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방법적 원리로서 ‘상황’에 대한 기초신학적 이해
송용민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기초신학)
1. 들어가는 말
2. 신학의 원리로서 ‘기초신학’의 필요성과 기능적 과제
3. ‘상황’에 대한 신학적 이해
1) ‘상황(Kontext)’에 대한 어의적 고찰
2) 그리스도 신앙의 자리로서 ‘상황’의 다양성
3) 그리스도교 복음과 상황과의 해석학적 순환관계
4) “믿는 이들의 신앙감각(sensus fidellium)”과 ‘상황’의 상호 연관성
4. “상황적 기초신학”의 원리와 형태
1) 신학적 배경
2) 원리와 형태
3) 상황적 기초신학에 대한 비판과 남은 과제들
5. 다원적 종교사회인 한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신학발전을 위한 몇 가지 제언
6.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교 신학은 역사의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에 대한 깊은 영성적 사색과 이성적 성찰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의 자기이해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인간 삶의 정신영역이 아닌 생(生)의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을 하느님의 계시의 장(場)로 이해한 그리스도교 신앙사건 자체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하느님과의 만남의 자리로 이해한다. 그 중심에는 역사의 현장을 살아간 예수 그리스도, 즉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되어 묻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가 하느님 곁에 머물면서 파멸될 수 없는 새로운 실존을 살았고, 이 새 삶이야말로 죽음과 죄를 완전히 극복할 미래의 새로운 희망의 약속임을 깊이 깨달은 그의 제자들의 고백과 증언이 자리 잡고 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나자렛 예수는 유대교의 상황 안에서 유일무이한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실천하고 가르친, 그래서 메시아 - ‘그리스도’라고 고백되어진 분이셨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러한 나자렛 예수를 통해서 인간의 하느님 은총에로의 의타적 실존, 혹은 칼 라너가 말한 “하느님에게로의 정향본성(定向本性) (Gottesverwiesenheit - potentia oboedientialis)”이 가장 완전하게 드러났음을 인간의 이성(理性) 앞에서 책임 있게 증언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역사 안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신 “하느님의 자기비허적 사랑”의 실체를 인류 역사 안에서 해명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신학의 고전적인 표현으로 잘 알려진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fides quaerens intellectum)”으로서의 신학이 지닌 이러한 중심과제는 시대의 변천 속에서 다양한 신학적 원리들에 의해서 개진되고 성찰되어왔다. 교회의 본질적인 선교적 사명(마태 28, 29)에서 출발한 신앙의 변호(Apologie)와 이단과 이교사상에 맞서서 학문적 입장에서 교회를 옹호하려던 교부시대의 ‘호교론(Apologetik)’에서부터 중세의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는 스콜라 신학을 넘어 17세기 계몽주의 이후 합리적 이성주의와 무신론적 회의주의에 맞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Fundament)와 원리(Prinzip)을 발견하고 이를 학문적 방법으로 해명하려는 ‘기초적 신학(Fundamentale Theologie)’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신학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자기계시를 해명”하기위해 몰두해 왔다.
19세기 초 교의신학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신학의 한 과목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기초신학”의 발전은 진리에 대한 이성적 합리성(合理性)을 강조하는 시대적 사조에 맞서 신앙행위를 하느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인간의 진리에로의 결단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해석하려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호교론적 배경에서 출발하였다. 신앙을 자명하게 전제하지 않으면서도 신앙행위가 인간의 이성에 납득 가능한 행위임을 유추해내려는 신학적 노력은 신앙의 근거이자 여타의 신학적 원리들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 되는 하느님의 계시사건을 신학의 독자적 영역으로 다루려는 시도에 무게를 실어 준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기반들과 전제조건들을 ‘신앙적 이성(信仰的 理性)’이라는 인간의 자기이해의 관점에서 성찰을 시작한 기초신학적 관심은 20세기 들어서면서 하느님의 계시가 시공의 범주와 무관하게 단순히 ‘발생’하지 않고, 이를 수용하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지향한다는 인간학적 통찰로 말미암아 이전까지 신앙의 권위와 하느님 중심(Theozentrik)’의 신학에서 인간중심의 신학구조(Anthropozentrik)로 중심이동을 하고 있다. 이는 다양한 인간학적 연구의 성과들, 즉 철학과 정신과학의 업적이 이루어낸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회과학적 인간연구의 성과들을 신학의 원리로 수용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인간학적 관심의 수용은 오늘날 기초신학이 지닌 “신앙의 합리적 해명”이란 과제를 더 이상 “철학적 이성의 합리성과 명증성”이란 관점에서가 아닌 인간에 대한 전인적(全人的) 이해, 즉, 감성과 이성, 의지의 통합적인 사유를 전제한 인간의 자기이해라는 통찰을 통해 접근하려는 다양한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하느님의 계시사건을 수용하는 인간의 체험과 그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상황들(context - 독일어 Kontext)’에 대한 관심의 확대는 신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거를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를 현실의 삶 안에서 ‘체현(體現)’하는 것임을 알게 해주었다. 즉, 신앙의 근거를 해명하는 신학은 본성적으로 신앙을 수용하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향해 제약된 언어적 형태와 사유방식을 통해서 복음을 전달하고 선포해야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과거의 시대와는 사뭇 다르다. 종교의 다원주의와 가치관의 상대주의의 위협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본질적 과제인 ‘복음 선포’(마태 28, 19)와 현대시대의 다양한 “문화의복음화”의 소명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가 직면한 다양한 인간적 상황들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신앙을 단순히 종교적 열정과 신심으로 매몰시키지 않으면서 오히려 “인간의 전인적 구원과 완성”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종교-문화적 상황들을 신학의 중심으로 돌려놓아야 함을 말해준다. 이른바 신앙의 전달 가능성을 연구하는 ‘선교적-호교적 신학’은 여전히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과 근거에 대한 이성적 해명을 전제로 한 기초신학의 본질적 과제와 더불어 중요한 기초신학의 과제임엔 틀림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기초신학이란 과목이 지닌 중요성과 하느님 계시와 인간의 신앙을 규정하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신학적 의미들을 규명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한국이라는 다종교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지닌 본질적인 정체성을 발견해 내는 데 기초신학의 역할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통교능력에 대한 관심을 신학의 중심에 두는 “상황적 기초신학(Kontextuelle Fundamentaltheologie)”에 대한 이해를 통해 미래의 한국 신학의 방향과 과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2. 신학의 원리로서 “기초신학”의 중요성과 기능적 과제
신학의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 신앙의 합리적 해명과 전달 가능성에 대한 성찰이다. 신학은 자신 안에 내포한 양면적 과제, 즉 전달하고자 하는 신앙의 내용에 대한 이성적 합리성에 근거한 확신과 아울러 이를 동시대의 사상과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표현과 방법들을 발견해야 한다. 이러한 이중적 과제를 떠맡은 그리스도교 신학은 오랜 시간동안 희랍 철학에 바탕을 둔 호교론적 교부철학과 형이상학적 종교적 바탕 위에서 개념적-합리적 방법의 학문성을 강조한 중세의 스콜라 신학의 도움을 받아왔다. 이른바 타종교나 타문화에 대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우위성을 드러내던 그리스도교 절대 진리주장(Absolutheitsanspruch)은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던 중세 스콜라철학의 바탕에서 자명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성의 계몽” (칸트)을 부르짖던 17세기 계몽주의 이후 밀어닥친 다양한 종교와 계시비판들을 마주하게 된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 이성적 합리주의와 여기에서 기인된 무신론적 회의주의와 불가지론에 맞서서 기존의 권위(Auctoritas)와 이성(Ratio) 을 중심으로 한 스콜라 신학의 그늘에서 벗어나 시대의 이성에게 납득 가능한 방법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희망의 근거에 대해 언제라도 답변해야 할”( I베드 3, 15) 소명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초부터 강하게 제기되어온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거에 대한 해명을 추구하는 ‘기초신학(Fundamentaltheologie)’이란 과목의 출현은 신앙의 기초에 대한 이성적-합리적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호교론적(Apologetik)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교의신학(Dogmatik)과는 구분된 새로운 신학의 방법론으로서 주목을 받게 된 기초신학의 등장은 당시의 “종교적 근본주의”에 대한 비트켄슈타인의 “철학적 근본주의 비판”의 영향을 받아 독일의 신학자 요한 세바스챤 드레이(Johann Sebastian Drey 1777-1853)를 시작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문제에 대한 통찰과 이성적 해명을 통해 신학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려는 노력과 결부되어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기초신학이 계몽주의의 계시비판에 대한 신학의 힘겨루기에서 시작되어 해석학적 연구와 더불어 자발적인 자기결정을 중시하는 근대 정신과학의 업적과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말해준다. 새로운 방법론의 출현은 기존에 하느님 계시의 절대권위에 의존한 스콜라 신학의 한계를 넘어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대사회의 이성과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새로운 신학적 흐름을 낳게 하였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이러한 기초신학적 관심은 나아가 ‘해석학적 통찰’을 통해서 등장한 인간의 ‘내재적-자기이해적(intrinsezistisch)’ 방법을 통해 그리스도 신앙과 신학의 근거를 해명하고 그리스도교의 진리주장을 인간의 자기이해를 통해 근거 짓는, 이른바 신앙을 이성 앞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신학적 소명”으로 집약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소명”을 넘겨받은 시대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기초신학적 성찰은 근세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다양한 관심들이 제각기 주장되고 있는 정신과학의 발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그 성격과 한계가 명시적으로 규정되지 못한, 그래서 아직도 그 정체성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는 신학의 한 과목으로 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기초신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후 서구 중심의 신학적 풍토가 탈서구적 구조를 지향하는 제3세계 교회 -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 는 서구적 언어와 철학적 사유로 각인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국의 전통과 문화의 맥락 안에서 새롭게 이해하여 복음이 수용되는 ‘상황들’에 맞게 해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본래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매여 있는 복음 선포의 언어적 성격을 통찰한 이들의 신학의 해석학적 수용은 기존 신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신학의 자리, 즉 상황들(context)”을 신학적 방법론의 전면에 부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제3세계 신학자들과 서구의 몇몇 신학자들은 하느님 체험이 구체적인 인간의 상황들과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간파하고 새로운 상황에서 체험되어지는 그리스도 신앙진리의 핵심을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이점은 인간의 체험이 본성상 시공의 영역 안에서 언어로 “표현”되어지기 때문에 하느님 체험의 영역 역시 언어사건을 통해 표현되어지는 인간 체험의 장(場)에 대한 관심을 신학이 포기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제 신학에서는 그리스도 복음 (text)을 그 복음을 수용하는 인간의 다양한 상황(context)속에서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이런 텍스트와 컨텍스트간의 갈등구조가 완전히 신학 안에서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른바 ‘해석학의 시녀’가 되어버린 현대신학이 지닌 미완결의 개방성이 신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그리스도 신앙진리의 최종근거를 보편타당한 이성 앞에서 