이신론적 신 존재 증명에 대한 근대 합리론의 주장에 맞서서 인격적 하느님 체험의 가능성을 신앙의 입장에서 고수한 사람은 파스칼이다. 그는 철학자들이 주장한 하느님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과 무관하며, 따라서 철학자의 신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없는 신 존재 증명의 부당하며,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야말로 참된 신 존재에 대한 증명을 드러내는 표지임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하느님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으로 이해하고, 철학자나 사색가의 하느님의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즉 복음을 통해 증언된 하느님의 체험을 철학적 사색 속에서 강조하였다.
파스칼의 이러한 입장은 개인적, 역사적 하느님 체험의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신체험을 향한 감수성(esprit de finesse)을 통해 인간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열린 체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근대 철학의 이성중심의 사유의 맹점을 지적하는 새로운 전환점을 형성해왔다. 인간의 이성의 깊이를 깨닫기 위한 감수성의 체험이야 말로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적 ‘마음’의 체험을 일으켰고, 이 마음에서 체험되는 하느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하겠다.
파스칼의 신앙 체험은 하느님께 신뢰하는 인간의 실존적 결단행위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개인적 신체험을 어떻게 타인에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야기 시켰다. 하느님은 비언어적인 체험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언어의 형태로 전달되어질 때 그 체험이 전달될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 점은 현대 신학의 동향 속에서 동양의 새로운 신 증명의 신학적 관심을 이끌었고, 마음에서 체험되는 하느님을 신학적으로 성찰한 대만의 아시아 신학자 송천성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3) 하느님을 체험하다: 해석학적 입장
1) 초월신학적 입장 – 인간의 정신의 역동성 속에서의 하느님 체험
이미 칼 라너를 통해서 소개된 인간학적-초월론적 신학의 입장은 오늘날 인간의 하느님 존재에 대한 자명성이 ‘체험’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자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른바 인간학적 전환(Anthropozentrik)을 통해서 신학 안에서 인간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라너의 신학적 입장은 중세의 우주론적 중심주의의 맹점과 근세의 합리주의적 인간 이성에 대한 맹종을 과감하게 떨치고 인간의 자기이해를 통해서 하느님 체험의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해명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이른바 하느님과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하던 사유체계를 벗어나 하느님을 인간의 인격적 대상으로 이해한 현대 신학의 입장은 모든 신학적 사유의 출발점을 인간의 자기이해에 두고 있다. 즉 인간의 본질, 원천, 목적에 이르기까지 인간 실존에 대한 의미에의 질문은 20세기 정신과학의 꽃이라고 불리는 “해석학”의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서 하느님을 인간의 자기완성의 목표로서 이해하려는 학문적 태도를 가능하게 했다.
해석학적 입장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과의 만남의 역사적 도정 속에서 자신을 현존재(Dasein)으로 이해하며(하이데거), 역사의 다양성과 변화의 갈등구조 속에서 자기 이해의 개방성과 상대성을 이해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의 자기 정체성과 타인과의 차별성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이해 가능성의 지평들을 서로 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며(가다머), 이 점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자기완성에 이르기 위한 완전한 인간 지평의 개현(開顯)을 희망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지평을 열어주었다.
라너는 인간의 해석학적 자기이해의 전이해로서 인간의 하느님 말씀의 수용가능성과 세계 안에서의 정신으로서의 인간이 하느님 체험의 가능성을 자신의 초월성 안에서 바라볼 수 있음을 초월신학적 입장으로 전개하였고, 그 결과 하느님 체험의 가능성을 그리스도교 계시 사건 안에서 해명하려는 그리스도교적 신관의 입장에 충실하고자 했다.
2) 역사신학적 입장: 역사 안에서 하느님 체험의 이야기
라너의 이러한 초월론적 경험의 영역 속에서의 하느님 이해의 과정과는 달리 역사라는 구체적인 인간 이해의 지평을 하느님 체험과 만남의 장으로 이해한 역사신학적 입장도 오늘날 새로운 하느님 체험의 지평을 열어주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독일의 신학자 판넨베르그(W. Pannenberg)는 하느님의 계시를 인간의 역사로서 이해하면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직시하면서, 인간이 역사적 실존으로서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의 생의 체험들이 지시하는 인간의 본질적 목적에로 향하는 과정 속에서 하느님을 역사의 주관자로서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역사 신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자 이 역사를 주체적으로 경험하는 주체로서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며, 이 역사의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삶의 체험들 속에서 만나게 되는 인간의 자기완성의 표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보며,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궁극적 체험에 다다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역사가 지닌 궁극적 희망은 역사의 불합리성고 모순성과 더불어 인간의 고통과 현실적 자기이해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이 무의미 하지 않다는 종말론적 희망의 입장을 하느님 이해와 관련해서 새롭게 개진하고 있다는 점이 오늘날 특별히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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