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 이론의 해석 문제
유대칠
(토마스철학학교)
진리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오캄에 이르기까지 진리는 상호일치설로 설명되었다. 즉 사고와 실재의 상호일치가 진리란 것이다. 외부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이 직접적으로 인식에 주어짐으로 사고 가운데 개념과 일치하는 것, 그것에 진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진리관에 근거한 인식론에서 외부 대상의 존재 여부는 회의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호일치설에 근거한 인식론은 데카르트의 그것과 확연한 차이를 가진다. 기본적으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에서 진리의 인식으로 나아간다. 데카르트에게 외부 실재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회의의 대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데카르트에겐 근본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근대 이후 데카르트의 철학적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철학적 영향력은 곧 그의 철학이 근거하는 인식론 혹은 진리관의 영향력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영향력은 근대 철학의 거장인 칸트와 헤겔 역시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우린 상호일치설과 데카르트의 논의를 가로지르는 그 논쟁의 핵심에 진리관이 있으며, 이 진리관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이 둘의 철학을 결코 마주하기 힘든 지점에 다다르게 하였음을 본 논의를 통하여 확인하게 될 것이다.
1. 상호일치설과 실재론.
실재론에서 존재는 우리에게 기대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즉 우리의 사유와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존재가 사유 가운데 개념과 상호일치할 때 진리가 가능하다. 여기에서 상호일치설은 근본적으로 실재론을 전재한다. 만일 존재가 회의의 대상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상호일치설은 불가능하다.
사과를 생각 할 때, 이 개념이 하나의 진리, 즉 참된 개념이라면 이것은 외부 존재하는 사과와 상호일치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사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사과가 눈에 보였지만, 사과가 없다고 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즉각적으로 사고의 개념에 반영되며, 만일 반영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 대상의 존재는 확인되지만, 그 대상의 본질 혹은 무엇임이 파악되지 않는 경우이다. 하지만 사과의 무엇임을 알면서 눈에 보이는 사과에 대한 개념을 사고 속에 형성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에 토마스 아퀴나스와 오캄은 감각적 인식은 그 자체로 타당하며 의식의 대상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맛이 느껴지는 등의 모든 감각적 인식은 그 자체로 그 대상의 존재를 수반하며, 그 인식은 거짓일 수 없다. 감각적 인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직관적 인식(intuitiva notitia)이다.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와 오캄은 외부 대상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cogito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직관적 인식의 대상 혹은 감각적 인식의 대상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인식론에 의하면 “감각에 앞서 있지 않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지성 가운데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인식은 원래 증명될 수 없는 제일의 원리들의 인식에서 성립된다. 그리고 이 원리들 인식은 감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다.”1) 이 글귀에서 외부 대상의 인식은 인식하는 제일 원리의 인식이며, 이러한 제일 원리는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자체로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어떤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 자체로 타당한 것이다. 다음의 글귀를 읽어보자. “그들은 근거가 없는 것들의 어떤 근거를 찾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증명의 원리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2) 『형이상학 주해』에서 토마스는 외부 대상의 근거를 논의하는 이들은 부당한데, 그 이유는 그것은 제일 원리로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증명 혹은 인식이 지식하는 원리 혹은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영혼 외부 개별자의 존재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와 같이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감각의 고유한 대상이다. 감각으로 우리는 외부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3)
오캄의 경우도 신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즉 기적과 같은 신학적 논의가 일어나지 않은 이상, 자연 상태에서 감각적 인식의 대상은 그 자체로 외부 대상의 존재를 수반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토마스 아퀴나스와 질송은 모두가 직접적 실재론이란 동일한 인식론적 입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4) 물론 그 세부적 방식에선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중세철학자들은 그 논의 전개의 방식이 가지는 차이에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많은 경우는 실재론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와 다르다. 그에게 외부 존재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그 자체로 타당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인식론적으로 이에 대한 감각도 타당한 것이 아니다.
2. 데카르트와 cogito 그리고 테카르트적 토마스주의
간단히 정리하자면, 토마스와 오캄에 있어 인식의 제일 원리는 개별대상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타당하다. 데카라트는 이러한 외부 대상을 회의하며, 새로운 제일 원리를 찾으며, cogito를 제시한다.5)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느끼지만, 이 모든 것이 어떤 악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 감각적 인식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오류일 수 있단 것이다.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민한 이 문제, 즉 회의주의의 극복에 대한 논의는 근대 데카르트에게서 다시 시도된다. 그것은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의미의 철학과 그 철학의 기초를 다지기 위함이다.
간단하게 여기에서 중세 후기와 근대 초기 왜 회의주의를 극복하고자 하였는지를 살피고 감이 본 논의의 역사적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인다.