책임질 수 있는 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이른바 ‘나약했던 이성(schwache Vernunft)“을 새롭게 재건하여 철학적 신앙해명을 시도하는 독일 기초신학의 한 흐름은 ‘다원주의(Pluralismus)’로 귀결된 오늘날의 해석학적 신학의 위험 속에서 기초신학이 지녀야할 궁극적 과제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이렇듯 이성 앞에서 신앙을 책임져야할 기초신학은 오늘날 두 가지 신학적 흐름 속에서 자신의 과제를 대변하고 있다. M. Seckler는 기초신학이 “내부로 지향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기이해에 중점을 둔 기초적 신학(Fundamentale Theologie)”과 “외부로 지향된 그리스도 신앙의 전달과 자기주장에 중점을 둔 호교론적 신학(Apologetische Theologie)”의 양면적 과제가 있음을 직시하였다. ‘선교와 자기이해’, 즉 ‘신앙해명과 신앙전달’이라는 그리스도교가 지닌 양면적 과제를 기초신학이 그대로 떠맡아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두 측면은 기초신학의 과제 안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간과하거나 소홀하게 대할 수 없는 오늘날의 신학의 두 흐름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체적 체험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신학적 진술과 공동체의 실천을 긴밀히 연결하려는 ‘공동체 신학’과 신앙의 개별적 체험과는 무관하게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 원리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는 ‘아카데미적 신학’의 상호연관성을 기초신학이 직시하면서 기초신학은 마치 ‘집의 문지방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신학의 다양한 통로들을 서로 연계하고 상통할 수 있든 가능성들을 연구하는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늘날의 기초신학은 인류의 정신과학의 연구를, 특별히 철학, 사회학, 역사학 등을 신학의 대화 상대자로 받아들이고, 신학이 결국 해명해야할 하느님 계시의 궁극적 가능성과 인간의 계시 수용가능성을 자신의 본질적 과제로 받아들여 언제 어디서든지 시공간을 초월한 복음의 보편성을 우리 시대에 납득 가능하게 전달해야할 선교적 소명을 갖게 되었다. 이 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062-1965)가 제기한 새로운 신학적 방법론에 대한 요청으로 더 힘을 얻은 것이 사실이다. 공의회는 사목헌장(Gaudium et Spes)에서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GS 4)를 지니고 있는 교회의 임무를 역설하였고, 여기에 맞갖은 신학적 방법론의 변화가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이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것을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는 것을 기초신학의 주요과제로 삼는 신학적 연구가 바로 “상황신학(Kontextuelle Theologie)”이다. 상황신학이란 복음이 수용되는 다양한 상황들, 특별히 “문화적-종교적 영역을 신앙성찰의 출발점이자 목표로 삼는 것을 골자로 하는 연역적 신학 작업의 다양한 형식과 형태”를 의미한다. 이로써 상황을 신학의 중심주제로 다룸으로서 그리스도 복음의 수용 가능 조건들을 단순히 신앙의 절대성이나 이성적 합리성의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진리는 단순히 교회의 교도권적 권위와 철학에 뿌리를 둔 사변적인 성찰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인간의 체험이 어우러지는 “삶의 자리들, - 공의회의 표현대로라면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GS 1)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삶의 현장 속에서 해명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상황 (context)”을 신학이 방법적 원리로 수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상황”을 적극 수용할 수 있는 신학의 형태와 구조는 무엇일까? 아울러 이러한 기초신학적 요청이 오늘날 한국의 다종교 사회 안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성과와 과제는 무엇인가?
3. “상황 - context”에 대한 신학적 이해
1) “상황(context)”에 대한 어의적 고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상황’이란 말을 자주 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상황이 그래서...”.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여건’, ‘정황’, ‘처지’ 등의 말로 대신 될 수 있는 이런 생활언어들은 인간의 행동과 언어가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서 그저 단순히 ‘발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발생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조건들과 결과들이 복합적으로 연관되어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상황이 고려되지 않은 행동이나 언어가 동시대인들의 공통체험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장애가 되는지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본래 ‘상황(狀況 - Context; 독일어 Kontext)’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라틴어의 ‘contextere’ (함께 엮음), 혹은 ‘contextus’ =‘결합, 연관’에서 유래했고, 독일어의 Text (본문) 혹은 Textilien (직물)이란 단어와 연관을 지니고 있다. 이 단어들은 대개 ‘엮음’ ‘짜임새’, ‘구조’ 혹은 ‘맥락’ 등을 연상시키는 말들이다. 본시 언어학적으로 context는 “한 text(본문)의 문법적인 연관성을 표현하는 단어체계”를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어떤 것의 이해를 위해 구성적인 요소가 되는 연관성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구성의 기능으로서 context는 하나의 본문(text)의 연관성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현실화 시키는 해석의 틀을 제공하거나 본문을 해석하는 언어공동체에게 이해의 배경들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context란 단어의 활용은 오래전부터 문학작품들의 본문을 다루는데서, 말하자면 인식론, 해석학, 논리학의 영역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특별히 이 단어가 성서 해석학에서 문헌비판을 위해 중요하게 사용되었는데, 어떤 본문(text)이 실제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어떤 언어세계와 사유체계에서 다른 언어와 사유체계로 ‘번역되어질 때’ 일어나는 이해(理解- Verstehen)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중요한 도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본문 이해의 기능으로서의 context의 활용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한 것은 언어학에서 이 단어를 더 이상 “언어 내부의 짜임새(innersprachliche Umgebung)”가 아닌 “언어 이외의 상황(außersprachliche Situation)”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그리고 이 단어가 신학에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 인류의 정신과학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해석학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 해석학의 발달 안에서 통찰된 인간 현존재의 자기이해는 역사의 지평(Horizont)에서 인간이 자신의 생(生)의 의미(意味)를 묻고 체험(Erleben)하며, 자신의 역사성과 초월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했고, 이 점은 인간의 삶이 마주하고 있는 다양한 역사적 상황들에 대한 신학적 성찰로 이어졌다.
더욱이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 문화간과 종교간의 관계를 맺는 가운데 축어적(verbal)인 본문의 맥락들만이 아니라, 삶과 사회의 맥락들을 포함하고 있는 비언어적 방식의 번역과정을 통해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한 본문에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을 전달해 주는 훌륭한 도구이자 낮선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되는 어려움들을 극복하게 해주는 관건이 된다는 사실이 부각되었고, 이 점은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낯선 문화들 속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 그 문화에 친숙해지거나 복음의 뿌리를 내리는 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전제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른바 오늘날 제3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신학(Kontextuelle Theologie)”의 발전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여러 종교의 세계관, 철학, 문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체제의 점증하는 의식들에 직면하여 그때그때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환경공간 속에서 그 형태와 언어를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자체로부터 형성된 환경 속에서 우선적으로 자신을 실현했던 동안은 문화와 삶의 세계를 형성하는 본문(text)과 그의 실제적인 상황(context)이 상호 매우 밀접하였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그리스도교 신학이 복음이 전달되는 비신학적인 낯선 문화와 환경들을 만나면서 복음의 생명력 있는 전달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상황들’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신학적 과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2) 그리스도 신앙의 자리로서 “상황”의 다양성
상황(context)이 “그 안에서 무엇인가 존재하고 발생하는 상호교환적인 연관성들의 총체”라 할 때, 이러한 상호 연관성에 대한 신학적 통찰은 60년대 이후 활발하게 논의된 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과 2차 세계 대전 이후 등장한 다방면에 걸친 다원주의의 논의에서 출발하였다. 특별히 제3세계의 독립을 기점으로 오랫동안 제국주의적 성격을 띤 서구 중심의 신학의 틀에 질식해 온 제3세계 교회들은 탈서구화를 지향하면서 다원화된 시대정신 속에서 주체적으로 복음을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 사상체계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이 점은 신학의 중심을 서구의 철학적 이성을 중심으로 펼쳐진 “사변신학(思辨神學)”에서 구체적 인간의 상황들을 신학에서 충분히 고려한 “상황신학(狀況神學)”에로의 전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상황의 신학적 의미를 세분화 하여 신학의 중심 주제로 다룬 한스 발덴펠스(Hans Waldenfels)에 의하면 오늘날 그리스도 신앙이 자신을 이해하는 삶의 자리로서 상황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로, 사회-경제적-정치적 상황이다. 19세기 말엽 발전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 사회학은 유럽에서의 사회적, 정치적 구조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응답이었다. 그 광범위한 변화는 서구의 산업사회의 출현, 자본과 노동의 긴장,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새로운 무게 이동, 그리고 신흥 시민 계급으로 정치적 중요성의 이동에 따른 그리스도교 신학의 정체성에서부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현실에 대한 비판에 까지 미쳤다. 그러나 신학이 유럽 사회의 이러한 광범위한 변화가 지닌 문제점들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정작 보편적 신학의 틀에서 총체적으로 사회적 상황들을 고려한 새로운 신학의 요청을 충분히 소화해 내지는 못하였다. 더욱이 20세기 중반 이래로 운송기술과 정보기술의 광범위한 발전과 국제 사회 속에서 드러난 다양한 정치-사회적 양극관계들, 예를 들면, 가난/부, 자본주의/사회주의, 동/서, 남/북, 선진국/개발도상국, 지배자/억압자, 독재정치/민주정치 등은 제3세계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와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신앙의 선포되고 체험되는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들을 신학의 자리로 올바로 해석하기 위하여 주변학문들의 도움, 특별히 철학, 종교학, 사회학, 심리학 등의 인간 연구와 사회분석의 다양한 이론들을 수용해 왔다. 하지만 신학의 이러한 사회분석적 이론들의 수용이, 특별히 고전적 맑스주의 등의 이론적 전제들에 대한 검증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반성과 이 분석의 도움을 통해 결국에는 신학이 포괄적인 문화와 역사의 해석이라는 특별한 과제를 자각하게 되었다는 점은 오늘날 신학 발전에 중요한 잣대를 제공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모든 사회적인 요소들과 지속적인 상호관계와 상충되는 관심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종교의 사회적인 모습들을 지속적인 영의 식별을 통해서 그들이 지닌 미래의 비판적 가능성을 세심하게 묻고 외부로부터 오는 비판적인 물음에 답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둘째는 정신사적, 문화적 경향들이다. 현대세계의 정신사적인 가장 큰 특징은 문화적 다원주의의 경험이다. 다원주의(Pluralismus)란 “어떠한 상위의 단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인간의 현실이해의 다양한 관점들의 다양성과 병행 혹은 상반성”을 의미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다른 문화들과의 상호 맞대면을 통해서 자기의 문화가 상대화 되는 곳에서 자신의 규범적 힘의 상실을 체험하고 있다. 