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 R . I . S . T . O . T . E . L . E . S
The Background of Philosophy in Middle Age.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624-546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과학자.
출생배경
? 스타게이로스 출생이다. 부친 니코마코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할아버지인 아민타스 3세의 시의(侍醫)였기에 당시는 의례적으로 의술은 가업을 잇는 전통적 직업이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의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학교인 리케이온에서는 의술과 실제 의료행위를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어릴 때부터 의술과 마케도니아의 궁정생활을 접한 탓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의 영향이 강한 철학사상을 내놓았고, 왕자들과 궁정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여러 번 표현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릴 때 아버지가 죽자 친척으로 추정되는 프로크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고, 프로크세노스는 BC 367년 그를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지식의 체계를 이룬 아리스토텔레스
? 아리스토텔레스는 과거의 모든 그리스 철학자들(특히 플라톤)의 학설을 수집 비판하는 작업을 하였고, 그 위에 자신의 학설을 전개하였다. 생명의 일반적 특성과 감각 지각을 다룬 <영혼론>을 비롯하여 <논리학>, <형이상학>, <정치학>, <윤리학>, <자연학>, <수사학>,<시학>, <기상학>, <박물학> 등등 그가 다루지 않은 문제는 거의 없다. 그는 경험 과학자인 동시에 사회 과학자이며 동시에 개별적인 과학들의 역사적 과학 성과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한 세계 사상 최대의 박학다식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의 지식 체계는 거의 2000년간 서양 세계를 지배해 왔고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진정한 평가가 가능했던 점에서도 그 이후 누구도 못 이룬 업적을 이뤄 낸 것이다.
?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비록 철학의 이견1)은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사려한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위계를 두어 분류하고 있다.
1. 기관(organon) - 논리학
2. 이론의 학
1) 제 1철학 - 자연학, 영혼학, 수학
2) 제 2철학 - 형이상학(존재론, 신학)
3. 실천의 학
1)윤리학 2) 경제학 3) 정치학
4. 제작의 학 - 수사학, 시학.
논리학
? 학문적인 인식은 사물이 지닌 필연적인 관련을 그 원인에 따라 인식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서 삼단논법2)의 형식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삼단논법이 이러한 논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제1전제를 말한 공이론(公理論)도 뛰어났다. 그의 논리학서는 《오르가논 Organon3)》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하여졌다. 여기서는 <범주론>, <명제론>, <분석론>, <변증론>이 다루어지고 있다. 예 : ① 모든 인간은 죽는다. ②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③ 고로 소크라테스도 죽었다.
자연학
? 운동하는 사물에 대한 연구가 자연학이라고 그는 정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을 원리적 탐구의 근본학으로 파악하였다. 이 자연학의 범위는 대단히 넓어서 여러 원소나 생물, 특히 동물은 물론이고 영혼의 연구까지 포함된다. 영혼은 신체의 형상이며, 각 형상의 장소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진짜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을 눈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여기에 이 세상 사물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물어야 할 네 가지가 있다. ① 그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질료인) ② 그것은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형상인) ③ 그것은 어떻게 해서 움직이는가? (운동인) ④ 그것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목적인) 이중 ②,③,④는 자연물에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사물을 이루는 재료)와 형상(사물의 고유한 특성)으로 자연물은 이루어지고,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생성 발전의 과정으로서 자연의 존재는 파악된다. 질료는 거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디나미스[可能態]로, 최종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최종목적(텔로스)인 엔텔레케이아[完成態], 에네르게이아[現實態]야말로 자연 존재의 우월하는 원인이라고 한다(목적론적 자연관)4)
