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스크랩] 현대철학

@로마의휴일 2007. 10. 20. 10:28
 

The Background of the Philosophy

  s  ‧  y  ‧  n  ‧  o  ‧  p  ‧  s  ‧  i  ‧  s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624-54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과학자.

생애

■  의사인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할아버지인 아민타스 3세의 시의(侍醫)였다. 당시 의술은 가업을 잇는 전통적 직업이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의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어릴 때부터 의술과 마케도니아의 궁정생활을 접한 탓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의 영향이 강한 철학사상을 내놓았고, 왕자들과 궁정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여러 번 표현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  기원전 384년 그리스 북부 지방의 작은 도시 스타게이라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원전 367년 18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옮겨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플라톤의 영향으로 자연은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물의 본질이 구체적인 사물과는 별도로 존재한다는 스승의 이데아론을 거부하면서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 즉 책상의 본질과 책상이라는 구체적 물질은 분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  후세에 남긴 것, 우주론과 운동론 그리고 물질관이다. 그는 모든 물질은 물, 불, 흙, 공기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비율에 따라 물질의 성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운동은 이들 원소가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성질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우주도 이들 네 원소와 에테르라는 제 5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도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6-7세기에 '과학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00년 동안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본개념

■  논리학 : 학문적인 인식은 사물이 지닌 필연적인 관련을 그 원인에 따라 인식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서 삼단논법의 형식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삼단논법이 이러한 논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제1전제를 말한 공이론(公理論)도 뛰어났다. 그의 논리학서는 《오르가논 Organon》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하여졌다.

■  자연학 : 운동 ·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연구가 자연학이라고 불린다. 그는 여기서 네종류의 원인[四因論]을 들었다. ① 질료인(質料因:사물이 ‘그것’에서 되어 있는 소재), ② 형상인(形相因:사물이 ‘그것’으로 형상되는 것으로,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③ 동력인(動力因:‘그것’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이 되는 힘), ④ 목적인(目的因 :그 사물 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②, ③, ④는 자연물에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으로 자연물은 이루어지고,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생성 발전의 과정으로서 자연의 존재는 파악된다. 질료는 거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디나미스[可能態 dynamis]로, 최종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최종목적(텔로스)인 엔텔레케이아[完成態], 에네르게이아[現實態]야말로 자연 존재의 우월하는 원인이라고 한다(목적론적 자연관).

■  형이상학 : 존재자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으뜸되는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을 소피아(지혜) 또는 제1철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시에 보다 고귀한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신학이기도 하다. 신(神)은 으뜸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기도 하다. 신은 질료에서 떠나, 영원 불변한 관조(觀照) 안에 머무는 자기사유자(自己思惟者)로서 최고의 현실태이고, 그것 자신은 부동이면서 ‘사랑을 받는 것’으로서 일체의 것을 움직이는 ‘부동의 제1동자(動者)’이다. 그것은 자연계를 초월하는 자연계의 근거로서의 종극목적이다. 이 학문은 뒤에 형이상학(메타피직스)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은 이 학문이 뒤의 전집 편집에서 주어진 위치에서 유래된 것이다.

■  윤리학 : 행위의 종극 목표는, 신의 자기사유의 활동을 모방하는 이성적 관조에 놓여 있으나, 이것은 약간의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중용(中庸)으로서의 덕이 행위의 목적이다.

■  정치학 : 인간은 국가적 동물이다. 공공의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선(善)은 실현된다. 그런까닭에, 윤리학은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가 교대로 다스리는 자가 되는 곳에서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나라 제도가 있다고 한 정체론(政體論)은 온건한 민주주의의 뛰어난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고 할 수 있다.

■  시학 : 창작의 본질은 모방(模倣)에 있다. 비극은 숭고한 행위의 모방이며, 숭고한 인물이 불행에 빠져가는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관객 가운데서 일어나는 연민과 공포의 정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정서를 정화(淨化)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오캄   Occam, William. 1280-1349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

생애

■  잉글랜드 오컴 출생. 젊어서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되고, 옥스퍼드에서 배운 뒤, 그 곳과 파리에서 강의를 하였으나, 이단이라는 혐의를 받고, 몇 가지 명제(命題)는 유죄 선고를 받아, 교황 요하네스 22세와 알력이 있었다. 그는 논리학과 인식론(認識論)에서 뛰어나며, 후세에 끼친 영향도 크다.