문화라는 개념은 더 이상 인간을 규정하는 불변의 요소라기보다는 인간의 다양한 삶의 가변적 요소들, 예를 들면 과학과 기술, 예술과 문학, 윤리와 법, 철학과 세계관, 종교들이라는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서술되어지는 경험적 범주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문화의 새로운 양태(樣態)들은 인간이 주체로서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학적 기획들을 위한 동기(動機)가 되는 동시에, 신학에 있어서는 신학의 주변을 엮고 있는 다른 정신사적 가치들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연구들, 예를 들면 역사과학, 언어학, 인간학, 인종학과 고고학 등의 도움으로 문화적인 상황과 그의 해명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점은 신학이 “사변적인 학문에서 특별히 학문의 주체에 중추적인 의미와 책임을 우선적으로 부여하는 귀납적이고 경험적인 학문으로 변화”하게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문화간의 대화를 통해서 유럽 중심의 신학은 타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초문화적인 보편성 주장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고, 이들 문화의 가치뿐만 아니라 종교적 신념 안에 있는 옳고 성스러운 요소들을 인정하였고, 신학적 다원주의를 위한 길을 열어 주었다. 더욱이 인간 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의 지나친 확대가 오늘날 서구 인간학의 무신론과 “하느님 콤플렉스”를 만들어 냈다면, 새로운 정신사적 변혁은 제3세계 신학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신학의 신중심주의(神中心主義)의 새로운 창조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온 “자연-문화, 인간-자연, 개인-사회, 언어-행동, 정신-물질, 자율-타율, 문화-타문화” 라는 상반된 관계성을 상호통교적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세 번째는 세계관적. 종교적 상황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지였던 서구의 문화 공간에서는 새로운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교가 종교개혁 이후의 교파간의 갈등으로 인해 여러 갈래의 그리스도교회와 공동체로 나뉘어져 있지만, 오늘날 독일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회 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일치에로의 의식(Ecumenical)이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서방 세계는 “비그리스도교화와 세속화의 과정, 하느님 신앙 없는 삶의 모습, 사실적인 무신론, 불가지론과 무신론적 인본주의로 상당히 각인”되어 있고, 서구 철학의 많은 형태 안에서 하느님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해에 있어서 다원성(多元性)은 성서적인 초기 사상들에게서 알려진 정당한 형태로서, “신학적 성향들과 교회의 구조들뿐만 아니라 획일적 경향들에 반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구상”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다원주의의 긍정이 “문화와 종교의 상대화(相大化)”을 초래하여 신앙 고백의 단일성을 위협하거나 신적 진리에 대한 구원적인 체험을 자의화(自意化) 할 수 있는 위험을 지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종교의식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타종교들의 다원주의에 대한 의식의 성장과 종교혼합적 하부문화를 발생시켜 오늘날 이른바 “신비술(esoteric)”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뉴에이지(New Age)”로 대표되는 현대의 신영성운동의 중심에는 인간의 내적 구원의 자력능력의 개발과 인격적 하느님 없는 자기 구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의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신학의 과제는 자명하다: 한스 발덴펠스는 말하기를, 첫째로 “그리스도교 신학은 타종교들과의 만남에서 그리스도교의 주장이 타종교 대표자들의 그것과 동일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 그리스도교적 종교학으로 격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둘째로, “그리스도교 신학이 타종교의 신앙인들과 커뮤니케이션과 협력을 통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삶의 증언을 함에 있어 타종교들과 문화들 속에 존재하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들과 사회. 문화적 유산들을 인정하고, 보존하며 촉진시키는가 하면(NA 2), 동시에 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주장을 따라야 한다” 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4) 그리스도교 복음과 상황과의 해석학적 순환관계
앞서서 언급한 그리스도 신앙의 삶의 자리로서의 상황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분명히 그리스도교 신학을 새로운 각도에서 전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는 했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쉽게 풀릴 수 없는 긴장관계가 남아 있다. 이른바 신학의 본문(text)과 상황들(context)의 해석학적 순환관계가 그것이다. 우선적으로 가장 큰 원칙을 말하자면 이렇다: “누군가가 상황(context)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는 무엇보다 먼저 본문(text)를 말해야 한다. 이 점은 다음의 원칙에도 적용된다. 비록 상황들이 새로운 본문들과 더불어 규정된다 하더라도, 상황은 결코 본문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본문이 무조건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다.” 이 점을 신학에 적용하면 이렇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수많은 상황들과 관련을 맺고 있고, 상황들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적응이, 즉 상황신학적 노력이 그리스도교 복음을 더 깊게 이해하고, 삶의 실천으로 이끌어 낼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의 본문인 ‘복음’을 만들어 내거나 대신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해석은 특별히 성서 해석학이 우리에게 전해준 중요한 원리와 무관하지 않다. 즉, 성서해석학이 일깨워준 두 가지 사실, 첫째로 성서가 더 이상 일방적으로 신적 영감으로만 저술되거나 인간적인 언어와 형태와 무관하지 않은 신앙 고백서라는 성서학적 통찰은 신학이 마주하게 되는 그리스도교의 본문인 복음이 인간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 둘째로 성서저자의 주변 환경과 성서 말씀을 듣는 이들의 다양한 역사적 상황들에 대한 관심이 그리스도교 복음의 원천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발전과정을 신학 안에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는 통찰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서의 “삶의 자리”에 대한 연구는 본질적으로 성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함이지 성서 본문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복음의 원초적 본문이 “선포와 신앙전승의 역사성”에 의해 이해되어 왔고, 이는 교의와 신학역사 뿐만 아니라, 교회와 신심의 역사에 까지 뿌리 깊게 영향을 미쳐 왔다는 점, 그리고 역사가 지닌 우연성(偶然性)이 신앙의 규범을 형성하는 데에도 한 몫을 했다는 점은 오늘날 신학이 역사적 상황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이런 관점은 인간의 이해의 사건이 역사의 통시성(通時性 - diachron)과 공시성(共時性 - synchron)의 역학관계와 맞물려 있다는 해석학적 통찰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사를 이해하지만, 이는 역사를 이끌고 있는 전체적 전망을 통해서 재해석 되고 있다는 역사이해의 순환관계를 말한다. 이런 통찰은 우리가 항상 원천으로부터 다른 한 시대로의 도약,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들 자신의 시대로의 건너뜀을 이룰 때 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신학이 견뎌야 하는 긴장관계가 있다. 규범으로 받아들여지고 고백되어지는 원천과의 회귀적 연계성은 신학을 늘 “지금-여기서” 움직이게 하는 동시에 반성(反省)하게끔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이러한 현대 정신과학적 통찰을 수용한 신학의 시대적 요청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현대의 사목헌장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임무를 완수하고자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DH 4304).” 이런 공의회의 현대 세계에 대한 적응(Aggiornament)은 기초신학의 새로운 방향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기초신학의 대헌장으로 불리는 베드로전서 3장 15절, 즉“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십시오”라는 희망의 근거에 대한 해명의 요청은 이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는 신학의 현실적 과제로 중심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스 발덴펠스는 이점을 이른바 신학이 지닌 “원추형의 긴장관계(Eliptisches Spannungsfeld)”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는 세 가지 단계로 설명될 수 있는데, 첫째로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전제가 되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초, 즉 복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과, 둘째로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본문인 “복음”을 듣는 현대인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반응, 즉 오늘날의 상황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점, 그리고 셋째로, 제각기 다루어진 신앙의 기초내용들을 성찰하여 결코 시간을 떠나 홀로 설 수 없고, 늘 시대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의 특성에 따라 그리스도 신앙을 늘 현재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의 과정을 원추형의 모델로 소개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출발점에서 다시 원래의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평면적인 순환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출발점이 그 보다 더 성숙한 원추형의 정점에 이르는 발전적인 순환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학을 상황에 적응시켜야 한다”는 상황신학적 요청은 그리스도의 본문(text)인 복음이 상황(context)을 만났을 때 풍요로운 성찰의 결실로 새롭게 이해된 복음으로 순환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지, 상황에 대한 신학적 관심이 본래의 복음을 대신하거나 잊게 해서는 안 됨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공의회의 언급과 관련짓는다면, “시대의 징표를 그리스도 복음의 빛으로 해명하는 것”이 신학의 임무이지 “그리스도 복음을 시대의 징표로 해석해내는 것”은 이른바 루돌프 불트만이 행한 “비신화화 구상(Entmythologisierungsprogramm)”의 모순을 반복하는 것이 된다. 사실상 오늘날의 다양한 신학적 다원주의에 근거한 다양한 방법론과 형태들뿐만 아니라 종교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러한 “신학의 지나친 자기 우상화의 위험”을 공의회가 지적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믿는 이들의 신앙감각(sensus fidelium)”과 “상황”의 상호 연관성
여기서 잠시 신학의 방법론적인 문제들을 잠시 벗어나 왜 이토록 “상황”이 그리스도교 신학 전개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지 기초신학적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신학의 긴 역사적 전통을 감안했을 때 오늘날의 신앙과 신학의 전환기만큼 그 변화의 정도가 크게 느껴지는 때는 그리 흔치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이런 신학의 방향전환에 결정적인 힘을 실어준 것이 계몽주의 이후 전개된 “인간학적 전환”이라는 정신과학의 혁명에 힘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배경에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교회의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잊어왔거나 외면해온 하나의 중대한 신학적 테마를 다시 되찾았다는 데 있다. 다름 아닌 “믿는 이들의 신앙감각(sensus fidelium)”이 그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헌장(Lumen Gentium)을 통해 교회 문헌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인정한 “신앙감각(sensus fidei)”은 초대교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신앙의 뿌리처럼 이어져 왔지만, 그 중요성만큼이나 신학에서 그다지 잘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에 속한다. 물론 여기서는 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신앙감각”이란 단어가 지닌 신학적 의미와 깊이를 다 다룰 수는 없기에 우리 주제와 관련해서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지적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신앙감각(sensus fidei)”이란 단어는 본래 “신앙(fides)”와 “감각(sensus)”이란 생소한 결합에서 파생되는 신학의 긴장관계를 잘 드러내 준다. 여기서는 인격적 신뢰행위로서의 “신앙”이 감각에 대한 본질적 요소라는 점을 전제했을 때 감각(sensus)이란 개념의 해석에 따라 드러나는 신앙형태의 두 양극성을 먼저 비교해 보는 것이 좋겠다. 우선 “감각(sensus)”이란 단어를 일반적으로 “감성적 느낌”이란 의미로 이해했을 때 신앙감각은 자칫 감각적으로 자극되는 것들에 대해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신앙의 느낌”(feeling of faith)으로 편협하게 해석될 위험이 있다. 이를테면 인간은 자신의 신앙적 태도를 감각적 느낌에 예속시키고 신앙을 선택적이고 자의적인 지각에로 제한시킬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러다보면 신앙은 감정과 관련된 인간의 영혼능력의 한 부분으로 전락되고, 이는 신앙행위가 감정뿐만 아니라, 이성과 의지적 실천을 포함한 전인적(全人的)행위임을 간과하게 만들어 신앙과 지성사이의 건강한 긴장관계를 외면한 주관적 느낌으로 곡해되거나, 현실적인 삶의 자리를 무시한 “신심주의(Fidelismus)”로 빠질 수 있게 된다.