예: '비'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① 질료인 : 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 수증기
② 형상인 : 비의 고유한 특성은? - 물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는 것
③ 운동인 : 비는 어떻게 해서 오는가? - 수증기가 냉각되어 응결됨으로써
④ 목적인 : 비가 오는 이유는? - 식물과 동물들이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 자연의 변화란 질료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변형되는 과정으로 모든 질료는 특정한 형상을 실현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또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을 추구한다. 예를 들면, 화강암은 말의 조각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달걀은 닭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개나 소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달걀이 닭이 되면 그 가능태가 현실태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가능태가 현실태로 바뀌려면,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 질료형상론은 형상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이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하나의 형상은 다른 형상에 대해서 질료가 될 수 있고 또한 형상이 될 수도 있다. 형상들의 연쇄체계가 세계이며, 세계의 근원에 순수형상이 있다. 우리는 그의 질료형상론에서 순수 질료, 즉 그 자체 속에 어떠한 형상도 함축하지 않는, 다시 말하면 더 이상 어떤 것의 형상이 아닌 질료 자체와 상관관계 속에 있는 형상들의 계보를 보게 된다. 형상들의 계보는 순수 형상을 정점으로 순수 질료에로 내려올수록 다양한 형상들로 분화된다. 따라서 순수질료와 순수형상 사이에 무수한 형상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상호연관 속에 하나의 극점에로 귀결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 질료와 순수 형상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상들의 통일적 체계를 세계로 또는 자연으로 파악한다. 그에게 세계와 자연은 구분될 수 있는 독립적 영역들이 아니라 한 영역이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근대철학의 초기에까지 지속되었다. 그에게 세계는 자연의 일부분이며 자연의 원리에 지배된다. 따라서 그에게 자연학은 최종적인 물음의 영역이다.
형이상학5)
? 존재자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으뜸되는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을 소피아(지혜) 또는 제1철학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동시에 보다 고귀한 존재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신학”이기도 하다. 신(神)은 으뜸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기도 하다. 신은 질료에서 떠나, 영원불변한 관조(觀照) 안에 머무는 자기사유자(自己思惟者)로서 최고의 현실태이고, 그것 자신은 부동이면서 ‘사랑을 받는 것’으로서 일체의 것을 움직이는 ‘부동의 제1동자(動者)’이다. 그것은 자연계를 초월하는 자연계의 근거로서의 종극목적이다. 이 학문은 뒤에 형이상학(메타피직스)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은 이 학문이 뒤의 전집 편집에서 주어진 위치에서 유래된 것이다.
? 사람은 이성적 능력이라는 최고의 영혼을 가진 존재.
자신의 모든 능력을 가능성을 가장 잘 발휘하고 이용할 때 가장 행복하다. 인간은 식물적, 동물적, 이성적 영혼을 모두 지니고 있다. 따라서 쾌락과 만족, 자유, 세상에 대한 관조 모두가 필요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이 중요하다. (비겁과 무모의 중용은 용감/금욕과 향락의 중용은 절제/오만과 비굴의 중용은 긍지/인색과 낭비의 중용은 대범)
인간에게 있는 이성에 따르는 삶, 관조의 삶이 즉 신적인 삶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사회 없이는 살 수 없다. 사회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은 신과 짐승뿐이다. 인간에게 가정에서 해 줄 수 있는 것, 마을에서 해 줄 수 있는 것, 국가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다. 국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또 우리의 복리와 행복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며 인간의 본성은 국가를 통해서만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
윤리학
? 행위의 종극 목표는, 신의 자기사유의 활동을 모방하는 이성적 관조에 놓여 있으나, 이것은 약간의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중용(中庸)으로서의 덕이 행위의 목적이다.
그에 의하면 윤리학은 정치학의 일부로서 인간에 있어서의 선을 연구하는 덕론이다. 덕이란 각 사물에 고유한 기능의 우수성을 의미하고, 행복은 바로 영혼의 유덕한 활동에 의해서 초래되는 것이다. 그러한 덕은 ‘용기’와 같은 습관적이 덕과 ‘지혜’와 같은 지성적인 덕으로 구분된다. 습성적인 덕은 양 극단의 중간에 있고 사려 즉 실천이성이 이를 결정한다. 지성적인 덕은 지혜를 추구하는 관상의 생활에 의하여 얻어진다.
