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

[스크랩] 종교회의

@로마의휴일 2007. 10. 20. 10:28

The Background of the Creed

 C ‧ O ‧ N ‧ T ‧ E ‧ M ‧ P ‧ O ‧ R ‧ A ‧ R ‧ Y    T ‧ H ‧ E ‧ O ‧ L ‧ O ‧ G ‧ Y

니케아 공회의     The Council of Nicaea I. 325. 5. 20

< 니케아 공회의 소집 배경과 이유  >

■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로마는 광대한 영토의 확장과 많은 이민족의 문화와 혼합한 제국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교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교회 안에는 교리적인 논쟁으로 인한 내분과 갈등이 일기 시작하였고 황제는 이를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300동안 초대교회에서 믿어왔던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제정이 되어 있지 않아 혼돈을 빗어내게 된 것인데, 황제는 처음으로 니케아에서 에큐메니칼 공회의를 두 달간 진행하게 된다.

<  니케아 공회의 논의 내용  >

■  주제: 「 예수가 신으로 동일시 되어야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교회교리에 대한 이견을 판단.

* 아리우스의 주장 :  예수는 신이 아닌 인간의 피조물이므로 예수는 신으로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동방교회에서 발생된 주장)

* 아타나시우스의 주장 :  예수는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신으로서 성부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이다.

■  부활절의 날자 (봄을 맞아 첫 번째 만월 후 첫 번째 주일 : 폴리캅과 소아시아 지방은 니산월 14월로 주장)

■  20개의 교회 계율 제정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새로운 제국의 구획에 따른 새로운 교회의 조직 즉 교구 관활권 확정 :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으로 )

■  성직자의 직위

■  공적인 참회에 대하여

■  분열자들과 이단지들의 재입회에 관하여

■  예배의식의 규정 등이 다뤄졌고 아리우스의 견해를 누르고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 본질 (homoousios)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The Council of Nicaea II. 787.

■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에큐메니칼 공의회. 당시 섭정(攝政)이던 동로마제국의 황후 이레네 2세가 총대주교 타라시우스를 책동하여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聖畵像) 숭배, 남녀공주수도원(男女共住修道院)의 금지 등에 관한 조규(條規) 20개 조가 의결되었다. 그러나 성화상에 관한 교리는 서유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켜 얼마 동안 그 승인이 보류되었다.

<  니케아신조  >

■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아버지, 한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 빛으로부터 나신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 창조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신 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존재하게 된,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고 성육신하셨으며, 인간이 되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제 3일에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오신다. 또한 성령을 믿는다. 그리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는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과 '그가 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또 다른 위격 혹은 본질로부터 나셨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이 변화되거나  변질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  사 도 신 경  >

■  사도 신경은 신약성경의 편집과 때를 같이하여 정해졌다. 사도 신경이란 사도들이 지은 신경이란 뜻이 아니고 사도들의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상 사도 신경은 사도들이 떠난 뒤 오랜 후에 정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신경은 사도들에 의해 지어졌다는 전설이 오래 동안 믿어져 왔다.

■  신경이란 (크리드 Creed) 란 말로 라틴어 크레도(Credo)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 뜻은 “나는 믿는다”라는 뜻이다. 또한 신경이란 신앙적 조건의 설명이다. 당시 영지주의자와 교회와의 투쟁때문에 사도 신경이 생기게 되었다. 이 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에 총체라고 할 수 있다.

■  사도 신경은 200년경부터 세례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면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의 신앙을 사도신경을 통하여 고백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세례를 위한 신앙 고백이 점차 발전하여 360년에 아리안 고백에서 처음으로 “음부로 내려가사”가 첨부되었고 750년경에 정식으로 삽입이 되었다. 또한 “성도의 교제”란 말은 650년 이후에 삽입되었으며 “영원히 사는 것”이란 말은 어거스틴이 사용한 신경에서부터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 신경은 니케아시대에서 부터 일반적으로 믿어 오던 것을 좀더 보충하여 세례문답 뿐만 아니라 그노시스(영지주의)이단을 위시한 여러 가지 잘못된 교리를 구별하기 위한 정통적 신앙고백으로 점차 사용하게 되었다.