다른 한 편으로는 “감각”(sensus)이란 용어를 오늘날 “지각적 행위능력(sense)”란 뜻에 앞서‘의미(meaning)’, ‘목적(purpose)’, ‘의식(mind)’이란 뜻으로 해석될 때 신앙감각은 “신앙의 의미” 혹은 “신앙의 목적”이란 의미로 전가되어, 마치 신앙이 인간 주체의 지적 이성을 통한 목적 달성이라는 작위적(作爲的) 노력이나 자기결정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신앙이나 회의주의에 빠지거나 “독백적 자기이해” 혹은 통교를 저해하는 “냉담적-자기중심적 신앙”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신앙행위의 양극성 속에서 “신앙감각”이란 개념이 올바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신앙행위가 감각과 어떤 상관관계에 있느냐를 명확하게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신앙은 감각이 지향하는 본질(本質)이고, 감각은 신앙을 받아들이는 통로(通路)”이다. 신앙행위는 결코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세상 저편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지 못한 지식의 결핍 현상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만나는 타인과의 “상호신뢰”라는 인격적 사건이자 실재(實在)를 대하는 인간의 전인적(全人的) 태도이다. 인격적 존재로서 인간은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자신의 존재나 타인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구체적인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결단해야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된다. 테오도로 슈나이더(T. Schneider)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실재를 긍정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게 되는데, 곧 희망의 형태로 각인된, 최소한 표현되지는 않지만 미래를 향해 자신과 타인의 삶이 완성되리란 믿음의 응답이 그것이다. 이러한 지평들은 학문적으로 인식되지는 않지만 ‘신앙 되어진다’, 즉 근본적인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거나, 실재의 전체에 자신의 발을 내딛는 것을 말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의 사건에서 재조명하여 (DV 5)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실재를 만나는 인간의 “지각능력(知覺能力 - Wahrnehmungsverm?gen)”에 바탕을 둔 인식방법과 권위를 재인식했다. 이에 따르면 신앙감각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그 계시의 구체적인 장이 되는 “지금-여기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표징들을 읽고 해석하며 이를 자신의 삶 안에서 구체적인 방법으로 “증언”할 수 있는 은사(카리스마)라는 것이다. 이 은사의 원리는 “진리의 영(요한 14, 17)”이시고, 이 성령의 움직임은 하느님을 향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선사된 초월성(Transzendentalit?t)의 근간이 된다. 그리고 이 초월성은 인간의 자연이성의 인식구조 안에서 발견되어진다. 이 말은 신앙이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의 인식의 범주에서 이루어지는, 하이데거의 말대로라면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이란 역사에로 피투(披投)된 현존재(現存在 - Dasein)로서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의 자기계시의 지향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계시와 신앙이해는 인간의 삶의 공간을 하느님 계시의 장으로 이해하는 토대가 되었고, 오랜 신학의 역사 안에서 이성적 사유의 필연성에 반대된다는, 그래서 불명료하고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왜곡되거나 신학의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던 “감각(sensus)“의 의미를 재성찰하게 하였다. 아울러 이 점에 뿌리를 박고 있던 신학적 주제들, 즉 “감성과 체험”, “신비와 직관”, “기억과 이야기”, “고통을 통한 지혜에 근거한 삶의 권위“등의 인간 삶의 영역들에 대한 신학적 가치들이 재발견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신앙감각”이란 신앙의 논리성을 지향하려는 인간의 지성적 능력이라기보다는, 본성적으로 하느님께로 정향(定向 Verwiesen-sein)된 인간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지각적 수용능력”을 통해 “진리와 선함,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고, 이를 간직하며, 삶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증언하여 마침내 절대 신비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려는 신앙의 “감수성(Sensibilit?t)”으로 이해 될 수 있겠다.
이런 신앙감각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서 강조하고 싶은 바는 다음과 같은 점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상황에 대해 갖는 관심은 단순히 현실적인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서 나오는 필연성만도 아니요, “신앙을 지성을 갖고 이해해 보려는(fides quaerens intellectum)” 오랜 신학적 과제에서 나온 것만도 아니란 사실이다. 오히려 상황에 대한 신학의 관심은 본질적으로 “내적 신앙의 지각능력,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신앙감각의 해석학적 순환관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말은 신앙감각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본질적으로 특정한 언어와 문화적 상황 속에 제약되고 각인되어 있으면서도 그 안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언어와 상황을 발생시키고, 새로운 하느님 체험구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감각’은 하느님의 계시를 수용하는 직접적 소인(素因)이고, 이런 감각이 지향하는 구체적인 삶의 시간과 장소는 신학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어, 그리스도 신앙이 “지금-여기서” 내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깨닫는 해석학적 과정임을 재인식하게 한다. 그래서 ‘신앙감각’을 신학의 주제로 삼는 신학은 당연히 “그리스도 신앙의 뿌리와 정체성에서부터 발출하는 신학적 노력”이며,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인간에게 현실 안에서 구원적 삶을 선사하는 기초이자 원리”임을 입증하려 노력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감각이 상황에 대한 신학의 관심과 가지는 연관성을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신앙감각에 대한 이해는 서구의 이성 중심적 신앙에서 잊혀 가는 신앙의 “감성적 지각 능력”을 새롭게 인식시켜 준다. 이는 논리적 이해를 중심으로 신학의 학문성을 입증하려는 이른바 “신앙의 철학적 해명”이란 서구신학의 맹점을 벗어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인간의 “신앙적 지각능력”의 근원을 해명하고 이를 실천적으로 요청하는 신학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다. 이로써 신앙인은 절대적 신비로서 자신의 전 존재를 감싸고 있는 하느님께 대해 조건 없이 자신을 열어두고, 자신이 신비이신 하느님을 향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자유와 책임을 지니고 끊임없이 결단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능력 - 칼 라너는 이러한 체험을 “초월적 체험(trasnzendentale Erfahrung)”이라 부른다 - 을 재발견하게 된다.
둘째로, 그리스도 신앙으로 정향된 신앙감각은 구체적인 역사의 장(場)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의 증거에 대한 전인적 공감능력(共感能力)을 말한다. 이 능력은 신앙인 개인에게 주어진 “신앙인식의 기관” 이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이를 일치시키는 성령의 은사이기도 하다. 개별 신앙인은 이 능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자신을 더욱 일치 시키며, 개념적인 판단에 앞서서 신앙의 대상을 자신의 영(靈)의 역동성 안에서 새롭게 자각하는 구체적 체험을 할 수 있다. 인간은 이로써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사건들 속에서 자아의 깊은 좌절과 무의미 체험을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십자가의 신비, 하느님의 자기비허의 신비에 자신을 맡기어, 고통 안에서도 늘 새롭게 자신을 일으키는 하느님의 진리를 향해 자신을 열고, 그 진리를 깨닫고 고백하며, 더 깊이 신앙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성화(聖化)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 모든 신앙의 지각능력이 지향하는 점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과 화해하며, 서로를 묶어 주는 예수를 따르는 실천적 삶이며 태도이다. 예수의 인격 안에서 신앙인은 인간을 향해 자신을 내놓는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며, 특별히 그 분의 십자가 안에서 삶 에서 드러나는 고통의 실재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며, 고통을 철저히 수용하는 가운데 드러난 희망의 실재를 신뢰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감각’은 온전히 예수를 따르려고 결단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신앙의 능력이자 카리스마이다. 이 능력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 일치하며, 교회 밖의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으로부터 선사 받는다. 즉, 성령은 개별 신앙인의 신앙지각능력의 원리이자,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체험되는 동시에 성령으로부터 신앙감각을 선사 받은 개별 신앙인(sensus fidei)은 같은 믿음과 같은 희망 속에 결합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여(sensus fidelium)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함께 고백하고 이를 공동체적으로 증언할 수 있게 된다(consensus fidelium). 성서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성령의 도유로 새로운 구원 공동체인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선포하면서(사도 2, 37-47), 동시에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선사된 카리스마를 통해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공동체 건설과 타인의 구원에 대해 봉사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이 카리스마는 성령에 의해 일으켜지고 개별 신앙인에게는 늘 새롭게 일깨워져야 할 선사된 은총이다. 이를 통해 신앙 공동체는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과 대화하고 통교할 수 있는 능력을 선사 받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를 Communio로 규정하고, 교회의 친교를 교회의 핵심으로 이해한 것도 이러한 성찰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성령의 직접적 은사로서 이 “신앙감각”은 “시대의 표징을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사목헌장 4항)하라는 교회의 새로운 공동체적 소명의 기초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함께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를 실천”할 수 있게 되며, 예수 안에서 드러난 진리를 세상에 선포하고 이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다. 구체적으로 교회의 선교사명은 단순히 교도권적인 가르침의 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부여된 신앙감각을 통해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거룩한 소명이며,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한 봉사체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진리에 내적 동의와 일치(Consensus)를 통해 “도구이자 표징”(교회헌장 1항)인 자신의 정체성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4. “상황적 기초신학”의 원리와 형태
1) 신학적 배경
이제까지 우리는 신학이 상황과 가지는 연관성을 신학의 내적 출발점과 지향점, 그리고 현대사회 속에서 새롭게 요청되는 과제와 목표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과 신학의 긴밀한 연관성을 신학의 형태 안에서 규명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신학의 방법론의 한 형태로서 “신학의 상황성(Kontextualit?t)” 혹은 “신학적 성찰이 이루어지는 맥락들”을 신학의 중심주제로 받아들여 기초신학의 한 원리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한스 발덴펠스(Hans Waldenfels)의 “상황적 기초신학”의 취지와 원리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발덴펠스는 오늘날 신학이 단순히 인간의 이성적 성찰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Theo-Logie)”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과 함께 하는, 혹은 인간의 삶을 새롭게 조명해 주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감성적 체험에서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임에 공감하는 신학적 흐름을 직시하고 있다. 이점은 하느님 계시 사건 자체와 계시의 전달 가능성에 대해 추론적 혹은 사변적 접근을 시도하는 신학의 흐름에 맞서 이에 근본적으로 전제되어야할 또 다른 중요한 신학적 접근원리를 일깨워준다. 즉, 내적 회심을 통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복음화 함으로써 살아있는 하느님의 현존에 전적으로 투신하는, 그래서 구체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경험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신학적 언술과 실천을 긴밀히 연결시키려는 “공동체 신학”의 원리이다.