정치학
? 인간은 국가적 동물이다. 공공의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선(善)은 실현된다. 그런 까닭에, 윤리학은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가 교대로 다스리는 자가 되는 곳에서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나라 제도가 있다고 한 정체론(政體論)은 온건한 민주주의의 뛰어난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하는 그의 정치학은 특정 국가 제도만을 옳은 것으로 보지 않으며 국가 제도는 국민의 성격과 필요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비판하면서 <민주제도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시학
? 창작의 본질은 모방(模倣)에 있다. 비극은 숭고한 행위의 모방이며, 숭고한 인물이 불행에 빠져가는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관객 가운데서 일어나는 연민과 공포의 정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정서를 정화(淨化)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S . C . H . O . L . A P . H . I . L . O . S . O . P . H . Y
The Background of Philosophy in Middle Age.
?스콜라 철학
어원
? 고대 그리스어의 '여유'라는 뜻을 가진 스콜레(σχολη)를 라틴어로 (schola) 소리 나는대로 적은 낱말로서 오늘날 '학파'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특히 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서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던 신학에 바탕을 둔 철학적 사상을 일컫는데 쓰이고 있다. 때문에 철학사에서는 이 시기의 철학을 통틀어서 흔히 스콜라 철학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철학.
?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의 신학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일반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 탐구와 인식의 문제를 신앙과 결부시켜 생각하였으며, 인간이 지닌 이성 역시 신의 계시 혹은 전능 아래에서 이해하였다. 가령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의 존재 문제를 다루었는데, 여기서 스콜라의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단순히 물질적 혹은 추상적인 방법론으로 관찰 또는 연구하지 않고 언제나 기독교의 신앙에 따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의 산물 혹은 수단으로서 스콜라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아래 광범위하게 논리학을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중세 초기에 샤를 대제(大帝)는 유럽 각지에 신학원(神學院)을 설립하고 학문육성에 진력하였다. 스콜라학의 명칭은 이 신학원 교수(doctores scholastici)에서 유래하며, 그 후 중세의 신학원과 대학에서 연구되는 학문을 널리 스콜라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그 가운데 한 부문인 철학 분야이다. 스콜라학은 이 때문에 중세의 신학(神學)·철학 연구 전반을 총괄하는 것으로 매우 다방면에 걸친 것이지만 거기에는 전체적으로 공통되는 몇 가지 특징도 있다. 그것은 중세의 학문연구방법(스콜라학적 방법)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에 의하여 중세철학의 본연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규정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중세의 학문 연구는 대체로 성서와 교부(敎父)의 저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자, 기타 저술가의 저서에 대한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 저서의 독해·주석·해석이 그 첫째 작업이었다. 이 무렵 성서는 신(神)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성서의 권위).
② 신의 말은 먼저 신앙에 의하여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만 '신앙'은 인간이 거기에 내포되는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새 사람으로 재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라는 것이 스콜라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때 신앙과 이해(또는 이성)는 서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요구하면서도 한쪽이 다른 한쪽에 용해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바로 중세철학을 구성하는 두 요인이다. 따라서 중세철학을 '신학의 하녀'라 하여 한편에 대한 예속관계로서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스콜라철학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예속되는 곳에서는 상실되며, 긴장관계에 있는 양자의 종합에 의해서만 스콜라학이 성립된다. 스콜라학의 다양성은 이 종합의 다양성에 있다.
③ 교부와 철학자의 저작은 이를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하나의 문제점에 따라 참조되는 여러 전거(典據)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설(說)이 수집·정리되었다. 12세기 초, 페트루스롬바르두스의 《명제론집(命題論集)》은 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아벨라르두스는 이들 여러 견해를 하나하나의 논점에 대하여 긍정측과 부정측의 대립하는 양자로 분류하는 방법(그렇다와 아니다의 방법)을 도입하였다. 13세기의 슴마(완전한 단일로서 간결한 총괄)는 이들 대립하는 여러 견해 사이의 조화와 종합의 시도로서 여러 영역에 관하여 이루어진 여러 설의 집대성이며, 참으로 학술의 종합이라고 할 만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은 그 중 가장 저명한 것이다.
스콜라철학의 발전
? 초기
샤를 대제 시대부터 12세기까지이며 신(新)플라톤파 철학을 도입하여 가짜 디오니시오스(Dionysios)의 번역에 의하여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스코투스 에류게나, 신앙과 이성(理性)의 관계를 명확히 한정시키고 스콜라학의 방법을 확립하여 '스콜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켄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神)의 존재에 관한 안셀무스의 증명은 유명하다.