오캄 철학의 기본개념

■  유명론 : 유명론자와 실재론자라는 표현은 일찍이 12세기에 사용되었다. 13세기에 알베르트 마그누스는 지성에만 공통성을 두었던 사람들에게 유명론자라고 말했다. 오캄 이후에 이런 고대의 명칭은 그의 제자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유명론자 혹은 명사론자는 현대인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하는 데서 새로운 길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4세기 파리에서는 몇몇 유명론적 입론을 금지했으나 이것이 오컴주의 전파를 막지는 못하였다.

■  아베로에스주의 : 아베로에스주의는 13세기에는 공격받고 정죄 당했지만 중세 말 14세기에 들어서서는 계속 지지를 받고 지지자들이 주위에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서나 그렇듯이 이러한 지지자들 또한 여러 부류였다. 리처드 피츠랄프는 아베로에스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결코 확신하지 않았다. 능동 지성의 단일성이라는 유명한 입론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오지 않고 다른 어떤 철학자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다. 만일 이것이 아베로에스의 창안이라면 자연 이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는 능동 지성의 단일성에 맞서게 되고 그가 다른 부분에서 말한 교리의 능동 지성의 단일성에도 맞섰다. 사실 아베로에스는 개별 능동 지성이 가능 지성의 형상이라고 분명히 이야기 했으므로 능동 지성은 하나님임에 틀림 없다. 피츠랄프에게 능동 지성은 제일 형상으로 곧 사람의 신체적 기능 속에서 예지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의 사유를 준비시키는 방식으로 사람의 사유와 결합된 하나님으로 보인다. 겐트의 헨리는 신적 조명을 해석할 때 그것을 사람의 사유에 실제적 지식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피츠랄프는 신적 조명은 오직 습관적 지식을 부여할 뿐이라고 본다. 라틴 아베로에스 주의자로서 갈멜파의 존이 있는데 그는 아베로에스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에도 동의하지 않고서 그것들을 반박 하는 데만 골몰한다. 그가 보기에 능동 지성은 신앙에 맞서고 철학에도 맞서는 오류이다. 14세기 초반의 영국의 토마스 윌턴의 몇몇 텍스트는 그가 아베로에스의 몇 결론들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자연 이성만으로는 하나님이 자신 외에는 무엇이든 안다는 것을 혹은 합리적 혼은 인간 신체와 더불어 증식된다는 것을 혹은 따라서 합리적 혼은 신체의 형상이라는 것을 아베로에스에 맞서서 논증할 수 없다. 토마스 윌턴이 과연 어느 정도로 이 입론에 관여했는지는 더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브루노             Bruno, Giordano. 1548-1600  이탈리아의 철학자·천문학자·수학자·신비주의자.

생애

■  직업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필리포였고, 나중에는 태어난 곳의 지명을 따서 '일 놀라노'라고 불렸다.

■  1562년 나폴리로 가서 그리스·라틴의 고전문학, 논리학, 변증론(논증법)을 연구했다.

아베로에스주의(이슬람 철학자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에 영향을 받은 여러 서구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의 사상)에 경도된 것으로 알려진 G.V.데 콜레의 강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기억장치와 기억술에 관한 저작의 영향도 받았다. 1565년 나폴리에 있는 산도메니코마지오레의 도미니쿠스 수도원에 들어갔고 조르다노라는 이름을 받았다. 비정통적 태도 때문에 이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지만, 1572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같은 해 나폴리 수도원으로 배치되어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시시콜콜한 신학 논의들로 짜증을 느꼈지만 1575년 7월 정규과정을 마쳤다. 그에 앞서 금서인 에라스무스의 주석서를 2권 읽고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한 아리우스파의 이단 학설을 거리낌없이 논의한 일 때문에 수도원장이 이단죄로 재판을 하려 하자 1576년 2월 로마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자신이 부당하게 살인자로 고발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다시 파문 절차가 시작되어 1576년 4월 다시 도망쳤다. 도미니쿠스 수도회를 나와 북부 이탈리아를 떠돌아다니다가, 1578년 제네바로 가서 교정일로 생계를 꾸려갔다. 형식적으로는 칼뱅주의를 받아들였으나, 칼뱅주의자 교수에 대한 격렬한 비판문을 공표한 뒤 개혁 교회도 가톨릭 못지않게 비관용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포되어 파문당했지만 발언을 철회함으로써 복권되었다. 마침내 제네바를 떠나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프랑스 툴루즈로 갔다. 그곳에서 카톨릭교회의 사면을 받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브루노는 툴루즈에서 철학강사로 임명되었고 1581년 파리로 갔다.