<  결  론  >

  이 공의회를 통해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은 정통교리로 확정되었고,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나 로마 북방 변두 게르만 민족에게 전파됨. 예루살렘 사도 회의 다음 가는 최초의 교회 회의였던 니케아 공의회는 정통적인 신학 정립에 있어서 교회사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381

<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소집 배경과 내용  >

■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하여는 확정지었으나 성령의 신성에 관하여는 언급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381년에 제2 기독교 총회의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제 2차 에큐메니칼 공회의)  이 회의에서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고 또한 성령의 신성에 관하여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삼위일체 교리가 정리되고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항목이 되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다만 위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계획하신 분이시고 예수님은 그 계획을 이루신 분이시며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일을 하신다. 특별히 이 공회의를 통해서 성령론에 대한 부분이 많이 보완되어 성령의 신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 의미가 확고히 되었다. 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란 표현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의 동일을 드러내 주고 있다.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나오시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령은 구별된 위격으로서의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독립적인 자리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분으로 소개되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라는 표현을 통해서 위에서 말한 내용, 즉 삼위가 동질일 뿐만 아니라 동등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삼위일체 교리가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온전히 정립되었다.

<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특징 및 영향  >

■  이 신조는 "초대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사용되어 세례예식 때에 고백되었고 또 성만찬 예식의 고백으로서도 6세기부터 사용되다가 칼케돈 공회 후에는 모든 신조들 가운데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  결  론  >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동방교회의 형식으로 된 초기의 신조이지만 니케아 회의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성령에 관한 언급에 있어서도 사도신경보다도 더 명확하고 자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동질(coessential), 동등(coequal), 창조 이전의 발생, 참하나님의 참 하나님, 발생되고 피조되지 않으심 등과 같은 용어들은 동방교회가 반세기 이상 끌어오던 아리안 이단과의 피나는 싸움 끝에 얻어낸 트로피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욱이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으며(단지 첫 두 항목을 약간 수정했고) 가장 중요한 점은 니케아 신조에서 문제시되었던 성령에 대한 문제가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칼케돈 공의회    The Council of Chalcedon  451

<  칼케돈 공의회 소집 배경과 내용  >

■  니케아 공의회(325 제 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을 통해 성자와 성부의 관계를 규명하였고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제 2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바로 규명하므로서 아타나시우스의 신조를 인정, 정통교리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삼위일체의 제 2격인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어떻게 그의 인성과 관계될 수 있는가?」, 「진실로 하나님이신 그가 어떻게 동시에 인간이 될 수 있는가」 또한 「그가 어떻게 인간적 조건하에 살수 있으며 사람의 형체로 나타났는가?」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의 문제였다. 이 문제로 인하여 451년 제 3차로 세계적 종교회가 니케아 근처의 칼케돈에서 약 600여명의 감독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진행되었다.

■  칼케돈 공의회에서 논의된 사항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의 하나님이시오 완전한 인성을 가진 참 사람으로 교회는 신앙할 것을 결의 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두 성품은 그리스도 자신의 관계에 관하여 혼돈이 없고 변함이 없고 분리가 없고 불화가 없는 두 성품을 가지셨지만 한 인격이시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만 생각한다면 근본주의로 흐르기 쉽고 사람으로만 생각한다면 신신학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의 증언과 그 인격의 생활에서 보여 주듯이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이요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또 사람이신 것을 믿는 것이 복음주의적 전통신앙이다.

<  칼케돈 공의회 신조  >

■  그러므로 교부들을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한 분이신 유일한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또한 사람으로서 완전하시며(teleion),  그는 실제로 하나님이시며 또 실제로 사람이시며, 합리적인 영혼(Psyches logikes)과 몸을 가지고 계신다.

■  그의 신성에 관한 한 그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타고 나셨고 또 그의 인성에 관한 한 그는 다만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시간(aionon)이 시작하기 전에 그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독생하였고 그리고 그의 인성은 우리의 본질을 타고 나셨다. 이처럼 다만 죄를 제외하고는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  시간이 시작하기 전에 그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독생하셨고 그리고 지금 마지막 날에 와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니, 그의 인성 (anthropoteta)면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이시다. 

■  우리는 이 한 분의 유일하신 그리스도-성자, 주, 두 가지 본성(physesin)을 타고 나신 독생자를 인정하며, 이 두 가지 본성이 혼동(asunkutos)되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거나(atrepotos), 두 다른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adiaretos), 양성의 영역과 기능에 따라 각각 대립(achoristos)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각성의 특성은 연합으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 않는다.

