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 최장집·박찬표·박상훈·서복경·박수형 지음

@로마의휴일 2013. 4. 26. 22:15
책과 삶
[책과 삶]정치의 문제는 당…‘노동·진보 정당 있는 민주주의’ 필요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 최장집·박찬표·박상훈·서복경·박수형 지음 | 후마니타스 | 380쪽 | 1만8000원

정치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정치학자 래리 바텔스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공화당 정부와 민주당 정부 집권기간을 소득분배율로 비교 분석했다. 여섯 차례 집권한 공화당 정부 기간 동안에는 모두 소득 분배의 불평등 비율이 증가했다. 민주당은 다섯 번 집권했는데 그중 네 차례에서 불평등 비율이 하락했다. 특히 민주당 집권 기간 동안 하층 소득자의 실질소득은 평균 5.7% 증가했다. 공화당 집권 시기에는 1.3% 증가에 그쳤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정치에 기대하지 않는다. 정치는 제자리를 맴돌고 그것이 정치불신을 낳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저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일군의 학자들은 그간 꾸준히 ‘문제는 정당’이라는 주장을 펴 왔다.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인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데… 현대 민주정치에서 그 핵심은 좋은 정당을 만드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저자들은 촛불집회 같은 광장과 운동의 정치가 갖는 한계를 지적해 왔다. 국민의 뜻을 여론조사나 국민 경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직접 묻겠다는 것도 ‘망상이자 하구’라고 말한다. 안팎의 문제제기와 비판이 이어졌고, 이번 책에서 저자들은 그에 대한 생각을 내놓았다.

흔히 우리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는 달성했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는 달성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를 ‘절차적’과 ‘실질적’으로 나누는 구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실질적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제도 또는 절차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탓에 ‘실질적 결과’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때 ‘87년 체제’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정당 정치라는 측면에서 볼 때 1987년에 바뀐 것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지닌다. 1987년 대선을 지배한 것은 학생·노동운동이 아닌 20년 전에 만들어진 정당들이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계층 분화가 이뤄져 새롭고 복합적인 갈등구조가 생겨났음에도 정작 노동자와 소외 세력을 대변할 정당은 나타나지 못했다. 비슷한 보수적 성향의 두 정당이 경쟁하면서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 불러낸 건 ‘지역주의’였다. 지역 갈등이 심해 지역주의 투표가 횡행한 게 아니라 싸울거리가 없어서 지역을 팻감으로 삼은 셈이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공적 연대보다 가족처럼 소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는 그런 공적 연대를 만들어낼 노동조합 같은 자율적 결사체를 만드는 것도 억압했고, 그런 협력을 뒷받침할 정당도 없었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었다.

“현대 민주정치에서 그 핵심은 좋은 정당을 만드는 데 달려 있다.” 노회찬 전 의원 등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2004년 총선 당시 ‘판갈이론’을 상징하는 고기 불판을 들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많은 사람들이 개별 정당의 변화나 인물 교체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총선 때마다 절반의 의원들이 바뀌고, 국민참여경선도 해 봤지만 별반 나아진 게 없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정당이 아니라 정당 체제가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복수의 정당들이 사회를 폭넓게 대변할 수 있도록 이념적·계층적·대중적으로 넓게 포진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기존 정당으로 부족하다면 새로운 정당이 쉽게 만들어지고 정당 체제 내에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기존 정당들의 행위양식에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 2004년 불과 10석으로 원내에 진입한 민주노동당이 내세운 ‘무상급식’ 같은 서민의제가 훗날 정치판 전체를 뒤흔들게 된 것이 좋은 예다.

정당이 제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운동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운동은 “늘 체제나 제도 밖에서 수동적 요구를 하는 데 머물 수밖에” 없다. 한때는 온 세상이 바뀔 것처럼 들썩이지만 어느새 돌아보면 기존의 체제나 구조는 바뀐 것 없음을 발견하는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이 반복되는 건 아무리 격렬한 운동의 에너지라도 기성 정당들의 놀음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만들어졌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라는 말처럼 늘 ‘깨어 있는 시민’들을 바랄 수도 없다. 적극적 참여는 시간과 돈이 많이 든다. 반면 정당을 매개로 한 선거 참여는 가장 값싼 방법이다. 균질적인 소수의 시민으로 이뤄졌던 고대민주주의는 “어제의 피치자가 오늘의 통치자”인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했다. 반면 이질적인 대규모 시민들로 이뤄지는 현대민주주의는 “어제의 야당이 오늘의 여당이 되는” 체제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에게도 ‘노동 있는 민주주의’ 혹은 ‘진보 정당 있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빈곤 인구의 비율이 낮고 정신질환과 영양실조, 강력범죄 발생률이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연구결과 진보 정당의 경쟁력이 크고, 노동조합의 힘이 강한 나라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현대 정당론을 체계화한 피터 메이어는 말한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보수적인 정당 간의 교체를 넘어 그 밖에 있는 진보적인 정당도 집권할 수 있을 정도가 될 때 완성된다.”