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공회의 The Council of Nicaea I. 325. 5. 20
< 니케아 공회의 소집 배경과 이유 >
■ 콘스탄티누스황제는 로마는 광대한 영토의 확장과 많은 이민족의 문화와 혼합한 제국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교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교회 안에는 교리적인 논쟁으로 인한 내분과 갈등이 일기 시작하였고 황제는 이를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300동안 초대교회에서 믿어왔던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제정이 되어 있지 않아 혼돈을 빗어내게 된 것인데, 황제는 처음으로 니케아에서 에큐메니칼 공회의를 두 달간 진행하게 된다.
< 니케아 공회의 논의 내용 >
■ 주제: 「 예수가 신으로 동일시 되어야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의 교회교리에 대한 이견을 판단.
* 아리우스의 주장 : 예수는 신이 아닌 인간의 피조물이므로 예수는 신으로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동방교회에서 발생된 주장)
* 아타나시우스의 주장 : 예수는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신으로서 성부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이다.
■ 부활절의 날자 (봄을 맞아 첫 번째 만월 후 첫 번째 주일 : 폴리캅과 소아시아 지방은 니산월 14월로 주장)
■ 20개의 교회 계율 제정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새로운 제국의 구획에 따른 새로운 교회의 조직 즉 교구 관활권 확정 :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으로 )
■ 성직자의 직위
■ 공적인 참회에 대하여
■ 분열자들과 이단지들의 재입회에 관하여
■ 예배의식의 규정 등이 다뤄졌고 아리우스의 견해를 누르고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 본질 (homoousios)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The Council of Nicaea II. 787.
■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에큐메니칼 공의회. 당시 섭정(攝政)이던 동로마제국의 황후 이레네 2세가 총대주교 타라시우스를 책동하여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聖畵像) 숭배, 남녀공주수도원(男女共住修道院)의 금지 등에 관한 조규(條規) 20개 조가 의결되었다. 그러나 성화상에 관한 교리는 서유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켜 얼마 동안 그 승인이 보류되었다.
< 니케아신조 >
■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아버지, 한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 빛으로부터 나신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 창조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신 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존재하게 된, 아버지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고 성육신하셨으며, 인간이 되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제 3일에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오신다. 또한 성령을 믿는다. 그리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는 그는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과 '그가 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또 다른 위격 혹은 본질로부터 나셨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이 변화되거나 변질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 사 도 신 경 >
■ 사도 신경은 신약성경의 편집과 때를 같이하여 정해졌다. 사도 신경이란 사도들이 지은 신경이란 뜻이 아니고 사도들의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상 사도 신경은 사도들이 떠난 뒤 오랜 후에 정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신경은 사도들에 의해 지어졌다는 전설이 오래 동안 믿어져 왔다.
■ 신경이란 (크리드 Creed) 란 말로 라틴어 크레도(Credo)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 뜻은 “나는 믿는다”라는 뜻이다. 또한 신경이란 신앙적 조건의 설명이다. 당시 영지주의자와 교회와의 투쟁때문에 사도 신경이 생기게 되었다. 이 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에 총체라고 할 수 있다.
■ 사도 신경은 200년경부터 세례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면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의 신앙을 사도신경을 통하여 고백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세례를 위한 신앙 고백이 점차 발전하여 360년에 아리안 고백에서 처음으로 “음부로 내려가사”가 첨부되었고 750년경에 정식으로 삽입이 되었다. 또한 “성도의 교제”란 말은 650년 이후에 삽입되었으며 “영원히 사는 것”이란 말은 어거스틴이 사용한 신경에서부터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늘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 신경은 니케아시대에서 부터 일반적으로 믿어 오던 것을 좀더 보충하여 세례문답 뿐만 아니라 그노시스(영지주의)이단을 위시한 여러 가지 잘못된 교리를 구별하기 위한 정통적 신앙고백으로 점차 사용하게 되었다.
< 결 론 >
■ 이 공의회를 통해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은 정통교리로 확정되었고,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나 로마 북방 변두 게르만 민족에게 전파됨. 예루살렘 사도 회의 다음 가는 최초의 교회 회의였던 니케아 공의회는 정통적인 신학 정립에 있어서 교회사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