1277년의 단죄 이후 신은 이성적 제한을 넘어선 절대적 권능을 가진 존재로 다루어졌다. 즉 신에 대한 논의는 합리적으로 서술되어질지라도 그것이 신의 본질은 아니며, 단지 신에 대한 인간의 최대한 합리적 이해의 한 부분 정도일 뿐이다. 예를 들어, 알베르투스는 성체성사와 무흠잉태 그리고 부활 등을 기적이며, 이는 이성을 넘어선 초자연적 현상으로 단정한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인간이 성체성사에서 실체의 변화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이것이 이성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은 아닌 초자연적 현상이라 규정한다. 즉 신은 절대적 권능으로 모든 자연적 현상을 자연적 법칙을 넘어 지배할 수 있는 절대적 권능을 가진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오캄에 이르러 자연상태에선 그렇지 않지만, 신에 의한 초자연적 현상, 즉 기적의 상황에선 존재하지 않은 것이라고 신은 그 지성에 직접적으로 개념을 야기할 수 있다고 하는 논의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중세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연 현상, 즉 인상적 상황에선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 있어야 인식이 가능하며, 인식이란 사실 자체가 외부 대상의 존재를 수반한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 신의 절대적 권능이 기능하게 된다면, 이러한 자연적 현상을 다르게 될 수 있다. 신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이 데카르트는 인간 이성의 완전한 세계 이해의 방해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장 지금의 현상이 신의 기적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단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지각하는 바로 이것이 신의 기적의 반영이라면, 우린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게 되며, 이것이 신의 지걱에 의한 것인지 알길 도 없다. 여기에서 회의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논적으로 삼은 그 악령이란 이러한 철학사적 논의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조차도 간섭할 수 없는, 즉 신의 절대적 권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어떤 제일의 원리를 요구하게 된다. 바로 cogito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감각으로 수용하는 모든 것은 의심의 대상이다. 이것의 실재성은 그 자체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 cogito에서 추론 가능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즉 타자가 당연히 나의 사유와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중세의 전통과 달리 타자의 존재는 주관의 검증에 의하여 존재가 허락되는 그러한 것이 되어 버린다. 합리론자가 아닌 경험론자 버클리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잘 이야기해준다. 즉 지각이 곧 존재란 것이다. 주관의 지각이 존재를 수반하며, 주관과 무관한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 경험론과 중세 경험론, 즉 토마스 아퀴나스와 오캄 등은 그 논지가 서로 다르다.
하지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등장한 초기 토미스트들은 이러한 철학사적 흐름에 대한 무지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에 근거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식론을 해석하곤 하였다. 기본적으로 데카르트는 감각이 지성 가운데 모든 인식의 시발점이란 토마스와 달리 “감각은 사고에 대해 어떠한 신체작용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6) 그렇게 다른 길을 감에도 많은 이들은 데카르트를 기반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해석하였으며, 이러한 그릇된 해석을 넘어서는 과정 역시 이러한 논의에서 시도되었다.7)
간단한 보고서인 본 지면을 통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론 자체의 모든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실로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필자는 바로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과 관련된 논의를 통하여 진리론을 분명히 함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론에 대한 정당한 해석을 부여하고자 한다.
3. 토마스 아퀴나스 진리의 두 가지 해법
노엘의 글귀를 그대로 읽어보자.
“그것은 철학을 어떤 논란의 여기 없는 시발점 가운데 확고하게 정초하게 하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에 의하여 주어진 요구를 만족시키는 문제이다. 이 시발점은 흔히 데카르트의 cogito란 이름으로 불린다.”8)
이 글에 말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철학은 그 이후 철학하는 이에게 하나의 의무란 것이다. 확고한 지식, 즉 인식 혹은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말이다. 스콜라학자들도 근본적으로 데카르트주의가 된 시기가 바로 데카르트 이후의 시기이다. 이 당시 많은 토마스주의자들은 분명 데카르트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는 20세기 초 스콜라학자 라인슈타들러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이 우리 가운데 직접 작용한다는 것에 관하여 어떠한 의식도 가질 수 없다.”9)
이 글귀는 앞서 논의한 중세 논의에 대한 데카르트적 반론을 스콜라학자에 의하여 진술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 준다. 즉 당시 스콜라학자들은 많은 면에서 데카르트를 철학적 문제의 해법으로 삼은 것이다. 신의 의식 가운데 직접 작용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린 의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성 가운데 가지는 것, 즉 감각적으로 수용되어 지성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회의의 대상이 되며, 이에 대한 해법은 데카라트의 cogito로 귀결되었다. 나는 생각한다고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 제일 원리에서 철학을 시작하려 한 것이다. 만일 이러한 것이 근거라면, 진리상호일치설은 무너진다. 외부 대상은 그 자체로 타당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감각인식도 그 자체로 타당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데카르트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나기 힘든 서로 다른 진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심지어 토마스 아퀴나스는 cogito를 직접적으로 부정한다. 다음의 글귀를 보자.