■  오히려 각성의 고유성(idiotetos)이 보존되고 양성이 한 품성과 한 자질(hypostasis)로 일치를 이룬다. 양성은 갈라지거나 두 품성으로 분리될 수  없고 오직 합하여 하나님의 한 분이시며 유일하게 독생하신 로고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옛 예언자들도 이렇게 증거하였고 주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고, 교부들의 신조도 이렇게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보름스 종교회담    The Disputation of Worms   1521

<  보름스 종교회담 소집 배경과 내용  >

■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면서 신학교수인 루터가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대학의 성교회 정문에 게시하였다. 이는 마인츠의 대주교 교회의 알브레히트가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판매한 면죄부에 대해 루터가 그 성사적 효과를 신학적으로 문제 삼은 것이었다. 예상 밖으로 이것은 유럽 전체에 대운동으로 파급되었고 가톨릭교회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므로, 인간의 영혼 구원이 인간의 선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95개조 논제>는 경제적으로 로마에 의해 많은 수탈을 당하여 온 독일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문제가 일개 수도사가 제기한 신학논쟁에서 독일 국민전체의 정치적 ·경제적인 문제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당초 교황 레오10세는 이 문제를 경시하였다가 문제의 해결이 어렵게 되자 유화책을 강구하기도 하였으나, 루터는 1519년의 J.에크와의 라이프치히 논쟁 때 결정적으로 가톨릭교회와 정면대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이 논쟁에서 루터는 보헤미아의 후스를 본떠 교황과 교회회의의 可謬性을 주장하고 그 권위의 절대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1520년 6월 드디어 루터에 대한 파문이 단행되었다.

■  1521년 1월 로마 교황청은 루터에 대한 파문장 "데체트 로마눔 폰티피쳄"(Decet Romanum Pontificem, 로마 대주교에 속하다)으로 루터를 교회로부터 파문하였다. 이 파문장으로 인해 루터는 로마로 소환되어 교황의 심판대 앞에서야 했는데 이에 앞서 프리드리히 현공이 루터의 판결을 독일 영토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정치세력의 신장으로 황제의 국민이 교황에게서 심문을 받기 이전 황제에게 호소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1521년 4월 루터는 보름스(Worms)의 제국의회(칼5세)에서 루터는 자신의 신앙을 관철하였다.

<  보름스 종교회담 이후의 상황  >

■  보름스 이후 종교개혁적인 사상에서 종교개혁 운동으로 되었다. 작센 선제후국, 고지 독일지역 그리고 자유도시 그리고 독일 국경을 넘어 네덜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그리고 동 프로이센까지 이 운동은 퍼져 나간다.  마틴 부처(Martin Bucer)와 취리히의 훌드라이히 츠빙글리(Huldreich Zwingli)와 같은 다른 종교개혁자들도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  보름스 종교회담 이후 종교개혁운동은 루터가 소위 "광신자들" (Schw rmer)이라고 일컬은 과격한 한 파를 갖게 되었다. 이들은 무력으로 복음에 대한 직접적인 자유를 교회와 정치적 관례에 이식시키기를 원했다.

트렌트 공의회    The Council of Trent   1545

<  트렌트 공의회 소집 배경  >

■  당시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는 공의회 수위설에 대한 두려움과 교황령의 문제로 인하여 공의회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다. 칼 5세는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와의 전쟁에서 승리(1526)한 뒤 독일로 가려했으나 프랑소아 1세가 재차 전쟁을 선언하고 교황이 그 편에 섰다. 칼 5세는 교황이 즉각 동맹에서 손을 떼지 않으면 교황을 공의회에 출두시키겠다고 위협한 뒤 군대를 로마로 진군시켰다.

1526년 5월 6일 로마를 점령한 난폭하고 거친 스페인군과 독일 용병들로 인해 강도와 약탈과 살인이 몇 주간 동안 영원한 도시 로마에 만연됐다. 「로마 약탈 점령(Sacco di Roma)」은 대재난이었다. 그것은 교황청을 속죄와 회개로 경고하는 하느님의 시련이었고 로마의 문예부흥 활동을 종결시킨 동시에 개혁을 시작하게 한 계기가 됐다.

바오로 3세(1534~1549) 교황에 이르러 비로소 공의회와 개혁에 대한 전망이 밝아졌다. 교황은 일련의 개혁 투사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개혁위원회를 구성했다(1536). 마침내 1545년 3월 15일 소집된 공의회 첫 회의가 12월에 이뤄졌다.

<  트렌트 공의회의 내용  >

18년간 3개 회기로 실시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약 18년간에 걸쳐 이탈리아의 북부 트리엔트에서 개최된 이 공의회는 종교개혁으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에 대하여 정당성회복을 위해 이뤄졌다.  공의회는 3개 회기로 나눠진다.

■  제1회기(1545~1548)

교부들은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주장을 이단으로 배척하고 성서와 성전(교회) 모두를 신앙의 원천으로 확인했다. 성서의 해석은 교회만이 권위를 가짐을 명백히 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은총 절대설과 정의 가산설을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에 대한 정의를 규정했다. 성사에 대한 교리도 이때 규정됐다. 첫 회기는 황제 칼과 교황 사이의 관계 악화로 중단됐다.

