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스크랩] 두루마기 행주치마 입고사는 사람들아.....아 반갑구나!!

@로마의휴일 2008. 4. 3. 10:17

반갑구나

 http://user.chollian.net/~prokhr/korea/song/song04.htm

작  사 : 김경련
작  곡 : 안국민
편  곡 : 최영섭
노  래 : 이영구(국립합창단원)
연  주 : KBS 관현악단

 

흘러간 강물처럼 못 보는가 하였더니
이제야 만났구나 반가운 사람들아
갈라져 몇 해더냐 그리워 몇 해더냐
산천은 변했어도 말씨만은 변함없구나
아 ~ 반갑구나 아 ~ 반갑구나
두루마기 행주치마 입고 사는 사람들아

 

사람이 사노라면 만날 때가 있다더니
이제야 만났구나 반가운 사람들아
다녀야 서로 알고 다녀야 정이 들지
마음의 창문 열고 그립던 정 쏟아보자
아 ~ 반갑구나 아 ~ 반갑구나
두루마기 행주치마 입고 사는 사람들아

 

 

연변문련 주석 김경련님(2003년 타계)의 글에 중국 조선족 음악가협회 주석인 안국민님이 곡을 붙였다. 연변 자치주 우리 동포들의 부탁은 단 한가지 "남도 좋고, 북도 좋으니 제발 집안에서는 싸우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두루마기 행주치마 입고 사는 사람들아..."

 

반갑구나 - 작사 : 김경련, 작곡 : 안국민, 노래 : 이영구

 

 

고 김경련 - 끝나지 않은 예술생명 

 

김철(조선족문단 시인, 중국계관시인, 연변일보2003.12.08)

 

나의 후임이며 학생인 연변문련 주석 김경련씨가 타계했다는 충격파는 나의 가슴을 강타했다. 김씨가 떠났다니, 이건 너무나도 뜻밖이다. 이 기별은 진짜 천둥우뢰마냥 내 가슴에 심한 상처를 주었다. 그래서 늙은 사람이 젊은이의 추도문을 쓴다는게 우습게 되었다고 누가 말했는가.

 

금년 여름, 내가 연변에 갔을 때 그는 영부인 혜옥녀사와 함께 우리 내외를 안내하여 왕청 배초구의 만천성을 유람했었다. 그 일이 어제 같은데 갑작스레 가다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다. 사람좋게 늘 웃고있는 그의 모습이 지금도 늘 눈에 밟히기만 한다. 나는 그를 항시 좋아했었다. 그래서 그가 문련주석, 나의 후임이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었고 그도 나를 늘 존중해왔던 처지이다. 내가 연변작가협회 주석으로 있을 때 꾸려놓은 연변대학 문학반을 그는 우수한 학생으로 수업을 마쳤다. 그는 또 문학반졸업생가운데서 성공한 사람중의 한사람이였다.

 

지금도 자치주창립 50돐때 공원운동장에서 있었던 집단무용의 폭넓은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만여명이나 되는 무용수들이 정채롭게 펼친 이 집단무용의 창작자이며 연출자가 바로 김경련씨다. 그무렵 김경련씨는 마치도 흑인같은 얼굴로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몇 달동안을 그것도 한 여름 땡볕아래서 고생한 표징이였다. 누가 말해서 그 로고를 알랴. 새벽 네시, 날이 푸름해서 집을 나서면 밤늦게야 돌아오는 남편을 바라보는 안해 혜옥이의 마음은 늘 긁힌데 없이 아팠겠지만 혁명사업에 혼신을 다 바치는 남편이라고 생각할 때 안해의 마음도 어딘가 모르게 긍지에 차있었을 것이다.

 

당시 그는 성한 몸이 아니였다. 뼈마디에 심한 동통을 느끼면서도 병원에 갈것마저도 잊고 연변인민들의 50돐맞이에 기쁨을 주려고 그토록 헌신한것이였다. 그가 창작한 집단무용은 매우 출중하였다. 그의 예술성이나 정치사상내용이나를 막론하고 그토록 완벽하게 여러면의 깊은 뜻을 집단무용으로 표달한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잘했다, 훌륭하다라는 글 한편을 신문에 남겨놓고 연변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데 1년밖에 안되는 사이에, 더구나 새파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다니, 청청병력이 아닐수 없다!