? 전성기
13세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서(自然學書)를 아라비아철학에서 이입함으로써 종래의 신학으로부터는 독립된 지적 연구(知的硏究)가 일어난다. 이 새로운 연구를 대폭적으로 채용하고 게다가 이것을 전통적인 스콜라학의 체계 속에 혼연히 융화시킨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신과 우주와 인간의 문제를 다같이 설명하는 이론적 체계를 세워 《신학대전(神學大全)》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아퀴나스의 신학체계에 의하여, 가톨릭교회의 ‘성사(聖事)’는 신적(神的) 권위를 지니게 되었으며, 1439년의 종교회의에서 ‘세례(洗禮)’ ‘견진(堅振)’ ‘고백(告白)’ 등의 7가지 성사가 제정되고, 하느님의 은총은 이들 교회의 성사를 통하여 주어진다는 교의가 확립되었다.신학에 대한 철학의 원리적인 독립성이 유지되면서 전체는 신학의 체계로서 종합되었다. 이에 비해 보나벤투라는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신비주의적 경향을 지켰다.
? 말기
13세기 이후로는 쇠퇴하기 시작하여 14세기로, 신앙과 이성과의 조화가 점차 상실되었다. 둔스 스코투스, 유명론자(唯名論者) W.오캄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 M.J.에크하르트 등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성으로써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킴으로써 스콜라 신학의 토대를 흔들어 놓았다.
안셀무스 Anselmus. 1033-1109 이탈리아의 신학자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 창시자.
독백론
? 변증론적·종교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 논문은 신의 현존과 속성을 초기의 중세 사상가들처럼 통상적으로 권위에 호소하지 않고 오직 이성에 의존하여 논증하려 했다. 안셀무스는 정의·지혜·힘과 같은 완전함의 여러 측면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하여,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규범이 있고 인간의 정신이 이 절대규범을 이해할 수 있다고 논증했다.
대여록
? 안셀무스가 대수도원장으로 있으면서 베크는 수사들의 수련과 신학탐구의 중심이 되었다. 안셀무스는 신의 본성과 현존에 관한 물음에 만족스럽게 답하려고 계속 노력했다. 〈대어록(對語錄) Proslogium〉은 원제가 〈지성을 찾는 신앙 Fides quaerens intellectum〉으로 신의 현존에 관한 존재론적 논증을 확립했다. 그는 이 책에서 아무리 바보일지라도 어떤 존재가 현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존재관념보다는 더 나은 존재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존재는 현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존재의 관념은 그 존재의 현존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론적 논증은 같은 시대의 수사인 마르무티에의 고닐로가 쓴 〈신은 없다고 말하는 바보들을 위한 변명 Liber pro insipiente〉에서 도전을 받았다. 고닐로는 어떤 존재에 관한 관념이 객관적인 질서 속에서 그 존재의 현존을 함축한다는 주장과 신에 대한 직접적 직관이 신의 현존을 함축한다는 주장을 부정했다.
캔터베리 대주교시절.
? 1066년 노르망디 점령을 실현한 잉글랜드의 '정복왕' 윌리엄은 베크 수도원의 후원자였으며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 있는 땅을 이 수도원에 하사했다. 안셀무스는 이 땅을 둘러보기 위해 잉글랜드를 3차례 방문했다. 이 방문기간에 안셀무스는 체스터에 수도분원을 세웠는데, 정복왕 윌리엄의 아들이며 계승자 윌리엄 2세 루퍼스는 그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했다(1093. 3). 이 관구는 1089년 랜프랭크가 죽은 이래로 줄곧 공석이었으며, 그 사이 국왕은 관구의 수입을 몰수하고 토지를 빼앗았다.