이 방법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 나타난 비그리스도인들의 자의식의 성장이라는 다원주의적 배경과 서구의 일방적인 신학사조에 반발하여 자신들의 언어와 사상, 문화와 종교적 전통 안에서 그리스도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이른바 제3세계 신학자들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관심에 의해서 힘을 얻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서구의 추상적-사변적 철학의 틀을 이용한 신앙이해에서 벗어나, 삶의 구체적인 상황을 신학의 중심주제로 바라보고, “지금-여기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실천지향적(Theopraxis) 신학”을 지향하는 특성을 지닌다. 이른바 “왜”라는 끊임없는 질문의 둘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변적 성찰보다는 신앙의 대상을 깊이 관조하면서,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향한 깊은 내적 만남의 체험을 신학의 주제로 다루면서도, 그리스도 신앙의 출발점과 그 중심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신앙의 상황들 간의 긴장관계를 놓치지 않으려는 신학적 기획을 우리는 “상황신학(Kontextuelle Theologie)”이라고 부른다.
상황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로서의 신학을 특정한 상황으로부터, 상황 안에서, 그리고 상황을 위하여 전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진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적 기획은 그리스도 신앙을 인간의 다양한 경험적 지평들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삶의 실천에 중대한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실천 지향의 신학적 시도는 두 가지 점에서 신학의 새로운 의식전환을 가능하게 했다. 첫째는 신학이 오랫동안 실천의 원리를 사변신학의 결과로만 인식했지, 자신의 출발점으로 수용하지 못했다 점이고, 둘째는 이러한 신학이 본질적으로 선택해야할 또 다른 신학의 한 방향이 있었음을 외면해 왔다는 점이다. 즉,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궁극적 해명이라고 한다면, 이 진리를 해명하려는 신학이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요청”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하여 더 귀를 기울인 것인지에 따른 신학의 양면성을 깊이 다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신학의 자기성찰이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다원주의의 물결과 만나면서 신학의 정체성과 신학 방법론의 다원성에 대해 성찰을 가능하게 했고, 오늘날까지 서구의 언어와 사상을 중심으로 이해되어온 그리스도 신앙진리를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발덴펠스가 이러한 상황신학의 요청을 “기초신학”의 원리로 수용하는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논의의 배경이 깔려 있다.
첫째는 오늘날 호교론적 과제에서 출발한 기초신학이 그리스도 신앙과 신학의 기초(Fundament)가 무엇인지를 언급할 것인가, 아니면 신앙하는 “인간”에 대한 질문에 답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한 논의이다. 다시 말해서 신학이 호교론적 복음전달이란 과제로서 신앙과 신학의 근본을 해명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근본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 신앙이 인간에게 가능할 수 있는 조건들을 먼저 연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점에 관해서 발덴펠스는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신학이 이성의 영향 하에서 신앙근거들의 가능조건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논의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리스도 신앙을 이해하려는 이러한 시도가 한 역사적 실존과 그의 역사와 사회 안에서의 삶과의 깊은 관련성을 말해주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과정을 너무 쉽게 간과한 듯이 보인다”.
그는 이른바 근래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신앙의 최종적 근거해명(Letztbegr?ndung)”이라는 기초신학의 방향설정에 대한 긍정적 관점, 즉, 한 역사적-구체적 인물로 부터 신학의 규범들을 얻는다는 것이 실제로 자명하게 전제될 수 없다는 점과, 여기서부터 유추되는 보편적 진리주장은 가능하지 않다는 학문적 비판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기에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피하지 않는데, 즉, “나는 스스로 역사 안에서 등장한 역사적-구체적 인물의 실존적 요청에 나를 맡길 것인가, 아니면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이성과 사유의 가능성들에 모든 것을 걸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점은 오늘날 그리스도 신앙을 가장 위협하고 있는 “종교적 다원주의에 대한 관심의 증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종교적 선택의 가능성들의 다원성”을 고려했을 때, 그리스도 신학이 오늘날 “정체성에 무게를 둔 생각”을 먼저 할 것인지 아니면 “차이점에 중점을 둔 사유”를 우선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부각되고 있다.
한 가지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할 점은 다양성에로의 관심과 이에 대한 학문적 신뢰가 신학의 다원성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불신과 하느님에 대한 외면을 가져올 수 있다는 위험이다. 즉, 다양성의 인정이 하느님의 신성을 앗아가거나, 인간이 다양한 욕구들에 맞춰 제한된 인간이성의 판단에 하느님을 예속할 수 있을 뿐더러, 하느님을 조작 가능한 형태의 위대함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위험은 언제나 상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오늘날의 신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신앙을 “호교론적-해석학적-대화적 방법”으로 모든 시대와 인간의 전 삶의 영역에 전달하고자 한다는 소명을 포기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신학이 신학일 수 있는 근거와 영성”은 다분히 “선교적 사명”과 “그리스도 신앙의 설득력 있는 선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근대 신학의 발전 과정에서 기초신학이 교의신학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학문으로 성장하게 된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른바 “근대의 합리성(Rationalit?t)”에 대한 요청에 직면한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의 가장 큰 판단척도인 합리성을 신학의 원리로 수용하여, 신앙만으로 풀기 힘든 신학적 난제들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데 거의 사활을 걸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성의 확실성”이 근본적인 의문에 처해졌을 뿐만 아니라, 신앙진리의 해명이 단순히 이성의 합리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자명해지고 있다. 오히려 신학은 여타의 인간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도움을 통해서 신앙을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열리고 있다. 예를 들면 ‘종교철학’은 인간의 본질적인 하느님 지향성(종교성)에 대해 해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역사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의 제자 공동체의 전승의 전달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사회학’은 그리스도교회가 사회적 성격을 띤 신앙의 공동체임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이런 관점에서 기초신학을 오늘날 “문지방 학문”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문, 즉 복음의 규범으로 받아들여 이를 문의 안과 밖에서 적절하게 대화하며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기초신학의 과제를 잘 표현해 준다 하겠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 신앙이 지닌 주체적 인격 상호간의 만남과 대화에로의 열린 개방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다. 그리스도교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완전한 사회체(sozietas perfecta)”로서의 교회의 구원에 대한 절대적 진리주장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란 배타성의 극복과, 포괄주의적 입장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칼 라너)을 인정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적인 관점들은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학이 타종교나 타문화에 대하여 지니는 변화된 입장을 잘 드러내 준다. 이른바 상황에 대한 신학의 관심은 당연히 과거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그들 안에 있는 “옳고 거룩한 것들”을 배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자산과 사회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증진”(NA 2)하려는 대화적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오늘날 “토착화”에 대한 깊은 관심은 신학의 상황에 대한 관심의 구체화이며, 넓은 의미에서 “신학의 상황화”(Kontextualisierung der Theologie)를 위한의 교회 공동체적 노력이다. 따라서 토착화는 교회의 교도권이 가지고 있는 “위로부터의” 관심이 아니다. 신학이 궁극적으로 구체적인 “신앙의 자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당연히 신앙의 토착화는 “아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상황신학의 관점이 다분히 “믿는 이들의 신앙감각”을 신학의 주체로 여기고, 이들의 구체적인 삶과 신앙의 문제들과 이들이 지닌 그리스도 신앙과 자신들의 오랜 종교-문화적 전통의 충돌을 신학적으로 주제화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토착화란 이론적으로 계획되고 교육 되어지는 일련의 신앙의 내용들에 대해 신학자들이나 교도권자들이 제시하는 규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역교회가 하느님의 진리를 지각하고 살아가는 ‘신앙감각’을 지닌 다수의 교회의 주체들의 실천적 동의를 이끌어 내는 교회의 공동 작업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에는 신앙인의 진정한 권위가 필요하며, 이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률적 권위가 아닌, 십자가의 고통의 현실 수용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에로 자신을 맡기는 “종교적 권위”를 말한다.
메다르드 켈(M. Kehl)은 그리스도교 신학이 신앙인들의 삶의 권위와 종교적 감수성을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는 이런 신학적 요청이야 말로 오늘날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을 더욱 올바르게 표현할 뿐만 아니라, 그럼으로써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신앙을 살아있는 구원의 표징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임을 강조했다. 따라서 이런 “타문화의 주체성에 대한 존경과 인정”과 더불어 “문화 간의 상호대화”야말로 참된 가톨릭성(Katholizit?t)을 드러내는 교회의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2) 상황적 기초신학의 원리와 형태
이러한 오늘날의 사상적 흐름을 단순히 신학의 관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신학의 근본원리로서 강조한 것이 바로 “상황적 기초신학(Kontetuelle Fundamentaltheologie)”이다. 발덴펠스의 이런 신학적 구상은 어떤 새로운 신학의 창출이 아니다. 오히려 상황에 대한 신학의 관심을 그리스도 신앙과 신학의 기초 원리로 이해하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의 일환이다. 특별히 “상황적 기초신학”은 서구신학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누려온 그리스 사상과 유대-그리스도교의 경험세계라는 사상적 지평에 대한 한계를 절감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즉 서구사상에게는 낮선 제3의 길을 통해서 신학의 본질적 과제를 새롭게 재건해 보려는 노력이다. 이는 서구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데카르트적인 자아에로의 회귀가 오늘날 분명히 시대적 착각이나 모순임을 인정하고, 오히려 제3의 길, 혹은 “제3의 눈”으로 진리에 접근하려는 신학적 시도이다. 이 점은 서구의 이른바 “아우슈비츠 체험”을 통해 자각한 인간 이성의 한계와 하느님 부재의 실존적 문제에 대한 비판이며, 아울러 서구의 이성 중심의 사유가 초래한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의 왜곡이라는 시대착오적 문제를 교정해 줄 수 있으리란 희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발덴펠스가 주장하는 “상황적 기초신학”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상황신학의 원리와 당위성을 근거로 하여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종합할 수 있겠다.