 

그의 안해 혜옥녀사의 말에 따르면 타계무렵 그는 각 협회의 대표대회준비에 밤낮을 여념이 없이 분주히 보냈다한다. 가슴이 침침하고 뭔가 불편해서 병원에 가 검사해보라는 남의 충고도 귀등으로 흘려보내고 무리를 했는데 의사의 말에 의하면 벌써 한달전에 입원을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사업을 위해서는 가정도 자기의 몸도 돌보지 않고 충성한 그의 자세가 돋보인다. 김경련씨는 항상 남의 일을 첫 자리에 놓고 사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 한다. 문련주석자리에 있으면서 그는 이토록 좋은 인상과 숭고한 정신을 남겨놓고 떠났다. 그가 알심들여 준비하던 문련 각 협회의 대표대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가 대를 이어 이 미완성작품에 종지부를 찍을것인지.

 

하지만 그가 갔어도 그의 사업은 끝나지 않았고 그의 예술의 생명도 끝나지 않았다. 인생의 순환선,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겠지. 끝나지 않은 예술의 생명선, 그가 못다한 몫까지 메고 후임들은 더 잘 일해야 하겠지. 우리 민족이 예술은 대를 이어 더 활짝 꽃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가신 님은 시름 놓고 눈을 감으시라. 서운한 마음들이 그 길을 밟고 그대의 뜻을 이어가리라!

 

 

김경련예술생애연구토론회 개최

연변문련 주석 고 김경련씨 타계 1주기 기념  

 

연변일보 김철호기자(2004.11.12)

 

11월 11일, 원 연변문련 주석 고 김경련씨의 타계 1주기 “김경련예술생애연구토론회”(주최 연변문련 주관 “연변세계”잡지사)가 연길빈관에서 있었다. 연변문련, 연변작가협회, 연변대학, 연변서예가협회, 연변촬영가협회, 연변구연가협회, 연변무용가협회, 연변가무단 등 부문의 문학예술일군 20여명이 이날 연구토론회에 참가했다. 이날 연구토론회에는 주당위 선전부 부부장 채영춘이 참가했다.

 

이날 연구토론회에서는 “<김치독>례찬”(김동운), “소설 <죄악의 씨알머리>의 심리적접근”(전성호) 등 기조론문 9편이 발표되였으며 고 김경련의 인품과 사업에 대한 열정적인 발언이 있었다. 발언자들은 고 김경련씨의 문학창작에서 따낸 성과와 연변문예에 기여한 공헌을 충분히 긍정했다.

 

고 김경련씨는 소설, 가사, 가극, 촬영 등 많은 장르의 창작에서 성과가 있는 작가였다. 그가 1982년에 창작한 중편소설 “흉수는 누구?”는 처음으로 “폭이 넓고 심도있게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을 비판하고 당내에 있는 정치야심가, 타락분자를 정면고발한 작품”(최삼룡)이라는 평이다. 그는 30여년간 창작생애에 200여수의 아름다운 가사를 창작하여 연변의 음악사업에 공헌했는바 “제비가 돌아왔네”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가 합작해 창작한 가극 “아리랑”은 국가문화대상을 수상했다. 비록 연변문련의 지도사업이 몹시 바쁘고 건상상황도 아주 나빴지만 그는 조직의 배치에 따라 연변가무단 단장을 겸직한 2년사이에 대형무용서사시 “장백정”의 지도사업을 완성했다. 또한 여러 가지 곤난을 극복하면서 자치주창립 50주년경축대회의 1만 5000명 대형광장무의 창작, 리허설, 공연의 임무를 출중하게 완수함으로써 연변문련의 형상을 세우기도 했다. 발언자들은 고 김경련씨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라는데 입을 모으기도 했다.

 

“그는 무용을 알고 악기를 알며 소설을 창작했고 가극을 창작했으며 촬영도 수준급이고 서예재간도 괜찮다.”(하원매) 때문에 “예술을 향한 열정”일문에서 촬영가 리종걸씨는 고 김경련씨의 촬영작품을 두고 그가 남기도 간 사진작품에서 “사진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과 프로정신을 엿볼수 있다”고 했다.

 

연구토론회에서 주당위 선전부 부부장 채영춘은 고 김경련주석에 대한 인품, 작품에 대한 “여러분들의 발언을 통해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서 “김경련주석의 넉넉하고 뜨겁고 도고한 웃음으로부터 겸허하고 열정적이며 예술에 대한 참다움을 항상 보아왔다. 그가 내놓은 훌륭한 아이디어-연변관광과 문예를 결부시키는 사로와 고민은 환상적이 아니라 지금 와서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대하여 선전에만 그치지 말고 그의 정신과 실천의 높은 진가를 마땅히 따라배워야 한다”고 했다.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치자꽃설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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