? 안셀무스는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가 내키지 않았으나 잉글랜드 교회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수락했다. 그는 윌리엄 2세가 캔터베리에 땅을 되돌려주고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 대신 우르바누스 2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할 때까지 대주교 부임을 거부했다. 병에 걸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던 윌리엄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안셀무스는 1093년 12월 4일 정식으로 캔터베리 대주교에 부임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병에서 회복되자 안셀무스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요구했고, 안셀무스는 이를 성직매매 행위(성직 임명에 대한 보답)로 보고 거절했다. 안셀무스의 거절에 맞서 윌리엄은 안셀무스가 로마에 가서 우르바누스 2세로부터 팔리움(교황청의 대주교 승인을 상징하는 예복)을 수여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왕이 우르바누스 2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안셀무스는 본질적으로 성직과 관련된 문제에 왕이 개입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서임논쟁(敍任論爭), 즉 주교와 같은 성직을 그 직위의 상징물을 가지고 임명할 1차적 권리가 세속적 지배자(황제 또는 왕)에게 있느냐, 아니면 교황에게 있느냐 하는 논쟁에서 주요인물이 되었다. 이 논쟁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1095년 3월 11일 로킹엄 교회회의에 모인 잉글랜드의 주교들은 안셀무스가 아니라 왕의 편에 서 있었다. 교황의 사절이 로마에서 팔리움을 가지고 왔을 때, 안셀무스는 그것을 윌리엄 2세로부터 수여받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자기의 정신과 성직의 권위가 왕에게 빚진 것으로 비추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2세는 안셀무스가 로마로 떠나는 것을 허용했으나, 그가 떠나자 캔터베리의 땅을 몰수했다.
? 1098년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바리 공의회에 참석하여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왕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그리스 교회에 맞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信條)의 하나인 '필리오케'(Filioque:'그리고 성자[聖子]로부터')에 관한 교리조항을 옹호하는 등 공의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스 교회는 1054년 이래로 서방교회와 분리되어 있었다. 서방교회측의 신조 해석에 가미된 필리오케에 관한 교리조항은 성령(聖靈)이 성부(聖父)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지적했다. 그리스 교회는 필리오케 조항이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바리 공의회는 세속 관리가 성직을 임명하는 데 반대하여 초기의 법령을 거부했다.
구원에 대한 보속론
?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 Cur Deus homo?〉 이 저서는 구원보속론에 관한 고전적 연구서가 되었다. 봉건적 사회구조에 바탕을 둔 이 이론에 따르면,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신에게 죄를 지었다. 봉건사회에서 가해자는 피해자의 지위에 따라서 피해자에게 보상 또는 보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왕에 대한 죄는 귀족이나 농노에 대한 죄보다 더 많은 보속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신에게 결코 보속할 수 없으므로 영원한 죽음만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다시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주는 수단은 신-인(神人: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다. 신-인의 무한한 능력에 의해 인간은 협동적 재창조 행위 속에서 정화된다. 안셀무스는 인간이 그의 죄 때문에 악마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견해를 반박하고, 구원의 본질을 성찬식(聖餐式) 속의 그리스도와 개별적으로 통합하는 데서 찾았다. 세례(이것에 의해 개인은 교회와 통합됨)는 성찬식에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
?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를 완성한 뒤, 안셀무스는 1099년 부활절에 로마에서 열린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했다. 1년 뒤 윌리엄 2에 이어 동생 헨리 1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았다. 헨리 1세는 교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안셀무스가 잉글랜드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했고 안전을 보장했다. 안셀무스는 잉글랜드에 다시 돌아갔으나, 헨리 1세가 성직의 영적 상징물을 가지고 성직자를 임명할 권리를 고집하자 곧 왕과 결별했다. 3차례에 걸쳐 왕은 그러한 권리를 요청했고, 교황은 그때마다 이를 거부했다. 이 기간 중 안셀무스는 1103년 4월부터 1106년 8월까지 추방되었다. 이 논쟁은 웨스트민스터 교회회의에서 타결되었다. 왕은 성직의 상징물인 반지와 지팡이를 가지고 주교와 대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왕은 주교와 대수도원장이 축성에 앞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웨스트민스터 협약은 보름스 협약(1122)의 한 본보기가 되었으며, 이 협약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한동안 성직을 둘러싼 논란을 해소했다.