“우리 정신은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10)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고 주체에 관한 직접적 직관을 거부한다. 하지만 데카르트를 통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는 피카르드와 같은 이는 이와 다르다. cogito에서 외부 대상의 존재를 확인한다. 다음 글귀를 보자.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직관하는 만큼 우리는 (외부) 존재에 대하여 직관할 수 있다.”11)
즉 , cogito에 관련된 한에서 우린 존재에 대하여 인식할 수 있다는 논의이다. 이러한 논의는 다음의 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로 방향을 돌려 아무런 중간 매체도 없이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포착하고 자기 자신의 활동들의 가치와 의미를 규정하고자 한다. 이것이 인식론 전체이다.”12)
이 당시 토마스주의자들은 cogito에서 인식론 전체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자기 인식은 어떤 중간 매체가 없이 자기 존재에 관하여 인식하는 사고 주체의 인식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인식에서 외부 존재는 그 타당성을 부여받는다.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데카르트는 외부 세계와 대상의 존재를 그 자체로 타당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외부 대상은 증명이 필요 없는 그 자체로 타당한 인식의 제일 원리이다. 그렇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겐 cogito와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질송은 데카르트를 연구하고, 이에 전문가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깊은 연구는 곧 데카르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확한 구분을 낳는다.
질송에 의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체계는 데카르트와 혼돈될 수 없다. 그는 직접적으로 명확하고 타당한 실재를 인식할 수 있으며, 외부 대상은 사고의 결과로 그 타당성을 가지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이를 질송은 직접적 실재론이라 부르며, 이를 그의 시대 다른 해석가와 자신을 구분한다.13) 그리고 이러한 해석이 토마스의 대표적 논의인 존재에 관한 논의와 더욱 더 적절하게 조화된다고 본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실재론과 상호일치설에 근거한 진리관을 가지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존재는 그 자체로 완전하며, 다른 것의 도움이나 다른 어떤 것에 의하여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가장 완전한 것이다(esse est inter omnia perfectissimum). 이것은 나의 사고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존재론적 이유이기도 하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외부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의 정당성을 가지지 않으며 회의의 대상이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르다. 하지만 데카르트적 토마스주의(cartesio-thomism)는 토마스의 논의를 데카르트의 논의로 정당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것이 정당한 것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cogito가 필요한 것인가?
4. 토마스의 실재론적 진리관
근대 경험론에 의하면 주관에 모든 존재들이 의존한다. 합리론의 대부인 데카르트는 주관에 모든 철학적의 근본 원리를 정초한다. 헤겔과 칸트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논의에서 외부 대상, 즉 객체 혹은 타자는 주관에 그 존재를 의존한다. 이는 버클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상의 존재는 주관에 의존한다.
하지만 중세 철학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이러한 논의는 수용되지 않았다. 중세 철학자들은 대체로 외부 대상의 존재를 그 자체로 타당한 것으로 보았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외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에 참여함으로 존재한다. 이는 사고 주체와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이렇게 영혼 외부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타당하다. 진리는 이렇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상이 사고 가운데 개념과 상호일치 할 때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론적 진리가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에 한정되어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식의 대상이 가지는 존재가 사고 주체에 의존하여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실재론이란 사고행위로부터 독립된 실재를 인식함을 가리킨다. 이것이 직접적 실재론이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실재에 대하여 인식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다르다. 그는 외부 세계는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관의 사고 행위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토마스 아퀴나스와 데카르트는 구분된다.
1) Thomas Aquinas, De veritate q.10, a.6.
2) Thomas Aquinas, In metaphysica 4, lect.15.
3) Thomas Aquinas, In de anima 2, lect.5. "감각은 구체적 사물을 포악하며, 지성은 보편자를 인식한다."
4) 물론 질송 이후 많은 이들이 오캄에 관한 잘못된 해석을 통하여 그 실재론 복원에 실패하였지만, 뵈너 등의 연구가 이후 많은 논의가 이젠 오캄을 실재론의 범주에 포함하는 것을 하나의 상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5) Descartes, Pricipia philosophiae, pars 1, n.10.
6) H.Gouthier, La Vocation de Malebranche (Paris: Vrin, 1928), 80-107.
7) 이러한 흐름에 반대하는 질송 역시 데카르트 연구에서 이를 다루고 있다.
8) L.Noel, "La Methode de realisme" In Revue neoscholastique de philosophie (1931), 437. Acta secundi congressus thomistici internationalis (Torino: Marieti, 1937),
9) Reinstadler, Elementa philosophiae scholasticae (Freiburg, 1904), 174.
10) Thomas Aquinas, De veritate q.10, a.8, resp.
11) C.Picard, "Le probleme critique fundamental" In Archives de Philosophie (Paris: G.Beauchesne, 1923), 59.
12) L.Noel, Note d'epistemologie thomiste (Louvain, 1925), 188.
13) 이와 관련된 질송의 논의는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국내 번역서는 다음의 것이있다. 질송, 『토미스트 실재론과 인식 비판』 이재룡 옮김 (서울:서광사. 1994).
<부끄러운 과거의 레포트입니다... 시간이란... 후훗... 과거의 모습이 한 편 부끄럽지만... 그때의 기억이 즐겁게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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