■  제2회기(1551~1552)

바오로 3세에 이어 율리오 3세 교황이 즉위해 속개함. 성체성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과 실체변화,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비밀고해, 보속 등의 교리가 정의됐다. 2기에는 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일의 주교들이 참석했고 프로테스탄트들도 참석했다. 그런데 이들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지금까지의 결정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공통된 토론의 토대가 없었음이 명백해졌고 교황은 프로테스탄트의 요구에 대해 더 이상 토의하는 것을 금했다. 이어 독일 제후들의 봉기로 공의회가 중단됐다.

■  제3회기(1562~1563)

2기가 끝난 뒤 10년 후에 이어진 제3기에서 가장 중요한 심의 대상은 성체성사와 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 관한 것들이었고 이에 대한 교리가 규정됐다. 그 외에도 모든 성인의 통공, 성인 유해의 공경, 연옥, 대사, 성화상의 사용, 교구 신학교 설립, 주교 임명, 교구 시노드, 강론 등에 대한 교령이 반포됐다. 199명의 주교와 7명의 대수도원장, 7명의 수도회 총장들은 수많은 교령과 개혁령을 서명해 교황에게 보냈다. 바오로 4세는 1564년 1월 26일 모든 교령과 개혁령을 예외없이 승인했다.

도르트 교회회의    The Synod of Dort   1618

<  트렌트 공의회 소집 배경과 내용  >

■  도르트(정식 이름은 도르드레흐트)에서 열린 네덜란드 개혁교회 총회(1618. 11. 13~1619. 5. 9).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려 했다. 1610년 야콥스 아르미니우스를 지지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견해를 담은 다섯 항목의 진정서를 국회에 제출했는데 이 때문에 네덜란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항변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의회는 이 항의서를 심의하기 위해서 도르트 교회회의(1618~19)를 소집했다. 이 항의서는 다음의 5개 조항을 선언했다.

①   심판날에 있을 하느님의 선택과 영벌은 신앙을 갖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합리적으로 결정된다.

②   속죄는 본래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하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만 유효하다.

③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하느님의 뜻에 응답할 수 없다.

④   은총은 거부할 수 있다.

⑤   신자들은 죄를 거부할 수 있으나 은총에서 멀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 항의서의 핵심은 인간은 존엄하므로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엄격한 칼뱅주의자들의 예정설, 즉 구원받을 사람을 하느님이 미리 뽑거나 선택한다는 교리를 거부했다. 항변파에 반대한 사람들은 프란키스쿠스 고마루스를 지지하는 고마루스파였는데, 고마루스는 엄격한 칼뱅주의 입장에서 아르미니우스와 신학논쟁을 벌인 네덜란드 신학자였다. 도르트 교회회의에는 고마루스파의 네덜란드 대표들만이 아니라 독일·스위스·영국의 개혁교회 대표자들도 참석했다. 애초에 이 회의는 예정설에 대해 모든 개혁교회의 동의를 이끌어낼 계획이었지만, 실제로는 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  아르미니우스주의: 네덜란드 레이덴대학교의 개혁주의 신학자 야콥스 아르미니우스(1603~09 재직)가 주장.

칼뱅의 예정설에 대해 자유주의적인 반동으로 일어난 그리스도교 신학운동.  17세기초에 시작되었고, 하느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성서와 교리문답서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문제와 서적의 검열권 등을 다루었다. 그 뒤 항변파 대표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항변파는 회의가 정한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교회 회의에서는 항변파의 신학을 연구한 후 이 교리가 성서에 어긋난다고 선언하고 도르트 교회법을 만들었다. 이 교회법은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올바르다고 확인된 교리와 함께 항변파의 오류도 상세히 다루었다.  도르트 교회법은 벨기에 신앙고백 및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함께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북아메리카 그리스도 개혁교회의 신학적 기초가 되었다 이 교회회의에서 올바르다고 확인된 교리들이란,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   제한 속죄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

<  결  론  >

    네덜란드 항변파들은 도르트 교회회의에서 단죄당하고 한동안 정치적 박해도 받았으나 1630년에 이르러서는 법으로 자유를 보장받았다. 그들은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실질적으로 자유주의화하는 경향을 옹호해왔다. 18세기에 존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편집한 〈아르미니우스지(誌) The Arminian Magazine〉에서 "하느님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란다"고 썼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웨슬리의 종교운동에서 발전한 감리교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으며, 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미국 유니테리언주의를 탄생시켰다.

출처 : Prisc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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