? 안셀무스는 평화롭게 2년의 여생을 보냈다. 1163년 시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법규와 함께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1118?~70)은 안셀무스를 성인으로 책봉해달라고 교황에게 탄원했다. 안셀무스는 이 무렵에 성인으로 추증된 것 같다. 이는 1170년 캔터베리 대주교구의 기록에 대성당 내에 새로 마련된 안셀무스 묘소의 참배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수세기 동안 안셀무스는 일정지역 내에서만 존경을 받아왔다. 1720년 교황 클레멘스 6세(1700~21 재위)는 안셀무스를 교회박사로 선언했다.
안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4-1274 그리스도교의 철학자.
생애
? 토마스는 1224년 로카세카에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수도원에서 영적인 생활과 문화적 생활을 보낸 청년 토마스는 1239년 당시에 황제가 세운 나폴리대학교로 그를 보냈졌는데,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리스어·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과학저서들과 철학저서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30년 전에 설립된 탁발수사설교단, 곧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는 수사들에 대한 전통적인 부자(父子) 관계 형태의 조직을 버리고 민주적인 형태의 탁발수도회(단체와 개개인이 가난하여 자선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수도회)로 탈바꿈했으며, 기도와 육체노동 중심의 수도생활로부터 설교와 교육 중심의 보다 적극적인 생활로 나아갔다.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입회함으로써 그는 그가 태어난 봉건세계와 그를 양육한 수도원적인 영성으로부터 벗어나 파리유학의 길을 가게 되었다.
? 파리 도미니쿠스 수도회 중심지가 되었던 생자크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학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으며 새로 설립된 탁발수도회에 종교적 소명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제도 및 개념구조에 대한 신념이 공격을 받고 있던 세계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복음과 당대 문화의 만남은 토마스가 세운 견해의 핵심을 이루었고, 그 견해의 발전을 이끌었다. 대체로 그의 업적은 그 당시 새로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그리스도교 사상에 통합시킨 것이라고 간주되며, 이것을 그리스도교 역사의 처음 12세기 동안 교부들의 영향 아래 플라톤 사상을 그리스도교 사상에 통합한 것과 비교하곤 한다. 이 같은 견해는 대체로 정확한 것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토마스의 업적은 개개인의 삶과 교회 전반에 걸쳐 문화적·영적 쇄신이 필요하다는 복음적 각성을 실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토마스는 한편으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설립한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의 복음주의로부터, 또다른 한편으로는 도미니쿠스 수도회를 설립한 성 도미니쿠스의 학문적 열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탁발 종교인으로 이해된다.
? 당시 아라비아-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이 유입되어 신자들이 이에 대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고 있으므로 교회 당국은 이 철학에서 비롯되고 있는 자연주의 및 합리주의를 여러 차례 봉쇄하려고 했다. 여러 고위성직자들은 이 자연주의와 합리주의가 젊은 세대를 유혹한다고 보았지만 토마스는 이 새로운 사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나 파리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던 로저 베이컨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연구하고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강의했다. 당시 기독교도들과 신학자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적 합리주의의 엄격한 요구에 직면하였다. 이와 동시에 기술이 진보하면서 사람들은 농업사회의 초급 경제로부터 벗어나 도시사회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사회는 생산, 시장경제, 깊은 공동체 의식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성직자들을 위시해 새로운 세대의 남성들과 여성들은 세계를 경멸하는 전통적인 관념에 반기를 들었고, 이성을 이용하여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구조는 지성의 우위성을 강조했다. 기술 그 자체는 진리에 접근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기술은 우주를 인간화하는 힘이 되었다. 그러므로 초기 스콜라 철학을 지배해왔던 보편개념의 실재성에 대한 논쟁('붉다'라는 일반개념과 '이 붉은 것'이라는 특수개념의 상호관계에 대한 물음)은 뒷전으로 밀리고, 지식과 세계에 관한 일관성 있는 형이상학이 발전되었다(→ 스콜라주의). 1248년 여름 토마스는 알베르투스와 함께 파리를 떠났다. 알베르투스는 쾰른 수도원에 도미니쿠스 수도회가 새로 설립한 대학의 학장을 맡았다. 토마스는 1252년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신학석사학위를 준비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와1256년부터는 교수로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교황청시절
? 1259년 토마스는 그 당시 서방 인문주의의 중심지였던 교황청의 신학 고문과 신학 강사로 임명되었다.