■  파리에서 브루노는 마침내 마음 편하게 일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자리를 발견했다. 가톨릭과 위그노(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당시 앙리 3세의 궁정은 '폴리티크'(1584년 프로테스탄트로서 프랑스 왕위의 법정추정 상속인이 된 나바라 왕 엔리케 3세에게 동조하는 온건 가톨릭 교도들)라는 관용파가 지배하고 있었다. 종교에 대한 브루노의 태도는 이 집단과 양립할 수 있었고, 따라서 그는 앙리 3세의 보호를 받았다. 앙리 3세는 그를 임시 임명했다. 1582년 기억술에 관한 3권의 책을 펴냈고 이 책에서 그는 실재를 깊이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양초쟁이 Il candelaio〉(1582)라는 이탈리아어로 쓴 희극을 발표했는데 이 희극은 당시의 나폴리 사회를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당대의 도덕적·사회적 부패에 저항하고 있다.

■  1583년 봄 브루노는 앙리 3세의 소개장을 가지고 런던의 주영대사 미셸 드 카스텔노를 찾아갔다. 그는 곧 옥스퍼드로 불려가 그해 여름에 연속 강의를 시작했고, 이 강의에서 지구가 운동한다고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설명했다. 그러나 옥스퍼드 출신자들의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프랑스 대사의 초청을 받아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을 자주 드나들면서 필립 시드니 경과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같은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교분을 맺었다.

브루노 철학의 기본개념

■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피치노나 피코 등의 영향을 받고 있어 마술이나 점성술에도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그의 우주관은 말하자면, "우주는 무한하게 퍼져 있고 태양은 그 중에 하나의 항성에 불과하며 밤하늘에 떠오르는 별들도 모두 태양과 같은 종류의 항성이다"라는 무한 우주론을 주장했다. 물론 이 학설은 지금은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당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할지라도 분명히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  브루노의 무한 우주론은 지동설과는 직접은 관계없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 주장되고 있던 지동설은 우주의 중심에 태양이 있고 항성은 천구라고 하는 공에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베이컨             Bacon, Francis. 1561-1626  영국의 법률가, 궁정신하, 정치가, 영어 문장의 대가

생애

■  국새상서(國璽尙書) 니콜라스 베이컨 경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73~75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나 허약한 체질 때문에 적잖이 고생했다. 이때부터 '비생산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1576~79년 영국 대사 수행원으로 프랑스에 있다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귀국했지만 아버지가 그에게 유산을 별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평생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사상적 배경

■  17세기초 베이컨이 활동을 시작할 무렵 영국은 철학의 진공상태에 놓여 있었다. 15세기는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인문주의가 약간 활기를 띠었을 뿐 지적으로 거의 마비되어 있었으며, 16세기초 존 콜릿, 윌리엄 그로신, 토머스 모어 등이 르네상스의 그리스도교 합리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이 진취적 움직임도 당시 교회의 광적인 위세에 꺾이고 말았다. 리처드 후커가 토마스주의적 합리주의를 영국식으로 온건하게 해석한 1590년대에 이르러서야 철학은 되살아났다. 이때는 베이컨이 저술활동을 시작하기 불과 몇 해 전이었다.