첫째로, 상황적 기초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언어적 선포의 몰이해”라는 비판에 맞서서, “이해”라는 것이 “언어사건”임을 강조하는 해석학적 원리를 신학의 기초원리로 수용하여,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역사적 자기이해”를 신학의 중요한 원리로 강조한다. 즉, 이해라는 것이 일방적인 인간의 주체적 사유의 산물이 아니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 조건으로서의 전이해(前理解)와 지평(地平)이라는 ‘역사성(歷史性)’의 성찰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신학적 사유의 핵심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신학은 이른바 “해석학적 상관성(hermeneutische Relation)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되는 데, 즉 하나의 표징의 이해가 다른 표징의 연관성 안에서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루어진다는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발덴펠스는 이해하는 주체와 이해된 지평간의 해석학적 상관성을 이른바 “서구-그리스도교 근대시대(Europ?isch-christliche Neuzeit)”를 지나 “그리스도교 이후의 현대시대(postchristlich-Moderne)”라는 오늘날의 시대적 지평에서 살펴보려 한다. 먼저 종교-문화의 탈서구적 성격과, 다원주의로 특징 지워지는 이 시대의 지평에서 인간의 종교-사회적 처지를 주제화 하고 그리스도 복음의 전달 가능성을 고찰한 후, 이 시대에 드러나는 많은 현상학적 문제들, 특히 종교가 지닌 사회질서 유지의 가치상실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겸허히 수용한다. 더불어 그리스도교가 잊어온 복음 전달의 가치들, 특히 교의적-단정적 언어보다는 이야기적-해설적-설득적인 언어의 구조들을 재발견하여, 실천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삶의 권위를 인정하고, 종교적 예식들이 지닌 “하느님 신비에로의 접근(Mystagogie)”과 성령의 활동을 구체적인 자서전적 개인 여정과 교회 공동체 여정에서 발견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들은 신학이 그리스도 신앙의 사회적 구조들을 밝혀내고, 늘 현실과 관련을 맺는 자신의 역사성을 인식하여, 사변적 체계로 각인된 신학의 구조를 “구원중심의 구조”(Soteriozentirk)로 바꿔 가야할 책임을 알려준다.
둘째로, 상황적 기초신학은 기존의 그리스도 신학이 추구했던 방법론과는 다른 신학적 방법론의 새로운 전위(轉位)를 요청한다. 기존의 그리스도교 신학은 서구사상의 이해의 조건들과 인식방법들, 세계관들과 특정한 상황에서 출발한 철학들로 각인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Theo-logie)”를 주제로 삼아왔다. 하지만 오늘날의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겪고 있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은 기존의 신학이 “이론적-체계적 반성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당면한 상황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삶의 무게와 신학의 이해가능성을 지켜 나가야할 소명”을 자각하게 했다. 따라서 기존의 신학적 방법론이 자각한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선택하려는 과감한 시도는 이러한 신학의 현실적 과제에 마주선 신학의 우선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선택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신앙의 로고스(말씀)가 담지한 인식론적 가치와 진리에로의 흡인력을 그리스도교적 사유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인식체계들에로 전달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가 전제된다. 다시 말해서 신학의 새로운 자리매김을 위한 “전위적 시도(Umsetzung)”는 이른바 그리스도 신앙의 “의미를 세우고”, “의미의 정체성을 되찾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위적 시도란 그리스도 신앙을 이해해온 과거의 편향적인 신앙이해의 연역적 방법(induktive Methode)에서 벗어나, 신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역사적-구체적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다양한 조건들과 상황들의 연구를 통해서 하느님 체험의 가능구조들을 귀납적(deduktive Methode)으로 재해석 해낸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점은 합리적이고도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규명된 신앙진리의 해석이 결코 자동적으로 신앙을 만들어 내거나 삶의 실천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사변적 신학의 도움 없이도 “이미 그리스도 신앙의 삶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신앙인들의 삶의 자리와 그들의 의미체험 구조들을 재성찰함으로써, 신학이 간과한 중대한 신학적 원리들을 재발견하려고자 하는 것이 기초신학의 과제라는 점을 상기 시켜 준다.
셋째로, 상황적 기초신학은 본성상 그리스도교가 마주하는 다양한 세계관이나 가치체계, 종교-문화의 상황들과의 대화를 지향하며, 궁극적으로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통교능력을 재발견하고,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과 신비를 선포하려는 선교적 영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점은 상황적 기초신학이 오늘날의 종교 다원주의의 문제에 직면하여 신학의 대화적 입장을 지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교회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배타적 구원에 대한 입장을 철회하고, 타종교와 타문화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그리스도 신앙의 언어로 발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신학이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에 대해 물은 다음, 다른 종교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입장을 개진하는 가운데 이들과의 관련성과 그들 신앙의 근본적인 출발점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이 대화능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대화는 그리스도 신학이 스스로 누려온 당위성과 정당성들을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들 속에서 스스로 의문에 던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 말은 신학이 빠질 수 있는 두 가지 극단적 위험, 첫째로 그리스도 교회가 창조된 질서로서 인간사회의 진보적이고 자발적인 삶의 공간들의 독립성과 자유를 무시한 채 “세상의 교회화(Verkirchlichung der Welt)”를 주장하는 오류와, 둘째로 이와는 정반대로 신학이 세속적인 것을 교회가 말하는 삶과 구원, 희망의 미래와는 무관한 것을 치부해 버리거나 세속에로의 의지를 적대시 하는 태도를 피해야 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신학이 그리스도 신앙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인간적인 상황들을 고려한 대화적인 관점을 견지해나가는 데 있어서 오늘날 신학이 “개념중심의 신앙(Begriff des Christentums)”보다는 “현상중심의 신앙(Ph?nomen des Christentums)”에로의 중심이동을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 신앙의 복합성을 단순한 개념으로 제한하거나 통합시키려는 것 보다는 그리스도교가 만나는 다른 문화와 종교적 전통 속에 있는 다양한 “신앙감각의 표현들”을 진지하게 고려하여 이를 그리스도교적 체험의 영역으로 재해석하거나, 그리스도 신학의 개념이 지시하는 원초적 체험과 현상에 대한 새로운 언어들을 발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학적 배경과 원리 속에서 상황을 신학의 방법적 원리로 수용하는 신학의 구체적인 형태는 어떤 것일까? 발덴펠스는 자신의 저서 “상황적 기초신학”에서 구체적인 사유의 형태를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교 신앙과 이 신앙을 수용하는 동시대의 상황간의 긴장관계 속에서 발견한다.
우선 신학의 구조적 형태에서 보았을 때, 상황적 기초신학은 자신에게 이미 전제된 신앙의 출발점(Text)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 신앙과 만나는 동시대인들의 반응(Kontext)이라는 상황에 접하여 다음의 두 단계의 성찰을 하게 된다. 우선은 신앙의 내용, 혹은 신앙의 현상에 대한 이해(신학)는 필연적으로 이해의 과정에서 새로운 성찰을 반복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원형 구조를 지닌다(그림 1-A). 그러나 어느 순간 자명했던 신앙의 기본적인 입장이 처음과는 다른 새로운 신앙의 여건에서 출발했을 때 ― 예를 들면 과거에 신학에서 자명했던 전제된 “교회”가 전통적인 맥락에서 하느님의 계시진리를 보호하고 전달하는 권위적인 교계제도를 가리켰던 반면에, 오늘날 더 이상 이러한 전제가 수용될 수 없는 새로운 교회 안팎의 상황이 전개되었을 경우 ― 다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상황들이 알려지고, 이와 동반된 다양한 신앙현상들이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교회를 더 이상 특별한 부르심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신앙공동체가 아닌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에 의해 불림 받은 하느님의 백성 모두를 가리키는 새로운 용어로 해석되는 경우)(그림 1-B). 이전과는 달라진 상황 속에서 나타난 신앙 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접근방법들이 하나씩 해명되면서 비로소 그리스도교적 실천의 구체적인 형태가 발생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리한 신학적 성찰은 늘 신앙의 출발점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지속적인 연관성을 유지한 순환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과 이 순환의 과정은 결코 평면적인 반복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상승을 추구하는 새로운 순환의 과정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다(원추형 순환관계) (도표1 참조).
첫째로, 오늘날 신학이 하느님 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하느님이 더 이상 신학에 중심이 아닌 부차적 요소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철학과 종교학의 연구는 오늘의 인간이 철저하게 시공간이라는 우연적 상황에 제약되어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직시함으로써, 실존적으로 자신의 행복과 구원을 주관하는 절대적 신비이신 하느님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성적으로도 자신의 비구원적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초월에로의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상황적 기초신학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고통 속에 드러난 인간의 초월성과 절대 신비이신 하느님이 인간을 향한 보편적 구원의지와의 상관관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둘째로, 상황적 기초신학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을 “동시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에게 복음의 중대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는 요청에 귀를 기울인다. 신학 (도표 1: 상황적 기초신학의 도해 A - B)
이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리스도 신앙이 사변적인 성찰이 아닌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한 개인의 삶의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요청에서 출발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실존이었던 나자렛 예수의 삶과 죽음의 전승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예수가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대해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보편적이고 유일무이한 대답이었고, 이런 예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자기비허적 사랑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진리가 선포된다는 사실을 신학의 본질적인 과제란 것을 말해준다.