? 아베로에스5)와의 논쟁을 통해 이성이 누리는 자율성을 인정했던 토마스가 신망을 잃게 되고 신학의 방법 자체를 의문시 하게되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이성은 신앙 안에서 그 나름의 법칙에 따라 활동할 수 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고 구체화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신비는 적극적·의식적·조직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이성 활동의 규칙과 구조가 신앙의 빛과 통합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신학은 '과학'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전제들로부터 이성적으로 추론된 지식이다. 신학자들은 권위와 신앙을 출발점으로 받아들인 뒤 이성을 사용하여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 이에 반해 철학자는 전적으로 자연적인 이성의 빛에만 의지한다. 토마스는 신학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러자 여러 진영에서 아퀴나스에 대해 극심한 반대가 있었으며, 이러한 반대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신앙과 이성에 대하여
자연(physis)은 필연적 법칙을 가지며, 이 사실을 인정하면 로고스(이성적 구조)에 따라 과학을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토마스는 기적이나 하느님의 섭리에 소박하게 의지하여 자연의 힘을 신성시하는 유혹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네스크 예술과 사회관습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사물과 인간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초자연적' 세계가 인간의 상상력을 흐리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 자체의 세속적 성격이 폭로된 자연은 그에 합당한 종교적 가치를 가져야 하며, 보다 이성적인 방법에 따라 인간을 하느님에게 인도해야 한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초자연적인 것의 그림자가 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Physics〉을 대학교 교과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은 학문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당시 세계에 대한 종교적 이해와 반대되는 자연주의가 영성·사회관습·정치행위 등 모든 영역에 침투하고 있었다. 동시에 로마법이 볼로냐대학교에서 소생하고 있었다. 볼로냐대학교는 자연법을 엄격하게 분석했고, 프리드리히 2세의 법률가들에게 교회의 신정체제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했다. 성서적 상징을 사용하여 훌륭한 경건자들의 모습을 그리며 군주의 역할과 의무를 밝혔던 전통적인 견해는 정부의 실험과 이성적인 논문들로 대체되었다. 토마스도 1266년 키프로스의 왕을 위해 〈군주들의 통치에 대해 De regimine principum〉 같은 논문을 작성했다. 정의를 관장하는 일에서는 사법적 수사와 재판이 시죄법(試罪法)과 하느님의 심판에 호소하는 열광주의적 태도를 대체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지고 이단적 교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몹시 경계했다. 그가 볼 때 결정론은 자연에만 해당되고 인간은 자유로우며, 그 자유를 합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섭리신학에서 창조가 계속된다고 가르쳤다. 계속되는 창조는 창조주의 지혜에 대해 피조물이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또한 자연질서의 존재를 보장한다고 보았다. 하느님은 절대주권을 가지고 그가 창조한 만물을 움직인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주에 대해 행사하는 절대적 통치는 각각의 존재가 그 본성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하는 창조주의 섭리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율성은 이성적 피조물에게서 가장 높은 형태로 실현되어 있다. 지적·의지적·신체적으로 실존하는 인간은 문자 그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파괴되지 않으며, 오히려 바로 그 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피조물의 완전성으로부터 어떤 것을 분리시키는 것은 창조적 능력의 완전성 그 자체로부터 그것을 떼어내는 것이다." 신비한 원리이기도 한 이 형이상학적 공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보여준 영성의 핵심이다(자유의지).
그에 대한 평가
? 토마스 아퀴나스는 1323년 성인으로 추증되었고, 1567년 공식적으로 교회박사로 불리게 되었으며, 19세기말에 현대주의를 둘러싼 위기가 조성되자 정통의 주창자로 공표되었다. 토마스는 그리스 과학·문화·사상의 재발견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세계가 교리적 위기에 직면했던 시기에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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