■  16세기 후반 영국에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스콜라 철학, 학문적·미학적 인문주의, 신비주의 등 3가지 사상체계가 퍼져 있었다. 학교 교육의 주된 내용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대한 몇 가지 비판이 베이컨이 공부하던 케임브리지에 전해졌으나 이 비판은 다만 수사학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었다. 페트라르카, 로렌초 발라, 에라스무스로 이어진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전통은 정통 금욕주의와 반대로 현세의 즐거움을 찬양하고 예술·언어·자연의 아름다움을 선호한 반면 종교적 사변에는 비교적 무관심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연에 관한 지식은 무시하고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비주의 또는 비교주의(秘敎主義)는 인간과 우주 사이의 유비(類比)를 주장하거나 연금술처럼 자연과정 배후의 마술적 힘에 관심을 가졌다. 그 대표자는 독일인 파라켈수스이지만 영국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베이컨이 일종의 신비주의자였고 더욱이 장미십자회원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 그가 믿고 퍼뜨린 '자연 마술'은 비교주의 철학자들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  베이컨의 사상과 가까운 4번째 르네상스 사유양식은 쿠자의 니콜라우스와 이탈리아의 베르나르디노 텔레시오, 프란체스코 파트리치, 톰마소 캄파넬라, 조르다노 브루노 등의 대담한 자연철학이었다. 그들은 감각적 발견을 일반화하여 자연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베이컨의 글 속에 이 사상가들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그도 인간의 정신이 자연에 관한 지식을 얻는 데 적합하며 이 지식을 추상적 추론이 아니라 관찰에서 이끌어내야 한다고 믿었다.

베이컨 사상의 기본 개념

■  비록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대혁신〉이라는 제목으로 큰 작품을 쓸 야심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의 첫째 부분인 〈학문의 존엄에 관하여 De Augmentis Scientiarum〉는 〈학문의 진보〉의 라틴어 확대 번역판으로 1623년에 나왔으며 학문 분류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둘째 부분인 〈신 오르가논〉은 이미 1620년에 나왔으며 자연에 관한 지식을 얻는 정확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셋째 부분은 자연 사실을 관찰·기록하는 자연사이다. 베이컨은 바람·삶·죽음·밀도 등의 자연사를 썼으며 죽기 직전에도 〈숲들의 숲 Sylva Sylvarum:Or A Natural Historie〉을 쓰고 있었다. 넷째 부분은 자신의 방법을 적용한 사례들로 구성된 '지식의 사다리'이다. 가장 성공적인 사례는 〈신 오르가논〉에서 열이 입자의 운동임을 보여준 귀납 '표'이다. 이밖에 자신의 '선구자'에 관한 서술, 새로운 철학 등이 이 계획의 일부였다.

■  정신의 우상 

〈신 오르가논〉 1권에서 베이컨은 인간이 지식을 추구할 때 범하는 오류의 심리적 원인을 논의하면서 그 비유로 '우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베이컨은 4가지 우상을 구별했다. 첫째, 종족의 우상은 인류에게 공통적인 지적 결함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어떤 탐구 영역에는 실제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질서가 있다고 가정하는 지나친 단순화 경향이 있다. 둘째, 동굴의 우상은 개인의 지적 특성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사물들 사이의 유사점에 더 주목하고 또 다른 사람은 차이점에 더 주목한다. 셋째, 시장의 우상은 언어와 관련된 오류이다. 예컨대 일상 언어에서 고래와 물고기처럼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 비슷한 것으로 분류되는가 하면, 얼음·물·수증기같이 기본적으로 비슷한 것이 다른 것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한편 그는 예를 들어 '숙명'과 같은 무의미한 주제로 논쟁을 벌이게 만드는 언어 능력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 측면은 계몽주의, 19세기 콩트의 실증주의, 20세기 논리실증주의로 이어지는 회의적 합리주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넷째, 극장의 우상이란 잘못된 철학체계를 가리킨다. 베이컨은 감각의 역할을 무시한다고 본 인문주의자들의 철학체계를 그 예로 들었다. 정통 스콜라 철학에 대한 베이컨의 공격은 매우 원색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과학은 직관적으로 자명한 전제에서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베이컨은 그 전제들이 자명하지도 않고 반박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  인간 철학