세 번째로, 상황적 기초신학은 그리스도 신앙의 결정적인 핵심인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인간에서 선포된 “보편적, 혹은 포괄적 구원”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신학은 철저하게 개별적인 인간의 구체적인 이해의 지평뿐만 아니라, 이들의 삶을 규정하는 공동체의 다양한 세계관과 종교-문화적 가치체계들을 향해 열린 대화를 지향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신앙이 개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의 체험에서 시작되었으나, 본질적으로 같은 믿음을 지닌 이들의 공동체 신앙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신앙은 다시금 개별적인 예수 체험으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개인의 신앙감각(sensus fidie)이 공동의 신앙감각(sensus fidellium)으로 성장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동의 동의(consensus fidellium)를 가능하게 하는 교회의 예언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상황적 기초신학이 기초신학으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것은 이상에서 언급한 세 가지 기초신학의 중심주제, 즉 “하느님(종교적 논증) -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적 논증) - 교회 (교회론적 논증)”의 전통적인 틀을 그대로 수용하여 오늘날의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며, 교회의 올바른 공동체 신앙의 형태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는지 연구하기 때문이다. 발덴펠스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상황적 기초신학이 두 가지 신학의 방향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하나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theos)을 “지금-여기서” 언어화 하는 길(logos)인 “신학의 길(theo-logischer Weg)”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체험하고 있는 시공간의세계를 “신비(mysterion)”이신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신비인도적 길(mystagogischer Weg)”이 그것이다(도표 2 참조). 전자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의 교회와 신앙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신학의 형태들을 발견해 나가는 구조라 한다면, 후자는 현실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에 대한 이해의 현상을 중심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새롭게 이해해 보려는 신학적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을 도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도표 2: 상황적 기초신학의 내용적 구조)
3) 상황적 기초신학에 대한 비판과 남은 과제들
물론 이러한 상황(context)을 기초신학의 주요원리로 받아들이는 신학적 시도가 갖는 한계도 분명하다. 여기에는 상황적 기초신학에 대한 몇 가지 비판을 돌아보고 이에 대한 남은 과제들을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우선 첫째로 대두되는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다: “이런 신학적 의도가 혹시 신학을 다루는 완전히 다른 형태인가? 아니면 신학의 본질인 하느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아닌 비신학적인 다른 요소들을 신학의 방법적 도구로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는 건 아닌가? 혹은 특정한 관점이나 신앙경험의 예들을 신학의 규범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아닌가?” 하는 비판들이다. 이 점에 관해서 발덴펠스는 명확한 입장을 취한다. 상황신학적 관심은 결코 신학의 근거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이제까지의 신학의 기초 작업이 정말로 참된 그리스도 신앙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느냐는 타당성의 질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황에 대한 관심은 비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그리스도교에 대치하자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을 선포하는 근본적인 매개체로서의 언어를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는 해석학적 요청을 말한다. 즉 언어는 단일한 것이 아닌 “언어들”이란 것이고, 이 점에 있어서 서구 신학이 이제까지 누려온 언어적 상황이란 오늘날 다양한 “언어들”의 풍요로움으로 상대화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신학이 상대하는 상황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모든 상황들을 말한다기보다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구원에 관련된 특정한 상황들을 말한다. 즉, 상황신학이 인간과 관련된 보편적인 상황들을 무분별하게 대상으로 한다면 그건 그리스도의 복음적 정신과는 무관한 한낱 ‘민족학’으로 퇴보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가령 신학이 인간의 문화-예술적인 특별한 관점과 경험들에 관심을 국한 시키다 보면 정작 인간의 삶의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정치-사회-경제적인 요소들은 등한시 될 수 있는 위험이 언제나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이렇다: “이런 신학적 기획이 어쩌면 그리스도 신앙을 상대화 하거나 상대주의의 희생양이 되게 하지는 않는가?” 라는 문제이다. 즉 그리스도교가 주장해온 ‘보편적 진리주장’이 이런 상황신학의 요청으로 상대화 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 꼭 집고 넘어가야할 점은 상호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대화”가 지닌 특성이다. 신학이 세상과 적극적 대화를 해야 한다는 취지는 신학이 이미 주어진 그리스도교의 “상황성(Kontextualit?t)”이란 현실을 올바로 직시하여 현대의 다원주의의 문제점들을 극복하려는 데에 있지 그리스도교가 결코 냉소적 상대주의의 희생양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오늘날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일은 단순히 교의적인 신앙의 절대성을 강조하거나, 배타적인 구원관의 피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살고 있는 개별신앙인들의 구체적 체험을 해석하고 공유하여, 이들 안에 발견되는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구원적 의미를 동시대인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더 좋은 방법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한 가지 중요한 예를 들 수 있겠다. 그것은 그리스도 신학이 다른 문화들과의 대화 속에서 얻어낸 소중한 것 중에 하나가 오랫동안 잊혀왔던 “기억(menoria)”의 문화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기억”은 이성적 합리성에만 국한된 그리스도 신앙의 뿌리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이해를 “회상(回想)”과 “재현(再現)”의 종교적 관점으로 더욱 심화시켜 주었다. 특별히 요한 밥티스트 메츠(J. B. Metz)는 인간의 기억의 능력에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재발견하고, 고통에 대한 기억이 미래에 성취될 자유의 약속을 상기시켜준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메츠는 이른바 “위험한 기억(Gef?hrliche Erinnerung)”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 기억들은 과거의 경험들을 새롭게 조명하게 하고, 새롭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느껴지는 현재에 대한 통찰을 갖게 한다고 말한다. 더욱이 고통의 역사는 “위험한 전승(Gef?hrliche ?berlieferung)”의 형태를 만들며, 이 전승의 전달과 증언은 결코 논쟁적이 아닌 ‘위험하면서도 해방하는 기억들’ 속에서 항상 ‘이야기’ 되어진다는 사실을 통찰함으로써, 오랫동안 교회의 주변인으로 남았던 교회의 백성들을 신학의 주체로 다시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즉, 이제까지 교회는 “백성들을 위한 교회”였지, “백성의 교회”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메츠는 신학을 이야기하는 주체가 더 이상 신학자나 교도권자에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의 역사의 주체가 된 새로운 백성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역사를 이야기 하고 또 거기서부터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하는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 받은 백성에게 열고자 했다는 데 신학적 공헌을 했다. 이 새로운 신학의 주체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해 자신의 삶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기억하고, 고통의 현장에서 항상 말없이 침묵 속에서 고통을 이겨내는 지혜의 능력을 깨달아, 이를 “자서전적 이야기”로 전달할 뿐만 아니라, 같은 고통의 기억을 가진 이들과 연대함으로써 공동체 신앙의 기초적 뿌리를 재성찰하게 해주었다. 오늘날 종교는 바로 이러한 고통을 이겨내고, 삶의 의미에로 열려진 길을 동반하고 제시하는 곳에서 본래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교회가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끊임없이 교회와 세상 안에서 현재화(現在化)하려는 것은 기억이 지닌 소중한 가치들을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을 더욱 확실하게 지켜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이러한 신학적 시도가 자칫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을 흐리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오늘날의 다원주의적 물결 속에서 정체성의 발견이란 중대한 문제가 어느 때 보다 심각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리스도 신앙이 너무 많은 것을 상황에 대한 이해에 내주다 보면 결국 자신의 정체성 위기를 겪게 될 수도 있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발덴펠스는 이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논지를 편다. 우리는 흔히 “상황성(Kontextuali?t)”과 “상황화(Kontexutalisierung)”의 미묘한 차이를 잘 못 느낀다. “상황성(狀況性)”이 서로 외적으로 병립하거나 관계를 맺고 있는, 조금은 고립된 특정 상황들이란 관점에서 이론적이고-사변적인 방법으로 접근될 수 있는 것이어서, 세상과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새롭게 방향제시를 할 수 있는 역동성이 결여된 개념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상황적 기초신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상황적(kontextuell)”이란 표현은 다분히 “상황화(狀況化)”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즉 상황화는 “상황성”이 자칫 잃기 쉬운 “역동성(Dynamisierung)과 과정성(Prozesualisierug)”을 내포하며, 여기에 근거를 둔 상황적(狀況的)이란 표현은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전승(traditio)의 생생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새로운 상황화의 지속적인 과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복음의 “상황화”라는 필연적 시도는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면, 정체성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진 문제가 아니라 다원주의로 특징 지워지는 이 시대의 모든 인간들의 삶에 공통적으로 제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 그리스도교회의 역사가 항상 새롭게 단절과 재연(再練)이라는 정체성의 역사라는 점을 생각할 때, 상황들의 다원성에서 나온 차이점들 속에서 자신과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에 대한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문제는 그리스도 신앙의 ‘상황성’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안고 있는 질문, 즉 우리가 신학을 전개할 때, 진정으로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이른바 신학이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 되는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라면, 이러한 하느님과 관련된 역사들을 이야기 하고, 이를 언어화 하려는 신학적 시도가 마주치는 원초적 상황들과 새로운 상황들 간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관건이 되는 것은 신학이 그리스도 신앙의 본문(text), 즉 하느님의 역사 안에 자기계시를 인간의 자가당착적인 우상화의 위험에서 벗어난 “해방의 복음으로 언어화”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학을 “상황화”하던지 아니면 신학의 “상황성”에 대해 연구하는 일이던 간에 말이다.