베이컨은 인간·시민 철학을 실천적 기예 또는 기술의 문제로 다루었지만 그의 역사학과 법률학은 강한 이론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헨리 7세의 통치사 Historie of the Raigne of King Henry the Seventh〉는 왕의 정책을 깊이 파헤친 해석사이다. 정치학에서 베이컨은 정치와 종교를 조심스럽게 분리했다. 교육에 대한 글은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말에 대한 스콜라주의의 망상을 날카롭게 공격했으며, 이 비판은 코메니우스의 교육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베이컨은 보통 힘있는 사람에게 굽신거리고 인정이 없으며 뻔뻔스러운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기본적으로 이 평가를 의심할 만한 근거는 없지만 당시는 누구든 선량한 인물로 평가받기 어려운 시대였다. 한편 그처럼 글을 잘 쓴 인물치고 예술에 그토록 둔감했던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베이컨은 로버트 후크, 로버트 보일 등 영국 왕립학회 창시자들의 영웅이었고, 장 달랑베르는 〈백과전서 Encyclopedie〉에서 학문을 분류하면서 그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칸트도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그에게 바쳤다.

데카르트             Descartes, Rene. 1596-1650   프랑스의 수학자·과학자·철학자

생애

■  아버지 조아섕은 렌 지방의 브르타뉴 의회 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1세 때 죽었다. 그의 가족은 로마 가톨릭교를 믿었지만 가족의 연고지인 푸아투 지방은 위그노교의 본거지였다. 1606년 라 플레슈 예수회 대학에 입학하여, 훗날 프로테스탄트교를 탄핵한 자로 알려진 교부(敎父)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4년 푸아티에에 가서 1616년 법학 학위를 땄다. 1618년 네덜란드 브레다로 가서 프로테스탄트 통치자인 오라녜 공(公) 마우리츠의 평화시(時) 군대에서 15개월 동안 수학과 군사건축학을 배웠다. 여기서 의사 이사크 베크만의 격려로 수학을 공부하고 〈음악에 관한 소고 Musicae Compendium〉(1618 저술, 사후 출판)를 썼다.

■  1619~28년 북·서 유럽을 여행 중 보헤미아에 머물렀던 1619년 장차 인간의 권능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자 및 철학자가 되려는 포부를 지니게 되었다. 1620년경에 이미 모든 과학에 적용할 수 있는 연역적 추론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  프로테스탄트교를 포함한 이교도에 대한 가톨릭교의 박해가 심했던 프랑스와 달리 네덜란드는 종교적 관용의 안식처였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루칠리오 바니니처럼 신의 기적을 자연적으로 설명한 죄목으로 화형을 당하거나(1619)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에 충성하는 군대에 징집될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독창적인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  데카르트는 1629년 프라네커대학교에 가서도 여전히 로마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의 초안을 썼다. 1630년 라이덴대학교에 등록하여 의사 앙리 르네리를 제자로 맞아들였다. 1631년 덴마크를 방문했고 1633~34년 의사이자 연금술사 에티엔 드 빌브레시외와 함께 독일에 머물렀다. 의사 H. 레기우스가 1639년 위트레흐트대학교에서 데카르트의 견해를 가르치자 칼뱅주의 신학자 기스베르투스 뵈티우스와의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은 데카르트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데카르트는 1648년 〈뵈티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프로테스탄트교와 가톨릭교는 같은 신을 숭배하기 때문에 둘 다 신의 은총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관용과 인권을 호소했다. 그러나 논쟁이 심화되자 데카르트는 프랑스 대사 및 친구인 콘스탄테인 호이헨스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데카르트 사상의 기본 개념

■  데카르트의 목표는 자연에 정통하는 것이었다. 〈세계·광학·기상학·지리학〉에서는 지식 나무의 줄기에 대한 이해를 제공했고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서는 그 뿌리를 해명한 뒤, 역사·의학·도덕 등 지식의 가지를 연구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역학은 의학이나 생리학의 기초이고 의학 또는 생리학은 도덕심리학의 기초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물체가 역학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라고 믿었다(→ 기계론). 생리학을 연구하면서 동물의 육체를 해부하여 각 부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였고, 동물은 영혼을 갖지 않기 때문에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 혈액순환에 대해서도 기술했으나, 심장의 열기가 혈액을 팽창·분출시킨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심혈관계). 〈인간, 태아발생론 L'Homme, et un Traite de la formation du foetus〉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과 육체의 통일이며, 정신과 육체는 송과선(松果腺)에서 상호작용하는 서로 다른 두 실체이다(→ 심신이원론). 송과선은 두뇌의 기관으로는 쌍을 이루지 않은 유일한 기관이므로 정신과 육체의 합일점임에 틀림없다고 데카르트는 추론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감각기관에 미치는 작용 하나하나가 신경관을 통해 미세한 물질을 송과선에 전달하여 독특한 진동을 일으키고, 이 진동이 감정과 격정을 유발하여 육체의 작용을 야기한다(→ 자극반응학습). 이러한 통찰은 그가 자유의지와 정신의 육체조절 능력을 옹호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그와 같은 논변에도 불구하고, 1649년 〈정념론 Les Passions de l'ame〉에서는 인간의 육체작용 대부분이 외부의 물질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  데카르트의 도덕관은 반그리스도교적이었다. 데카르트는 칼뱅주의 및 예수회와는 대조적으로 신의 은총이 구원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진리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데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덕이 쌓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진리발견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데카르트의 낙관적 견해는, 구원을 오로지 신이 내리는 은총의 선물로만 여긴 예수회 운명예정설 변호론자이자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비관적 견해와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데카르트는 유덕한 행동이 은총보다는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 12세기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난받았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신의 상징이어서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칭찬이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오직 타인의 선(善)을 위해 호의를 갖고 행동할 때만 선하며 이러한 관용이 최고의 덕이다.

■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념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에피쿠로스주의자였으며, 선을 이해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점에서 극단적인 도덕적 낙관주의자였다. 그가 보기에 정념은 자발적인 의지이며,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은 그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자신의 정념을 통제해야 한다고 촉구한 점에서 스토아주의자이기도 했다.

■  데카르트는 사람이 신을 너무 생각하다 보면 분별력을 잃는다고 말했다. 가급적 숨기고자 애썼지만 자신의 유물론적 물리학과 생리학이 무신론의 싹을 내포하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무한한 우주를 쳐다보고 인간의 왜소함과 비참함을 느껴 전율에 휩싸인 파스칼과는 달리, 인간은 불쌍하고 죄 많은 존재라는 견해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주를 이해하고 행복을 증진하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다. 사물을 변화시키려고 신에 기도하는 일은 건방진 태도이며, 그보다 인간은 자기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피노자             Spinoza, Baruch. 1632-1677  네덜란드의 유대인 철학자, 17세기 합리론의 주요이론가.

■  1656년 7월 27일 유태교단으로부터 저주를 받으면서 파문되었다.

■  1677년 나이 44세를 갓 넘어 스피노자는 죽음을 바라보게 되었다. 

스피노자의 사상

■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룬 윤리학〉에 근거하여 <구약성서〉 예언자들의 영감은 오직 도덕적·실천적 교리에 한정된 의미만을 가지며, 실제의 믿음은 그 시대에 적합한 것이었을 뿐 이제는 철학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과학적·형이상학적 사변의 자유를 완벽하게 허용하는 일은 성서의 모든 주요교리들과 일치하고 기적은 도덕적 효과를 위해 잘못 해석되고 강조된 자연적 사건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  신에 대하여 - 이 우주에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광대한 자연 체계일 뿐입니다. 이 대자연만이 유일한 실체이고, 동시에 신(神)입니다. 이 자연의 체계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이 무한합니다. 그 체계 내에는 우연이 끼어들 곳이 없이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납니다. 모든 일의 인과관계는 오직 과거로부터 미래에로의 방향으로만 작용하고 그 결과는 모두 결정되어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신에게는 나은 것과 못한 것의 구별이 없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선험적 목적이 주어지지 않았고, 또 어떤 초월자가 행위 규범을 내려 우리에게 의무를 부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스피노자는 '완전'하다느니 '불완전'하다느니, 또는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구별은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단지 일정 사물을 만든 이의 의도가 완전히 들어가 있을 때에만 그것은 완전하다 불완전 하다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인간에 대하여 -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는 자기 보전의 욕구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의지와 욕구도 자기보존(형이상학적 자기 보전)을 궁극적 목표로 삼습니다. 즉 '자아의 본질을 지킨다'란 의미입니다.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인간은 스스로 행동하는 자기 보전성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  인간의 신격화

모든 우주를 직관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신뿐이고 인간에게 직관지란 목표임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직관을 확대시켜 감으로 인해 자유도 늘어나고 나아가서는 신과 동일할 수 있을 때까지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과 동일시 되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고 완전한 직관지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과 동일시 된 상태는 나와 남과의 구별을 초월하는 인격적인 해탈을 의미합니다.