5. 다원적 종교사회인 한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신학발전을 위한 몇 가지 제언
이제 이 논문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야 할 때가 된 듯싶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학이 왜 상황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신학의 방법적 원리로서 상황적 기초신학의 사상적 배경과 과제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이 모든 것들은 정작 우리들의 구체적인 신학의 자리인 “한국”이란 사회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작금의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문제와 종교-문화적인 충돌과 혼란, 그리고 정신사적-세계관적 가치체계의 와해와 난립의 문제를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혹자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신학으로서의 자기성찰만 다하면 되지 왜 자신의 영역 밖의 문제까지 관여하려 하느냐고 반박할지 모른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복잡하게 서로 얽힌 상황들은 신학과는 무관한 독립적인 한 사회학이나 인문과학의 영역이지 신학이 관여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학은 세상에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교조주의적 해석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신학은 “하느님이 하느님일 수 있도록”, 그리고 “하느님이 인간이 스스로 만든 우상에 갇혀 인간에게 말씀을 직접 건네실 수 없도록 하는 모든 인간적인 오류를 발견하고 정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한국의 신학은 오랫동안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이야기 하는데 장애되는 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안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었는데 아직도 공의회 이전의 정신으로 세상에 담을 쌓고 미심쩍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두려워 대화를 기피하거나 자가당착적인 자기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매함도 남아 있다. 교회의 교도권이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해야 한다는 공의회의 가르침과는 달리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하거나, 말씀 속에 살아있는 생생한 신앙인들의 체험을 외면할 수 있는 유혹도 남아있다. 신앙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체험과 그들의 신앙감각(sensus fidei)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신학의 변두리에 속하거나, 교회의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의 신학교육은 미래의 교회를 사목할 사제를 양성하는 곳이기에 진정한 신학 발전을 위한 아카데미의 장이 되기 힘든 구조를 지니고 있고, 교회는 수많은 토착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백성들을 위한 교회”이지 결코 “백성의 교회”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서구 교회와 신학에서는 그리스도 신학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버린 신학의 소재들을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의 뿌리인 철학적 이성의 합리성을 통해서 다시 세우려고 노력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그들의 고정된 시선을 제3세계의 문화와 종교에 돌려, 그들이 지니지 못했거나, 오랜 역사의 도정에서 잃어버리거나 잊어온 수많은 그리스도적 가치들을 재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사회를 비롯한 제3세계의 다양한 종교문화 속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필자는 한국사회가 서구 신학이 찾고 있는 신학의 특별한 소재들을 다양하게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구 신학이 다뤄왔던 것과는 다른 종교-문화적 뿌리와 우리 나름대로의 “신앙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의 언어와 사상으로 채색되고 전달된 신학을 우리의 언어와 사상으로 재해석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때이다. 한국 신학의 삶의 자리를 무시한 채, 서구적인 신학의 틀을 고집하는 신학은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이야기 하는 자신의 고유한 책임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전개한 “상황적 기초신학”은 한국 신학이 나아가야할 미래의 걸림돌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몇 가지 중대한 지표를 던져줄 수 있다고 본다.
첫째로, 한국의 신학 발전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 신앙의 “기초”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점은 다원주의적 다종교 사회로 특징 지워지고 있는 한국사회의 특성과 연관해서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교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원주의적 종교현상들로 인해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이 왜곡되거나, 다종교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 신앙이 질식되어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기초신학적인 연구가 다양한 한국의 종교적-사상적 상황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총체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초신학이 추구하는 두 가지 과제, 즉 그리스도 신앙의 기초가 무엇이냐는 정체성에 관련된 질문과, 이러한 정체성을 찾기 위한 학문적 접근 방법, 즉 신학의 방법론에 대한 강좌와 기초신학의 주변학문과의 연계성, 예를 들면 종교철학과 종교신학, 인간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학 등의 연구 결과들과 신학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내용의 강좌가 개설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앙-계시”라는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기초강좌 뿐만 아니라, 신학 방법론과 종교 신학적 관점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과 타종교와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신학자들의 양성이 필요할 것이다.
둘째로, 한국적인 신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현재 토착화와 관련된 폭 넓은 연구가 단순히 다방면에 걸친 학자들의 자기 목소리를 드높이는 산발적인 연구나 공동이해의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연구의 성과들이 넓은 의미의 기초신학의 영역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수용되어 신학의 새로운 자리매김에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신학계에서도 필자가 소개한 “상황적 기초신학”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다종교 사회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들을 폭넓게 다룰 수 있는 관점들이 연구되어야 한다. 비록 한국 가톨릭교회가 80년대 이후 한국인의 심성과 한국의 종교-문화적 전통에 걸 맞는 그리스도 신앙과 신학 연구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다방면에 걸친 토착화 연구에 매진해오긴 했지만, 이러한 토착화에 대한 관심이 점차로 산발적인 학문연구 분야에 치우치고 있다는 지적이나, 교회 사목의 현실적인 상황과 너무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생각할 경우에 토착화에 대한 이런 관심과 연구가 어떤 한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싶다. 첫째는 토착화가 신학적으로는 가장 절실한 문제임을 많은 신학자들이 공감하면서도 정작 토착화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일반 신자들에게는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고, 그러한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이다. 근래의 종교다원주의의 영향과 신영성운동의 부흥으로 인한 영적 공허감의 새로운 탈출구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밖에서 찾고자 하는 움직임을 감지했을 때, 이런 토착화에 대한 무관심은 교회의 사목이 겪고 있는 시급한 정체성 문제를 고려한다면 신학과 교회의 관심의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둘째로, 오늘날 토착화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토착지역에 신학용어를 새롭게 번역하는 형태나(번역모델), 토착 문화에 적응을 위한 교회의 노력(적응모델)을 뛰어 넘어, 문화와 종교를 엄밀하게 구분할 수 없는 동양의 특수성을 생각했을 때 토착화의 노력은 “문화의 본질인 종교”(폴 틸리히)들간의 대화로 더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간의 대화는 단순히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차원을 뛰어넘어 토착화를 넓은 의미로 “상호간의 종교성의 완성”(Inreligionisation)”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즉,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 속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상호 존중하는 평행적 관점에서 이제는 진정한 종교적 전통이 무엇인지에 대해 상호 논의하고, 그리스도교는 토착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옳고 선한 종교적 심성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으로 더욱 종교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토착화 노력이 토착종교의 전통과 가치를 무시한 채 문화적 유산들만을 그리스도화 시키려는 시도는 자칫 우물안 개구리 식의 고립된 신앙공동체의 자기 문화 입히기라는 오해를 벗어날 수 없으며,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종교에 대한 포괄적인 관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배타적으로 종교적 전통들을 선별하려는 오류를 겪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토착화에 대한 관심과 관련해서 세 번째로 언급할 수 있는 한국 신학의 과제로 신앙인들의 구체적인 체험과 신앙적 감수성에 대한 신학적 연구의 필요성을 들 수 있겠다.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 신학의 관심은 무엇보다 먼저 개별 신앙인의 실존적인 신앙체험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냐면 신앙을 선택하는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교의적 가르침이나 신학적 명증성에 자신의 실존을 걸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이를 자신의 생의 역사 안에 동참한 이들의 공동의 연대성 안에서 스스로 해석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신학은 하느님이 인간과는 무관하게 홀로 이야기하심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을 향해 말씀 하시는 하느님, 더 나아가 스스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 신앙은 역사의 한 장(場)에서 우리와 같은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십자가의 구원사건 안에서 인간의 실존적 완성과 희망을 발견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더욱 그렇다. 따라서 한국의 신자들의 신앙 체험 안에서 발견되는 그들의 “영적 감수성” 혹은 “신앙감각”의 본질을 발견하고, 이를 한국적인 심성에 맞게 언어화 하는 신학적 시도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교회의 토착화 노력이 일부 학자들과 사목자들의 관심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의 주인으로서의 하느님 백성의 공동의 작업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6. 맺는 말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해서 한국 가톨릭 신학이 당면하고 있는 기초적 연구에 대한 필요성과 타당성, 그리고 구체적인 신앙인의 “상황”을 신학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상황적 기초신학의 방법론을 소개하였다. 이 글을 마치면서 한국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다양한 신앙적 문제들에 대한 오늘날의 회의적 태도와는 달리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두 가지 한국인의 종교체험의 근본유형을 통해 신학이 구체적인 인간의 상황에 대한 관심을 언어화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고 싶다.
첫째는, 한국인의 고유한 심성인 ‘한(恨)’에 대한 체험이다. 필자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고통의 체험을 통해 종교적 신념과 신앙에 대한 결단을 하는 계기를 느낀다고 생각해 왔다. 한국의 격동기를 인고(忍苦)의 세월로 보내신 어머님들의 생에 대한 통고의 체험의 이야기를 들을 때, 혹은 사회적 경제적인 곤궁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실재를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이야기를 통해서, 혹은 평탄했던 삶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인생의 혼돈 속에서 겪게 되는 의미의 부재(不在)를 체험하거나 이런 이야기들을 대중매체들을 통해서 피부로 공감할 때 등, 한국인의 삶은 그야말로 ‘한’맺힌 삶의 연속임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한국의 격동기를 살아온 우리 부모의 세대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요즘의 젊은 세대에게도 어느 정도는 적용될 수 있는 한국적 고유 심성의 표현이라고 본다. 오늘날 사회의 모순이나 교우관계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회피하고자 파괴적으로 현실을 부정하려는 젊은 세대의 부조리 체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을 더 이상 고통의 ‘한(恨)’이 아닌 조화와 상생의 “한 - 하나, 통일, 조화”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여러 인간적 체험의 실재들이 있음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필자는 한국 신학이 먼저 관심을 가져야할 일이 이런 한국인의 가장 종교적이면서도 영성적인 태도인 ‘한’의 심성을 연구하고 이를 신학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한’의 심성이야 말로 가장 한국적인 신앙감각을 표현해 주는 가장 적절한 통로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이런 한의 심성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체험에 가장 한국적으로 접근하는 길이며,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영(靈)의 현존을 체험하는 한국적인 영성의 개발에 중요한 잣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한국인이 지닌 ‘정(情)’에 대한 체험이다. 혹자는 한국 사회의 합리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정(情)’의 부정적 요소를 꼽을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정으로 인한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아무리 언급한다 해도 한국인이 지닌 정(情)의 심성만큼이나 통합적이고 조화적인 심성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고유한 한국인의 심성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측면을 올바로 언어화 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전반에 걸친 무관심에 있을 것이다. 신학은 이런 한국인이 지닌 ‘정의 문화’를 언어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정(情)’은 한국인의 종교심성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과 이야기 문화를 지탱해 주는 공동체적 자기표현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이심전심(以心傳心)’과 말없이 삶으로서 신앙을 증언하고 실천해온, 성서적 표현에 의하면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지혜와 삶의 권위에서 드러나는 실천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자칫 “문화적 낭만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신학은 이런 이들의 삶의 체험에서 드러나는 하느님 체험을 언어화 하고, 이들이 지닌 공통된 체험의 본질을 신학적인 용어로 재해석해 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체험을 오랜 교회역사의 흥망성쇠의 희비 속에서 나름대로 표현해 왔다. 신학의 과거에 대한 반성은 현재의 신학을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미래의 신학의 비전을 제시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 신학이 추구하는 “신앙에 대한 이해”라는 과제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해석학적 과정임을 전제한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학 역시 미래로 개방된 해석학적 용기를 감행할 수 있어야 할 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해석학적 노력이 불명료한 교회의 정체성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신자들이 겪고 있는 신앙에 대한 무관심과 현실과의 괴리감을 좁혀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하면서도 시급한 과제임을 느낀다. 과거의 신학이 오늘의 신학을 예상할 수 없었듯이, 오늘의 신학은 또 다른 미래에 반성하지 않으면 안되는 과거의 신학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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