라이프니쯔          Leibniz, Gottfried Whilhelm. 1646-1767  독일의 철학자·수학자·정치고문.

생애

■  독일 30년전쟁이 끝날 무렵, 독실한 루터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니콜라이 학교에서 교육받았고 대부분 아버지의 장서로 독학했다. 라이프치히대학교 법학을 공부하면서 갈릴레오, 프랜시스 베이컨, 토머스 홉스, 르네 데카르트 등 과학과 철학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일생 동안 이 근대 사상가들과 스콜라주의화한 아리스토텔레스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라이프니츠는 교회의 재통합을 지지하기 위해 〈카톨릭 논증 Demonstrationes Catholicae〉을 썼다. 라이프니츠는 단자론으로 가는 새로운 발전경로가 된 영혼의 위치를 한 점으로 보는 관점을 세웠고,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 : 어떤 것도 이유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칙)을 전개했다. 나아가 이 난해한 점이론을 다루면서 그의 사고는 광학·공간·운동 문제로 이어져 1617년 〈새로운 물리학의 가설 Hypothesis Physica Nova〉을 출판했다.

■  재정적 도움을 얻기 위해 계산기를 발명하여 1673년 처음으로 런던을 여행하던 도중 왕립학회에 기증했다.

■  1675년말 라이프니츠는 적분과 미분의 기초를 세웠다(→ 미적분학)

■  수력압착기·풍차·램프·잠수함·시계 등 갖가지 기계장치들을 연구했고, 완벽한 수송수단을 고안하여 인(燐)으로 실험을 하기도 했다. 또 풍차로 작동하는 물 펌프를 개발하여 하르츠 산맥의 광산개발을 개선했고 1680~85년에는 이 광산에서 여러 번 기술자로 일했다. 라이프니츠는 최초의 지구가 용해상태였다는 가설을 제시하는 등 그곳에서 많은 관찰자료를 수집한 덕분에 지질학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라이프니츠는 이처럼 다양한 직업을 가지면서도 수학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1679년 3월 2진법 체계를 완성했고, 그해말에는 오늘날 일반 위상수학(位相數學 : 일정한 물리적 요소 또는 추상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집합의 선택적 속성을 다루는 수학의 한 분야)으로 알려진 위상분석의 기초를 제시했다. 역학과 철학 연구도 계속하여 그의 철학은 점차 반(反)데카르트주의로 나아갔다.

라이프니쯔의 철학

■  인식론 - 사물은 신(神) 안에서는 볼 수 없고 오히려 신의 관념과 인간의 관념 사이에는 엄밀한 관계인 유비(類比)가 있으며, 신의 논리와 인간의 논리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  라이프니츠는 1697년 〈궁극적 근원에 관하여 De Rerum Originatione〉에서 사물의 궁극적 근원이 바로 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고, 1698년 〈자연 그 자체에 관하여 De Ipsa Natura〉에서는 자신의 동역학 이론으로 자연의 내적 활동을 설명했다. 이 모든 저작을 통해 라이프니츠는 신앙을 해롭게 하는 데카르트주의에 반대했다.

■  수리철학 - `모든 명제의 술어는 주어에 내재되어있다.'

라이프니쯔는 어려서부터 그리이스 시대부터의 철학자들의 형식 체계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10개의 범주(kategorie)인 본질,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소유, 동작 및 감정은 몇 세기간 과학적이건 그렇지 않건 모든 사상에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이다.

■  변신론 - 단자론」중에서 ,` 두 종류의 진리가 있다. 하나는 논증에 의한 진리이며, 또 하나는 사실로서 나타나는 진리이다. 논증에 있어서의 진리는 필연적인 것이며, 그 반대 명제는 불가능하다.

출처 : Prisc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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